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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창검시대의 의병 김진우, 옥사한 신채호를 기억하다

최열

좌) 김진우, <도수죽(倒垂竹)>, 1936년 3월 7일, 종이, 128.7×31.5cm, 최열 소장
우) 김진우, <왕죽(王竹)>, 종이, 128.6×30cm, 최열 소장


1895년 의병장 의암(毅庵) 유인석(柳麟錫, 1842-1915)이 기병하여 충북 일대를 누빌 때 13살 어린 일주(一洲) 김진우(金振宇, 1883-1950)는 그 곁에서 시동으로 활약했다. 이후 김진우는 유인석이 1915년 만주에서 병사할 때까지 함께 했다. 

스승을 떠나보낸 김진우는 중국을 떠돌다 1917년 무렵 귀국해 한양에 정착하여 해강(海剛) 김규진(金圭鎭, 1868-1933)의 서화연구회에 출입하면서 미술가로 명성을 드높이던 중 다음 해 전국 단일 미술가조직인 서화협회에 정회원으로 참가했다. 의병 출신 미술인으로는 오직 한 명뿐인 회원이었다.

1919년 3월 1일 민족해방운동의 서막이 올랐고 서화협회 발기인인 오세창이 민족대표 33인으로 참가했다가 체포, 투옥 당했으며 회장 안중식 또한 연루자로 체포, 투옥을 당했다. 회원 김진우는 그 해 7월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 의정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다가 1921년 귀국길에 체포당해 3년의 옥중생활을 해야 했다. 1944년 여운형의 건국동맹에 가담했고 해방 뒤에도 여운형의 인민당 중앙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6·25전쟁이 발발했을 때 인민군에 부역했다는 혐의를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투옥, 옥중에서 얼어 죽고 말았다.

의병 출신 미술인 김진우의 묵죽은 당시 ‘특별히 만든 푸른 화살’이란 뜻의 ‘특제청시(特製靑矢)’라고 불리고 있었고 또한 민영익의 운미란(芸楣蘭)과 더불어 나란히 일주죽(一洲竹)으로 불리며 저항정신을 상징하는 쌍벽의 지위를 굳건히 하는 가운데 3.1민족해방운동 이후 일제강점기를 풍미하고 있었다.

전후 남한 사회 미술계는 그런 그를 완전히 지워버리고 말았다. 물구나무선 시대, 친일세력이 득세하던 시절의 해괴한 역류였다. 20세기 말 간송미술관에서 김진우 전람회가 열려 공동체에 온몸을 바친 숭고함에 존경의 뜻을 드러내기도 했지만 그뿐이었다. 여전히 미술사학계는 김진우란 이름을 미술사에 한 줄도 올리지 않고 있고 시장에서는 거들떠 보려 하지도 않는다. 21세기 한국 사회가 보여주는 추악하고도 부끄러운 모습이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김진우의 <도수죽(倒垂竹)>은 여순감옥에서 신채호(申采浩, 1880-1936)의 옥사에 이어 상해에서 일제요인 암살단인 맹혈단(猛血團) 검거 소식이 들려오던 1936년 2월에서 3월 사이인 그때 그린 걸작이다. ‘빈집은 밤새 춥구나[空堂一夜寒]’라는 문장으로 끝을 맺고 있는 화제시는 명나라 시인 이동양(李東陽, 1447-1516)의 것인데 이역만리에서 체포당해 옥중에서 고문으로 스러져간 투사의 위대함에 대한 헌정의 뜻을 머금은 것이다.

지금 우리는 그들을 모두 지워버렸다. 하지만 기억해야 한다. 그들이 바친 목숨의 대가로 지금 우리가 이렇게 살아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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