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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묵화 이후, 무묵수묵, 수묵은 도처에 있다 _2021 전남국제수묵비엔날레를 계기로 본 (上)

고충환



수묵화 이후, 무묵수묵, 수묵은 도처에 있다

_2021 전남국제수묵비엔날레를 계기로 본 (上)




전통적으로 수묵은 한국화 논의와 관련이 깊다. 한국화에 대한 언급 없이 수묵을 논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운명적으로 한 몸이라고 해야 할까. 수묵도 그렇지만 한국화에 대해서도 지필묵과 같은 재료적인 특질이나, 선(형식론)이나 기세(기운론) 같은 장르적인 특수성을 전제로 논하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지거나 최소한 지엽적임을 피할 수가 없다. 어쩌면 한국화에 대해서는 한국 사람이 그린 그림이라는, 그러므로 장르 구분 없이 폭넓은 의미를 적용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먹그림과 페인팅, 사진과 영상설치작업을 두루 아우르는 식의. 그리고 여기에 한국적인 미의식의 원형을 반영한 그림이라는 본질적인 의미를 폭넓게 적용해야 할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한국적인 미의식의 원형을 해석하고 각색한 작업을 두루 아우르는 식의. 


그렇다면 원형이 뭔가. 여기서 원형은 전형과 다르다. 전형이 사회화된 기호, 문화적인 기호, 객관화된 기호라고 한다면, 원형은 전형보다 깊다. 어쩌면 전형은 원형에서 길어 올려진 것이고, 그런 만큼 원형은 더 궁극적이다. 사진에 비유하자면, 롤랑 바르트의 스투디움(전형)과 푼크툼(원형, 실제로는 개인적인 너무나 개인적인 기호)의 구분과도 흡사하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칼 융은 개별주체의 기억보다 아득한 기억을 집단무의식이라고 했고, 그 집단무의식이 반복해서 나타나는 상징 곧 반복 상징을 원형이라고 불렀다. 그렇다면 한국적인 미의식의 원형은 무엇이며 어디서 어떻게 찾아질 수 있는가. 


한국적인 미의식의 원형은 정신, 그러므로 어쩌면 수묵 정신에서 찾아질 수밖에 없다. 여기서 정신은 다르게는 이념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고, 그 자체 감각과 감성, 감정과 감수성을 두루 아우르는 개념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헤겔은 예술을 이념의 감각적 현현이라고 했다). 그 자체 의식적이고 능동적인 층위에서보다는 무의식적이고 수동적인 차원에서 저절로 수행되는(그러므로 어느 정도 자동기술적으로 발현되는) 경우로 이해하면 되겠다. 수사적 표현을 빌리자면 의미의 매개도 없이 목적의 지향도 없이 자연스러운, 편안한, 물 흐르듯 하는 경우로 이해하면 되겠다. 


그렇다면 그 차원이며 경지는 어떻게 가능한가. 한국적 미의식을 관통하는 정신과 이념에 대해서는 그 설이 분분하지만, 개인적으로 풍류, 여기, 소요, 그리고 딜레탕트와 아마추어리즘 그러므로 어쩌면 사유하는 정신(자유롭게 사유하고 거침없이 사유하는 정신)에서 찾고 싶다. 특히 최치원이 정식화한 풍류는 바람처럼 흐른다는 뜻이고, 바람처럼 벽 그러므로 경계가 없다는 뜻이고, 바람처럼 거침이 없다는 뜻이고, 바람처럼 정처 없다는 말이다. 여기서 흐르는 것은 바람 말고 또 있다. 물이다. 그리고 물이 수묵과 그 생리가 통한다고 생각한다. 


그런가 하면 보들레르는 어쩌면 진정한 예술가는 정작 예술을 생산하는 주체보다는 예술을 즐기고 향유 하는 예술애호가 곧 딜레탕트일 수 있다고 했다. 예술을 즐기는데 격이 있고 형식이 있고 경계가 있을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차원이며 경지를 현대미술의 논리로 치자면 탈장르와 탈형식, 탈경계와 어쩌면 탈이념마저 아우르는 각종 탈의 논리와 성취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여기서 탈에 대해서는 그 대상(예컨대 형식적이고 장르적인 특수성 같은)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부정을 통해 긍정하는 지양(헤겔)의 경우로 이해하면 되겠고, 더 이상 그 대상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의미로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추어리즘에 대해서는 직업의식 혹은 장인정신과 비교되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앞서 수묵은 물과, 그리고 어쩌면 바람과도 그 생리가 통한다고 했다. 바람도 물도 수묵도 흐른다는 성질을 공유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흐르는 것에는 거침이 없고 경계가 없다. 활성적이다. 유동적이다. 가변적이다. 가역적이다. 얼룩이 꼭 그렇다. 얼룩에 거침이 있고 경계가 있을 일이 없다. 그런 만큼 개인적으로 수묵은 얼룩이 그린 그림 그러므로 얼룩 그림이라고 생각한다. 감각적 닮은꼴을 떠올리게 하는 재현적인 선입견으로 하늘처럼도 보이고 풍경처럼도 보이지만, 사실 수묵은 얼룩이 만든 그림이다. 그러므로 얼룩은 어쩌면 수묵의 형성원리 혹은 형성 요소, 모나드, 단자, 그것도 항상적으로 움직이는, 그렇게 움직이면서 자유자재로 변태 되는 최소 단위원소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 단위 원소들이 모이고 흩어지는 양태에 따라서 얼룩 그러므로 수묵은 하늘을 그리고, 풍경을 그리고, 세상 모든 풍경을 그린다. 그러므로 수묵에 대해서는 세상 모든 풍경이 발원하는 원천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무묵수묵, 수묵 없는 수묵, 수묵은 도처에 있다는 주제 의식은 바로 이런 착상에서 유래한 것이다. 비록 먹이 없을 때마저도 사실은 그 본성으로서 수묵의 정신을, 이념을, 생태 그러므로 흐르면서 생성하는 원리를, 성질을 포함하고 수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먹그림과 페인팅, 사진과 영상설치작업을 아우르는, 한국적인 미의식의 원형을 해석하고 각색한, 바람처럼 물처럼 흐르는 성질을 공유하는, 거침도 없고 경계도 없는 사유의 지점들을 포섭하는 작가들이 있다. 서체의 변용과 확장 가능성을 예시하는, 기의 흐름과 운영 가능성을 예시하는, 산수의 변용과 확장 가능성을 예시하는, 먹의 변용과 확장 가능성을 예시하는, 물의 변용과 확장 가능성을 예시하는, 그 외 다른 변용과 확장 가능성을 예시하는 작가들이다. 그렇게 수묵을 재정의하고 한국적 미의식의 원형을 재정초하는 작가들이다. 



