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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숙 / 반환점 없는 여정

이선영

반환점 없는 여정

  

이선영(미술평론가)

  

한적하고 넓직한 공간이지만 어둡고 서늘해서 거대한 동굴처럼 보이는 김명숙의 작업실, 벽에 붙어있는 작품들은 마치 헐거인(穴居人)이 그려 놓은 동굴벽화처럼 오직 그곳에서만 온전히 존재할 수 있을 듯하다. 아마도 이번 작품에 관한 한 가장 좋은 전시회는 그곳으로 관객이 직접 가는 것이다. 작가들은 대개 기나긴 모색과 치열한 투쟁의 흔적들은 지우고, 결과만 보여주길 원하지만, 끝을 기약할 수 없는 작품이라면? 작업실 벽에는 수년째 그리고 있는 작품들이 붙어 있다. 그러나 ‘여기까지가 완성이다’라는 결정은 이성의 계산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특히 예술에서 그렇다. 작품은 우선 작가에게서 시작되지만, 작품도 승낙을 해줘야 하는 완성이 되는 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정은 이루어져야 한다. ‘결정의 순간은 일종의 광기이다’라고 한 키에르케고르는 철학자보다는 예술가의 입장을 잘 전달한다. 그림이 붙어있는 작업실의 불을 켜기를 주저하는 작가에게 불을 좀 켜달라고 부탁한 나는 어둠 속에서 태어나 어둠 속에 존재하는 것들이 화이트 큐브를 비롯한 열린 공간으로 나가는 순간 어떻게 비춰질지 궁금하다.




인물(에오르디케)3 120x160



인물(에오르디케)4 180x240



김명숙의 작품은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금기를 위반하여 돌로 굳어버리거나 나락으로 떨어지는 신화들을 떠올린다. [인물] 시리즈는 에오르디케의 신화처럼, 천재일우의 기회를 실수로 잃어버린 이의 회한에 가득 찬 모습이 담겨있다. 그들은 다양한 빛의 강도에 도출된 채 굳어가고 있으며, 굳은지도 오래된 듯 풍화까지 되고 있다. 오랜 기다림과 절망은 작업하는 삶의 변수가 아니라 상수이다. 김명숙의 작품은 신화적, 예술적 인물, 동식물 등이 다양하게 등장하지만 변주된 자화상처럼 다가온다. 그 어떤 외관을 가지고 있든지 간에 그것들은 빛이 없는 곳에서 진화한 심해어처럼 가느다란 빛줄기 하나도 잡으려는 맹목(盲目)의 촉수들로 가득하다. 그것들이 지상으로 올라왔을 때 왜곡은 불가피하리라. 심해어 사진들이 괴상망측해 보이는 이유 중의 하나는 원래의 자기 자리에서는 형형색색의 기이한 아름다움을 발하던 것들이 다른 강도의 빛과 압력에 노출되어 눈과 내장 등이 튀어나오기 때문이다. 


외부로부터의 빛을 찾을 수 없다면 스스로 발광해야 하는 존재들의 궤적은 무언가 잡으려고 던져진 어부의 그물망처럼도 보인다. 그물이라기 보다는 선들이지만, 선들은 자기들끼리 얽혀져 그물을 만든다. 그물은 가늠할 수 없는 시간차를 두고 수없이 던져졌다. 그러나 잡으려는 것들이 숭숭 빠져 나갈만큼 어떤 그물은 성글다. 선으로 이루어진 그림이지만 외곽선은 풀려 있어서 어디까지를 완성으로 봐야 하는가. 좌표를 찍을 수 없는 허공에 투척된 선들의 미로는 길은 길인지만 어디로 향한 길인지 불확실하다. 작품 속 착종하는 선들은 땅 속 뿌리나 지상의 가지들처럼 위로든 아래로든 가지만 멈추지는 않는다. 이번 전시에 붙여진 ‘카타바시스(katabasis)’라는 부제는 지상의 빛을 뒤로 하고 심연으로 향하는 여정을 보여준다. 작품 [카타바시스] 시리즈에서는 심연에 들어간 사람 뒤로 아직 빛의 찰랑거림이 있지만, 그것은 영화 [그랑블루]의 마지막 장면처럼 반환점 없는 여정을 향한 출발점일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카타바시스1 320x230



