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영/ 숲에서 만난 아이, 그러므로 어쩌면 잊힌 자기
고충환 | 미술평론가
여성주의 예술가 메리 켈리는 6년 동안 직접 육아를 하면서 마주한 경험과 감정을 기록한, 석판화와 오브제, 저부조와 콜라주, 각종 도판과 수식과 드로잉을 포함하는, 아카이브 형태의 방대한 작업 <산후기록>(1973-1979)을 남겼다. 작업에서 작가는 섭식과 배변, 수유와 옹알이, 소위 젖떼기로 표현되는, 어머니로부터 아이가 분리되는 과정과 초기 형태의 사회화 과정을 낱낱이, 관찰자적 시점으로 기록했다. 그러면서, 어머니가 아이를 통해 판단되는 한에서 아이는 어머니의 징후, 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아이는 어머니의 징후다. 아이를 보면 어머니를 알 수 있다. 어머니를 알고 싶으면 아이를 보면 된다. 어머니와 아이의 동일시를 의미할 수도 있겠고, 아이에 대한 어머니의 무조건적인 사랑 그러므로 모성애를 의미할 수도 있겠다. 여성주의 시각에서는 모성애가 타고난 것인지, 아니면 사회가 여성에게 부과한 성역할(론)인지를 묻는 작업이라고도 했다.
이처럼 육아는 아이를 키우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당면한 일이고, 공감할 만한 일이다. 굳이 여성주의가 아니어도 그렇다. 그렇게 작가 한지영 역시 또 다른 형태의 육아일지를 쓴다(그린다). 육아일지? 외관상 작가의 그림은 육아일지가 무색하게 그저 숲을 그린 그림이다. 숲과 함께, 숲속에 아이가 등장하고, 몇몇 어른이 등장하는 그림이다. 아마도 아이의 아빠와 할머니일 것이다. 그렇게 숲속에 사람들이 어우러진 그림이고, 때로 아이 저 홀로 놀고, 거닐고, 골똘하고, 자기에 빠진 그림이다. 일종의 숲속 학교를 그린 그림이라고 해도 좋다. 그렇다면 여기서 숲속은, 숲속 학교에서의 육아는 작가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사람들이 사는 세속과는 어떻게 다른지 볼 일이다.
작가는 산골에서 태어나, 산골에서 학교를 다녔다(불가리아의 소도시 벨리코떠르노보). 지금도 산골에서 아이를 키우면서, 산골에 살고 있다. 영 깊은 산속은 아닐 것이다. 지척에 숲이 있어서 자연을 호흡할 수 있는, 도시의 변방쯤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예나 지금이나, 아이 이전이나 이후에나 변함없이 작가에게 자연은, 숲은, 마치 어머니의 품속과도 같은, 편안하고 설레는, 친근한 대상으로 남아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작가의 인격을 형성시켜준, 그리고 여기에 어쩌면 아이의 인격도 형성시켜줄 대상으로 남아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칼 융은 개인의 기억을 넘어서는 아득한 기억을 집단무의식이라고 했고, 그 집단무의식이 반복해서 나타나는 상징 그러므로 반복 상징을 원형이라고 불렀다. 그런, 아득한 기억을, 기억의 기억을, 원형적 기억을 의미하기도 할 것이다.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현대인은 온통 상실의 시대를 살고 있다. 고향(감)을 상실하고, 유년을 상실하고, 자연을 상실하고, 자기를 상실하고, 존재를 상실한 시대를 살고 있다. 지극한 상실감이야말로 그가 다름 아닌 현대인임을 증명해주는 징후이며 증상으로 받아들여지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렇듯 상실의 시대에, 치유와도 같은, 위로와도 같은, 축복과도 같은, 그런, 아득한, 먼, 아련한, 그리움의 대상을 의미하기도 할 것이다. 존재가 유래한, 그리고 여기에 어쩌면 다시 존재가 되돌아갈 우주적 자궁을, 원형적 자궁을 의미하기도 할 것이다. 영성주의에서처럼, 영적인, 신성한 대상을 의미하기도 할 것이다(작가는 그리스정교회의 이콘화를 전공했다).