서체의 변용과 확장 그러므로 흐르는 기 


이우환   

박서보, 묘법 시리즈 

윤명로 

이강소 

차명희, 자연에서 자기를 관조하는 풍경 

한영섭, 자연의 기억을, 자연의 흔적을 인출하다 

곽훈 

김혜련, 예술과 암호 그러므로 이미지의 원형을 찾아서 

제여란. 회화 자연, 어디든 어디도 아닌  

차기율, 순환의 여행, 방주와 강목 사이 



이우환. 화면에다 점 하나를 찍으면 지금까지 무미건조했던 화면이 갑자기 분주해진다. 점이 다른 점을 부른다. 화면이 한쪽으로 쏠린 듯해 다른 점을 찍어 그 균형을 맞추는 것이다. 때로 그 균형이 지나칠 때 화면은 질식할 듯해서, 또 다른 점을 찍어 그 균형을 깨기도 한다. 화면은 하나의 점이 불러들인 조화와 부조화, 균형과 불균형, 질서와 무질서가 길항하고 부침하는 생성의 장이며 생명의 장에 다름 아닌 것이다. 이처럼 질서와 무질서가 서로 스며들면서 어우러질 때 비로소 화면과 대면하고 있는 주체는 평안을 느끼고 자연을 느끼고 생명을 느끼고 존재를 느낀다. 하나의 점이 화면을 미몽의 상태에서 깨어나게 한 것이며, 익명의 장으로부터 존재의 장으로 거듭나게 한 것이다. 


이우환에게 창작주체로서 뿐만 아니라 이론가로서의 입지를 마련해준 계기가 된 1969년 논문 <사물에서 존재에로>에서의 논지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즉 한갓 돌멩이가 존재로 거듭나는 지점이나, 익명의 화면이 존재의 장으로 전이되는 계기에 작가의 관심이 맞춰져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계기에의 인식에 힘입어 우리는 화면 속에 일종의 보이지 않는 역학이나 자장과 같은, 그 자체 창조의 비밀을 엿보게 해주는, 존재를 생성시키는 원리가 작용 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주지하다시피 이우환은 곽인식과 함께 1960년대 후반에서 70년대 중엽 일본 모노하(物派)의 태생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사료 된다. 모노하는 산업용 재료나 자연 재료를 소재로 하여 이를 재구성하는 과정을 통해 사물의 고유성이 드러나게 한다. 여기서 재구성한다고는 했지만 이는 사물의 존재 방식에 대한 작가의 적극적인 간섭행위로서보다는, 작가의 개입이 아니라면 쉽게 간과했었을 사물의 존재성이 드러나 보이도록 관심을 유도하기 위한 매개적 행위에 머문다. 이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최소한의 행위를 통해 사물과 사물이 어떤 관계 하에 놓이는지 혹은 사물과 주체가 어떤 관계의 자장 속에 들어있는지 하는 사실에 주목한다. 소재 자체의 성질에 천착한 오브제의 미학으로부터 소재가 놓이는 방식 즉 배열과 배치에 주목하는 관계의 미학에로 인식이 전환되는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이로부터 유래한 핵심 개념이 만남과 조응 그리고 관계이다. 캔버스를 예로 들자면 하나의 점과 다른 점이, 하나의 점과 화면의 여백이, 화면과 주체가 모두 이러한 만남과 조응 그리고 관계의 자장 속에 놓인다. 나무와 돌이 만나고, 돌이 철판과 어우러진다. 존재치고 그 자체만으로 존재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 존재 자체가 이미 이런 관계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잉태된 개념이다. 이로써 화면은 세계를 모본으로 한 재현의 장으로서보다는 강도와 밀도 그리고 중력과 같은 역학이나 긴장감(역학이 불러일으키는 일종의 심리적 현상인)이 작용 되는 장, 생성의 장, 생명의 장으로서 주어진다. 관계의 미학이나 비가시적인 공간 역학에 대한 이러한 인식이 1970년대 국내의 단색조 회화 경향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것은 알려진 바와 같다. 


이우환의 석판화는 기본적으로 타블로 작업에 나타난 인식론에 의해 지지된다. 즉 작업의 프로세스를 장악하는 의식적이고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주체를 강조하는 대신, 그 프로세스가 저절로 드러나 보이도록 돕는 매개자적 행위의 소산을 보여준다. 이 일련의 과정을 통해 물과 기름이 만나지는 반발 작용이나, 해먹과 용제가 조응하는 미세 얼룩 효과, 그리고 회화적 질감 그대로를 전사해주는 석판화 고유의 현상이 오롯이 드러나게 된다. 


이우환은 최소한의 개입으로써 최대한의 세계와 관계하고 싶다고 말한다. 자신이 적게 개입할수록 오히려 회화적 질감이나 판화 고유의 현상은 그만큼 더 잘 드러난다고 본 것이다. 이렇게 텅 빈 화면이 관객의 의식적이고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참여행위를 유도한다. 이처럼 관객의 의식 속에서 화면이 완성되게 하는 작가의 태도나 방식은 그대로 의미가 최종적으로 완결되는 지점을 저자가 아닌 독자로 본 저자의 죽음 논의와도 통한다. 이로써 작가와 화면이 만나지는 그 강도 그대로 관객과 화면이 조응하는 또 다른 관계의 자장 속에로 초대한 것이다. 



박서보, 묘법 시리즈. 박서보의 묘법 시리즈는 19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후반까지의 드로잉의 경향성이 현저한 시기와 1980년대부터 현재까지의 한지의 물성을 이용한 후기 묘법 시기로 나뉜다. 


