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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흐름 속에서 명멸해가거나 변이를 거듭하는 존재들

박영택

시간의 흐름 속에서 명멸해가거나 변이를 거듭하는 존재들


                                                   박영택 (경기대교수, 미술평론가)


  회화란 일정한 평면에 환영(일루젼)을 안기는 시각적 장치이자 고정된 형상을 정박시키고 있는 표면이기도 하다. 물론 그 이미지는 보는 이의 망막과 정신적 활력 속에서 부단히 움직이고 유동한다. 반면 시간에서 건져 올린 이미지를 실시간 속에서 응시하게 하는 것이 이른바 비디오아트 내지 일련의 영상을 기반으로 한 작업들인데 이는 종전의 회화와는 분명 다른 시각적 체험과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여기서 핵심적인 것은 물론 시간이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이미지는 형성되고 완성되면서 모종의 서사/내용을 만들어나간다. 그리고 관중은 시간의 지속 안에서 그 작품을 완성해가는 주체의 소임을 부여받는다. 작가와 관중이 시간을 매개로 공모의 관계를 형성해나간다는 얘기다. 동시에 기존의 회화가 시각에 한정되어 있다면 영상은 시각과 청각 등 다양한 감각기관에 호소한다. 작품 앞에 자리한 관자의 신체에 전면적으로 개입하면서 그 모든 감각을 흡입하는 것이다. 

 이이남은 영상 작업(미디어 아트)을 통해 우리에게 익숙한 이미지를 다시 보여주고 있다. 이 다시 보여주기에는 유희, 조작, 낯설게 하기 등이 여러 변주들이 작동한다. 물론 이러한 전략은 20세기 이후 현대미술이 보여준 매우 익숙한 어법들이기도 하다. 쉽게 말해 그는 기존의 잘 알려진 이미지(명화나 대중매체에서 다루어진 도상들, 캐릭터들)를 갖고 이를 디지털 기술을 이용해 유희/재배치하면서 모종의 틈새를 만들어나간다. 바로 그 틈, 미세한 균열과 차이가 그의 작품이 되고 있다. 우선적으로 이이남은 디지털 이미지 프로세싱을 통해 고정된 상태, 정지된 그림을 움직이게 한다. 애초에 동영상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특정 회화를 조작해 조금씩 흔들어서, 서서히 움직이게 했다. 단지 움직인다는 사실 보다도 그 장면을 낯선 상황으로 돌변시키고 예기치 못한 사건을 발생시키는 트릭, 재미가 놓여져 있다는 점이 특이한 점이다. 보는 이를 착시에 빠지게 하거나 홀린 듯한 느낌을 주는가 하면 기존에 익히 알고 있던 원본이 슬그머니 탈바꿈하고 시공을 초월해 현재의 풍경으로 살아나는 기이한 환생의 체험을 안겨주기도 한다. 익숙했던 것들이 다소 낯선 존재로 변이를 거듭하는 것은 어딘지 ‘언캐니’한 느낌을 자아내기도 한다. 하여간 이러한 작업은 ‘움직이는 픽셀계의 복합적인 디지털 재현과 부활’에 따른 결과로 인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이남의 모든 작품은 움직임을 중심축으로 한다. 그것은 곧 시간의 반영이다. 자연계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란 늘 시공간 안에서 변화하고 있고 격렬한 시간의 지배 속에서 명멸한다. 우리가 본다는 것 또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만 보는 것이다. 이이남의 작업은 이러한 당연한 전제 위에서 시도된다. 그는 정지된 회화 이미지를 시간의 흐름 위에 다시 풀어놓았다. 그리고 그 변화의 양상을 추적하며 관찰한다. 그리고 미디어는 이러한 시도를 가능케 하는 유용한 매개로 기능한다. 그렇게 해서 작품 속 이미지는 미디어를 기반으로 하여 다시 움직이게 되었고 시공을 넘나드는가 하면 또 다른 존재들과 새로운 관계를 맺으면서 원본과는 다른 색다른 존재, 익숙하면서도 어딘지 ‘이상한’ 존재로 탈바꿈한다. 그런데 그의 작업에서 핵심적인 시간이란 우선 현실계를 지배하는 시간개념과는 다른 속도를 거느린다. 그 시간은 매우 느리게 진행되면서 서서히 바뀌어 가는 특정 장면, 변화되는 지점을 조금씩 깨닫게 만든다. 한눈에 걸려드는 게 아니라, 순간적으로 인지되는 게 아니라 점진적으로 진행되는 느린 속도는 현실과는 다른 매우 상이한 시간이자 감각이기도 하다. 천천히, 천천히 바라보면서 그 순간순간 자신이 무엇을 보고 있고 어떻게 변화되어 가는지를 직접 깨닫고 성찰하면서 기존에 익히 알던 이미지를 전혀 다른 맥락과 대비해서 관찰하게 하는 모종의 거리를 만드는 한편 당연하고 익숙한 위치의 사물을 재조정하고 그 틈새에 반성의 자리를 만들어주는 것이다. 시간이 흐름 속에서 화면 속의 이미지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동시에 그의 작업은 인간 존재의 본성을 결정하는 우리 자신의 유한성을 인지하게 하는데 이는 시간을 표현하는 도구로서 비디오라는 재료의 매체적 속성 자체가 일시적인 존재의 허무함을 근본적으로 내재하고 있기에 가능하다. 그러니까 이미지는 생겨나고 만들어지고 존재하다가 종내 사라지면서 그 유한함(이미지의, 인간 존재 혹은 모든 존재의)을 역설적으로 방증한다.  

