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패트롤, 대전 충청 현대미술
고충환 | 미술평론가
지역 현대미술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그 전에, 지역 현대미술이라는 용어 설정이 가능한가. 아니면 타당한가. 밑그림 그러므로 인식론적 지도가 그려지고 나서야 비로소 정의 문제로 건너갈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선 밑그림에 해당하는 인식론적 지도를 그리는 일에 착수하기로 했다. 크게는 연대기에 바탕을 둔 미술사적인 서술 방식과 양식적 특징을 통해 본 양식사적 서술 방식이 있을 것이지만, 그보다는 장소와 사건 그러므로 미술관과 전시를 좌표로 삼기로 했다. 좌표 그러므로 아트신을 통해 지역 현대미술의 특수성의 윤곽이 그려지기를 바라면서...
그룹 야투와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 현대미술을 견인하는 계기가 여럿 있지만, 그중 결정적인 계기로 치자면 담론을 들 수 있다. 특히 언어학과 기호학을 매개로 한 의미론적(그리고 인식론적) 대상으로 미술을 재정의한 개념미술 이후 현대미술에서 담론은 결정적이다. 더러 담론의 해체와 담론 이후(예를 들면, 테리 이글턴의 이론 이후)를 얘기하는 논객이 있지만, 이마저도 알고 보면 새로운 담론의 형식을 열면서 기왕의 담론을 해체하고 지양한 것이란 점에서 크게 보면 담론의 틀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텍스트로 치자면 편집적인 글쓰기와 해체적인 글쓰기가, 이미지로 치자면 브리콜라주와 브리콜레르가, 실천 논리로 치자면 정신분열증적 분석(질 들뢰즈)이, 그리고 타자와 다성성(미하일 바흐친)의 인정이 모두 담론의 틀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최근 수년 내에 현대미술과 관련해서 가장 핫한 담론으로 치자면 인류세 담론과 생태학을 들 수 있다. 환경미술과 기후미술을 아우르면서 넘어서는, 인간중심주의(휴머니즘으로 대변되는)를 넘어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에 대한 재설정을 요구해오는, 그렇게 자연 친화적인 미술의 실천 가능성을 모색한 것이다.
그 모색 한가운데에 그룹 야투가 있고,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가 있다. 세계 최초로 자연미술을 정의하고 정립한 것이란 점에서(물론 그전에 이미 부정적인 의미로 자연미술이란 용어가 사용된 적은 있지만. 이를테면 1971년 독일의 평론가 발터 아오에가 자연미술을 쓰레기라고 표현한 것이 그렇다. 서양 미학에서는 전통적으로 인공적인 것만이 예술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에 반해 자연은 숭고의 대상이라고 봤는데, 이런 예술과 자연과의 이분법적 구분에 대한 학문적 근거는 헤겔로 소급된다), 자생적인 시도와 성과를 예시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관련해서 현재 전 세계적인 네트워크를 확립했다는 점에서 그룹 야투의 존재는 단연 주목된다. 태생적으로 제도권 밖에 머물러야 했던, 어쩌면 지금도 여전히 그럴지도 모를, 그러므로 탈/비제도적인 제안과 실천이 사실은 제도권 미술을 견인하고 예비하고 있었음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룹 야투는 1981년 8월 14일 공주 금강 백사장에서 창립했다. 출범 당시 명칭은 야외현장미술연구회였다. 1983년 1월 공주 금강에서 진행한 워크숍에서 자연미술이란 용어가 처음 창안 발의되었으며, 1995년 한국자연미술가협회 야투로 이름을 바꾼 이후 현재에 이르고 있다. 창립 당시 맴버를 보면 곽문상, 강희순, 고승현, 김영철, 김지숙, 나경자, 박수용, 신현태, 이동구, 이순구, 이응우, 임동식, 조충연, 정봉숙, 정영진, 지석철, 함상호, 허강, 허진권, 홍오봉 같은 작가들이 참여했다.