작가의 대표적 경향인 묘법 시리즈는 캔버스의 표면에 단색조의 유화물감을 칠한 후 연필로 반복 드로잉 한 것으로서, 반복 구조와 이에 따른 표면요철효과를 보여주며, 모더니즘 서사에 바탕을 둔 환원주의 논리와 반복과정에서의 관조적인 느낌이 인상적이다. 특히 외관상의 반복 구조는 사실은 그 이면에 일정한 차이를 내포하고 있으며, 아무것도 표상하지 않거나 의미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그 존재감(즉물성 혹은 현존성)을 더 적극적으로 드러내게 된다. 



윤명로. 윤명로의 그동안의 회화적 이력을 보면 대략 1960년대의 문신 시리즈, 1970년대의 균열 시리즈, 1980년대의 얼레짓 시리즈, 1990년대의 익명의 땅 시리즈, 그리고 2000년대의 겸재 예찬 시리즈로 이어지고 있다. 이 가운데 초창기의 문신 시리즈는 당시의 앵포르멜의 경향성과 일맥상통한 것으로서, 존재의 원형질이랄 만한 응축된 에너지가 내부로부터 외부로 분출한 듯한 격정적인 파토스가 생생하게 전달된다. 


이후 대개는 선의 경영에 힘입은 드로잉적인 화면으로서 회화효과를 극대화하는 경향성을 보여주고 있다. 격정과 절제를 넘나들며 선을 매개로 한 회화효과를 다변화하는 일에 진력해온 것인데, 이는 다분히 재현적이거나 이념적인 논리 대신 회화 자체의 내적 논리에 의해 추동된 것으로 보인다. 그의 그림이 이처럼 회화 자체의 속성과 화면의 내재율에 의해 견인된 것인 만큼 화면과 작가와의 거리는 그만큼 밀착되기 마련이다. 이로 인해 분방한 붓질과 행위의 흔적이 생생하게 전달되는 화면에선 화면과 작가와의 사이에서 긴밀하게 교환되고 작용되어졌을 비가시적인 그 무엇이 감지되는데, 작가는 이를 호흡이라고 부른다. 그에게 회화적 행위란 다름 아닌 회화를 회화이게 해주는 원리, 생명, 리듬을 아우르는 이 비가시적인 호흡에 자기를 일치시키는 행위였던 것이다. 그리고 근작에서는 이 호흡의 원형을 아니마에서 찾는 일명 아니마 시리즈를 통해 현저하게 동양적인 사유를 암시하는 특유의 회화를 전개시키고 있다. 



이강소. 이강소의 그림은 허허로운 빈 화면으로 암시되는 물가에서 한가로이 노니는 오리를 그린 듯한 한 폭의 수묵화를 연상시킨다. 간결한 붓놀림만으로 오리와 물을, 그리고 여백으로 드러난 물가의 정취를 포착해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형상들은 애초부터 형상 자체를 염두에 둔 것이라기보다는 서체의 다양한 운용에 연유한 것으로서, 실제로 작가의 그림에서 형상과 서체는 서로 구분되지 않는다. 대상에 대한 최소한의 암시와 흐르는 듯한 서체가 유기적으로 어우러진 화면을 낳고 있는 것이다. 



차명희, 자연에서 자기를 관조하는 풍경. 작가는 종이에 흑색으로 바탕칠을 하고 그 위에 흰색 아크릴 물감을 덧바른다. 밑칠이 적당히 굳은 타이밍을 포착해 윗칠을 덧발라 윗칠과 아랫칠이 서로 스며들고 배어 나오게 한다. 그렇게 스며들고 배어 나오는 현상 자체가 이미 충분히 회화적이다. 얼마나 어떻게 스며들고 배어 나오게 할 것인가. 적당한 타이밍을 포착하는 것이나 두 색층이 어우러져 회화적 분위기를 연출하게끔 유도하는 것 모두가 감각의 문제이다. 그저 무미건조한 바탕화면을 넘어서는, 그 위에 모티브를 받아들이기 위한 예비화면 이상의 남다른 감각이 요구되고 작동된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그 색층이 적당히 굳은 타이밍을 붙잡아 그 위에 목탄으로 선을 그린다. 외관상 우연을 가장한 듯 무분별한 듯, 사실은 작가의 몸에 밴 감각을 따라 목탄을 북북 그으면 선이 그려지고 그 선의 가장자리로 부서진 목탄 가루가 우수수 흩어져 내린다. 그 가루 중 일부는 미처 굳지 않은 색층의 부분으로 흡수되고, 다른 일부는 표면 위에 겉돈다. 그리고 원하는 분위기며 질감이 나올 때까지 재차 그리고 거듭 아크릴 물감으로 지우고 목탄으로 그리는 과정을 반복한다. 


그렇게 작가는 새와 바람과 숲과 같은 자연을 바라본다. 새와 바람과 숲과 같은 자연을 바라보고, 그 자연을 내재화한 자기 내면을 바라본다. 그래서 작가가 붙인 <풍경>이라는 또 다른 제목은 따라서 사실은 내면 풍경이라는 의미로 읽혀져야 한다. 작가는 다름 아닌 내면 풍경을 그리고 있었다. 자연을 관조하면서, 자연에 동화된, 자연의 품성을 닮은, 혹은 자연을 닮고 싶은 자기 자신의 또 다른 자화상을 그리고 있었다. 



한영섭. 자연의 기억을, 자연의 흔적을 인출하다. 추수가 끝나 바싹 마른 들깨 줄기 다발이나 옥수숫대를 발로 지그시 밟으면 조직이 부드럽게 으깨진다(물론 이외에 싸릿대와 같은 다른 자연소재도 있을 것이지만, 대개는). 그렇게 적당히 거칠면서 부드러운 원하는 조직이 만들어지면 그 위에다 한지를 덮는다. 그리고 먹을 묻힌 솔(때로 바랜)로 한지를 문질러 표면 질감을 얻는다. 이때 재료의 종류 여하에 따라서, 조직의 거칠고 부드러운 그리고 균질하고 불규칙한 정도 여하에 따라서, 솔에 묻힌 먹의 농담 여하에 따라서, 솔 자체의 뻣뻣하고 부드러운 강도 여하에 따라서, 그리고 여기에 한지 자체의 다양한 두께며 재질감이 더해지면서 다채로운 표정의 표면 질감을 얻을 수가 있다. 이렇게 얻어진 종잇조각을 큰 화면에다가 붙여나가는데, 인출된 화면이 전면을 보도록 붙여 거친 질감을 그리고 배채법에서처럼 뒤집어 붙여 은근한 질감을 유도한다. 그리고 그렇게 붙여진 전체화면을 봐가며 최종적으로 가필해 조율하는 과정을 거친다. 


