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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원/ 휴양지, 현대인의 여가생활

고충환



이상원/ 휴양지, 현대인의 여가생활 



헤테로토피아. 초 장소를, 부재 하는 장소를 의미한다. 그 문자적 의미로만 치자면 유토피아와도 다르지 않다. 하지만 유토피아가 사람들의 이상으로만 존재하는 가상의 장소를 의미한다면, 헤테로토피아는 실재하지만 사람들의 의식에서 지워진 그러므로 잊힌 장소, 비 혹은 반사회적 장소를 의미하는 것이 다르다. 미셀 푸코는 감옥과 정신병원, 군대와 기숙사 같은, 사회로부터 격리된 장소 그러므로 반사회적 장소를 헤테로토피아라고 부른다. 

권력의 효율적인 관리를 위한 제도적 장치라고 보는 것이지만, 푸코는 특이하게도 여기에 휴양지를 포함시킨다. 휴양지 역시 어쩌면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을 감행하게 만드는(일시적으로 혹은 잠정적으로 스스로 사회로부터 격리시키는), 그러므로 비 혹은 반사회적 행위가 도모되는 장소라고 보기 때문이다. 제도와 권력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본 것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라 해도 여기서 휴양지는 대개 한적한 곳, 외진 곳, 충분한 휴식을 보장해줄 수 있는 곳 그러므로 숨어 있기 좋은 곳이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지금도 여전히 휴양지는 한적한 곳이고, 외진 곳이고, 숨어 있기 좋은 곳으로 남아 있는가. 처음엔 그랬다. 이런 한적하고 외지고 숨어 있기 좋은 곳에 하나둘 사람들이 찾아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좌표라도 찍듯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여긴 꼭 가봐야 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몰려와 군중을 이루었다. 이제 사람들은 숨기 위해 휴양지를 찾지 않는다. 오히려 자기가 속한 집단의식(예컨대 바캉스족, 캠핑족, 텐트족, 그리고 차박족 같은)을 인증받고 싶어서, 군중 속의 익명적인 주체로 묻히고 싶어서(그것도 숨는 한 방법이긴 하다), 저마다 자신의 행복을 확인하고 싶어서 휴양지를 찾는다고 한다면 지나친 일반화라고 할까. 

그러나 여하튼 휴양지의 의미가 예전 같지만은 않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 의미가 달라진 것이다. 이제 휴양지를 찾는 일은 특별할 것도 없는, 일반적인 일이 되었다. 여름이면 해변이나 계곡을 찾고, 가을이면 꽃놀이 가고, 겨울이 오면 스키를 타는, 그리고 여기에 별이 총총한 밤하늘을 올려다보기 위해 차박을 하고, 햇빛 좋은 날에 공원을 찾는 일은 소소하게 행복한 삶을 산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의 일과가 되었고 일상이 되었다. 그 자체가 생활양식으로 자리 잡았고 삶의 모드로 정착되었다는 점에서 현대인의 문화 풍속도의 한 단면으로 봐도 좋을 것이다. 

이상원의 그림이 그렇다. 휴양지를 찾은 사람들의 오색찬란한 행태와 정경을 파노라마처럼 전개해 보여주고 있는 작가의 그림이 휴식과 쉼(아니면 놀이?)으로 나타난 현대인의 생활양식을, 삶의 모드를 엿보게 만든다. 휴양지를 매개로 본 현대인의 여가생활을 통해 그동안 달라진 휴식의 의미(이를테면 개별적인 행위인 휴식이나 휴가에서마저 변형된 공동체 의식과 군중심리가 작용하는 것과 같은)와 함께, 그 문화 풍속도의 한 단면을 예시해주고 있다고 보면 좋을 것이다. 