창립 당시 선언문을 보면, 우리는 풀포기의 떨림에서부터 여치의 울음, 개구리의 합창, 새, 물고기, 나뭇결에 스치는 바람 소리, 밤하늘의 별빛, 봄의 꽃, 여름의 열기, 가을의 드맑고 높은 하늘, 겨울의 차디찬 기온은 물론 인간이 갖는 모든 동작과 응시, 심리적인 문제, 다각적인 면에서 생생하게 부딪치는 모든 현실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우리 작업의 대상임을 밝힌다(1981년, 임동식)고 했다. 흔히 볼법한, 대개 제도권 미술과 기왕의 미술 행태에 저항하는 결의에 찬 투의 선언문과는 그 결이 사뭇 다르다. 자연 자체 그러므로 자연의 본성을, 자연과의 교감을,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 그러므로 어쩌면 자연생태를 넘어 사회생태학마저 대상으로서 아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창립 초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룹 야투의 실질적 연구 그룹인 야투자연미술사계절연구회(1981-현재)를 중심으로, 이후 금강국제자연미술전(1991-2002),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2004-현재, 금강국제자연미술전을 확장한), 야투자연미술국제레지던스 프로그램(2009-현재), 야투자연미술의 집(2011-현재, 입주작가를 위한 숙소와 작업실로 이용되고 있는), 야투아이프로젝트(2011-현재, 세계에 흩어져 있는 자연미술가들이 네트워킹하는 온라인 플랫폼), 국제노마딕아트프로젝트(2014-현재, 한국을 시작으로 국가를 바꿔가며 전 세계를 일주하는, 현장답사를 겸한 워크숍과 작가 프리젠테이션, 그리고 결과 보고전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순회형식의 전시)를 운영해오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 실내 전시장을 겸한 본부로 금강국제자연미술센터를, 실외 전시장으로 평소 일반인에게도 개방된 연미산자연미술공원을 두고 있다.
청주공예비엔날레.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가 자연미술을 매개로 인류세 담론과 생태학을 실천하고 있다면, 청주공예비엔날레는 탈장르와 탈경계 그리고 탈형식으로 대변되는 탈의 담론을 실천하는 형식실험의 장이 되고 있다. 원래 공예는 기능과 용도와 같은 생활 속 쓰임새에 연유한 것이지만, 이런 쓰임새에서 벗어난, 오직 미적 향수의 대상으로서만 의미를 갖는, 그러므로 어쩌면 이전과는 다른 쓰임새를 모색하는 장이 되었다. 재료와 형식, 기능과 기법에 구애받지 않는 사실상 무한 자유가 실험되고 제안되는 장이라고 해야 할까. 종래의 조각과 회화, 프린트(전사)와 콜라주, 오브제와 설치미술, 조명과 연출이 어우러진 종합예술, 융복합예술, 다원 예술의 형태로 진화하고 있다고 해야 할까. 여기에 예술을 일상으로, 라는 선언으로 대변되는 아방가르드의 모토(그 결이 좀 다르지만, 20세기 초 영국에서 시작된 아트앤크라프트 운동의 모토이기도 했던)를 또 다른 형식으로 실현하고 있다고 해야 할까. 마이너 장르로 여겨졌던 공예가 현대미술을 선도하고 견인하는 또 다른 역설의 현장을 열어놓고 있다고 해도 좋다.
그동안 장르적 특수성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유사한 전시들이 많았지만, 그중 청주공예비엔날레(1999-현재)가 현대미술의 한 축으로서 뚜렷한 자리매김에 성공했다고 해도 좋다. 그동안 산업(계)을 포함한 전통 공예(계)와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지, 전시(예술계)와 축제(지방행정계)를 어떻게 구분할 것인지와 관련한 이해관계의 난맥상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우여곡절이 많았을 것이다. 지금은 이런 우려와 염려가 옛노래가 된 것 같은 분위기지만. 덧붙이자면, 장르적 특수성의 한계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형식실험과 미적 향수의 대상성을 넘어서는, 서사적인 작업이나 사회적인 이슈를 포함하는, 그리고 존재론적인 작업과 같은 예술 일반의 경향성과 담론을 더 폭넓게 수용할 수 있는 장치를 개발하고 보완하는 계기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대전시립미술관과 대전과학예술비엔날레. 미술관의 기능은 크게 전시와 소장작품 관리 그리고 교육으로 나뉜다. 이런 미술관의 기능을 바탕으로 지역미술관은 각 지역 미술, 현대미술, 그리고 여기에 저만의 특수성을 반영한 특화된 미술 간 유기적인 관계로 정초 된다. 이 가운데 다른 미술관과의 변별성을 기할 수 있는 부분으로, 지역미술관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것이 특화된 미술이다. 그러나 저마다 저만의 개성을 살린 특화된 미술관을 지향하지만, 실제로 이를 실현하기란 쉬운 일은 아니다.