기본적으로 탁본과 콜라주를 주요 방법론으로서 취하고 있는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이처럼 단순한 탁본이지만 사실은 이를 통해 다양한 표정의 표면 질감을 얻을 수가 있는 것인데, 때로 여기에 우연성이 개입되면서 표면 질감은 더 변화무상해진다. 전체적인 혹은 대략적인 과정은 계획하고 의도하고 조절할 수 있지만, 정작 그 과정을 통해 얻어지는 결과물은 철저하게 우연적이고 가변적이고 예측할 수가 없다. 그래서 똑같은 탁본의 과정을 거친 것이지만 정작 똑같은 패턴은 하나도 없다. 그래서 매번 일회적이고 매 순간 다른 표정이 인출된다. 그게 뭔가. 그렇게 매번 일회적이고 매 순간 다른 표정으로 인출되는 것이 뭔가. 그렇게 드러나 보이는 것이 뭔가. 자연이다. 자연의 본성이다. 자연은 흐른다. 자연은 얼핏 똑같은 모습으로 반복 순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알고 보면 다만 한순간도 같은 모습으로 머무는 법이 없다. 매 순간 변화하고 생성하고 소멸하고 부패하고 재생하고 이행하는 운동의 연속이 있을 뿐이고, 이 순간에서 저 순간으로 건너가는 연장된 순간들의 흐름이 있을 뿐이다. 반복 속의 차이라고나 할까. 


작가의 작업에서는 자연의 본성이 인출된다고 했다. 단순한 탁본이지만, 희한하게도 자연이 연상된다. 추수가 끝나 텅 빈 들판이 연상되고, 겹겹이 파문을 일으키며 일렁이는 바다가 연상되고, 잔잔한 수면에 마른 갈대가 흔들리는 호수가 연상되고, 턱턱 갈라진 논밭이 연상되고, 그 위로 노을이 드리워진 갈아엎은 토지가 연상된다. 자연을 탁본한 것이므로 이로부터 자연의 본성이 인출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바다를 탁본한 것이 아닌데도 그렇고, 호수를 떠낸 것이 아닌데도 그렇다. 무슨 말인가. 자연은 모조리 한 덩어리로 통한다. 그게 뭐든 자연은 한 몸이고 하나의 유기체이며 생명이다. 그래서 다만 자연인 한 그게 뭐든 하나로 통한다. 이는 결코 수사적 표현이 아니라, 실제로 작가의 화면에서 연상되고 발견되는 것들이다. 



곽훈. 작가의 그림은 기의 다양한 현상을 지시하고 암시하는 한편, 이를 다변화한 것으로 봐도 무방할 듯싶다. 주지하다시피 동양에서는 전통적으로 이 기를 예술의 원동력으로 간주해왔는데, 다름 아닌 기운론이다. 기의 흐름을 체득하고 그렇게 체득된 바를 분출하는 과정을 통해서 기가 자유자재로 흐르게 하는 것, 기가 자기를 실현하도록 길을 내어주는 것을 예술의 계기며, 창작의 이유로 본 것이다. 그리고 기운론은 여기에 머무르지 않고 이기론으로 확대 재생산된다. 즉 기의 무분별한 분출을 통해 세상의 이치에 다다르는 것이며, 우주의 생성 현상을 경유해 우주의 생성 이치를 깨닫는 것이다. 


작가의 그림은 이처럼 우주의 생성원리의 두 축인 이와 기의 양비론에 바탕을 둔 것으로서, 이와 기가 길항하고 부침하고 삼투되는 치열한 과정을 통해 궁극적인 조화를 일궈내는 것이다. 이러한 양비론 자체는 서로 구분되면서 합치되는 음과 양의 생성원리와도 무관하지 않으며, 그 양상은 하나의 그림 속에서 실현되기도 하지만, 대개는 일종의 이중그림 내지는 이중화면으로써 현상한다. 정적인 화면과 동적인 화면, 관조적인 화면과 역동적인 화면, 면적인 화면과 세세한 선묘가 두드러져 보이는 화면을 대비시켜 음과 양이, 이와 기가 서로 대비되고 순환하는 그 긴밀한 상호 관계성(상호 작용성)을 대변케 한 것이다. 나아가 그 자체가 정신과 감성이, 명과 암이 대비되는 존재의 꼴에도 부합해 쉽게 공감을 자아낸다. 


이 일련의 그림들은 때로 전통적인 오방색에 등장하는 원색들이 현란하게 대비되는 것으로 나타나며, 때로는 흙의 색감을 닮은 황토색이나 흑갈색의 고답적인 색채, 그리고 마찬가지로 흙의 질감을 떠올리게 하는 질박한 표면효과가 두드러져 보이기도 한다. 특히 그림에서 감지되는 흙의 질감은 시간의 축을 과거로 되돌려 놓은 듯, 무슨 발굴된 부장품이나 유적을 보는 듯, 어떤 아득한 원형적 존재나 그 흔적과 마주한 것 같은 상념에 빠져들게 한다. 원색대비가 암시하는 무속의 세계와 흙의 질감으로 나타난 자연 친화적인 세계관이 부닥치는가 하면, 명상과 선으로 나타난 동양의 정신성에 바탕을 둔 정적인 계기와 즉흥적이고 우연적이며 동적인 화면이 하나로 스미면서 존재의 내재적 울림을 전해준다. 


작가는 자신의 그림이 모두 땅을 그린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땅은 그 자체 물리적 대상이나 실체로서보다는 땅의 정기처럼 보이지 않는 기운을 의미하며, 존재가 유래한 뿌리 의식이나 원형 의식을 암시한다. 그리고 이는 평면작업에서 기로, 그리고 설치작업에서 공명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기론과 선 사상으로 나타난 상위개념이 이 개념들 즉 기와 공명을 감싼다. 기의 체득을 통해 세상의 이치를 깨닫는가 하면, 그 과정에서 일체의 인위를 거부하고 자연의, 존재의 본성을 추구한다. 관념적이기보다는 몸적인 그의 그림은 말하자면 육화된 관념의 한 전형을 예시해주고 있는 것이다. 



