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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독립군 한형석의 글과 그림, 천년을 이어갈 지사의 향기

최열

좌) 한형석, <사군자 6폭병> 중 국화, 1980, 종이, 103.8×33.4cm, 최열 소장
우) 한형석, <사군자 6폭병> 중 풍죽, 1980, 종이, 103.8×33.4cm, 최열 소장


북경의 육영소학교 학생으로 9살짜리 한형석이 맞이한 3.1민족해방운동은 아버지가 발행하는 독립운동 기관지 호외판 <독립선언문>을 북경의 요로에 배포하는 것이었고 곧이어 일어난 5.4운동 시위대 참가로 이어졌다. 그로부터 71년이 지난 1980년 4월 11일 어느덧 80살의 노인이 되어버린 유운(悠雲) 한형석(韓亨錫, 1910-96)은 한 폭의 국화를 그렸다. 

그 <국화도>에 쓰기를 “1919년 3.1독립운동, 상해임정창립 61주 기념”이라 하였으므로 이 작품은 북경에서 3.1민족해방운동을 몸소 겪은 독립운동가의 가슴 시린 추억이 담긴 기록이다. 여기에 국화를 그려놓은 뜻은 서릿발 극심한 날의 외로움에도 3.1독립운동 및 상해임시정부 창립 정신이 보여준 그 절개를 굽히지 않는다는 저 ‘오상고절(傲霜孤節)’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그림을 보면 가지가 휘어져 치솟아 오르는데 잎사귀들이 풍성하고 꽃잎은 활짝 펴 하늘을 향해 열려 있다. 오목한 공간에는 빨간 구기자 열매가 춤추는 것이 마치 한편의 아름답고 소박한 노랫소리 같다.   

한형석은 임시정부 군무부장을 역임한 조성환(曹成煥, 1875-1948)의 권유로 상해 신화예술대학에 입학, 음악을 전공하고 이후 중국 항일연극대장, 한국청년 전지공작대 예술조장, 광복군 제2 지대 선전대장으로 항일예술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항전가곡>, <한국행진곡>, <국경의 밤>, <아리랑>을 비롯한 숱한 작품을 작사, 작곡, 공연했다.

1948년 9월 귀국한 그는 권력의 유혹을 단호히 뿌리친 채 부산으로 낙향했다. 지사(志士)의 전통을 그대로 따랐다. 치열한 세월을 마감하고서 낙향하여 처사(處士)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전통 말이다. 해방조국에서 자신이 할 일은 단 하나였다. 식민지에서 메마른 조국의 백성들에게 아름다운 선율을 선물함으로써 상처받은 마음을 쓰다듬는 것이다. 
그렇게 교육자로, 음악인으로, 서예가로, 화가로서의 생애를 올곧게 견뎌낸 한형석은 그러니까 20세기를 위대한 시대로 만들어나갔던 것이다. 그는 생전에 국가로부터 여러 훈장을 받았는데 사후에도 기념사업회가 생겨 추모사업을 지속하고 있으며 또한 부산 서구에 ‘먼구름 한형석 길’이며 한형석이 1953년에 설립한 ‘자유아동극장’이 남아있어 그 업적을 조금이나마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유독 미술사 분야에서만 한형석이란 이름은 사라졌다. 지사화가를 외면해 온 지난 20세기의 유산이거니와 하지만 앞서 말한 <국화도>는 물론 화폭 전체를 바람으로 채운 <풍죽(風竹)>은 20세기를 상징하는 걸작이다. 또한 목이 잘려 나가버린 난초인 <단두란(斷頭蘭)>도 절정의 시대 가치를 보여준다. 그의 글과 그림들은 한결같이 그윽한 율동과 소담한 선율로 넘치고 있다. 그가 늘 말하길 ‘매국노가 매장된 국립묘지에 가지 않겠다. 날 그저 백성들과 함께 누워있도록 하라’고 했는데 그 말씀대로 지금 그가 누워 계신 곳은 양산 솔밭산 공원묘지다. 참으로 천년을 이어갈 지사의 향기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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