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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미령 / 영겁의 시공간에서 반복되는 흐름

이선영

영겁의 시공간에서 반복되는 흐름

 

이선영(미술평론가)

 


인간의 보호 아래 있다가 바다로 방생되는 동물 영상을 본 적이 있다. 어린 펭귄은 그동안 자기를 보살펴 주었던 인간을 뒤로 하고, 바다로 달려가는 장면이었다. 난생 처음보는 바다에 겁을 먹은 펭귄은 멈칫멈칫 하면서 여러 번 인간 쪽으로 고개를 돌리기도 했지만, 결국 바다로 달려가 큰 파도에 작은 몸을 맡겼다. 바다에 처음 뛰어든 어린 펭귄의 운명은 알 수 없다. 바람 불고 파도치는 찬 바다는 거칠었지만, 안전한 환경에서 보살핌을 받던 펭귄을 그쪽으로 가게 한 원초적인 무엇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지향과 끌림이 인간에게도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인간 또한 궁극적으로는 그곳으로부터 왔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지구상에서 생명이 기원한 먼 옛날의 이야기지만, 가깝게는 생명이 기원한 물을 인체 내에서 구현한 모태의 양수에 떠 있던 기억이 있다. 비롯된 곳으로 되돌아간다 함은 생성과 소멸의 주기에 함께 함을 말한다. 이러한 운명적 끌림이 있기에 그려진 수많은 바다 풍경이 있었을 것이다.

 



01.My Ocean-162x130cm Mixed media 2021



02.My Ocean-162x130cm Mixed media 2021



03.My Ocean-91x72.7cm Mixed media 2021



개체로서의 인간은 바다를 반복해서 겪는다. 화면 가득 바다를 그리는 최미령의 작품은 자신을 포함한 모든 생명의 기원이 된 존재를 일깨운다. 바다는 생물학적으로도 의미가 있지만, 인간이 무한을 생각했을 때 떠오른 것이다. 무한의 이미지는 푸른 하늘이 먼저겠지만, 하늘을 반사하는 푸른 바다는 천상에 상응하는 지상의 짝패다. 최미령의 최근작 [My Ocean] 시리즈에 반영된 바다는 실로 다양한 모습이다. 작가에게 무한은 추상적 관념보다는 감각적 다양성으로부터 온다. 작가는 ‘작업실에서 바라보는 바다는 시시각각 햇살 받아 뿜어내는 많은 색과 반짝거림, 찰랑거림, 물결로 경쾌하고 아름다운 변화를 보여주었고, 달빛을 받아 밤의 짙은 색을 뿜어내는 신비롭고 고혹적인 깊은 바다를 보여주는 아주 여러 이미지의 바다였다. 어느 날은 경쾌한듯, 어느 날은 따뜻함을, 어느 날은 열정적인, 어느 날은 짙고 깊은 모습을 보이며 나를 매혹하였다.’고 말한다. 


작품 제목에 바다라는 명확한 단어가 들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다와 관련된 구체적인 풍경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조형적 언어 중 수평선은 대개 바다로부터 오지만, [My Ocean] 시리즈 대부분은 수평선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자연이라는 구체적 지시대상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한 초기 추상화가들은 이러한 수평선을 억제하고자 했다. 최미령의 ‘풍경’은 대부분 전면 구도(all over)다. 굳이 비교하자면 바다가 아닌 바닥과 더 가깝다. 최근 작품 중 가장 재현적 요소가 강한 것은 흐름이 느껴지는 화면 안의 밝은 부분이 하얀 포말을 연상시키는 작품이다. 어두운 바탕에 길고 짧은 밝은 선들만 떠 있는 망망대해의 모습을 담은 작품은 추상적인 재현에 해당된다. 추상미술 또한 자연적 지시 대상을 완전히 생략할 수는 없었다. 현재 여수에서 작업 중인 작가에게는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커다란 창을 가지고 있지만, 바다를 재현하지는 않는다. 




04.My Ocean-45.5x45.5cm Mixed media 2021



05.My Ocean-91x72.7cm Mixed media 2021



06.My Ocean-91x60.6cm Mixed media 2021



07.My Ocean-45.5x45.5cm Mixed media 2021



‘나의 바다’는 몇 년 몇 월 며 칠 어디의 바다는 아니다. 수많은 변주가 가능하기 위한 최초의 대상은 필요하다. 작가에게 바다는 영감의 기원이지 재현의 대상은 아니다. 최미령의 ‘나의 바다’는 바다를 보고 그리는 것이 아니라, 바다를 본 다음 그릴 것이다. 마음의 거처인 몸 속에 담은 것을 꺼내는 것이다. 공간적 범주인 지각은 시간적 범주인 기억과 어우러진다. 기억은 지각을 새롭게 하고 지각은 기억의 바탕이 된다. 보랏빛으로 가득한 바다 풍경이 담긴 작품은 자연적 대상보다는 보는 주체의 기분을 더 드러낸다. 파도치는 바다의 리듬은 붓질의 리듬으로 번역된다. 빛을 반사하는 바다의 면은 형태와 색채로 번역된다. 추상 또한 무로부터 시작되지 않는다. 조형적 단위소라 할만한 것들이 빼곡이 채워진 화면은 실체로서의 대상이 아닌 원소로서의 풍경이다. 그 원소는 저기 보이는 바다뿐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주체 또한 채우고 있으며, 입자이자 파동으로 구성된다. 