김혜련, 예술과 암호 그러므로 이미지의 원형을 찾아서. 한국성, 한국적 이미지, 한국적 미의식의 원형은 무엇인가. 적어도 표면에서 일어나는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단순히 소재에서 찾아질 수는 없는 일이다. 아마도 의식보다 깊은 무의식으로 잠자고 있는 잠재의식 그러므로 원형에서 그 단서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칼 융은 이처럼 의식보다 깊은 층위에서 일어나는 일을 집단무의식이라고 불렀고, 그러므로 꿈의 원료가 되고 신화의 재료가 되는 반복 상징을 원형이라고 했다. 그리고 주지하다시피 꿈(상상력을 매개로 한 억압된 욕망의 우회적인 실현)과 신화(서사의 기술) 그리고 상징(해석)은 예술과 관련이 깊다. 그러므로 어쩌면 예술 곧 미의식의 원형은 동시에 어느 정도 존재의 원형이기도 할 것이다. 


김혜련은 그렇게 어쩌면 잃어버린 상징을 소환하고, 잊힌 원형을 호출한다. 이미 수년 전부터 시작된 일이고, 아마도 앞으로도 한동안 지속될 일이고, 그러므로 어쩌면 작가의 작가적 아이덴티티를 바꿔 놓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 대략을 보면 <예술과 암호_빗살무늬>(2018), <예술과 암호_황남대총>(2018), <예술과 암호_고구려의 기와 문양>(2019), <예술과 암호_고조선>(2020), 그리고 근작에서의 <예술과 암호_고인돌의 그림들>(2021)에 이르기까지 작가는 한국의 고대 유물을, 선사시대와 고대 역사를 두루 섭렵하고 아우른다. 


그렇다면 작가는 이처럼 고대인이 발신해온 암호를 어떻게 해석하고 각색하는가. 고인돌도 그렇거니와 암각화에서 암호는 돌 위에 아로새겨져 있다. 무채색이다. 그래서 작가는 골판지에 먹으로 그렸다. 그렇다면 돌의 질감이며 아로새겨진 새김질은 또한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 그래서 골판지에 칼로 긋고, 부분적으로 종이를 뜯어내고, 마치 칼질을 하듯 붓질로 새김질을 대신했다. 그렇게 화면은 암각화의 최소한의 원형을 유지한 채, 내지르는 붓질과 튀기거나 마구 흘러내리면서 맺힌 먹물 자국으로 낭자한 것이 흡사 기운생동의 육화된 형식을 보는 것 같다. 작가는 고고학자가 아니므로 돌에 새겨진 암호를 의미보다는 감각으로 해독하는 것이다. 육화된 형식 그러므로 몸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보통 상징과 암호를 취할 때는 자칫 기호와 패턴으로 빠지거나 도상학적으로 흐르기 쉬운데, 작가는 그 염려를 뒤로한 채 암각화에 암호로 아로새겨진 고대인의 혼을 되불러오는 일에 성공하고 있다. 그러므로 어쩌면 자기가 유래했을 원형적 인간, 까마득하게 잊힌 자신과 대면하는 일에 성공하고 있다. 그림을 매개로 잠재적인 자기를 불러내는 일에, 자신의 육화된 분신과 대면하는 일에 성공하고 있다. 



제여란. 회화 자연, 어디든 어디도 아닌. 작가는 재현적인 회화 혹은 회화의 관성이 싫어서 스퀴지로 그린다고 했다. 그 와중에서도 그려진 이미지가 뭔가를 닮았다(재현했다) 싶으면 고쳐 그리거나 아예 그림을 망치고 만다. 애써 재현을 피해 가는 그림, 재현이 아닌 그림을 그리는 것인데, 그게 가능할까. 아무것도 재현하지 않은 그림이 가능하다면 그건 어떻게 가능한가. 적어도 알려진 대로라면 비 혹은 탈재현적인 회화는 추상이다. 그런데 작가는 정작 완전한 추상은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작가의 그림에서 보이는 추상은 뭔가. 작가의 그림은 추상이 아니란 말인가. 추상이 아니라면 뭔가. 재현도 아니면서 추상도 아닌, 작가의 그림은, 작가의 그림이 위치할 수 있는 지정학적 장소는 어디인가. 완전한 추상은 없지만, 추상은 있다. 다만 추상처럼 보이는 추상이다. 이처럼 추상에 대한 작가의 의미 부여가 유보적인 탓에 재현에 대한 의미도 유보적이다. 이런 유보적인 태도에 작가의 회화의 특정성이 있고, 그리기에 관한 그림의 특정성이 있다. 여기서 유보적인 태도는 모더니즘 패러다임과의 타협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작가가 지난한 그리기의 과정을 통해서, 그리기에 관한 탐색 과정을 통해서 찾아낸 회화의 장소, 회화의 지정학적 위치(그러므로 어쩌면 회화의 본성?)로 봐야 한다. 작가의 회화가 위치하는 지정학적 장소는 이처럼 겉보기와는 다르게 회화의 순리를 따른 혹은 회화의 순리를 재해석하고 자기화한 부분이 있다. 작가의 그림이 보기에 자연스럽고 편안하고 억지스러운 부분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여기서 작가의 그림은 마냥 자연스럽고 편안하고 억지스러운 부분이 없어 보인다기보다는, 사실은 부자연스럽고 불편하고 억지스러운 부분을 매개로 자연스럽고 편안하고 억지스러운 부분이 없어 보이는 경지며 차원에 도달한, 그래서 그림 이면에 잠자고 있는 부자연스럽고 불편하고 억지스러운 부분이 발하는 내적 생명력과 에너지가 여실한(바이탈리즘?), 그런 그림으로 보인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바로크 회화의 자기 확장성을 공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고, 그러므로 후기 바로크 회화의 추상화 버전으로도 보인다. 그리고 작가는 의외로(?) 가장 재현적인 자연에 대해서 언급한다. 위험, 춤, 연대감, 친화력, 온정 그리고 끝내는 둥글어지는 분명한 실체로서의 자연, 끊임없이 무언가가 아니면서 그 자체 멋진 장관인 그림에 대해서 말한다. 그러면서 회화가 자연일까, 하고 묻는다. 자연과 주체와의 관계가 그림 속에 자연을 생성시키고 작동시킨다. 그렇게 그림은 삽과 쟁기로 파헤쳐놓은 객토 된 농토를 보는 것도 같고, 걷잡을 수 없는 태풍의 눈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도 같고, 태초의 카오스를 보는 것도 같고, 막 우주가 생성되고 소멸되는 극적인 현장에 동참하는 것도 같고, 아니면 아직 외부에 전혀 알려진 적이 없는 신비한 동굴 속을 탐험하는 것도 같다. 사실은 이 중 그 무엇도 아니면서, 그 자체 멋진 장관(자연)인 그림을 보는 것도 같다. 그것을 작가는 회화 자연이라고 부른다. 그림 속에만 있는 장관, 그림으로만 존재하는 장관, 그림으로 인해 비로소 가능해지는 장관, 그림으로 인해 비로소 열리는 장관이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그림으로만 존재하는 자연, 그리고 어쩜 품성으로서의 자연(끝내 둥글어지는 분명한 실체로서의 자연), 회화 자연의 장관을 열어놓는다. 



