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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로맨틱한 봄의 예술가

김정수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조금 큰 듯한 낡은 나무 책상, 그리고 의자에 앉아 오랫동안 내 그림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시인의 모습을. 연세가 여든이 넘으셨던 노(老) 시인은 감미로운 따스한 봄 햇살처럼 나의 눈을 지긋하게 바라보시며 나지막하게 말씀하셨다. “김, 유화 작업이지?” 내가 “네”라고 대답하자 그녀는 얼굴에 여린 미소를 띠시며 말씀을 계속하셨다. “오늘 저녁 기분이 너무 좋다. 내가 이렇게 나이가 들었는데도 내게 그림을 봐달라고 갤러리에서 전시를 시켜달라고 젊은 작가가 찾아온 게 너무 기분이 좋다. 우선 2층 전시장에서 몇 점을 전시하며 반응을 지켜보자.” 

이 이야기는 어려운 외국생활에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친 내가 어렵게 만든 작품들을 가지고 무작정 찾아갔던 30여년 전 봄날, 파리 어느 갤러리에서의 이야기다. 시를 쓰시며 갤러리를 운영하셨던 노 시인은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지금도 봄날 예쁜 꽃잎이 떨어질 때처럼 언뜻언뜻 내 머릿속에 찰나로 남아서 나를 먼 동화 속의 주인공처럼 여기게끔 만든다. 그렇다. 원래 그림을 그리고 감상하고, 소장하고, 하는 일들은 어쩌면 꿈속에서 일어나야 하는 일들일는지도 모른다. 현실 속에서는 그렇게 다급하게 다가오는 일상의 문제들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30여 년 전, 기업을 운영하시던 장인어른과 대화 중에 그림 이야기가 오고 가곤 했었는데, 아무래도 그림 그리는 일이 비생산적인 일이라 생각을 하셨는지, 혹은 예술가들은 사후에나 빛을 본다 생각하셨는지, “자네, 조그만 사업을 한번 해보게.” 라고 사위의 처지를 걱정하며 바라보시던 아련하면서도 애잔한 눈빛도 생각이 난다. <진달래-축복> 시리즈를 그리기 10여 년 전, ‘진달래-기억의 저편’이라는 전시회를 하고 있었는데, 어떤 젊은 청년이 그림 앞에 덜썩 앉아서 한참을 바라다보고 있었다. 

그 어깨엔 왠지 모를 아픔 같은 게 살짝 얹혀진 것 같기도 하였고, 약간은 무거운 삶의 어둠이 짓누르고 있는 것 같기도 한 느낌을 받았었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천천히 다가가 나도 모르게 말을 붙였다. “자네 그림 그리나?” 그러자 “네” 하고 대답했다. 난 내 명함을 건네주며 “만약 힘들거나 어려울 땐 언제든 연락하게. 같이 술이나 한잔하세”라고 이야기 해주었다. 

그리고 8여 년 지난 어느 날, 예쁜 꽃다발을 화랑 큐레이터 선생이 받아서 내게 전해 주었다. 보낸 이는 내가 익히 알고 있는, 핫하게 뜨고 있는, 꽤 유명한 젊은 화가였었다. 난 속으로 ‘이 친구가 왜 꽃바구니를 보냈을까?’ 의아해하면서도 기분은 상당히 좋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이틀이 지나 그 친구에게 연락을 받고, 대면하니, 수년 전 내 그림 앞에 앉아있던 그 젊은이였었다.

난 기쁘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고, 반갑기도 하고... “어떻게 된 일이냐?” 물었더니 학교 졸업하고 계속 그림을 그리려 했는데 현실이 녹록지 않아 힘이 완전히 빠졌을 때, 우연히 선생님 그림이 내 가슴에 와 닿아 그림 앞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며 그때, 선생님이 다가와 명함을 주며 “힘들때 언제든 찾아오게”라는 위로에 힘을 얻어 작업하게 됐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우린 반갑게 해후했고 잠깐이었지만 오랜벗을 만난 것 같이 마냥 즐거웠던 시간을 보냈었다. 꿈결 같은 그런 시간이었다. 그리고 이제 가끔 같은 전시장에서 같이 그림들을 전시하기도 하곤 한다.

나라가 어수선하다. 나라는 나라대로, 또한 개개인의 삶은 개개인대로 지탱하기 어려운 문제들로 가득하다. 이러한 문제들은 어쩌면 꽤 오랜 기간 우리 인간들을 괴롭혀 온 문제들이기도 하다. 괴롭게 살든 즐겁게 살든 살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숭고한 일인런지 모른다. 내가 살아있으므로 푸른 맑은 하늘이 존재하고, 따뜻한 햇볕도, 파릇파릇한 들풀들도, 그리고 그 위로 스쳐 지나가는 아늑한 바람들도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봄이다. 마음을 설레게 하는 봄이다. 마음이 설레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괴로운 사람도 있을 것이다. 삶이 현실이 정말 힘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조심스럽게 모든 이에게 제안해 보고 싶다. ‘이 봄날 예술가가 되어 봅시다’ 라고 시인이 되고 플루트 연주가가 되고 화가가 되어보자고, 직접 할 수 없다면 연주도 들어보고, 시도 읽어보고, 그림도 감상하며, 현재 부딪힌 여러 세계에서 달콤한 꿈의 세계로 빠져 보자고. 그래서 항상 받기만 했던 부딪혀야만 했던 지금의 세계에서 벗어나 자연처럼 따뜻한 햇볕을 주고, 공기를 주고, 물도 주고, 그래서 때가 되어 봄이 되면 죽은 듯 보였던... 단 한 사람에게라도 파릇파릇한 새싹을 돋게 하는 그런 멋진 로맨틱한 예술가가 되어 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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