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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그리고, 본다는 것에 관한 의미 : 주태석 개인전에 붙여

김종근

그림을 그리고, 본다는 것에 관한 의미 : 주태석 개인전에 붙여

임창섭(미술평론)
 
주태석의 <자연-이미지> 연작은 숲을 그린 것이 분명하다. 나무를 그린 것이라고 해도 틀린 해석은 아니다. 하지만 자연에서 볼 수 있는 숲이나 나무를 그대로 캔버스로 옮기려 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사용한 색채도 그렇고 형태도 숲속에서 보았던 우리의 무심한 기억과는 많은 차이가 난다. 그가 숲이나 나무가 가진 형태만을 오롯이 캔버스에 담아내려고 많은 시간을 붓과 씨름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정도는 관람자가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혹여나 이런 상상이나 생각 없이, 그가 대학을 졸업한 뒤부터 1989년까지 발표했던 <기찻길> 시리즈와 같은 범주로 묶어버리는 편견을 가진다면 그의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소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근원적인 의문이자 질문이지만, 첨단과학시대라고 하는 21세기인 지금도 예술에 관해 완전한 답을 여전히 얻지 못하고 있는 것은 “왜 그림을 그리지”하는 것이다. 긴 예술의 역사에서 삼사백 년 전에야 이름을 얻은 미학과 미술사라는 학문도, 겨우 일백 년 넘은 예술학이라는 분야에서도 이 질문에 답을 내놓긴 했지만, “그렇겠지” 할 정도일 뿐인 것 같다. 어떤 사건을 기록하거나, 통치자의 얼굴을 기억하기 위해 조각을 하거나, 아름다운 풍경을 언제든 감상할 수 있게 그린다는 것(여전히 대부분 사람은 그림 혹은 미술이라는 예술을 이렇게 알고 있다.)은 이제 설득력이 없다. 그림보다 더 경제적으로 생생하게, 더 과학적으로 아름답게 기록할 수 있는 수단이 발명되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현실보다 더욱 현실처럼 느끼게 하는 증강현실(AR)이나 가상현실(VR) 기술도 나날이 발전하고 있어, ‘리오타르’가 말하는 시뮬라시옹(simulation)처럼 실재와 가상을 완전히 구분할 수 없을 정도가 될 날도 멀지 않았다. 그림이 무언가를 묘사해 기록 혹은 아름다움을 표현하려는 기술 혹은 저장매체라고 인식하는 것은 21세기에 맞지 않는 오류일 뿐이다.
그리고 ‘본능설’ 혹은 ‘유희설’로 본다는 주장은, 즉 인간본능 중에 그림을 그리려는 혹은 즐기려는 기재가 유전자에 새겨져있다는 답은 대부분 사람에게 동의를 받기 어렵다. 필자도 여기 대부분 사람 중에 포함된다. 단순하게 말해서, 우리의 본능에 미술을 즐기려는 기재가 있다면 카페에 가는 것처럼, 극장에 가는 것처럼 미술관에 가는 것이 일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은 흔하지 않다. 그림을 감상하는 일은 쉽지 않고, 나하고 상관도 없으며 우리 생활과는 거리가 있다고 여긴다. 21세기에도 회화(여기서는 평면작품이라는 의미)가 중요하다는 ‘데이비드 호크니’의 주장은 다른 의미로 말한 것이겠지만, 나름대로 이해하면 대부분 사람들은 그림이라는 예술이 얼마나 우리의 사고와 문화에 큰 영향을 미치는지 알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알리는 주장으로 생각된다. 이런 주장이나 학설이 틀린 것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한때는 아주 적절한 해석이었고, 어느 시기에는 딱 들어맞는 학설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주장들이 누구나 동의하기에 적절하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왜 그림을 보고 그리는지에 대한 21세기 사회와 문화지형에 들어맞는 주장이나 학설이 있을 것이고, 그럴 것이라고 믿는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완전히 동의하기는 어렵겠지만 계속해서 다양한 주장들이 나와야 한다. 그래야 예술행위에 대한 회의(懷疑)가 줄어들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이라고 논리정연하고 진지하게 정의할 수 있는 능력이나 온갖 학설을 끌어다 설득할만한 재주는 없어도, 필자는 무언가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마치 우주 끝에 또 우주가 있고, 그 우주 끝에 또 다른 우주가 있음을 믿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주는 유한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주태석은 80년대까지 <기찻길> 시리즈로, 이후부터는 <자연-이미지>(자연이라고 하지만 나무가 이루는 풍경 이미지라고 말하는 것이 이해가 빠르다) 시리즈를 발표해왔다. 