이런 와중에 대전시립미술관은 과학에서 변별성을 찾는다. 예술과 기술, 예술과 과학의 융복합에서 자기 정체성을 찾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아무래도 인근에 카이스트와 대덕연구단지와 같은 과학 인프라가 구축된 탓이 클 것이다. 그리고 1993년 대전 엑스포가 열린 것도 주목해볼 일이다. 이러한 현실을 바탕으로 1998년 4월 개관한 대전시립미술관은 2024년 현재 14000여 점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고, 그중 상당 부분을 미디어 작품이 차지하고 있다. 대표 소장품으로 1993년 대전 엑스포에 출품 전시된 모습 그대로 원형을 복원한, 백남준의 <프랙탈 거북선>을 위한 전용 전시실을 별도 운영하고 있고, 여기에 2022년 10월 공립미술관 최초로 미술관 소장품을 수장고에 보관된 모습 그대로 전시 관람할 수 있는 열린 수장고를 개관하기도 했다.
2012년 청주시와 국립현대미술관이 MOU를 체결한 이후 6년만인 2018년 12월 구 연초제조창 건물을 리모델링 한, 지상 5층 규모에 2만여 점의 작품을 수용할 수 있는 수장고와 국내 최고 수준의 보존/복원센터를 갖추고 있는 국립현대미술관 청주관이 개관할 당시에만 해도 수장고 형 미술관으로는 유일했지만, 지금은 지역미술관마다 앞다퉈 열린 미술관을 실제로 개관하거나 표방하고 있어서 그동안 변화된 미술관 환경을 실감하게 된다.
이러한 지역적 특수성을 반영한 대전시립미술관의 대표 기획 전시로, 카이스트와 대덕연구단지와 같은 지역의 과학 인프라와 연계한 융복합 전시 <프로젝트 대전>이 주목된다. 2000년부터 대전시립미술관이 자체 기획한, 현재는 대전과학예술비엔날레로 명칭을 바꾼, 기술과 자연과 인간의 통합을 지향하는, 과학과 예술의 융복합을 지향하는 전시다. 그 면면을 보면 2000년 <대전 패스타>와, 2012년 에너지를 키워드로 한 <프로젝트 대전> 이후, 2014년에는 뇌 과학을 주제로 한, 2016년에는 우주를 주제로 한, 그리고 2018년에는 바이오를 주제로 한 전시가 열렸다.
관련해서 (재)대전문화재단이 주관하고 주최하는 <아티언스 대전>이나, (재)대전고암미술문화재단이 주관하고 후원하는, 이응노미술관 신수장고 M2 프로젝트룸 및 M1 유휴공간에서 열리는 전시 <아트랩 대전> 역시 주목해볼 일이다. <아티언스 대전>이 과학 연구자와 예술가가 일대일로 매칭 해 연구와 전시를 공동으로 진행하는 방식이라면, <아트랩 대전>은 청년 작가 전시 지원 프로젝트로서 반드시 과학과 연계된 형식은 아니라는 것이 다른 점이다. 참고로 대전시립미술관과 나란히 위치한, 2007년 5월 개관한 이응노미술관은 이응노의 진작을 중심으로 한 1400여 점의 작품을 현재 소장 관리하고 있고, 2020년부터는 이응노미술관 소장품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 이응노 연구소(2024년 현재 황효순 소장)를 산하에 두고 있다.