차기율. 순환의 여행, 방주와 강목 사이. 방주는 대홍수 이후 살아남은 노아의 방주를 의미하고 서양문명을 상징한다. 그리고 강목은 나무와 풀과 같은 한방에서 약초나 약재로 쓰이는 각종 식물의 대강(大綱)과 세목(細目)을 밝힌 서책인 본초강목(本草綱目)에서 따온 것으로서 동양사상을 상징한다. 각각 서양으로 상징되는 문명과 동양으로 상징되는 자연을 화해시키고 종합(요새 말로 치자면 융합)을 실천한다는 의미를 담았다. 


작가는 주로 포도나무 줄기를 소재로 취하는데, 다른 나무들에 비해 뒤틀림이 강해 마치 근육과도 같은 유기체의 본성을 떠올려주기 때문이다. 이렇게 포도나무 줄기를 취해와 끓는 물에 삶아 그 껍질을 일일이 벗겨낸 연후에, 그 토막들을 연이어 조립하는 방법으로써 거대한 구조물을 만든다. 전체적으로 유선형을 그리면서 세로나 가로로 길게 설치된 그 구조물은 마구 얽히고설킨 덩굴나무를 연상시키고, 비정형의 유기체적 다발이나 덩어리를 상기시킨다. 그리고 그렇게 구조물이 만들어지고 나면, 그 줄기의 표면에 주로 본초강목에서 인용한 자연과 관련한 한문자들이 붓글씨로 기입된다. 여기서 한문자들은 나무줄기로 표상된 유기체적 신체에 직접 작용하는 치유력과 주술을 수행하는 것으로 보인다. 때로 구조물의 표면을 마치 불에 탄 숯처럼 검게 칠하기도 하는데, 마찬가지로 숯의 치유력과 재생능력을 의미할 것이다. 이처럼 검게 칠해진 구조물에서도 여전히 그 밑에 한문자가 잠재적인 형태로 기입된 것으로 보아야 하고, 따라서 자연으로부터 유래한 능력들, 이를테면 자연치유력이며 주술작용 그리고 재생능력이 함축된 경우로 보아야 한다. 이렇게 구조물은 방주와 강목을 한 몸에 아우르고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 거대한 구조물이 마구 얽혀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하나의 고리로 연결돼 있다는 점이다. 마치 카오스와 코스모스가 합체된 것 같은 이 구조물에서 역동성과 정치함이, 우연한 계획으로 나타난 이율배반적인 역학이 작동되고 있음을 알겠다. 뫼비우스의 띠란 알다시피 하나의 거대한 순환하는 고리이다. 뒤틀리고 비틀린 고리의 몸체를 따라 생과 사가 흐르고 삶과 죽음이 만나지기를 무한 반복하는, 그리고 그렇게 무한 순환하는 존재의 표상이다. 그렇게 무한 순환하는 뫼비우스의 띠 중간중간에 작가는 납작한 조약돌을 장착해놓고 있다. 조약돌의 가운데를 뚫어 그 구멍 사이로 나무줄기가 관통하게 한 것인데, 반복의 마디 같고, 순환의 마디 같고, 윤회의 마디 같다. 무한 반복 속에 마디가 있고, 무한 순환 속에 경계가 있고, 무한 윤회 속에 분기점의 계기가 있다. 그렇게 억겁의 시간동안 축적된 존재가 호출되고, 억겁의 시간을 넘어 존재가 복원된다. 존재가 아닌 존재들이라고 해야 할까. 하나(一)이면서 다(多)인. 그렇게 마디가 있으면서 무한 순환하는 고리로부터 불현듯 질 들뢰즈의 주름이며 고원이며 뿌리(리좀)가 오롯이 복원되고 있었다. 특히 뿌리와 관련해선 서두에서도 말한 것이지만, 작가의 모든 작업엔 뿌리가 있다. 뿌리가 없는 경우에도 사실상 뿌리가 암시되고 있다. 이처럼 직접적이고 암시적인 뿌리를 매개로 생과 사가 연장될 수 있었고, 아(我)로부터 타(他)에로의 탈주를 감행할 수 있었고, 결정태로부터 가능태로의 이행이 가능할 수가 있었다. 그렇게 무한순환고리는 생과 사를, 아와 타를, 결정과 비결정의 계기를 한 아름에 싸안고 있었다. 