바다 표면에 난반사되는 햇살을 떠올리는 밝은 형태들이 화면 가득히 깔려 있는 작품에서 외곽선이 중첩되는 형태들은 제자리에서 진동하는 원소들을 떠올린다. 원소의 색상이 구체화 되면 군상으로도 보인다. 여러 색의 터치로 가득한 화면은 바다의 풍경이 결코 고정된 것은 아님을 알려준다. [My ocean] 시리즈는 여름의 ‘화려한 반짝거림’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한다. 찰랑거리는 물살을 반사하는 빛은 사그락거리는 소리를 낼 듯하다. 작가는 이 공(共)감각적인 작품들에 대해 ‘반복되는 형태와 색들의 부딪힘 속에서 변화를 보이며 간간이 보여지는 선들이 음악적인 요소’라고 말한다. 소리 또는 소리에 대한 상상은 타자가 존재한다는 징후이다. 최미령의 바다 풍경은 대도시 군상의 무리처럼 보이기도 한다. 파도처럼 끝없이 밀고 밀리면서 살아가는 인생이 중첩된다. 그 충만한 바다 풍경을 보는 이의 세포들 또한 충만할 것이다. 




08.My Ocean-97x97cm Mixed media 2022



09.My Ocean-116x91cm Mixed media 2022



10.My Ocean-130x97cm Mixed media 2022



물이라는 느낌을 명백하게 가시화하는 것은 파동이지만, 최미령이 작품에는 입자가 훨씬 더 많다. 바다는 무엇보다도 거대한 빛의 반사체로 다가온다. 물론 그 이전에 바다 또한 수소와 산소 입자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물질이라는 점도 깔려 있다. 최미령의 바다는 지지직거리는 화면으로 변주되기도 하는데, 그것은 전자제품에서 잡히는 먼 우주의 전자파가 포착된 모습과 유사하다. 검은 바탕에 오색 조개 껍데기를 가득 박아넣은 자개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인상파처럼 색 점을 화면에서 병렬시킴으로서 생생한 느낌을 살렸다. 색감뿐 아니라 여백과 형태의 관계를 전도시키는 방식으로 잠재적 운동감을 준다. 화면의 구성요소들이 빽빽한 작품의 경우 바다의 풍경이 거의 연상되지 않는다. 중간중간의 하얀 선들은 요소들을 움직이게 할 수 있는 여백으로 다가온다. 또 다른 작품에서는 크고 밝은 점들을 전면에 내세운다. 한 작품에서 배경이었던 것이 형태로, 형태였던 것이 배경으로 자리를 바꾸는 듯한 운동감이 있다. 


어두운 배경에 가득 떠 있는 밝은 색점들이 있는 작품은 크기와 형태, 명도의 변화를 통해 잠재적 움직임을 부여한다. 최미령의 작품은 주체와 객체의 풍경이라는 점에서 현상학적 관점으로 해석될 수 있다. 메를로-퐁티는 [지각의 현상학]에서 몸은 자연과 우리를 이어주는 살아있는 끈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끈을 통해 연결된 감성적 세계는 마치 두 몸의 짝짓기와 같은 것이다. 메를로 퐁티는 ‘단 하나의 충실을 향해 두 몸이 양측에서 부딪혀오는 단 하나의 벽을 향해 두 몸의 지향들을 맞추기’라고 표현한다. 최미령에게 목전에 펼쳐진 바다 풍경은 작가의 방식으로 참여할 수 있는 세계로 다가온다. 현상학적 관점에 의하면, 살은 물질이 아니고 정신이 아니며 실체(substance)가 아니다. 메를로 퐁티는 살을 지칭하기 위해서는 원소라는 용어를 써야 한다고 본다. 살을 존재의 한 원소로서 간주할 때 최미령의 작품에서 나와 바다는 내재적으로 융합된다. 작품마다 다르게 설정된 조형 요소들이 세포처럼 중첩된 작품들은 촉각적이다. 촉각은 ‘세계로 가는 입문이고 입구’(메를로 퐁티)가 된다. 


출전; 미술과 비평 2022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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