기찻길은 다니던 대학 근처에 철길이 소재였다는 기록으로 보면, 철길을 소재로 해서 그린다는 측면에서는 특별한 이유를 찾을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가 대학을 졸업할 시기의 미술계에 일어났던 현상 중에 하나라고 단순하게 볼 수도 있다. 하지만 특별함이 없는 단순함이라는 것으로 70, 80년대에 미술계를 지배하고 있던 고정적 시각에 대한 관습 혹은 관념에 대한 규범위반을 시작한 것이라고 해석해도 좋을지 모른다. 일상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이 그림 소재가 된다는 생각, 그것도 가능한 보이는 그대로 캔버스로 옮긴다는 의도를 그의 작품에서 읽을 수 있다면, 왜 그렇게 그려야 했는지 궁금할 수밖에 없다. 사실주의라고 부르는 ‘귀스타브 쿠르베’가 아름다운 풍경이 아니고, 상상의 여인도 아니라, 주변에 일어나는 사건과 사람들 그리고 흔한 풍경을 그려서 작품이라고 발표했을 때 관람객들은 편안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인정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 생경함에 익숙해지는 일에, 즉 이미 익숙해진 관습에 대한 위반 혹은 반란이라고 이해하는데 그렇게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쿠르베의 생각은 곧 젊은 화가에게 수용되어 불과 얼마 뒤 인상파가 등장했고, 인상파 그림을 이해하는데 또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따라서 기찻길이, 풍경이, 나무가 소재로 캔버스로 옮겨지면서 아름다움이라는 가치에 대한 반란을 보여준 그림을 주태석이 의도한 것이라고 해석해도 완전히 틀린 주장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해석은 완성된 작품의 결과만을 놓고 본 것일 뿐이다. 이런 해석만으로는 그가 그리는 동안의 노력과 고민은 읽을 수 없다. 예상할 수 있는 그의 고민을 생각나는 대로 늘어놓으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자신만의 그림이 무엇인지 가장 크게 고민했을 것이고 그것을 찾아서 캔버스와 씨름했을 것이다. 이렇게 그리는 게 좋은지, 저렇게 그리는 게 좋은지 수많은 고민의 밤낮을 보냈을 것이고, 저번에는 녹색으로 그렸으니까 이번에는 갈색으로 그리면 어떨까 궁리하고 연구했을 것이다. 스스로 자연에 대한 인식과 해석은 무엇인지, 숲과 나무에 대한 형태와 배치, 색의 사용에 있어서 조화, 여백에 대한 효과 등은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지, 캔버스를 마주한 채 수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 그 속에서 방법을 찾고 그것에 대한 선택 그리고 이어서 수정과 수정, 그마저도 어느 순간 자신의 선택과 방법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캔버스를 아무것도 그리지 않은 상태로 되돌리는 상황을 겪으며 작품을 만들었을 것이다. 무엇을 위해 그렇게 그림을 그리는 것인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그 많은 시간을 자신과 싸우는지 의문을 가졌을 것이다. 이 지점에서 “왜”라는 질문을 할 수밖에 없다. 호기심이 없다면 이 세상은 새로울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예술 장르 중에서 미술, 특히 현대미술만큼 매력적인 것만큼 없다. 우리가 만든 상식이라는 고정관념에 대한 재치있는 반격, 진리라는 것에 대한 또 다른 관점을 표출한다. 그것도 누구나 볼 수 있는 시각적인 기호로 말이다. 그래서 누군가 미술의 역사는 규범을 파괴한 역사라고 정의하기도 했다. 비-정치적으로, 비-강제적으로, 비-지배적으로 기존의 규범에 대한 반추(反芻)를 강요한다. 이런 주장은 아주 적절하다고 여겨진다. ‘마르셀 뒤샹’이 <변기>에 R. Mutt라고 적당히 쓰고 작품이라고 주장한 이후, 현대미술은 규범을 위반하는 것이 그것의 존재목적인 것처럼 이해되었다. 무언가 되돌아보고 그것이 어떤 의미를 담아내고 있는지 무엇을 지시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은 정당한 위치를 확보하고 있는 것인지 혹은 비난을 받아야 하는지 회의하게 만들었다. 이것은 바로 반성(反省, reflection)을 말하는 것이다. 철학사에서 누구보다 큰 업적을 남겼다고 인정받는 ‘프리드리히 헤겔’은 반성의 활동을 통해 자신의 철학을 구상했다고 평가할 정도이니까, 현대미술에서 반성은 현대미술이게 하는 최고의 가치이면서 효과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주태석의 고민은 바로 자신의 작품에 대한 자신의 의식에 대한 자연과 나무에 대한 인식의 반성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림 그리기에서 어떤 의도도 없이 저절로 완성된 것은 이미 그림일 수 없다. 주태석의 <자연-이미지>는 보편성을 언급하지 않는다. 개별적이면서 구체적인 사적(私的) 경험을 축적해서 그림을 그리면서, 스스로 고민(비판과 검토라는 반성의 차원으로까지 진전하면서)하고 반성을 통하여 자연을 재해석한다. 