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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석우- 수령 깊은 나무의 표면과 그 너머

박영택

최석우- 수령 깊은 나무의 표면과 그 너머


                                                   박영택 (경기대교수, 미술평론가)

 
 
 최석우는 수령이 깊은 나무의 밑둥치 일부를 확대해서 보여준다. 대지에 뿌리박혀서 힘차게 밀고 올라오는 핵심 부위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바닥에 바짝 붙어나간 시선으로 올려다 본 듯한, 혹은 매우 낮은 자세로 나무에 눈을 맞춘 시선에 의해 포착된 나무의 몸체, 그 피부만이 독점적으로 당당하게 자리하고 있다. 그것은 직립한 인간의 시선보다도 더 낮은 시선, 사물에 근접한 시선에 해당한다. 따라서 보편적인 거리감이 슬쩍 뭉개지고 신체에 보다 밀착하면서 감겨드는 모종의 핍진함이 있다. 그래서 굵고 다부진 몸통과 거북의 등껍질 마냥  갈라지고 일어선 껍질만이 가득 화면을 채우고 있다. 
자신의 삶의 동선에서 접한 나무이자 신록의 자연에서 싱싱한 생명력을 뿜어내는 나무, 튼실한 나무를 통한 모종의 메시지를 진솔한 재현술에 입각해 전달하고자 하는 의도를 지닌 그림으로 보인다. 초록의 싱그럽고 상쾌한 색감과 영롱하고 선명한 하늘과 투명한 공기, 밝은 빛이 시원하게 파고 들며 깊은 숲의 눅눅하고 비릿한 내음이 진동하고 태고의 시간이 여전히 맴도는 듯한 분위기가 흐르는 그런 풍경이다. 마치 보는 이들을 산속으로 내몰아 청량한 공기를 호흡하게 하고 수직으로 솟은 우람한 나무의 생명력을 감지하게 하는 한편 번잡한 도시와는 다른 이 공간 안에서 잠시 휴식과 명상 또는 치유의 시간을 갖게 하려는 배려인 듯도 하다. 아마도 그런 착시, 환영을 만들려는 장치가 이러한 극사실적인 그림을 그린 목적은 아닐까? 작가가 그린 나무들은 쉬이 가늠할 수 없는 아득한 시간의 양과 신비스러운 자연의 이치와 오묘한 생명력을 깨닫게 하는 매개로 작동한다. 그러니까 작가는 우리들의 시선을 바로 ‘저곳’에 의도적으로 정박시키고 싶었던 것 같다. 그것은 문명과 도시와는 대척점인 자리에 위치하는 공간인 셈이다. 이토록 정교한 재현술에 입각해 이룬 환영주의로 시선을 낚아채면서 보는 이의 망막을 나무와 숲의 풍경 안에, 문명과 대조되는 이상적인 공간에 안치시키고자 한다. 
 거의 사진과 유사하게 그려진 이 극사실주의 회화는 사진에 바탕을 둔, 사진으로부터 길어 올려진 그림이자 렌즈의 효과를 다시 붓질로 반복하고 있는 이미지다. 그것은 사진과 회화가 겹쳐있는 지점에서 풀려나오며 사진적인 효과를 응용한 회화다. 우선 작가는 자신의 눈에 들어온 특정 나무를 촬영한다. 카메라의 기계적 메카니즘이 잡아낸 시선이고 그 렌즈적 효과로 인해 극단적인 원근의 효과가 강조된 구도이기에 그림의 중심이 되는 전경의 사물에 선명하게 초점이 맞춰져 있고 그 뒤는 마냥 흐릿하게 뭉개져 있다. 
우선 나무의 피부를 재현하는 감각, 기술이 탁월하다. 자신이 촬영한 사진을 단지 묘사 하는 데서 머물지 않고 그로부터 더 밀고 나가 납작하고 미끈하며 오로지 피부밖에 없는 인화지의 질감을 넘어서서 나무 자체가 지닌 물성과 촉각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물질감, 질료성을 적극 살리고 있는 한편 우리가 눈으로 보고 접하는 자연의 색채에 가장 근접한 색을 살려내려 하고 있다. 이는 기존 재현회화, 일반적인 극사실회화의 관습적 틀을 벗어나서 실제 눈으로 보고 느끼는 것 자체에 가장 육박한 그림에 대한 구현이자 한편으로는 오늘날과 같은 디지털시대에 아날로그적인 그리기의 가능성을 다시 모색해보는 시도일 수도 있다. 

