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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지도 어리지도 않은

이선영

늙지도 어리지도 않은

  

이선영(미술평론가)

 


청년문화에 관련된 레트로 봉황의 기획 <청년치유 토(土)닥토(土)닥 ‘YOUTH, 늙지도 어리지도 않은 展 : 상상의 무게>에서 상상의 역할은 지대하다. 오로라를 연상시키는 변화무쌍하고 화려한 색감이 있는 구민지의 작품들은 칙칙한 일상에 대한 대안으로 다가온다. 최근 작업 제목 [공상 몽상 환상]은 비현실 세계에 대한 작가의 취향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삭막한 현실에서 도피처를 찾는 이들에게 비현실은 인기가 많다. 비현실 또한 컴퓨터로 빨려 들어간다. 매 순간 업데이트 되는 최신 소식들에도 불구하고, 스마트폰 화면을 무심하게 훑어내리는 손가락들은 자극적인 콘텐츠의 범람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권태를 나타낸다. 그것은 생산자가 아닌 소비자로서의 역할을 맡은 이들의 운명이다. 분업이 일반화된 현대사회에서 노동의 신성함은 빛을 바랬다. 문화이론가들이 주장하듯이, (자본주의 사회의) 소외된 노동이 소외된 여가를 낳는 것이다. 


구민지의 작품에서 예술이라는 대안적 우주의 생명체 또한 상상의 동물들이다. 어떤 종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경계 위의 존재들은 ’늙지도 젊지도 않은‘ 모호한 세대들과 동일시될 수 있다. 상상, 또는 현실 그자체가 아닌 상상 속의 현실이나 현실 속에서 상상의 몫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현실 속의 상상의 몫은 이데올로기부터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거대 문화사업까지 두루 걸쳐있다. 상상 속의 현실은 인간사회의 다양한 상황에 빗대볼 수 있는 신화나 종교에서 찾아질 수 있고, 근대 들어 예술이 자율화되면서도 그 역할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어릴 때부터 그림을 그려왔던 작가의 묘사력은 뛰어나다. 마음만 먹으면 그려낼 수 있는 능력은 당연하지 않다. 재능 이외에 꾸준한 작업이 요구된다. 구민지의 많은 작품 목록들은 그러한 필요조건을 갖추고 있다. 삶의 불확실성을 작업의 확실성으로 돌파하려는 의지가 있다.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는 확실성, 그 역설적 상황을 예술을 통해 표현한다. 


많은 작품들에 그만의 기법이 일관되게 관철되고 있다. 대신에 도상은 모호하다. 종(種)과 종사이의 경계가 무너지는 괴물, 또는 상상 동물이다. 구민지의 작품들은 상상적인 것일수록 더 설득력 있는 기법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문화사업의 생산물이 그토록 실감 난 것은 그 이유다. 캐릭터의 털끝 하나하나의 움직임이 실감 나는 만화영화 같은 것은 문화 소비자에게 설득력 있다. 현대사회에서 미술 또한 고립될 수 없고, 대중문화의 스펙터클과 잠재적, 현실적으로 경쟁한다. 뛰어난 기법의 작품들은 아름다운 가상이 주는 약과 독을 같이 가진다. 약은 아름다움의 목록을 추가한 것이며 독은 거짓된 화해다. 독을 완화하기 위해서는 메시지를 강화해야 할 것이다. 물론 작가는 자신이 발명한 상상의 대상에 많은 상징성을 접어 넣었지만, 그것이 관객에게 제대로 읽히는 가는 별개의 문제다. 시간적 축을 따라 흐르는 서사와 한눈에 사로잡는 조형적 언어와의 차이점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동양의 고전 산해경을 비롯해서 신화나 설화 속의 동물들은 다양한 서사로 재미와 의미를 동시에 제시하곤 했다. 현대미술사에도 표현주의 화파로 분류되는 독일 청기사파가 비현실적 동물을 등장시킨 바 있다. 청기사파의 대표적인 도상인 말은 현실적이지만 푸른색은 비현실적이다. 양자의 만남 또는 충돌은 세계대전 전후의 불안한 서구 사회를 반영했다. 여기에서 아름다움과 비극, 상상과 우회적인 현실비판은 밀접하다. 구민지의 작품에서 상상의 도상을 더욱 상상적인 것으로 만드는 색감은 상상에 대한 작가의 의지를 보여준다. 한편 인간과 비유된 동물도 양자의 차이점도 의식될 필요가 있다. 작가는 인간을 닮은 상상 동물이 욕망을 상징한다고 한다. 인간의 욕망은 동물의 욕구와 달리 끝이 없다. 그것이 인간적 욕망의 강점이자 약점이다. 작가의 의도대로 인간의 욕망을 반영하기 위해서는 현재 등장하는 도상들의 형태나 색이 끝없이 변이해야 할 것이다. 

