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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경숙/ 나는 누구인가, 흐르는 존재와 유동적인 정체성

고충환


구경숙/ 나는 누구인가, 흐르는 존재와 유동적인 정체성 

고충환 | 미술평론가


일부 추상회화에서처럼 아예 주제가 없거나 사실상 주제가 무의미한 경우가 아니라면, 대개의 그림에서 주제는 그림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 내용을 암시하는 것으로, 그림이 지향하는 실재, 그러므로 핵심으로 이끄는 길잡이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주제 의식이야말로 작가의 그림을 관통하는 인문학적 배경이 되고 있고, 그 자체 작가의 작가 의식을 결정하는 키가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제 의식으로 미루어보건대 그동안 구경숙 작가는 여성의 성적 정체성에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침묵(Silence)과 같은, 여성사(Herstory)와 같은, 태반(Chrysalis)과 같은, 그리고 비밀의 정원(The Secret Garden)과 같은 직접적이고 암시적인 일련의 주제 의식을 통해 가부장적 가치체계에 가려진 여성성, 억압적인 여성성, 침묵하는 여성성을 주제화한 것이 그렇다. 

그리고 이후 Trace(흔적)과 Markings(자국) 같은 그림에서 주제(그리고 주제 의식)는 몸의 문제, 정체성 문제, 그리고 존재론적인 문제로 진화한다. 그리고 알다시피 이러한 문제의식은 작가에게 한정되지는 않는다. 비록 작가를 매개로 한 것으로 작가 자신으로부터 비롯한 것이지만 작가 개인에 함몰되지 않고 모두가 공감하고 공유할 수 있는 경험으로 심화하고 확장되면서 보편성을 얻는다. 몸이, 정체성이, 존재가 자기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남긴 흔적을 추적하고 기록하고 재구성한 것인데, 알다시피 흔적도 자국도 정해진 형태를 가지고 있지 않다. 비결정적이고 가변적이고 우연적이라고 해야 할까. 그래서일까. 그림 역시 알만한 형상의 경계를 넘어선다. 추상과 형상, 알만한 형상과 암시적인 형상의 경계를 넘나든다고 해야 할까. 알만한 형상 그러므로 어쩌면 선입견이 만들어준 형상이 해체되고 재구성되면서 존재가 재정립되고 있다고 해야 할까. 


작가는 근작을 Markings(자국)이라고 부른다. 종전 Markings(자국) 연작이 심화하고 확장된 경우로 보면 되겠다. 보기에 따라선 Trace(흔적) 연작과도 상통한 부분이 있다. 세부적인 차이를 무시하고 본다면, 자국이 곧 흔적이기도 할 것이므로. 문제는 무슨 자국이며, 무엇의 흔적인지를 따져 묻는 일이며, 그 자체 작가의 작업을 해석하는 관건이기도 할 것이다. 마킹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표시, 자국, 흔적을 의미한다. 표시한다, 자국과 흔적을 새긴다는 뜻이다. 여기서 새긴다는 말은 폭넓게는 찾다, 추구하다, 탐색하다, 찍는다, 찍어낸다, 아로새긴다는 의미와 상통한다고 해도 좋다. 그렇다면 작가는 무슨 자국을 찾고, 무엇의 흔적을 찾아 헤매는가. 그리고 그렇게 찾은 자국과 흔적은 또한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런저런 의미가 있지만, 마킹의 일차적 의미로 치자면 표시를, 표시하는 행위를 뜻한다. 그리고 표시는 미셸 푸코 이후, 조르주 아감벤 이후 담론의 핵심으로 등장한, 사회학적 의미를 갖는 용어가 되었다. 표시는, 표시하는 행위는 말하자면 제도적 장치다. 흔히 낙인을 찍는다거나, 좌표를 설정한다거나, 지목한다는 말과 관련이 깊다. 옛날에 노예의 몸에 불도장을 찍어 표시한 것에서 유래한 말이다. 이후 이 말은 유대인의 노란 별 표시로, 간통한 여인을 뜻하는 주홍글씨 A로 확대 재생산된다. 