그 자체로 하나의 우주를 형상화해놓은 것이라고 해야 할까. 작가에게 방주란 말하자면 우주였고 만다라(우주를 도해한)였다. 그리고 그 우주가 세상을 바라본다. 무슨 말인가. 작가는 매달린 구조물 밑에 이런저런 장치들을 보조하는데, 바닥에다 파문을 그린다. 여기서 파문은 기며 에너지를 표상한다. 그렇게 각각 나와 너로부터 발원한 에너지는 파문을 그리며 퍼져나가 너에게 가닿고 나에게 미친다. 뿌리도 그렇지만, 불교의 연기설을 표상한 경우로 볼 수 있겠다. 그리고 작가는 이와는 또 다른 버전에서 전시장 바닥에다 검은 물이 가득 담긴 바트(수조)를 설치한다. 그리고 바트 속에다 돌들(존재의 섬들)을 설치하고, 종교적인 도상이며 이데올로기의 표상들(이념과 역사 아니면 이념의 역사)을 설치하고, 생활 오브제들(생활사)을 설치한다. 그대로 삶이며 세상사를 재현해놓은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이렇게 재현된 세상을 허공에 매달린 우주가 바라본다. 흑경처럼 반영하는 성질로 인해 세상은 세상대로 우주(바트에 담긴 우주의 반영상이며 이미지)를 바라본다. 그렇게 우주는 세상을 그리고 세상은 우주를 반영한다. 특히 바트에 담긴 돌들은 존재를 표상하고 존재의 섬들을 표상한다. 존재의 섬들 각각은 고립돼 있지만, 보이지 않는 파문으로 서로 연결된다. 가시적인 파문이 비가시적인 파문의 형태로 재차 변주되고 있는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그렇게 나는 너에게 가닿고 너는 나에게 미친다. 가닿는다는 것 그리고 미친다는 것은 서로 반영하고 반영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은 무한 반복되고 무한 순환된다. 재차, 불교의 인드라망(서로 반영하고 반영되는 밑도 끝도 없이 연이어진 구슬 그물)이 실현되고 있는 경우로 봐도 되겠다. 



산수의 변용과 확장  


조환, 철판 산수 

석철주, 신몽유도원도 

한상진, 풍경의 상처 

유승호, 문자 산수 

권부문, 산수와 낙산, 와유와 무한 

배종헌, 얼룩 회화 혹은 흔적 회화 

김도희, 손톱 산수 그러므로 몸 산수  



조환, 철판 산수. 그동안 조환은 때로는 깊이 있는 수묵으로 더러는 사실적이고 섬세한 묘사로 보통 사람들의 보통의 삶의 모습을 그려냈었다. 관찰자적 시선과 정서를 담아 도심과 변두리의 삶의 정경을 그려냈었다. 그래서 그 이면에는 동시대적인 삶의 풍속도랄 만한 전형적인 삶의 풍경이 오롯이 담겨진 것이었다. 그리고 불현듯 유학길에 올라 조소(조각)를 전공하고 돌아왔다. 한국화와 조소, 먹그림과 물성, 얼핏 이 둘은 쉽게 만나질 것 같지 않은데, 작가는 이 쉽지 않은 일을 해내고 있다. 먹그림은 깊이가 있고 사실적일지언정 재현된 이미지와 일루전과 암시의 경계를 넘지 못한다. 아마도 그림을 그리는 내내 그 경계를 넘고 싶었을 것이고, 굳이 조각이 아니더라도 물성이 그리웠을 것이다. 차갑거나 뜨거운, 거칠거나 부드러운, 물질만이 가질 수 있는 실체감을 자신의 것으로 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나와진 것이 서체에 바탕을 둔, 준과 필과 획에 기반을 둔 소위 철판 회화다. 아마도 먼저 먹그림을 그린 연후에, 먹그림을 철판에다 대고 먹그림 그대로 따냈을 것이다. 조각으로 치면 철판에 구멍을 뚫는 투각과 원하는 형태 그대로 오려내는 커트, 그리고 그렇게 오려낸 조각들을 덧붙여 하나의 전체 그림으로 재구성해내는 과정에서의 용접이 동원되어졌을 이 그림들은 먹그림과는 사뭇 다른 표정을 자아낸다. 농담으로나 질감에 있어서 먹그림이 함축하고 있는 유기적이고 비정형의 화면을 마치 종이를 오려 붙인 듯 평면의 실루엣으로 환원해놓은 것이다. 그러면서도 먹그림과 동떨어진 생경한 느낌을 주지는 않는다. 투각과 커트가 주로 평면적인 조각을 위한 기법이라는 점, 그래서 여전히 평면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도 먹그림 그대로 따낸 탓에 먹그림 고유의 필력과 비정형의 가장자리 선이 여실한 점이 그렇다. 녹슨 철판의 물성을 자기 것으로 하면서도, 그래서 조각의 핵심적인 한 성질을 가로채면서도, 정작 그 생리는 조각보다는 먹그림에 기울어져 있는 것이다. 


이렇게 작가는 철판 조각으로 점을 그리고 필을 그린다. 붓끝을 세워 점점이 찍어나간 점들이 모여 추상적인 관념을 그려내는가 하면, 먹그림 그대로 필과 필이 어우러져서 첩첩이 중첩된 산수를 그려내고, 대나무를 그려낸다. 아마도 머잖아 다른 사군자에로까지 확장될 것이고, 차후로도 먹그림 고유의 필력이 두드러져 보이는 한에서 소재가 결정될 것이다. 여하튼 이렇게 철판 조각으로 그림을 그리는 탓에, 그 속에는 먹그림과 조각의 생리가 하나의 결로 스며든다. 이를테면 작가는 철판 조각으로 재구성된 대나무(혹은 산수) 그림을 벽 위에다 거는데, 이때 대나무 그림과 벽 사이에 그림자가 생긴다. 조각으로 치자면 오브제(그림)가 실체를 얻고, 먹그림으로 치자면 오브제보다는 그림자가 오히려 더 먹그림의 생리에 가깝다. 그림자에는 심지어 먹그림의 농담과 선염이 오롯이 탑재돼 있기조차 하다. 아마도 그림자 자체를 연출하는, 혹은 적어도 그림자를 조형의 한 요소로서 적극 끌어들이는 경우를 예상해볼 수도 있겠다. 