이외에도 대전시립미술관이 주최하는 청년 작가 지원 전시 <넥스트코드>(1999년-현재)가, 구 농산물 검사소 건물을 리모델링 한, 2008년 9월 대전시립미술관이 개관한 <대전창작센터>가, 구 테미도서관 건물을 리모델링 한, 2014년 3월 대전문화재단이 개관 운영하는 레지던스 프로그램 <테미예술창작센터>가 지역의 현대미술을 견인하는 역할을 떠맡고 있다. 이외에도 대전 지역에는 한때 스페이스 씨와 산호여인숙(둘 다 대전의 구도심 대흥동)과 같은 대안공간이 있어서 구도심을 새로운 문화생태환경으로 재활성화하는 등 도시재생 프로젝트와 함께 현대미술의 틈새를 메우는 역할을 했는데, 지금은 없어져서 아쉬운 마음이다.
청주시립미술관과 진천군립생거판화미술관. 현재 청주에는 구 연초제조창 건물을 리모델링 해 2018년 12월 개관한 국립현대미술관 청주관이, 그리고 구 KBS 방송국 건물을 리모델링 해 2016년 7월 개관한 청주시립미술관이 지역 현대미술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 청주시립미술관은 2024년 현재 400여 점에 달하는 소장품을 수집 관리하고 있고(개관이 늦은 만큼 소장작품 수도 적다), 본관을 비롯해, 산하에 청주시립대청호미술관, 오창전시관,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등 총 4개 전시장을 두고 있다.
이 가운데 청주시립대청호미술관(2004년 대청호미술관으로 개관한 이후, 2014년 청원군과 청주시가 통폐합되면서 지금의 청주시립대청호미술관으로 개칭한)은 1995년 대청호국제환경미술제를 기점으로 결성된 전위적인 설치미술 그룹 나인드레곤헤즈(아홉 용머리)의 모태가 된 곳인 만큼 현재에도 주로 환경 생태 주제와 관련한 기획전시 위주로 운영되고 있고, 오창호수도서관 내 일부 층을 할애해 전시장으로 사용하고 있는 오창전시관은 도서관을 찾은 일반 관객을 대상으로 문화 향수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참고로 최근 수년 내에 전국적으로 도서관과 미술관을 합친 형태의 미술도서관이 건립되는 추세에 있는데, 그중 도서관과 전시장이 그리고 여기에 작가 입주 프로그램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의정부미술도서관이 가장 성공적인 경우라고 생각한다. 미래의 미술관의 한 형태를 예시해주고 있다고도 생각된다).
그리고 미술관보다 먼저 2007년 3월 개관한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역시 도서관 건물을 리모델링 한)는 입주작가와 외부 전문가 매칭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한편, 입주작가 릴레이 프로젝트 형식의 전시를 개최해오고 있다. 현재 지역 창작 프로그램 중 작가들이 가장 선호하는 장소 중 한 곳으로 꼽히고 있다. 이외에도 청주는 다른 지역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사립 미술관 인프라가 발달 구축된 편인데, 스페이스몸미술관(2000년 갤러리로 문을 연 이후, 2005년 미술관으로 재개관한), 신미술관(2000년 7월 갤러리신으로 출발해, 2003년 10월 미술관으로 등록한 이후, 2006년 11월 신관을 증축해 확장 재개관한), 쉐마미술관(2009년 개관), 그리고 우민아트센터(2011년 개관, 우민미술상 운영)가 있다.
그리고 특화된 미술관으로 진천군립생거판화미술관이 있다. 2010년 판화 전문미술관을 표방하면서 개관한 것인데, 개관 당시에도 그리고 어쩌면 지금도 국내외적으로 그 사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일이다. 국내 최초로 판화 전문미술관으로 개관한 이 미술관은 미술관의 성격을 특정 분야로 한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향후 미술관 특성화 사업과 관련해 의미 있는 사례로, 한국현대판화의 미래를 열어갈 유의미한 계기로 기억될 것이다. 이외에도 현재 한솔문화재단 산하의 뮤지엄산(원주 소재)이 비록 판화 전문미술관은 아니지만, 판화 장려에 힘을 기울이고 있는 편이다.