카타바시스2 300x240



바닥이 있다면 바닥을 치고 올라올 수 있겠지만, 우주만큼이나 인간이 잘 모르는 곳이 심해라고 하지 않는가. 관객에게는 다소간 낯선 ‘카타바시스’는 기독교에서 나오는 용어지만, 동양의 사고에서도 발견된다. 샤머니즘에서 무당은 삼계(三界)를 오르락 내리락 할 수 있는 존재이며, 특히 하계에 내려 갔다옴으로서 보다 큰 능력을 획득한다. 궁극적으로는 다시 돌아온다는, 심지어는 비상한다는 동서고금의 신화적 귀결은 화해와 치유의 서사에 아로새겨져 있다. 그러나 신화와 종교적 관념이 약화되는 현대사회에서 귀환의 약속은 장담하기 힘들다. 작가는 미지의 곳을 탐험하는 이처럼 반환점 없는 여정에 접어든다. 김명숙이 캔버스 대신에 사용하는 얇은 종이는 심연을 향한 시행착오 가득한 여정들을 말없이 받아낸다. 먹은 통상적으로 능숙하게 한번에 그어지는 선과 잘 어울리는데, 김명숙이 사용하는 혼합재료 중 먹으로 이루어진 선은 마치 더듬이같다. 


선들의 축적으로 만들어진 독특한 명암법은 형상들의 아우라를 만들어내는 조형적 장치다. 빛의 향방은 서사를 만들어내는 요소로도 작동한다. 형상이 드러나긴 하지만, 명확치 않은 외곽선은 관객 앞에 드러난 개체의 자기 동일성과 항상성이 의심받는다. 거기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죽음이 너무 심하다면, 해체나 과정 중에 있다고 치자. 어떤 부분은 덧그리고 덧그려져 빛도 빠져나갈 틈 없이 너무 밀도가 크다. 어떤 작품은 무두질 한 가죽처럼, 작가가 비유하듯이 ‘카프카의 [유형지에서]의 병사의 등에 새겨지는 글자들처럼’, 수많은 선들이 응축되어 체액처럼 번들거린다. 덜어내기는 힘든 겹의 축적은 한번에 그려낸 선 만큼이나 망칠 위험이 상존한다. 적절함이라는 척도 자체가 없는 김명숙의 작업은 잘 짜여진 그물망으로 계획대로 수확하는 노동과는 거리가 멀다. 그림을 생리적 현상이라고 간주하는 작가는 따로 스케치를 해본 적이 없고, 물감을 을 생리적으로 분비되는 체액 그 자체로 대하는 듯하다. 




인물1 120x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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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재능과 의지, 내면의 생리상태 외에 운 또한 필요한 작업들은 심신을 지치게 하기에 충분하다. 그러한 류의 작업은 도박과도 같다. 스팅(Sting)의 노래 [Shape of My Heart]에서 도박사의 카드놀이--“He deals the cards as a meditation, to find the answer, the sacred geometry of choice. The hidden law of a probable outcome” (노래 중에서)--같이 결정불가능성 속의 결정은 예술의 특징이다. 모리스 블랑쇼는 [문학의 공간]에서 예술에서 ‘불확실성은 본질적인 것’이라고 본다. 그에 의하면, ‘존재의 미 확정성, 그 힘에 몸을 맡기고 존재의 순수한 격렬함에 몸을 내맡기는 것이 시인의 운명이다. 그러나 또한 그 힘에 절제를 가함으로서 하나의 형태로서의 성취를 강요함으로서 그것을 억제하는 것도 시인의 운명이다. 고뇌의 불확실성을 정확한 언어의 결단으로 고양시키는 것이 시인의 임무’이다. 어두침침한 그림들은 끝 있는 인생과 끝없는 예술이 직면할 수 밖에 없는 멜랑콜리가 깔려있다.