 작가는 디지털 매체를 활용해 레디메이드 이미지(동·서양의 걸작이라 일컫는 명화들)를 갖고 주무른다. 동· 서양이 크로스오버되고 과거와 현재가 한 지평에서 만나며 여러 이미지가 중첩된다. 그것은 원작과는 다르면서도 부단히 그 원작에 기생해가는 작업이다. 근작인 모네의 <해돋이>나 쇠라의 <아니에르에서의 물놀이>나 고흐의 익숙한 작품을 이용한 작업 역시 그 그림의 어느 일부를 확대하고 그것을 다른 버전으로 옮겨가는 것이고 한 원작에서 출발해 지속해서 다른 장면으로 변환되어 가는 추이–동일성과 차이성을 동시에 유발시키는-를 번갈아 가면서 보여주는 작업이다. 원작에 대해 갖고 있는 관중들의 선입견에 기대고 있고 그 익숙한 이미지가 주는 친근함, 그리고 그것이 서서히 움직이면서 조금씩 다른 양태로 변이되어 가는 과정을 목도 하게 하는 즐거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명멸해가거나 변이를 거듭해가는 과정 자체가 주제가 되고 있으며 그처럼 혼종과 혼성성을 거듭하는 묘한 이미지가 주는 매력 등이 버무려져 있는 작업이다. 예를 들어 그는 모네의 <해돋이>를 부분적으로 절취 하고 이를 각각 세 가지 버전으로 나누어 보여준다. 이 확대된 풍경은 원작으로부터 파생되어 각각 완연히 다른 느낌, 감각을 발생시키면서 전개된다. 또한 쇠라의 <아니에르에서의 물놀이>의 한 부분을 확대한 작업 역시 점묘주의에 입각한 본래의 그림을 디지털 비트로 변환해서 보여주는데 그에 따라 순수한 색채의 점이 확대된 비트는 모자이크 되어 전체를 희미하게 보여주다가 점차적으로 완전히 격자의 색면추상으로 환원되어 버리는 과정으로 나아간다. 이는 당시 쇠라의 의도가 화면 위에 순수한 색채를 얹혀놓아 보는 이들의 눈 속에서 색이 혼합되도록 하고자 했던 목표를 오늘날의 디지털 기술로 실현시킨다는 의미와 함께 쇠라의 의도가 결국 순수한 색채로, 주어진 캔버스의 격자형에 일치된 표면, 그 표면을 도포 한 단색의 물감/색채로 마감된 모더니즘의 형식주의로 귀결되었음을 은연중 연상시킨다. 
또 다른 작업은 스페인 궁정화가인 벨라스케스가 그린 마그리타 공주 초상화를 오늘날 스튜디오에서 조명을 받으면서 사진촬영에 임하고 있는 듯한 장면으로 전환시킨 것(스틸사진)으로 이는 시공을 초월한 아이러니를 발생시키는 작업인 동시에 벨라스케스의 작업과 동시대에 모델 사진을 찍는 일의 공유성을 슬쩍 오버랩시키는 재치가 반짝이는 작업이다. 여기서는 단색조로 물든 흑백사진과 유사한 표면에서 회화와 사진의 경계가 무척이나 모호하게 접혀든 느낌이 흥미로웠다. 반면 또 다른 평면 작업에서는 대중매체에서 흔히 접했던 영웅의 이미지들, 그러니까 독수리 오형제, 건담, 스파이더맨, 배트맨 등의 캐릭터를 초상화로 변용하는 사진이 새롭게 선보였다. 얼굴 정면이 화면을 가득 채우면서 보는 이를 강렬하게 응시하고 있는 이 초상은 ‘불의에 맞서 진리를 위해 투쟁하는 단호하고 결연한 의지의 표정’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 사진들은 명증성과 기록성이라는 사진 고유의 특성으로 제시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여러 겹으로 다시 보여 진다. 이 겹, 수많은 레이어 안에는 시간과 공간이 흐르고 보는 이들의 해석과 감정의 교차를 허용시키는 통로가 들어간다. 동시에 그 안에는 여러 이질적인 이미지들이 교차하면서 착시, 환영을 야기한다. 
 