작가의 그림에는 해변을 거니는 사람들, 물속에서 수영하는 사람들, 산행하는 사람들, 스키장에서 설원을 누비는 사람들, 유채꽃밭에 파묻혀 서로 사진을 찍어주거나 셀카를 찍는 사람들, 공원에서 개를 앞세워 산책하는 사람들, 조깅 하는 사람들, 자리에 눕거나 앉아서 망중한을 즐기는 사람들, 캠핑 장에 늘어선 알록달록한 텐트와 파도에 몸을 실은 서퍼와 같은, 휴양지를 찾은 사람들과 그 정경이 손에 잡힐 듯 그려져 있다. 

손에 잡힌다고는 했지만, 사실적이지는 않다. 처음엔 꽤 묘사적이었지만 사실은 이때에마저도 그랬다. 무슨 말인가. 특히 작가의 초기 작업에서 두드러진 특징이라고 한다면 부감 시점과 점경을 들 수가 있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사람들이 점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하얀 종이 위에 그리고 캔버스 위에 찍힌 그림자가 실재감을 더하고(특히 백사장 위를 거니는 사람들에서 더 두드러져 보이는), 비록 멀리 보이는 사람들이지만 세밀한 관찰과 함께 단 몇 번의 붓질로 그 동세와 포스를 포획하는 감각적 능력으로 인해 그림은 생동감을 얻는다. 그렇게 비록 등을 보여주고 있는 사람들이지만, 그리고 대개 얼굴 없는 사람들이지만 그 보이지 않는 얼굴에서 표정마저 느껴진다. 

예술에 대한 정의가 분분하지만, 그중 결정적인 경우로 예술은 암시의 기술이라고 했다. 암시란 그리지 않으면서 그린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기술이고 사실은 감각이다. 사람을 예로 들면 특정 부위를 생략하거나 감으로 그리는 것인데(이를테면 한 번의 붓 터치로 대신하는 것과 같은), 해부학적 구조와 동세에 대한 이해와 감각이 전제될 때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여기에 수영복, 조깅복, 등산복, 스키복과 같은, 사람들의 의복과 여기에 부수되는 복장 일체(예컨대 라이더의 핼맷)에 대한 관찰이 그림에 생생함을 더한다. 향후 그리고 어쩌면 이미 작가의 작업이 문화적 아이콘과 물화 된 인격체(페티시즘)와 같은 사회학적 의미로까지 확장되고 심화할 수 있는 개연성을 예시해주는 부분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작가의 그림에서는 시점이 중요한데, 작가가 구사하는 시점에는 부감 시점과 함께 파노라마 시점이 있다. 하나의 화면 속에 사람들이 모이고 흩어지는 군중을 소재로 한 그림에 부감 시점이 적용되고 있다면, 파노라마 시점은 하나의 화면 속에 한 사람을 그려 넣는 식의, 그렇게 그린 소품을 가로나 세로로 길게 나열해 보여주는 식의 그림에 해당한다. 조깅하면서 지나가는 사람, 운동하면서 지나가는 사람, 자전거를 타면서 지나가는 사람들과 같은, 지나가는 사람들을 재현해 보여주는 방식이 필름을 닮았고, 실제로도 그림을 확대 적용한 셀애니메이션 작업에서 그 효과는 극대화된다. 