작가의 자가 진단에 의하면, 이전 그림들에는 광원이 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광원이 사라졌다고 했다. 광원을 잃은 채 자신의 목소리만을 다시 반향하는 거대한 동굴의 암흑 속에서 빛을 찾으려는 움직임이 근 10년 가까이 계속됐다. 빛과 어둠의 관계는 형이상학의 역사를 관통한다. 한스 블루멘베르크의 [진리의 은유로서의 빛]에서는 빛이라는 개념은 원래 이원론적 세계관에 속했다고 추측한다. 그에 의하면 플라톤의 동굴 비유에는 존재의 빛으로서 모든 것을 비추는 태양으로 형상화되는 선이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그러나 동굴로부터 벗어나는 여정이 있는 반면에, 다시 동굴로 돌아가는 이들도 있다. [진리의 은유로서의 빛]에 의하면 이러한 동굴은 은둔의 장소, 일상성으로부터 퇴각하는 장소, 역사적인 운동의 방향을 전환하려는 갈망의 장소이다. 짜라투스트라의 동굴이 바로 이러한 장소이다. 외부로부터의 빛은 없지만 정신의 내면적인 빛이 있을 수 있는데, 그것은 초월적인 빛에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카라바지오 만다라 160x240



렘브란트 만다라 180x160



프로이드 만다라 200x210



밀레공부(키질하는사람) 320x210



한스 블루멘베르크는 영지주의의 예를 든다. 그에 의하면 절대적인 빛의 이산(離散)과 재결합이라는 드라마는 영지(gnosis)의 기본 관념이다. 김명숙의 카타바시스 전은 어둠으로부터 빛으로 나아가는 인간의 역사, ‘어둠 속에서 길을 잃었다가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는 빛의 역사’(한스 블루멘베르크)를 반향한다. 또한 이 동굴은 라이프니쯔의 모나드, 즉 ‘창 없는 방’과 비교될 수 있다. 질 들뢰즈는 [주름; 라이프니쯔와 바로크]에서 ‘수렴하거나 또는 발산하는 무한한 계열들을 가지고, 또한 모든 가능성을 포괄하는 시간의 직조를 형성하는 바로크식 미로’의 예를 든다. 들뢰즈에 의하면 ‘동굴은 혼돈이 아니며 하나의 계열이다. 이 계열의 요소들은 다시 점점 더 미묘해지는 질료로 채워지는 동굴들이며 계열들 각각은 뒤따라 이어지는 것으로 연장된다’ 이 외부 없는 내부는 내적인 투쟁의 장이 되었다. 작업실 책상을 호위병처럼 에워싸고 있는 책들은 이러한 투쟁의 동반자이다. 


작업실 여기저기에 붙인 빛바랜 메모지에는 작업하면서 매번 되새기려는 발췌문들이 적혀 있다. ...“Prowess of floweres 꽃들의 무용(武勇)”, “美는 단지 만남일지 모른다. 장인의 사슬, 거대한 긍지, 거대한 복종이 어떤 지점에서 교차하는”, “그림은 ‘이미지의 역사’로 평준화되기를 원하지 않으며, ‘예술의 역사’로 격상되기를 원하지도 않는다. 그림은 도상학의 출발점으로 삼는 최초의 몸짓으로 되돌아가는 해석학을 원한다.”... 가독성은 없지만 손수 필사한 메모지들에 어떤 내용이 적혀있든 그 시간을 그렇게 보낸 수행성이 중요할 것이다. 책 속 타자와의 침묵의 대화를 통해 그 중 일부는 작품의 제목으로 주제로 발전되곤 한다. 타자와의 대화는 무명의 할머니부터 작가에게 등대가 되어 주었던 작가들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다. 카라밧지오, 렘브란트, 터너, 모네, 밀레, 베르메르, 고야, 루시앙 프로이트, 베이컨, 캐테 콜비츠 ....