 고화질 비디오 모니터 위에 ‘원작의 복잡한 시뮬라크르’를 발생시키는 이이남의 작업은 분명 디지털미디어로 인해 가능한 작업이다. 오늘날은 분명 디지털 시대이고 당대이 미술 역시 이를 반영한다. 디지털시대란 디지털 정보를 처리하고 전달하는 디지털미디어가 지배적이고 보편적인 매체 형태인 시대를 의미한다. 주지하다시피 디지털 정보의 특성은 완전복제성, 즉각적 접근 가능성, 조작가능성 등이 있으며 디지털 매체의 주요 특성으로는 상호작용성, 네트워크성, 복합성 등이 있다. 또한 디지털 정보는 모두 비트라는 동일한 형태로 존재하며, 따라서 하나의 기계(멀티미디어 컴퓨터)로 처리하고 송수신하고 재생할 수 있는 것을 일컫는다. 그러니까 물리적 사물의 고정적 형태에 의존하는 아날로그적 정보가 조작과 변환에 물리적 제약이 따른다면 디지털 정보는 어떤 형태의 정보든 조작할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디지털 사진이나 영상이 가장 튼 성격은 변환과 조작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조작가능성은 실체의 재현이라는 이미지의 근본적인 성격을 상상력의 발현이라는 새로운 차원의 개념으로 재구성하고 있다. 그로인해 실제라는 개념은 변질되고 다른 차원으로 이동한다. 아니 기존의 실제라는 개념을 조작하고, 변화시키며, 영향을 주고자 하는 것이 바로 미디어 아트다. 이이남의 작업이 그런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오래 전 발터 벤야민은 기계적 복사가 예술에 미치는 영향을 논의하면서, 기계적 복사(인쇄매체와 사진)는 예술작품의 독특한 권위(aura)를 위협한다고 주장하였다. 벤야민은 모든 예술품은 고유한 속성을 갖고 있는데, 기계적 복사본은 원본이 갖고 있는 이러한 진품으로서의 속성을 위협한다고 보았다. 오늘날 디지털 정보양식은 원본의 권위를 위협하는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원본이라는 개념 자체를 없애 버리고 있다. 디지털 미디어 기술은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차원의 미디어아트를 발생시키고 있으며 이러한 미디어 아트는 우리가 본 적이 없는 세계를 모니터나 프로젝션 등으로 가상세계를 만들어 내고 있다. 이전의 고정된 회화와 달리 우리의 감각을 혼란시키고 참여를 독려하고 낯선 감각을 발생시키며 새로운 시간과 공간을 실험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는 단연 상상력이다. 이이남은 최근의 디지털미디어를 적극 활용하면서 무척이나 재미있는 예술의 존재 방식을 만들어내고 있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 중요한 것은 그 결과물이 단순히 재미에 그치지 않고 보는 이의 마음에 모종의 여운을 남기는 동시에 이미지에 대한 깊은 사유와 통찰을 가능하게 하느냐에 달려 있을 것이다. 디지털미디어의 목적은 미술가와 그에 관련된 사람들이 새로운 세상의 의미와 새로운 경험의 시도를 구성하게 하는 데에 있으며 궁극적으로 작가들의 모든 실험이란 결국 예술적 비전을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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