그렇게 작가에게 산책은 하루하루가 일상이었다. 부단히도 아이와 산책을 했었다. 숲속에 들어가면, 숲은 흐르는 시간을, 평안을, 위로를 내어주었다. 숲에 있으면, 작가도 아이도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렇게 숲속에서 아이는 찔레꽃을, 오동나무를, 상수리나무를, 모과나무를, 사과나무를, 벚나무를, 버찌를 알아갈 것이었다. 숲속에서 꼼지락거리는 벌레가 움직이는 소리를 알아차리고, 낙엽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들을 것이었다. 한밤중에 달을, 별을 올려다보며 꿈을 꿀 것이었다. 여름의 맛이 가을의 그리고 겨울의 맛과 어떻게 다른지 알아갈 것이었다. 어떤 나무는 왜 기쁘고, 또한 다른 나무는 슬퍼 보이는지 그 차이를 알아갈 것이었다. 빛이 쨍하면 그림자가 짙어지고, 빛이 흐릿하면 그림자가 순해지는 이유를 알아갈 것이었다. 그렇게 어떻게 빛과 그림자가 비례(혹은 반비례)하는지, 왜 빛이 있는 곳에 그림자도 있는지 알아갈 것이었다.
멀리서 보면 숲은 유기적인 덩어리로 보이지만, 정작 숲속에 들어가서 보면 숲을 이루는 개별적인 존재들이 보인다. 그렇게 숲이, 나무가, 바람이, 대기가, 소리가, 그처럼 개별적인 것들이 어떻게 서로 어우러져 유기적인 전체를 일구는지 알아갈 것이었다. 수면에 비친 나무 그림자를 보고, 어떻게 물거울이 하늘을 비추고, 구름을 비추고, 자기를 비추고, 존재를 비추고, 심연을 비추는지 알아갈 것이었다(보르헤스는 거울 속에 타자들이 산다고 했다). 그리고 여기에 작가는 숨 속으로, 라고 했다. 숨 속으로? 숲을 오기한 것인가. 오기가 아니었다. 숨을 쉬는 숲이었다. 그렇게 아이는 숲이 쉬는 숨과 함께 호흡할 것이었다. 숲의 깊이 그러므로 숲의 허파를 호흡하면서, 겨울이 오는 소리를 들으면서, 가을의 끝자락에도 서 볼 것이었다. 그리고 아이가 돌아본다. 그림 밖에 있는 작가도 돌아본다. 그렇게 작가는 아이의 돌아보는 눈을 빌려 잊힌 자기(자기_타자)를 보고 있었고, 상실된 자기의 유년을 보고 있었다.
작가는 그렇게 숲속 학교에서의 육아를 통해 아이를 보고, 아이를 통해 자기를 본다. 이 일련의 그림들을 캔버스와 켄트지 위에 오일 파스텔로 그렸는데, 다른 재질의 그림들과는 사뭇 다른 질감을, 색감을, 느낌을 자아낸다. 알다시피 캔버스와 켄트지는 표면에 미세 요철을 가지고 있고, 여기에 부드러운 질감의 오일 파스텔이 지나가면서 남긴 자국과 미처 메워지지 않은 채 남겨진 요철이 그려진 부분과 어우러져 특유의 물성을 자아낸다.
광점 그러므로 빛으로 색채를 대신한, 자잘한 색면들로 세부를 대신한, 크고 작은 터치들이 중첩되면서 화면에 깊이를 만들고 형상을 밀어 올리는 것이 인상파의 풍경화를 닮았다(인상파는 빛에 반응한 그림으로 외광파로도 불렀다). 색깔과 색깔, 자국과 자국이 경계를 허물어 뭉개지면서, 서로 섞이면서, 섬세하고 풍부한 중간톤을 만드는 것이 바르비종 화파의 풍경화를 떠올리게도 된다. 여기에 파스텔 특유의 질감으로 원색마저 부드럽고 우호적인 느낌을 준다. 부드럽고 우호적인 질감의 그림이, 사실적이고 서사적인 그림이 자연의 품성을 닮았다고 해야 할까. 작가는 그림과 함께 따로 그림책을 그리는데, 아마도 이런 사실적이고 서사적인 그림의 경향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예술에 대한 정의가 분분하지만 그중 결정적인 경우로 치자면, 예술은 서사 그러므로 이야기의 기술일 수 있고, 이런 예술의 정의와도 통하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이야기는 비록 육아를 매개로 한 자신의 사적 경험을 이야기한 것이지만, 사실은 누구나 공감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보편성을 얻는다. 비록 숲 그러므로 자연을 매개로 한 자신의 사사로운 감정을 그린 것이지만, 어쩌면 잊힌 자연, 상실한 자연을 새삼 일깨워준다는 점에서 감동을 준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상실한 유년 앞에 서게 만들고, 잊힌 자기(자기_타자) 앞에 서게 만든다. 바람이 나뭇잎을 흔드는, 햇빛이 꽃잎을 희롱하는, 캄캄한 밤 위로 별이 총총한 숲속에 서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