그리고 개인을 감시하는 제도적 장치가 개인을 직접 감금하고 구속하는 방식에서 교육을 통해 사람들의 의식을 파고드는 방식으로 진화한 이후, 표시는, 표시하는 행위는 또 다른 양상을 띤다. 이를테면, 사회가 불안정할 때 희생양을 지목해 사람들의 잠재적인 폭력성에 물꼬를 터주는 것에 모든 건전하고 건강한(?) 제도의 성패가 달려있다(르네 지라르, 희생양 제도). 의학과 권력이 결탁해 정신병자는 물론 공공연한 반사회적 인사를 사회로부터 격리 수용한다(미셸 푸코, 정신병원의 기원). 그리고 여기에 심지어 법률로부터조차 보호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조르주 아감벤, 발가벗은 인간). 난민과 같은. 노숙자와 같은. 무연고자와 같은. 

그리고 여기에 표시한다는 말은 굴레를 씌운다, 프레임을 씌운다, 는 의미의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관습과도 통한다. 여성성과 여성주의 역시 이런 굴레로부터, 그리고 굴레에 대한 반작용으로부터 비롯한 것이란 점에서 보면, 여성성과 여성주의를 주제로 한 작가의 전작 역시 그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다. 마킹의 표시한다, 는 의미를 사회학적 관점에서 풀어낸 작업이라고 해도 좋다. 그리고 자국과 흔적을 찾아 나선, 아마도 존재의 자국과 흔적을 찾아 나선, 이후 작업에서 작가는 상대적으로 더 존재론적인 층위에서의 작업으로 진화하고 있다고 해도 좋다. 

그러므로 어쩌면 마킹 연작이야말로 작가의 전후 작업을, 전후 작업에서의 주제 의식을 아우르면서 분유하는 전제 혹은 큰 주제라고 해도 좋다. 말하자면, 마킹 연작을 빌려, 마킹이란 주제 의식을 빌려 존재의 사회학적 의미와 위상(존재의 사회적 정체성)을 묻는 한편, 다른 한편으로 존재의 정체성(존재의 존재론적 혹은 생물학적 정체성)을 묻는 작업이라고 해도 좋다. 

그렇게 작가의 근작은 존재의 생물적 혹은 생물학적 정체성을 묻는 작업으로 보인다. 생리적 혹은 생태학적 정체성을, 그러므로 어쩌면 존재론적 정체성을 묻는 작업이라고 해도 좋다. 그렇다면 작가는 아마도 몸(혹은 의식?)에 아로새겨져 있을, 어떤 표시를, 어떤 흔적을, 어떤 자국을 찾아 존재의 정체성을 담보해 주고 있는지 볼 일이다. 

흔히 온몸으로 그림을 그리고, 몸을 던져 작업을 한다고 한다. 실제로 그렇다기보다는 작업을 대하는 태도와 자세를 수사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하지만 작가의 경우에 이 말은 수사적 표현이 아니다. 작업 과정에 실제로 자신의 몸을 던져 작업을 하는데, 처음에는 철판에 드러누워 물을 뿌려 산화된 부분과 몸이 프린트된 부분을 대비시킨, 등신대 크기의 작업으로 시작했다. 

