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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연희의 옛 그림 속 인물에 말을 걸다 (16) 압구정도 - 압구정, 한강유람과 역사유감

고연희

서울과 평양. 두 도시 이야기에서 강(江)을 뺄 수 있을까. 평양을 흐르는 대동강 강물과 서울 한강의 풍취는 우리나라 우수한 문학작품의 밑거름이었다. 강가의 빼어난 명소가 그림으로 거듭 그려졌다. 대동강변 멋진 부벽루와 연광정은 평양감사가 부임한 뒤 마중잔치가 벌어진 곳이었고, 한강의 풍취로는 예부터 서호와 동호 일대가 제일로 꼽혔다. 대략 서강대교가 지나가고 동호대교가 지나가는 언저리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시리즈 끝>

# 한강의 동호, 동호의 압구정!

동호를 즐기기에 가장 좋은 곳은 ‘압구정’이란 정자였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압구정이 어디에 있었을까. 오늘날 압구정동 구현대라 불리는 현대아파트 1차 72동과 74동 사이에 사람들이 오가지 않는 비탈진 응달의 공터가 제법 넓게 자리하고 있다. 그 공터에 ‘狎鷗亭址(압구정지)’라 적힌 커다란 바위 푯말이 덩그렇게 서 있다. 74동의 지대가 한결 높으니, 압구정은 74동쪽 언덕 위에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바위 푯말과 한강 사이에는 여러 동의 아파트가 들어서 있고 올림픽대로가 뻗어 있지만, 아파트를 건축할 당시 압구정 터에서 한강까지는 온통 배나무밭이었다고 한다. 

정선이 그린 <압구정도>는 그로부터 100여 년 전 압구정이 서 있던 실경이며 그 주변의 경치다. 가장 높은 언덕 위에 번듯하게 선 건물이 압구정이겠다. 



# ‘압구(狎鷗)’

‘압구’란 “갈매기와 친압(親狎·친해 가깝다)하다”란 뜻이다. 물에 사는 갈매기와 사람이 사귀기란 만무한 일이지만, 중국 고전 『열자』에 갈매기와 친했던 사람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 사람은 매일 아침 바다로 나가 갈매기와 놀았다. 갈매기 수백 마리가 그에게 모여들었다. 그런데 하루는 그의 아버지가 갈매기 한 마리만 잡아오라 하여 이튿날 그는 갈매기 한 마리를 잡을 마음으로 바다에 나섰다. 그러자 갈매기들은 너울너울 하늘 위로 날 뿐 한 마리도 그에게 내려오지 않았다. 

‘기심(機心)’이란 말이 있다. 계획해 생각하는 욕심이며, 사특한 마음이다. 기심이 없어야 ‘압구’의 경지를 누릴 수 있다. 자연과 일체가 되려면, 될 말은 아니겠지만, 아마도 나 자신이 사회 속의 사람이란 사실조차 잊어야 할 것이다. 중국 북송 때의 한기(韓琦)는 조정과 백성에게 헌신적인 재상이었는데 성품이 겸손해 명망이 높았다. 그의 집이름이 ‘압구정’이었다. 대학자 구양수가 시를 지어 기렸다. “어찌 기심을 잊어 갈매기가 믿어주는 데 그치시리. 만물을 다스림에 마음을 두지 않으시리라!” 세상에서 재상 임무를 행하느라 수고로운 마음을 이제 훌훌 벗고 자연을 즐기라는 기대와 믿음이 대단하다. 



# 압구정 주인의 ‘기심’

옛사람들은 이름(名) 외에 ‘호(號)’라는 별명을 지어 서로를 불렀다. ‘호’를 짓는 데도 스타일이 있었다. 고려 말에는 포은(정몽주), 야은(길재), 도은(이숭인) 등으로 은거의 ‘-은(隱)’자가 유행하더니, 조선 전기에는 비해당(안평대군), 사가정(서거정), 보한재(신숙주) 같이 ‘- 재(齋)’, ‘-당(堂)’ 혹은 ‘-정(亭)’ 등의 사유 건축물에 붙인 멋진 이름이 호로 널리 사용됐다. 

한강변 별장에 ‘압구정’이라 현판을 걸어 놓고 그것을 ‘호’로 삼은 인물은, 조선 전기의 관료 한명회(韓明澮·1415~1487)였다. 한명회는 한기의 옛 고사가 담긴 압구정의 이름을 명나라 한림학사 예겸(倪謙·?~1479)에게 직접 받아 왔고 현판도 예겸의 글씨로 달았다. 그러나 압구라는 이름 치장은 겉멋이었고, 한명회의 골수에는 ‘기심’이 가득했다. 그는 과거에 실패했지만 수양대군의 심복이 돼 사육신을 참살하는 데 앞장섰고 일등공신이 돼 영의정에 올랐으며, 세조 이후 성종대까지 고위직을 역임하면서 자신의 두 딸을 모두 왕비로 세웠다. 아이러니 아닌가. 압구를 하려면 기심이 없어야 하는데 압구정을 차지하려면 기심이 많아야 했다. 후대 사람들이 한명회를 일컬어 ‘사람의 탈을 쓴 원숭이’라 불렀다. 학봉선생 김성일(1538~1593)은 압구정을 바라보며 죽은 한명회를 야단쳤다. 