장르적 특수성을 근거로 미술관의 성격이나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이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라고도 하겠지만(현실적으로 볼 때, 미술관도 갤러리도 주제전 위주지, 이제 더이상 장르와 형식적 특징을 근거로 전시를 기획하지는 않는다), 판화와 공예와 서예와 같은, 흔히 마이너 장르로 알려진 경우라면 문제는 다르다. 특정 장르를 활성화한다는 점에서 장려되는 면이 없지 않다고 해도 좋다. 중요한 것은 그 와중에도 동시대성의 감성과 촉을 놓치지 않는 일일 것이다.
한편으로, 동시대성의 감성과 촉으로 종 다양성의 인정과 함께 신과 구가 공존하는 다공성(원래 발터 벤야민이 다공성의 도시 개념으로 제안한)을 들 수 있다. 그 자체 시간의 집인 박물관에 미술관의 콘텐츠가, 마찬가지로 미술관에 박물관의 유물이 들어가는 식의 혼종적인 전시환경과 경험을 창출하는 것인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 활자본 <직지심체요절>(1377년 청주 흥덕사에서 활자인쇄로 인쇄된, 독일의 구텐베르크 활자보다 700여 년 앞서는, 1972년 유네스코에 의해 공인된, 현재 1992년 개관한 청주고인쇄박물관이 소장 전시하고 있는)을 재해석하는 일이 현대미술을 위해 새로운 길을 여는 계기며 자산이 될 수가 있을 것이다. 예컨대 현대미술의 감성과 어법으로 중앙박물관을 매개하는 나한 전시와 같은. 베르사유 궁전에 개입하는 제프 쿤스와 같은.
아라리오갤러리. 천안에 거점을 둔 아라리오갤러리는 지역을 넘어 한국현대미술 생태계에 그리고 특히 미술시장에 주목할 만한 영향을 미쳤다. 개관전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2002년 12월, 거리의 예술가 혹은 언더그라운드 화가라는 별칭을 얻고 있는 팝아트의 대가 (고)키스 해링을 초대하는 것으로 첫 전시를 오픈한 것이 그렇다(실제로는 1989년 개관했다가, 이후 재개관한). 아마도 작가 최초의 대규모 국내 전시로 기억된다.
특이한 것은 평소 갤러리와 관장이 같이 붙어 다니는 경우가 잘 없는데, 아라리오갤러리만큼은 예외적인 경우라고 해도 좋다. 갤러리 관장 김창일은 갤러리만큼이나 유명하다. 세계적인 컬렉터로 널리 알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2007년 세계적인 권위의 미술 매체 아트리뷰가 선정한 세계 예술계에서 영향력 있는 인사 100인에 선정, 2016년 아트넷이 선정한 세계 100대 컬렉터에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명단을 올린), 그 자신 직접 그림을 그리는 작가이기도 하다(씨킴이라는 예명으로 활동하는).
갤러리 개관 초기를 중심으로 그동안 진행된 전시를 보면 2005년 <라이프치히 화파>, 2006년 <중국의 현대미술과 시대정신>, 2007년 <문틴 앤 로젠블룸>(독일 신표현주의 경향의), 2010년 <군도의 불빛들>(동남아시아 지역의 근 현대미술을 가늠하게 해 주는)과 같은 전시들이 주목된다.
알레고리적 서사로 답보상태의 구상회화에 새로운 길을 연 독일 신표현주의와 라이프치히 화파, 현실주의를 도구로 자본주의에 반응한, 냉소적 사실주의로 대변되는 중국 아방가르드 미술, 포스트모더니즘 이후 종 다양성이 인정되면서 새로운 미술 강국으로 부상한 인도 현대미술 등 지금이야 그렇지도 않지만, 당시만 해도 이름마저 생소한, 최소한 그동안 국내 전시를 통해 접할 기회가 없었던 작가들이고, 전시들이고, 경향들이다. 면면을 보면 알겠지만, 하나같이 블록버스터 전시와는 그 결이 다른, 이후 제도권 미술에 파장을 부른 전시들이다.