 


윤여성은 코로나 시기에 작업실에 갇혀있으면서 무기력감을 해소하고자 좋아하는 빵을 만들기 시작했다. 빵은 만들기도 재미있고 일용할 양식도 되었지만, 만든 것을 다 먹을 수는 없었다. 동료들과 나눠 먹는 것도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인간들끼리 모이는 것은 물론, 같이 먹는 것도 금지된 엄혹한 시기가 아니었나. 이러한 총체적인 난국이 앞으로도 또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이 개인이나 사회로서는 위기 대응책을 강구하게 한다. 작가는 남은 빵들이 부패하는 것을 보고 이를 작업에 활용했다. 마침 현대미술이 거의 모든 것을 작품화할 수 있을 만큼 확장성을 가졌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작가는 영어로 고통이라는 의미를 가지는 단어 ‘pain’ 불어로 빵임을 의식하고, ‘빵과 고통 그 사이에 대한 이야기’를 작품화하기로 한다. 빵이 왜 고통일까. ‘눈물 젖은 빵을...’이라는 문장이 있을 만큼, 생명에게 운명적인 가혹한 생존 조건 때문은 아닐까. 


인류 역사의 어느 시기에 발명되어 보편적인 음식 중의 하나가 된 빵은 농사나 요리를 비롯한 전형적인 문화의 산물이다. 빵은 생존을 가능하게 하고, 문명을 가능하게 해주었지만, 그에 따른 고통 또한 의미한다. 빵을 만들 때 밀가루 반죽을 치대는 과정은 굉장한 노동력이 드는데다가, 얼마 전 빵 공장 노동자의 끼임 사고도 있었듯이, 산업화된다고 해서 빵 관련 고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작가에게는 단지 먹는 것을 좋아서가 아니라, 만들기 좋아서라는 계기와 연결된다. 윤여성의 작품은 빵이 조형적인 면에서도 풍부한 영감의 원천이 됨을 알려준다. 가령 빵의 단면에 나타나는 복잡한 숨구멍들의 모양새나 빵이 부패하면서 생기는 색과 형태의 변화 등을 활용한 작품들이 그것이다. 빵이 가지는 다양한 상징과 형태들은 설치작품으로 탄생했다. 빵은 단순한 소재에 머물지 않고, 기록과 함께 하면서 작품의 개념적인 차원도 보강한다. 


기록은 무기력함을 비롯해서 자신이 처한 상황에 거리를 두게함으로서,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윤여성의 작품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하면서 그것이 동시에 ‘빵’, 즉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소통 및 유통에 대한 희망 사항이 담겨있다. 최근작의 또 하나의 소재는 이불이다. 빵에 관련된 여러 개념처럼, ‘이 불안’과 ‘이불 안’이라는 띄어쓰기에서 영감을 받았다. ‘이불 밖은 위험해!’라는 우스갯소리도 있지만, 이불 안은 가장 개인적인 공간으로 휴식부터 꿈꾸기를 비롯한 편안함의 자리다. 젊은 작가의 불확실성에서 야기되는 불안감을 해소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이부자리는 삶의 씁쓸함과 피로가 해결되는 달콤한 휴식의 시공간에 핵심적이다. 윤여성은 이불로 작업을 하고 알록달록한 풍선들을 한데 모아 그 안에서 이루어졌을 포근한 상상을 표현했다. 빵도 그렇고 이불도 그렇고 치유에 초점이 맞춰진 최근작의 소재들은 초월적이거나 관념적이지 않고 생활밀착형의 구체성을 특징으로 한다. 


가령 작가는 자신이 처한 ‘무기력증의 촉감과 맛’을 찾아내고자 했다. 그것들은 자신이 처한 자연스러운 상황으로부터 시작됐지만, 예술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다. 빵과 관련된 개념 중 고통이 더 다가올 수 있는 지점이다. 밤낮없이 돌아가는 24시간의 시대가 열린 지도 오래된 지금, 이불 또한 사적 영역에 갇혀 멈춰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의미와 재미의 원천이었지만 고통이 될 수 있는 예술은 빵의 역설을 공유한다. 이불 또한 마찬가지다. 삶의 불안을 해소하는 가장 사적인 자리는 그것이 동시에 공적 소통의 매개가 된다는 점에서 불안을 증폭시킬 수 있다. 작가라고 해서 젊은이라고 해서 불안한 것은 아니다. 불안은 현대인의 보편적 조건이다. 상대적으로 변치 않는다고 믿어지는 자연이나 전통에 비해 현대는 관계를 더욱 조밀하게 좁혀나간다는 점이 불안을 증폭시킨다. 불안은 근대의 조건이자 귀결이다. 윤여성에게 작가란 그 병을 더 심하게 앓고 이겨내면서 관객에게 치유의 방식을 제안하는 소통자 역할을 맡는다.


출전; 레트로 봉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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