아폴로 180x240



동물1 120x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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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제목 중에는 이름 옆에 만다라를 붙인 것들이 있다. 작가에 의하면 만다라는 행자가 명상을 통하여 우주의 핵심과 합일하고자 하는 깨달음의 안내도이다. 핏빛 공간 속에 얼굴이 들려있는 모습이 있는 작품 [카라바지오 만다라]는 카라밧지오가 자기 목을 따서 신에게 바치는 모습에서 스스로를 심판하는 작가의 심정이 투사되어 있다. 작가는 [렘브란트 만다라]나 [프로이트 만다라]를 작업하면서 ‘거장의 내부에 있었을 빛의 블랙홀에 빠지고만 불나방이었다’고 토로한다. 김명숙의 관심을 끄는 인물들은 자신을 이끈 회화의 거장들 뿐 아니라, 2013년 영정을 소재로 한 전시(17회 개인전, 담갤러리)을 촉발시켰던 한 할머니--청주 산막리 작업실 자리의 전 주인으로 그 자리에서 60년 이상을 살았으나 서울로 이주한 후 자살함--부터 살인혐의로 체포되어 신문에 실린 이들까지 광범위하다. 그러한 작품들은 특정인의 얼굴의 재현이라기 보다는 타자되기의 과정을 위한 매개물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특히 그러한 타자들은 수난자나 수행자로서 작가에게 감정이입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수많은 선들로 주름진 얼굴에는 고뇌하는 영혼이 깃들어있다. 작가는 얼굴을 영혼의 지도라고 생각한다. 얼굴에는 한 영혼의 심전도와 기상도가 새겨져 있다는 것이다. 물론 꺼진 빛으로 인하여 초상들에서 눈의 표현에 매우 가학피학적인 표현을 낳게 했다. 영혼의 창은 굳게 닫혀 있거나 심지어는 후벼 파져 있는 듯한 모습도 있다. 광원이 사라진 초상들은 데드마스크같은 느낌을 준다. 죽지 않은 존재들에게도 죽음은 이미 가까이에 있다. 조형예술가에게 가장 중요한 눈에 대해 작가는 두더지처럼 눈이 퇴화된 존재는 다른 감각들을 더 발전시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지독한 근시였던 작가 페르난두 페소아나 만년에 거의 눈이 먼 보르헤스 등도 김명숙이 공감하는 작가들이다. 단편적인 인상이 아니라, 침묵의 대화를 오랜 세월 이어갈 수 있었던 이들과의 만남은 초상이라는 형식으로 귀결된다. 김명숙의 작품에서 얼굴은 살아있는 것이든 죽은 것이든 ‘이안과 피안의 경계에 다다른 최후의 얼굴, 적멸의 얼굴’(김명숙)이다. 




말 320x210



미노타우르스 260x195



모든 초상은 자화상의 변주가 되어 가면서, 이제 자기를 그리나 남을 그리나 차이가 없어지는 지경(또는 경지)이 되었다. 작가는 처음에는 자신이 그림을 보지만 어느 순간에는 그림이 자신을 응시하는 듯한 체험을 말한다. 대리석으로 된 토르소이기보다는 그냥 사지가 잘려나간 몸뚱이 같은 작품 [아폴로]는 시인 릴케가 고대 토르소 상에 대해 쓴 [고대 아폴로의 토르소]와 공명한다. 그 시에 의하면, ‘거기 두 개의 눈망울이 무르익고 있던/ 아폴로의 엄청난 머리를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 토르소는 지금도 촛대처럼 불타고 있다...이 토르소에는 너를 바라보지 않는 부분이란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1990년대 나무를 처음 그릴 때, 새벽 무렵 동네 야산의 소나무들이 자신을 응시하며 자신에게 다가왔던 체험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그것은 나무를 비롯해 자신을 에워싼 것들이 주체의 대상이 아니라, 주체 자체가 나무가 되는 경지를 말한다. 자신을 잃는 이러한 체험은 위험하면서도 경이롭다. 작가는 ‘미는 두려움이다’라는 릴케의 말을 인용한다. 


아직 자연을 정복했다고 자신하지 못했던 숲속의 원시인들이 감지한 신적 존재 또한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예술은 자신의 원초적 조건을 되찾으려고 노력하는 순간 현대에 의해 극복되었다고 믿어졌던 종교를 만나게 된다. 카프카는 ‘자신의 삶이 문학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했고, 그 문학을 기도의 형식이자 구원의 수단으로 여겼다’는 맥락에서의 종교성을 말한다. 1976년도판 금성출판사의 세계미술 문고는 작가의 오랜 미술관이다. 작가는 문고판의 희미한 인쇄물에서도 빛을 본다. 그 문고판에서 본 밀레의 농부들은 시지프스적 존재로 되살아난다. 김명숙의 버전인 [밀레공부(키질하는사람)]에서 키질하는 농부는 ‘곡식 낱알들이 빛 알갱이가 되어가고 키질이 무도가 되어갈 때까지’(김명숙) 키질을 수행하는 수행자로 나타난다. 인간뿐 아니라 동물과도 타자되기가 이루어진다. 거북이, 염소, 박쥐, 원숭이, 군함조, 말, 소 등 종류도 다양하다. 