공간을 보면, 천안종합버스터미널을 중심으로 아라리오갤러리와 아라리오 조각공원이 조성돼 있고, 서울의 경우 아라리오갤러리 서울(원래 2006년 4월 소격동에 문을 열었다가, 이후 2014년 3월 지금의 삼청동으로 옮긴)과 아라리오 뮤지엄 인 스페이스(건축가 고 김수근의 옛 공간 사옥 건물을 매입해 미술관으로 탈바꿈한)가 조성돼 있다. 여기에 아라리오뮤지엄 제주탑동시네마(제주시 구도심 탑동 일대를 아트타운으로 재생시킨, 도시재생의 개념으로 접근한 뮤지엄 프로젝트의 일환인)가, 그리고 아라리오갤러리 상하이(원래 2005년 12월 베이징에 최초 개관했다가, 이후 2014년 8월 상하이로 옮겨 재개관한. 그동안 팬데믹으로 답보 상태에 있다가 이후 최근에 다시 활성화한)가 현재 동시 운영되고 있다. 한때 뉴욕 진출을 시도했다가 도중에 접기도 했다.
천안을 본부로, 지역을 넘어, 한국을 넘어, 세계로 확장하는 덩치를 보여주고 있다고 해야 할까. 국내에서는 그 경우를 찾아보기가 어렵고, 같은 꿈을 꾸는 갤러리가 있다면 지침이 될 만한 경우라고 해도 좋다.
세계적인 컬렉터인 만큼 공간전시는 주로 컬렉션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현재 국내외 유명작가 작품 4000여 점을 보유하고 있는데, 웬만한 지역미술관 수준이라고 해도 좋다. 그 면면을 보면, 곰돌이 인형과 자선 모금함을 들고 있는 데미안 허스트의 <자비>, 인체 해부도를 소재로 한 같은 작가의 <Hymm>을 비롯해, 제이크 앤 디노스 채프만 형제, 안토니 곰리, 트레이시 에민과 같은 영국의 yBa 작가들, 하늘을 향한 무한열주 혹은 토템폴을 연상시키는 조각가 아르망 페르난데스의 <수백만 마일>, 인도 작가 수보드 굽타의 <제어된 선>, 그리고 여기에 셀 수 없는 유리구슬로 마치 꿈을 꾸듯 몽롱한 느낌의 사슴을 조형한 일본 작가 코헤이 나와의 작품을 포함하고 있다. 얼굴 없는 조각으로 유명한 김인배, 사진 조각의 권오상, 사적 서사를 초현실주의로 풀어낸 이진주와 같은 국내 작가들도 보인다.
예로부터 대전을 포함한 충청지역을 중원이라고 불렀다. 특히 대전을 한밭 그러므로 큰 밭이라고도 했다. 대전은 순우리말 큰 밭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농경사회에서 큰 밭은 부를 상징한다). 아마도 국토의 중심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여기에 세계의 중심이라는 자부심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자연미술을 매개로 인류세 담론과 생태학과 같은 담론을 리드하고 있는 그룹 야투와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 경계를 넘어 현대미술을 위한 형식실험장으로 자리매김한 청주공예비엔날레, 카이스트와 대덕연구단지와 같은 인프라를 바탕으로 예술과 과학의 융복합을 실험하고 있는 대전시립미술관과 대전과학예술비엔날레, 국내 최고 수준의 수장고와 보존/복원센터를 갖추고 있는 국립현대미술관 청주관, 다른 지역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탄탄한 인프라를 갖추고 있는 청주 지역 사립 미술관, 세계 최고의 금속 활자본 <직지심체요절>을 소장하고 있는 청주고인쇄박물관, 특화된 미술관의 가능성을 예시해주는 진천군립생거판화미술관, 그리고 미술관급 소장품과 전시로 국내 미술 생태계에 유의미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아라리오갤러리와 같은 풍부한 인프라 자산을 바탕으로, 지금, 중원이 중원을 꿈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