평생토록 명예와 이익이라면 작은 것도 따졌으니, 

기심이 얼마나 되었는지 너는 알겠지. 

헛된 이름을 세상에 자랑 말게.

하얀 갈매기는 원래 사람에게 속지 않는다. 

( 一生名利較銖?, 多少機心爾自知.

莫以虛名誇末俗, 白鷗元不被人欺.

일생명리교수치, 다소기심이자지. 

막이허명과말속, 백구원불피인기.) - 김성일, 「압구정」 



# ‘기심’을 키워 준 왕(王)

한명회 생전에 그를 밀어 준 사람은 조선의 역대 국왕들 세조, 중종, 그리고 성종이었다. 수양대군은 한명회를 보자마자 모든 일을 털어놓고 상의해 쿠데타를 성공시켰다. 왕실 치장으로 압구정을 치장하겠다는 등 한명회의 무례한 행동으로 주변 관료들이 분노해 처벌하자고 들끓을 때, 중종은 한명회를 감싸느라 요리조리 말을 돌렸다. 성종은 한명회를 일러 ‘나의 장자방(張子房)’이라 불러 총애했으니 성종은 자신을 한나라 고조에 비기면서 장량(張良)만 한 뛰어난 충신을 두었노라 뿌듯함을 표현한 셈이다. 성종은 또한 압구정에 직접 시를 하사해 관료들도 이를 따르게 했으니, 명공의 시문 수백 편이 한명회의 압구정에 걸렸다. 점필재선생 김종직도 참여시를 지었는데, “공이 오면 갈매기가 모여들고, 공이 가면 갈매기가 울어댔지”라는 달콤한 문구가 있으니, 지금 보면 민망한 일이다. 한명회가 중국을 가면 명나라 황제가 노한(老韓)이라 융숭하게 대접했고, 중국 문사들이 압구정에 지어 준 시문도 수십 편이었다. 이 같은 국내외의 예우가 역사에 드물었다. 충신도 간신도 지도자가 키워내는 법. 한명회를 총애했던 국왕들의 이야기는 두고두고 거론되며 역사를 돌아보는 후인들의 마음을 안타깝게 했다. 

장원급제하고 기운도 좋았다는 최경립은 한명회 생전에 비난의 시를 지어 줬다. “가슴속 기심만 고요하게 가라앉히면, 벼슬의 바다에서도 백구와 노닐 수 있을 텐데!” 한명회는 이 시를 고깝게 여기고 현판에 붙이지 않았다고 한다. 최경립의 이 시구가 조선 후기까지 인구에 회자됐다. 후인의 마음을 통쾌하게 했기 때문이다. 



# 한강유람과 압구정

한명회가 죽은 뒤로 압구정을 독차지한 뚜렷한 인물은 없었던 것 같다. 기대승(16세기)의 시 「압구정」에서 “거친 숲 엉킨 풀이 높은 언덕 덮였으니, 그 옛날 성대한 놀이 베풀어지던 일 생각나네. 인간사 100년이 그 얼마나 되던가. 안개 낀 강을 바라보며 머리만 긁적긁적.”

정약용(18세기)도 “압구정 피리연주 즐거웠겠지. 그때는 금가락지 미녀를 끌어안았으리. 지금은 적막한 집 누가 살려 하겠나. 수양버들 예전 같고 저녁 매미 많이 우네”라 했다. 압구정은 종종 주인을 못 찾았고 이따금씩 찾아드는 문인들이 한숨을 짓게 하는 곳이었다. 

애당초 좋은 것은 압구정 앞 한강의 풍취였다. 임진왜란 후 혼란하던 1606년 봄 명나라 사신이 한강뱃놀이를 원해 사신을 배에 태워 술과 생선회로 대접하고 그의 배는 압구정에 내렸다는 기록이 실록에 전한다. 한강의 생선회는 농어가 유명했다. 

조선 후기에 산수유람 문화가 풍미하면서, 권세 있는 문인은 국내의 명산대천으로 수십 일에 걸쳐 노비들을 이끌고 다녔고, 이를 기록한 글과 그림이 유례없이 풍성하게 쏟아져 나왔다. 천하명산 금강산, 동해안 절경, 신선경이라고 퇴계선생 이황이 감탄한 단양 일대가 가장 애호됐고, 한강유람이 빠지지 않았다. 