그리고 이후 사진 인화지를 여러 장 연결해 자신의 몸이 충분히 누울 수 있는 크기를 만든 후, 그 위에 현상액을 바른 에어캡(뽁뽁이)을 쓰거나 입고 누워 밀착시키는 방식으로 몸의 흔적을 인화지에 담았다. 사진 인화지의 크기에 한정이 있는 만큼(물론 더 큰 인화지도 있지만) 작업을 보여주는 방식 또한 변화를 겪는데, 하나의 유기적인 전체를 보여주는 등신대 크기의 작품에서 이미지를 해체하고 조합하고 재구성한, 부분들의 집합으로 모자이크된 작품으로 변신했다. 자신의 몸을 직접 인화한 최초 부분 이미지를 바탕으로, 여기에 스캔 이미지가 도입되고,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통한 편집과정이 더해지면서 작업은 더 중층화되고(레이어를 만들고) 섬세해진다. 사진 인화에 바탕을 둔 이 일련의 작업을 작가는 사진 드로잉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여기에 근작에서는 자신의 몸의 부분 이미지와 함께, 반짝이 천과 구겨진 비닐봉지와 가발과 같은 일상 용품이 이미지를 위해 도입된다. 아마도 몸으로부터, 의식으로부터, 그러므로 자기로부터 발원한 정체성이 확장되면서 가닿은, 일상이 정체성의 부분을 형성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체를 구성하는 기본 요소들, 이를테면 물, 림프, 세포, 정맥, 혈액과 같은 이미지들이 도입되기도 한다. 아마도 관계를 매개로 한 사회적 정체성, 몸(아니면 의식)을 매개로 한 존재론적 정체성과 같은 거대 담론의 경계를 넘어 미시적인 층위에서 건져 올린, 어쩌면 생명 자체를 담보해 주는, 정체성의 또 다른 형성 요소라고 본 것일 터이다. 

기법적으로도 몸의 부분 이미지를 직접 찍어내는 프린트와 사진과 스캔 이미지 외에 탁본과 플로이드 기법과 목판 엠보싱 기법이 더해지면서 화면은 재차 중층화된다(레이어에 레이어가 쌓인다). 플로이드 기법은 마블링이 전형적인 경우로서, 아마도 흐르는 존재와 유동적인 정체성을 강조하기 위해 도입된 것일 터이다. 그리고 탁본과 엠보싱은 물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서, 화면에 요철을 만드는 것인 만큼 쿠션이 있는 지지대가 요구되고, 상당한 두께를 가지고 있는 한지가 도입된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물성의 강조와 함께, 시각적 이미지를 촉각적 이미지로 확장 심화하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작가의 그림은 자신의 몸을 던져, 몸을 직접 찍어내는 행위와 과정으로부터 비롯했다. 내 몸을 대상화하고 객관화하고 타자화하는 과정에서 나를 형성한 것들, 나를 형성시켜준 것들, 그러므로 나의 정체성이 그 실체를 드러내면서 마침내 손에 잡힐 것이라고 생각했을 터이다. 그렇다면 작가의 그림 어디에 어떻게 정체성은 있는가. 작가의 몸은 어디에 있는가. 정작 그림에서 작가의 몸은 알아볼 수는 없는, 알 수 없는 비정형의 얼룩들로 드러난다. 작가의 몸이, 정체성이 부분들로, 알 수 없는 비정형의 얼룩들로 해체되고 재구성되고 있다고 해야 할까. 

이로써 작가는 혹, 존재란 하나의 결정적인, 고정된 실체로서 거머쥘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지도 모른다. 강물처럼, 흐르는 존재라고 말하고 싶은지도 모른다. 타자들 그러므로 온갖 이질적인 존재들이 하나로 섞이는, 유동적인 존재라고 말하고 싶은지도 모른다(후기구조주의에서는 주체를 타자들의 우연하고 무분별한 집합이라고 했다). 항상적으로 운동 중인 존재, 이행하는 존재, 변화하는 존재, 그러므로 운동과 이행과 변화만이 오롯한, 그 자체가 오히려 존재라고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항상적인 운동과 이행과 변화의 원인이기도 한, 생명(바이털리즘) 자체가 이미 존재라고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여기에 보기에 따라서 작가의 그림은 알만한, 알 수 없는 풍경처럼도 보인다. 그러므로 어쩌면 자연이 곧 존재라고 말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정체성의 풍경, 몸 풍경 그러므로 신체 풍경, 운동하는, 이행하는, 변화하는, 생성하는 풍경, 그러므로 지금 막 내가 생성되는 풍경 앞에 서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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