동물4 120x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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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1 490x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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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기원하는 곳, 또는 사라지는 곳이라는 상상을 야기하는 ‘카타바시스’전은 여기에 있는 타계, 내 안의 타자에 대한 감각을 고양한다. 타자와의 대화는 자신을 잃어버림으로서 다시 찾는 역설적인 과정이다. 르 클레지오는 [침묵]에서 타자와의 만남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내가 문득 이 세계의 중심이기를 그칠 때, 미지의 진실이 세계의 전면을 다시 차지하게 될 것이다. 나의 존재가 해체될 때, 나의 무상한 통일이 폭발해 버릴 때 나는 드디어 뚫을 수 없는 자연을 뚫고 들어갈 것이다. 내가 하나이기를 그치고, 내가 하나가 될 때, 내가 더이상 알지 못하게 될 때 나는 인식의 거대하고 지울 수 없는 대해 속에 잠기게 될 것이다...’ 김명숙의 작품에서 느림보지만 앞으로 내딛는 앞발이 강조된 거북이와 번제물로서 머리가 강조된 염소의 눈매는 날카롭다. 카프카적 변신을 겪은 작가의 동물들은 인간이었을 때보다 더욱 직관적이 되었다. 박쥐는 동굴로 비유되는 작업실에서 접힌 날개로 자신을 보호한 채 매달려 있다. 


먹이를 향해 수직 낙하 중인 군함조는 작업 또한 그럴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듯하다. 예술적 작업이란 정신의 사냥 아니겠는가. 뿔을 앞세우고 자신의 그림자를 들이받는 검은 소는 저돌적이다. 쓰러진 말은 다치고 늙은 말을 폐사시키는 상황을 연상시킨다. 그 말은 노쇠한 패기의 은유이다. 작가는 말을 그림으로서 그 말을 안락사시키고 싶다고 하는데도 ‘죽어가기만 하고 죽지는 않아서’ 여지껏 그림이 안 끝나고 있다고 말한다. 원숭이 또한 말 만큼이나 작가의 상황을 투사한다. 원숭이는 혼돈의 어둠 속에서 거꾸로인 채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무엇인가를 외친다. 길게 늘어진 팔은 너무 작업을 해서 탈골이 된 상태이다. 푸른 빛이 감도는 어둠 속에서 떨고 있는 원숭이는 고립무원의 경지를 은유한다. 심장 시리즈는 일부를 통해 전체를 비유하는 환유법을 구사한다. 작가에 의하면 심장은 ‘내부의 황제로서 감정과 욕망을 조절하고 제한하는 심장은 신성으로 통하는 문’이기도 하다. 




심장2 120x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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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하면 심장 관련 의학 사전을 들춰본다는 작가는 고대 이집트에서는 심장이 뇌로 간주되었으며, 그들은 심장으로 생각한다고 믿었다고 전한다. 관객을 향해 마주한 형상에는 인물이 내재되어 있다. 분해되거나 타들어 가는 마음/정신을 환유하는 심장/뇌는 고뇌하는 인물이 내재해 있다. 베로니카의 손수건처럼 바탕에 상처로부터 흘러나온 채액이 배어든듯한 장기는 정신의 고통과 육체의 고통을 일치시킨다. 양쪽으로 펼쳐지는 형상은 빛을 매개로 한 추락/비상이라는 작가의 주제와 연결하면 날개처럼도 보인다. 그것들은 날 수 없는 묵직한 날개, 다치고 피흘려서 비상할 수 없는 날개이다. 자신 안의 자연을 감지하는 이에게 자연은 대상화, 도구화될 수는 없다. 내 안에 나무가 있었듯이, 타인들의 얼굴에도 자신이 있다. 이러한 타자되기는 형상이 있지만, 재현은 아니다. 작품 속 여러 겹으로 횡단하는 선들은 무엇인가의 확고한 재현이 아니라 생성과 소멸의 와중에 있다. 작가는 지금의 자신을 이루는 타자들의 수많은 가닥들을 하나하나 펼쳐내 거듭하여 다시 짜기를 멈추지 않는다. 


출전; 해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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