부감 시점이 현실 그대로를 재현해 보여주는 객관적이고 관찰자적인 시각을 반영하고 있다면, 파노라마 시점은 상대적으로 인위적이고 연출된 시각을 반영한다. 조깅과 운동과 라이더로 나타난, 생활양식을 분류하고, 유형화하고, 개념화해 보여주는, 그렇게 현대인의 문화 풍속도의 일 단면이 한눈에 읽히도록 유도하는 방식일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부감 시점과 파노라마 시점은 현실을 재현하는 혹은 해석하는 작가의 두 경우 혹은 갈래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패턴이 있다. 작가의 그림에서 보면 특히 군인들의 제식을 보여주는, 그리고 축제 현장과 시위 현장을 소재로 한 경우에 이런 패턴이 두드러져 보인다. 보통 하나의 이미지가 단위원소가 돼 반복 재생산될 때 패턴이 발생한다. 특정 규칙이나 규율을 따라 반복되는 패턴 그러므로 규칙과 반복은 자기동일성 혹은 획일성을 요구해오는 제도의 유비적 표현일 수 있다. 이를테면 제식에서도 축제와 시위 현장에서도 리더가 있기 마련이고, 그의 구호나 몸짓에 일사불란하게 반응하는 것이 그렇다. 작가의 그림이 제도와 개별주체의 관계로 나타난 치열한 삶의 현장 속으로 확장되고 심화되는 또 다른 한 가능성의 계기로 봐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근작에서 작가는 또 한 차례 의미 있는 형식실험을 시도하고 있다. 추상화의 경향성을 예고하고 있는 것이 그렇다. 그 경향성의 회화는 그러나 처음부터 회화의 자율성과 예술의 형식논리에 바탕을 둔 모더니즘 패러다임을 실현한 추상회화와는 다르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주지하다시피 작가는 구상회화에 바탕을 두고 있고, 시점에 변화를 주는 방법으로 암시적인 회화를 강조하는 과정에서 반쯤은 저절로 이르게 된(그러므로 어쩌면 내적 필연성에 의한?) 경우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나무와 풍경을 최소한의 구조로 추상화한 몬드리안의 경우를, 인상파의 터치에서 추상회화의 평면화의 경향성을 예감한 클레멘테 그린버그의 경우를 떠올려봐도 좋을 것이다. 

추상화의 경향성은 언제 어떻게 발생하는가. 관계의 단절이 일어날 때 구상성은 추상성으로 인식된다. 보통은 관계가 만들어내는 차이에 근거해서 사물 대상의 개별 존재를 인식한다. 여기에 관계의 단절이 일어나면 차이가 소거되면서 낯설어지는 것이다. 이를테면 사물 대상을 화면에 꽉 차도록 풀사이즈로 제안할 때(작가의 용법으로는 올오버페인팅)가 그렇다. 

작가의 그림에서 보면 유채꽃밭(꽃 시리즈)이 그리고 수면(부유하는 사람들 시리즈)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그림이 그렇다. 말이 꽃밭이고 수면이지, 사실은 각 노란색과 청색 물감이 풀사이즈로 평면을 이루고 있다고 보면 될 것이다. 여기에 작가는 노란색의 붓질만으로 바람에 일렁이는 유채꽃밭을 표현했고, 청색의 붓질만으로 수면에 이는 파도를 재현했다. 그리고 앞서 작가는 다만 한두 번의 터치만으로 사람의 동세를 암시한다고 했는데, 이번에는 그 경향이 더 강조된다. 그리고 그렇게 유채꽃밭에 반쯤 파묻힌 채 저마다 사진찍기에 여념이 없는 사람들, 그리고 물놀이에 한창인 사람들이 비정형의 얼룩처럼 보이고 물감 범벅처럼 보인다. 그 경향은 시위 현장 같기도 하고 축제 현장 같기도 한, 군중을 소재로 한 그림에서 극대화된다. 짐짓 정색 하고 말하자면 모티브는 온데간데없고, 다만 순수한 색채들의 향연을 보는 것도 같다. 

그렇게 향후 작가의 그림은 추상화의 경향성을 넘어 추상화로 넘어갈 것인가. 그렇게 단정할 필요도 그럴 필요도 없다. 다만 내적 필연성이 자기를 이끄는 대로 가면 될 일이다. 적어도 분명한 것은 추상과 구상, 암시와 형상의 경계 위에서 그 감각적 수위를 조절하면서 작가가 자기만의 형식을 열어놓고 있다는 점이다. 현대인의 여가생활에 대한, 어딘가로 훌쩍 떠나고 싶은 욕망에 대한, 그 알록달록한, 들뜬 감정의 향연에 대한, 그 꿈과 판타지에 대한 자기만의 서사를 풀어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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