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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독립운동가이자 경주의 약사보살 조인좌의 기운과 세력

최열

조인좌, <석란> 대련, 종이, 95.5×47cm, 최열 소장


그 누구도 일성(一城) 조인좌(趙仁佐, 1902-88)를 미술인으로 여겨 높이 평가하는 경우를 본 적이 없다. 그것은 첫째 문인화와 둘째 사군자에 대한 오해와 왜곡으로부터 비롯하는 것이다.
첫째 문인화란 문인이라는 정체성을 지닌 인물이 그린 그림을 뜻하는 것이다. 그런데 20세기에 접어들어 문인 정체성을 지니지 않은 전업 화가들이 자신을 문인화가라고 내세우면서 개념의 왜곡이 생겼다. 그러다 보니 문인 정체성을 지닌 이들이 그린 그림을 ‘미술’이란 범주에서 배척해 버렸던 것이다.

둘째 사군자란 일제강점기와 더불어 생긴 개념으로 나라를 잃은 유민 또는 일민의 지조와 절개를 상징하는 그림이다. 그런데 20세기에 접어들어 일본제국에 협력하거나 순응하는 화가들이 사군자를 전유하는 데서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적어도 제국에 저항하는 의병, 독립군 출신 또는 은거하는 처사의 정체성을 지닌 인물이 그린 매난국죽이어야 하건만 거꾸로 순응과 협력의 전업 화가 따위가 그린 매난국죽을 사군자라 부르면서 저 지사들의 매난국죽은 ‘미술’이란 범주에서 배척해 버렸던 것이다. 그래서 조인좌는 ‘경주의 약사보살’이라는 존경의 대상이자 국악인으로 높은 평가를 받을지언정 미술계에서는 배척당하고 말았다.

조인좌는 마산에서 태어나 18살 때 3.1민족해방운동 시위대였고 1926년 마산 광복단 단원으로 가입하였으며 그 다음 해 체포, 투옥당해 1년 6개월을 어두운 감옥생활을 견뎌야 했다. 출옥한 뒤 절치부심하던 중 사회사업에 눈 돌려 경주에서 한약방 대덕당을 개업하였으며 그 수익금을 독립군 군자금으로 충당해 나갔다. 해방 뒤 그는 사회사업 및 교육사업과 더불어 문화예술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1958년 동도국악원 원장, 1962년 한국국악협회 경주지부 초대지부장, 1964년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경주지부 음악 분야 임원에 이어 1982년에는 지부장으로 활약하였다. 그리고 또한 그는 미술인이었다. 그는 한국전쟁 직후 경주서도원을 설립하여 후진을 양성하였는데 더불어 자신도 창작에 심혈을 기울였다.
조인좌의 작품세계는 그만의 개성에 넘치는 <석란도>가 모든 것을 설명해 준다. 그의 예술은 ‘기세(氣勢)’ 다시 말해 기운과 세력이 지배하는 공간 감각이라고 함축할 수 있다. 두 팔을 양쪽으로 펼친듯한 난초 잎새와 메마른 듯 까칠한 갈필(渴筆)의 질감을 살린 바위 그리고 가늘고 날카로운 선묘의 변화를 일으키는 글씨에 붉은색 인장이라는 네 가지는 그 공간을 구성하는 요소들이다. 잎새, 바위, 글씨, 인장이라는 네 요소가 장악하는 화폭은 그야말로 변화무쌍한 율동의 격정 공간을 연출하고 있다. 우리는 이토록 눈부신 예술가를 지금껏 잊고 살아왔다. 이대로는 안 된다. 3.1운동 일백 주년을 맞이하는 지금 미술계는 일성 조인좌라는 그 이름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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