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미숙 미술시평(37)
얼마 전 활발하게 미술비평 글도 쓰는 미술사가가 최근에는 이렇다 할 담론이 없다고 불평 섞인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동안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식민주의, 페미니즘, 포스트휴먼, 디아스포라, 유목주의, 하이브리디티(Hhybridity), 글로벌리즘, 글로컬리즘, 내셔널리즘 등 현대미술에 갖다 써먹을 담론들이 그럭저럭 많았는데 지금은 딱히 이렇다 할 문맥이 부재하거나 빈곤하다는 얘기다. 이들이 과연 이론가들이 적용하고 있는 작가의 작품에 진실인지 아닌지는 차치하고라도 여기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이러한 미술이론/미술사가의 접근방식은 또 하나의 유로 센트리즘(Eurocentrism), 즉 유럽중심주의(혹은 미국중심주의, 이 말은 좀 담론분야에서는 적절치 않다. 왜냐하면 미국도 담론에 있어서는 의존도가 컸기 때문에) 사고의 반영이며 결과가 아닐까 하는 점이다. 한편 그러한 유럽중심사고는 비단 미술 분야의 글쟁이들에만 적용되는 것일까. 작품을 만들어내는 작가는 어떠한가? 한때 어느 경제사회학자가 한 학회에서 한국의 학계가 외국의 최신 원자재와 기술을 수입해 그럴듯하게 가공해서 내다파는 중간 가공업체와 다를 바 없다는 발표를 읽은 적이 있다.
이러한 현상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지만 이전과 다른 점은 디지털 테크놀로지와 정보통신의 급속한 발달로 정보나 지식의 입수·수입이 이제는 무척 가속화되어 거의 동시화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우리가 간과하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기에 미개발, 혹은 저개발도상 국가에서도 이런 현상은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사실이다. 무작정 갖다 쓰거나 소모하기 전에 그러한 담론들이 나온 배경에 대한 상황 조사와 규명, 성찰의 필요하지 않았을까라는 원론적인 논의를 전제로 앞으로의 한국현대미술을 나름대로 전망해보면 이제는, 적어도 목전의 미래에는 건축비평가 케네스 프램턴(Kenneth Frampton)이 주장했듯이 어떤 비평적 지역주의(Critical Regionalism)의 생산 및 고찰로 가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의 조짐은 우리사회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어 전망은 밝으나 보수적이고 현실지향적인 한국미술계의 시각전환이 요구된다
한국사진의 역사 임응식전
국립현대미술관(덕수궁 분관)의 이른바 “한국사진의 대부”이며 “사진계의 역사”인 임응식의 사진전 ‘기록의 예술, 예술의 기록(2011.12.21-2.12)’은 일제 강점기부터 사진가, 후학을 양성했을 뿐 아니라 적잖은 사진단체를 결성하여 사단의 형성에 진력해왔던 행정가, 교육자, 비평가로 활동해 오면서 한국의 사진제도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그래서 그의 활동 자체가 한국사진사를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는 고인의 사진, 기록 자료를 총 망라한 기획전이었다. 이보다 약 한 달 전에 오픈한 국제갤러리의 ‘칸디다 회퍼(Candida Hfer)(2011.11.25-12.25)’ 와 PKM Trinity의 ‘토마스 데만트(Thomas Demand)(2011.11.24-1.10)’와 임응식은 대조를 이루면서 기이하게 연결돼 있어 흥미로웠다. 칸디다 회퍼와 토마스 데만트는 둘 다 현대 독일 사진계를 대표하는 - 회퍼는 그루스키(Gursky) 스투루스(Struth), 루프(Ruff) 등과 함께 베허(Becher) 밑에서 배출된 뒤셀도르프 사진의 제 2세대를 대표하며, 데만트는 그 뒤를 잇는 조각가가 사진으로 전향한 사진작가 - 작가들로서 국제 미술시장에서 가장 잘 팔리는 계열에 속하며, 그들의 작품 스케일, 기술의 완벽성, 스펙터클한 국면은 회화에 버금가는 최근의 현대사진, 특히 국제시장을 독점하고 있는 독일 현대사진의 표상이며 그들의 상업성은 가히 놀랄만 하다.
여러 면에서 임응식 사진전은 이들과 대비를 이룬다. 일제 강점기 초기의 예술사진들은 스타이켄, 스티글리츠를 무색케 하며 한국전쟁에 보도사진가로 활동하며 도큐먼트(Document)·기록으로서의 사진들은 도로시어 랭어(Dorothea Lange)를 방불케 하며 명동 씨인들은 위젠 아트제 - 물론 그의 다소 멜랑콜리(Melancholy)한 면은 없지만 - 의 파리장면들을 연상시키는데 물론 시대차이겠지만 크기와 프린트 기술로서는 위의 독일 사진작가들과는 비교가 안되지만 한국 사진의 걸어온 길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지역적 비평주의의 문맥의 일면을 고찰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위의 상업화랑들의 독일사진전들보다 의미 있는 전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