그리고 또 다른 중요한 사실로는 일종의 프레임이 없는 그림이 연출되고 있는 점인데, 이 역시 조각을 매개로 해서 가능해진 것이다. 그림을 한정하는 프레임이 따로 없다면, 벽면 자체가 프레임이 되고, 공간 전체가 프레임의 역할을 도맡게 된다. 마치 벽화처럼 벽 위에 대나무 그림이 걸리고, 벽면은 저절로 여백이 된다. 그리고 여백은 벽면을 넘어 공간으로까지 확장된다. 그림이 그려진(혹은 걸린) 벽면이라는 가상공간을 넘어 내가 속해져 있는 현실 공간을 포함하면서 또 다른 실제 혹은 실체감이 생긴다. 오브제와 내가 같은 공간에 속해져 있음으로 해서 비가시적인 공간 역학이 작동되고 분유되는, 조각 고유의 현상이 생긴다. 하지만 작가의 작업이 본격적인 공간설치작업으로까지 확장되려면 여전히 프레임처럼 보이는 벽면마저 버려야 한다. 먹그림과 조각 사이에 위치해있는 작가의 작업이 열어 놓게 될 향후 전망이 궁금해진다. 



석철주, 신몽유도원도. 안평대군이 꿈속에서 이상향을 봤고, 그 이야기를 전해 듣고 안견이 몽유도원도를 그렸다. 몽유도원도는 꿈을 그린 것인 만큼 그리고 이상향을 그린 것인 만큼 현실 속 풍경은 아니다. 그 풍경은 관념 산수와도 통하는데, 현실 속 풍경이 아니라 당시 사대부 문인 화가들 저마다 생각하는 유교적 세계관이며 자연관 그리고 우주관을 산수에 투사해 그린 것이다. 꿈을 그린 것이라는 점이 다르지만, 이상향을 그린 것이라는 점이 하나로 통한다. 그리고 석철주는 이 몽유도원도를 다시 그린다. 재료도 기법도 판이하다. 다른 점은 또 있는데, 관념 산수(관념을 현실처럼 그린)를 거꾸로 적용해 그렸다. 북한산과 같은 현실 속 풍경을 마치 꿈꾸듯 그렸고, 꿈속에서 본 풍경처럼 그린 것이다. 현실을 꿈처럼 그렸다? 현실에서 꿈을 본다? 좀 비약을 하자면, 비록 비루한 현실이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현실 속에서의 꿈꾸기를 멈출 수가 없다? 꿈이 아니라면 현실은 어떻게 건너갈 수가 있는가. 혹 현실과 꿈이 그 경계를 허무는 장자몽은 꿈(아니면 사실상 같은 말이지만 이상)으로 현실을 건너려는 도교적 은일 사상이 반영된 것은 아닐까.  


분명한 것은 작가가 현실을 꿈처럼 그린다는 것이고, 따라서 꿈같은 표면 아래 현실이며 현실 인식을 숨겨놓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관건은 그 수면 아래 어떤 현실이며 현실 인식이 잠자고 있는가를 밝히는 일일 것이다. 우선 그림의 표면을 보고 수면(잠의 겉면?)을 보자. 작가의 그림은 한눈에도 예사롭지 않다. 관념이건 실경이건, 산수며 풍경에 대한 선입견과는 거리가 멀다. 희뿌옇고 애매하고 몽몽하다. 그래서 마치 꿈을 꾸는 것 같다. 이 그림을 안평대군에게 보여줬다면 그 반응이 어땠을까 싶다. 희뿌옇고 애매하고 몽몽하다? 이건 그대로 무슨 막이 아닌가. 앞서 사물 대상과의 심적 거리며 미적 거리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이 막을 이런 심적 거리며 미적 거리를 견지하게 해주는 미학적 장치로 볼 수는 없을까. 전통적으로 조상들은 이런 거리두기를 몸소 실천했고, 창호 문과 발과 베일이 그 적정 거리를 가능하게 해주는 미학적 장치들이었다. 


이 장치들은 무슨 의미인가. 안과 밖의 경계 허물기며 통섭과 융합의 실천적 개념을 선취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한차례 걸러서 보고 한 템포 늦춰서 보면 세계가 다르게 보인다는, 세계를 자기식으로 관상하라는, 그리고 그렇게 세계를 보면서 만들라는 주문이 아닌가. 꿈처럼 몽몽한 작가의 그림은 그 이면에 바로 이 주문을 숨겨놓고 있었다. 그리고 아마도 의식의 이면에 잠자는 무의식의 지층을 캐낸다는, 의식의 흐름을 발굴한다는, 나아가 꿈으로 현실을 변혁시킨다는(미학화한다는?) 실천적 의미도 있을 것이다. 사실상 작가의 그림은 현실을 그리면서 이상향을 그린 점이 없지 않고, 따라서 현실로부터의 도피 내지는 보다 적극적인 경우로는 현실에 대한 변혁 의지를 이상향에 담아낸 전통적인 관념 산수와도 통한다. 


그리고 에로티시즘이 있다. 무슨 말이냐면 작가는 신몽유도원도 시리즈를 각각 청색과 핑크색 두 버전으로 그려놓고 있다. 물론 일부 다른 색상의 경우가 없지 않지만, 대개는. 여기서 청색 버전은 일단 대기와 공기의 미묘한 색감이며 질감을 옮겨 그린 것으로 보아 크게 무리가 없을 것이다. 물론 청색에서 이상이며 이상향의 메타포를 보아낼 수도 있는 일이다. 여하튼, 문제는 핑크색 버전 쪽이다. 핑크색 산수 그림은 보면 볼수록 에로틱한 느낌이 든다. 여기에다 펄 성분을 조금 함유한 경우라면 그 에로틱한 느낌은 볼 때마다 달라진다. 아마도 빛깔과 색깔이 미묘하게 상호작용하는 탓이리라. 루시앙 프로이트는 그림이 곧 살이며 몸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는데, 작가는 혹 이 핑크색 버전 그림에서 산수를 그리고 꿈을 그리면서, 동시에 그 산수며 꿈(그리고 그림)의 육질을 같이 그려놓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앞서 이야기한 성정체성과도 무관하지 않은 대목일 것이다. 


이처럼 작가는 일련의 신몽유도원도에서 현실과 꿈, 현실과 비현실, 의식과 무의식,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 상호 간의 희뿌옇고 애매하고 몽몽한 경계를, 그리고 더불어서 그 불투명한 경계의 육질을 그려놓고 있었다. 그럼으로써 전통적인 산수화를 차용하고 전유하는 주목할 만한 방법론의 지점을 예시해준다. 


(下) : http://www.daljin.com/column/200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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