화가 정선(鄭敾·1676∼1759)은 그 시절 문인들이 유람한 발자취며 그들이 거주한 곳의 풍경을 정취 있게 그려 인기가 높았다. 정선은 조선의 문인들이 갓 쓰고 두루마리 입고 산으로 유산(遊山)하고, 배 띄워 선유(船遊)하는 장면을 척척 그려,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의 문을 활짝 열었다. 정선의 진경산수화는 우리 산천 명소의 이미지를 결정시켜 준 특별한 공헌이 있다. 정선이 금강산을 그릴 때는 기세 넘치는 필선으로 그렸고, 한강변을 그릴 때는 곰살맞은 붓질로 그려 장소의 분위기를 살려냈다. 정선의 <압구정도>에는 고요하고 한가함이 느껴진다. 잔잔한 필묵에 신록의 봄기운 속 풀어지는 물결 위로 유람선이 슬슬 간다. 압구정 앞 동호의 풍광이 이렇게 아름다웠나 보다. 



# 압구정 그림, 황학루의 시 

심사숙고를 요구하는 예술이론 중 하나가 “강산이 그림 같다”거나 “그림이 풍경 같다”는 상반된 칭송에 대한 해석이다. 예술과 자연의 이미지는 무엇이 지배적일까. 게다가 “그림 속 풍경이 옛 시의 구절 같다”고 조선 문인들이 종종 말했다. 그런데 일단 그림으로 알려지면, 옛 시의 이미지는 그림에게 지배당한다. 

정선의 진경산수화 화첩이 독일의 한 수도원에 소장돼 있는데, 그 화첩의 한 화면이 <압구정>이다. 이 화면에 적힌 글이 이러하다. 



이 그림은, 최사훈의 ‘역력한양수(한양의 나무들이 역력하구나)’의 구절과 맞바꿀 만하다. 

(此作, 與崔司勳歷歷漢陽樹句, 相?. 차작 여최사훈역력한양수구 상질)



최사훈은 사훈벼슬을 지낸 최호(崔顥·704~754)로 당나라 시인이다. ‘역력한양수’란 구절은 중국 호북성 무한(武漢)의 ‘황학루’를 읊은 시의 일부다. 황학루는 ‘악양루’ ‘등왕각’과 함께 중국 3대 누각의 하나로, 시와 그림에 무수하게 담겨졌고 지금은 이름난 관광지다. 황학루에 들어서면 황학과 신선의 거대한 그림이 화려하게 맞이하고 최호의 위 시도 걸려 있다. 새로 설치된 황학루 내부의 엘리베이터로 올라가면 다름아닌 ‘동호(東湖)’의 아름다운 풍광을 조망하게 된다.

중국 황학루 곁 호수 이름이 ‘동호’였으니, 한강 ‘동호’의 압구정 풍경이 황학루의 시구에 비견된 것이다. 황학루를 읊은 시와 압구정을 그린 그림을 맞바꾼다 함이, 중국 경치와 조선 경치를 동호로 걸어 바꾸자는 언어유희만은 아닐 것이다. 압구정의 한강 풍광이 황학루 못지않노라는 감탄이요 자랑이다. 



# 압구정 강변의 금빛 모래 

정선을 후원한 안동김씨 출신의 대학자 김창협(1651~1708)이 압구정 앞 나루터에서 연착되는 배를 기다리고 서서 지은 시가 있다. 모래사장 황금빛과 봄물의 녹빛이 어른대어 좋은데도, 흉했던 옛 역사의 기억이 지워지지 않는다. 



푸르른 봄날 강물이 마침 좋아,

바라보고 있노라니 근심이 사라지네.

기러기는 먼저 어디로 돌아가고,

물 한가운데 갈매기가 자유롭네. 

모래사장 깨끗하여 말에서 내려

한참 전에 불러놓은 배를 기다리노라.

지난날 한공의 흥취가 생각나지만

작은 섬을 살 돈이 나에게는 없다오. 

- 김창협, 「한양에서 딱섬(楮島)으로 돌아올 때 배를 불렀는데, 시간이 한참 지나도 배가 오지 않기에 말에서 내려 모래사장에서 시를 짓노라」 



정선의 그림 <압구정도>를 다시 보자. 언덕 아래 깨끗한 모래사장 노란빛이 밝다. 오늘날 한강유람선 ‘한강랜드’가 잠실대교서 출발해 동호대교 아래서 어정거리며 배를 돌린다니, 압구정 앞 뱃놀이를 흉내내볼 만하다. <미술사학자>

- 문화일보 2013.03.08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3030801033130025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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