 최석우의 정교한 재현술에 기반 한 이 그림은 우리 산천의 어느 한 장소가 사실적으로 호출되어 있다. 이 땅에 사는 이들의 기억 속에 깊게 각인된 이곳 자연의 보편적인 풍경을 호명해낸다. 그로 인해 이른바 한국자연의 풍토성과 특질도 은연중 묻어난다. 이 그림 속에는 적막한 자연만이 존재한다. 인간과 문명의 흔적은 지워졌고 오직 아득한 시간의 무게 속에 영원처럼 자리하고 있는 숲/산과 나무가 있을 뿐이다. 그 풍경은 특정 계절의 추이 속에 멈춰서 있다. 그림의 중심은 단연 나무다. 우리에게 나무란 땅에서 음기를 빨아올리고 하늘에서는 양기를 빨아들이며 호흡을 하고 사는, 천지가 교감하며 삶의 원동력(기운생동)을 생성하는 존재였다. 그런 의미에서 나무는 하늘의 소리와 땅의 소리를 듣고 전하는 신령스러운 존재로 여겨졌다. 우리 조상은 해와 나무를 삶의 근원으로 생각해 왔다. 나무는 땅에서 음기(陰氣)를 빨아올리고 하늘에서는 양기(陽氣)를 빨아들이며 호흡을 하고 산다. 이 말은 나무를 통해 천지가 교감하며 삶의 원동력(기운생동)을 생성해 간다는 걸 뜻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무는 하늘의 소리와 땅의 소리를 듣고 전하는 신령스런 존재이다. 한편 자연은 부단히 변화하는 가운데 스스로를 넘어가면서 무수한 생명들을 산포시킨다. 움직임 속에서 하나의 형태로부터 다른 형태로 쉬지 않고 옮아간다. 그렇게 쉼 없이 움직이면서 기존의 형태를 만들고 부수며 소멸시키고 다시 생성시킨다. 그것이 자연의 본질이다. 고정태가 아니라 생성태이며 한 순간도 머무르지 않으며 부단히 사라지는 허상이다. 인간은 그 같은 자연의 생명 활동을 통해 자신의 생명을 반추한다. 자연의 이 무한영역에 자신의 유한한 생을 은밀히 비춰보는 것이다. 따라서 자연과 생명체들을 본다는 것, 그것들의 생성과 소멸의 과정을 관찰한다는 것은 인간이 절대적 주체의 자리임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무한성의 타자성’에 참여하는 것이다. 아마도 작가는 나무를 바라보면서 그러한 여러 생각에 잠겼던 것 같다. 그러한 사고의 여정을 따라가는 일이 그의 그림 그리는 일이기도 하다. 
 
 작가는 오래된 나무의 껍질, 표면을 통해 그 너머를 생각해본다. 분명 나무의 껍질이 본질은 아니지만 그것은 또한 이면을 상상하게 해주는 불가피한 표면이다. 표면을 통해 무한한 공간을 연상해보고 들어가 본다. 우리는 나무의 피부를 통해 나무란 존재의 본질, 자연의 속성, 생명력 등을 성찰한다. 그림이란 것 또한 부득이 사물의 외피를 주어진 캔버스의 표면 위로 밀착시키는 일이지만 동시에 보이지 않는 내부를, 어떤 이면을 암시하는 일이다. 따라서 그것은 너무 깊은 표면이 된다. 무엇보다도 촉각적인 최석우의 그림은 작가의 몸이 느끼는 사물의 피부 질감, 그 감각을 붓질을 통해 온전히 전달하려는 데 있어 보인다. 촉각적인 회화! 여기서 최석우의 재현적 회화는 보이는 외계의 대상을 극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데서 출발하지만 그것이 대상의 모방으로 귀결되는 것만은 아니다. 그림으로 보여지는 것은 화면 밖의 사물과 유사한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출발하여 더 멀리 가고자 한다. 조형적 재현이 유사를 내포할 수 있지만 그러나 닮았다는 것이 재현으로 귀착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재현에 의해 전적으로 흡수되거나 점령당하지 않는 것이 바로 그림의 세계이지 않을까? 결국 그는 보여지는 그대로의 사실주의적인 형태 이전 혹은 넘어선 그 대상으로부터 촉발된 흔적들의 생생한 감각을 드러내고자 한다. 나무가 지닌 놀라운 시간과 생명력, 그리고 그 껍질을 통해 보이지 않는 무수한 이야기를 시각화하려 하는 것이다. 그 세계로 보는 이들을 유인하고 생각거리를 안겨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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