한편으로는 자신의 예술언어가 관람자에게 은밀하게 보편성(이것에 관한 기다란 또 다른 글이 필요하다)을 획득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다. 스스로 자신을 반성하면서 교정하는 자신의 변혁에 관한 활동의 결과가 <자연-이미지> 그림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75)는 1961년 12월 ‘아이히만’ 재판을 직접 지켜본 보고서를 1963년에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보고서>라는 이름으로 출간했다. 여기서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는 개념을 말하는데, 악(惡)은 뿔 달린 악마가 아니라, 사랑처럼 언제나 우리 옆에 있다는 것이다. 평범한 중년남성으로 보이는 그는 ‘난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는 말을 되풀이하면서 자신이 저지른 악행에 대한 반성과 후회는 전혀 없었다. 아렌트는 ‘그는 스스로 생각하기를 포기했기 때문에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인식하지 못했다. 우리에게 악을 행하도록 어떤 계기를 마주했을 때 그것을 멈추게 할 방법은 생각하는 것뿐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아이히만의 잘못은 ‘전적인 생각 없음(sheer thoughtlessness)’과 같은 것이라는 말이다.(문광훈의 <심미주의 선언>에서 참고) 만약 현대미술 작가가 아이히만처럼 누군가의 명령에 의해 그림을 그린다면, 자신에게 혹독한 반성의 기재를 발휘하지 못한다면, 자신이 속한 사회화 자연에 대하여 비판적 의식을 무시하고 그림을 그린다면 예술이라는 장르 자체는 이미 소멸했을지도 모른다. 더 이상 예술의 존재가치는 찾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주태석의 그림은, 그것은 현대회화의 중요한 원리인 반성의 결과로 그려진 것으로 파악하고 이해해도 틀리지 않는다. 그러면 그림을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왜 우리는 예술을 즐기고 보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인가? 결론부터 내리면 정치적, 사회적, 객관적 다양한 경험이 자신에게 어떤 변화와 영향을 끼치는지 생각하는 과정 즉 반성능력을 확대해야 한다. 이런 반성의 기재를 통해 자신의 삶에 관한 판단 혹은 가치, 더 나아가서 자신의 존재목적에 대한 반성 혹은 판단능력을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능력은 완전하다고 주장할 수 없어도, 적어도 우리의 삶에 필요한 정도는 각종의 문화예술 소비행위를 통해서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미술관에 가서 화랑에서 미술작품을 감상하거나 혹은 책으로 미술에 관한 글을 읽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예술을 즐기고 간직해왔던 역사에서 그 증거는 너무나 많다. 다만 그것을 논리정연하게 주장할 만한, 그리고 그것을 이해할만한 주관적 경험과 같은 무언가가 부족할 뿐이다. 
노화랑의 <주태석 개인전>에 전시되는 그의 작품은 자연에 관하여 자신이 느낀 것을 생각하여 만든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개인적인 그리고 개별적인 자연에 대한 경험의 기록인 것이다. 이런 주장에 관하여 혹시, 누군가는 일부 동의할 수도 혹은 전적으로 부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먼저 그가 그린 어떤 한 작품(물론 작품의 구성은 모두 다르지만, 임의로 한 작품을 선택하여 말한다.)을 골라 천천히 들여다보면, 캔버스에서 눈앞에 가장 가까운 곳에 굵은 나무기둥이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나무껍질이며, 옹이가 있는 부분까지 묘사되어 있다. 이 기둥은 캔버스 화면에서 중심역할을 기재이다. 그 기둥에서 뻗어 나온 가지에는 잎사귀가 없다. 뒤에 있는 기둥은 훨씬 간략하게 묘사되었다. 색도 여러 색이 아니라 하나의 색으로만 칠해져 있다. 그 뒤 배경이 되는 먼 나무는 기둥에도 가지에도 잎이 무성하다. 이 역시 간략하게 묘사된다. 그 뒤에 또 나무들이 있다. 이렇게 주태석은 나무로 구성된 숲을 캔버스에서 만들어나가고 있다. 그러니까 그의 작품은 여러 층을 나무로 구분해서 위치해 놓음으로써 캔버스 공간을 3차원으로 전환하는 눈속임을 보여준다. 여기에 색채의 조합이나 배경을 어떤 식으로 나누느냐에 따라 작품 감상의 차원이 바뀐다. 하지만 어쩌면 이것은 관람자가 충분한 미적 경험 혹은 판단훈련이 쌓여야만 눈치를 챌 수 있을지 모른다. 
임마누엘 칸트는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을 저술하고 마지막에 <판단력 비판>을 저술했다. 여기서 비판이라 것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반성과 같은 궤도에 있는 정신활동이며, 판단력은 무언가 옳고 그름 혹은 아름다움(여기서 아름다움만이 아니라 참다움과 선함을 모두 지칭한다. 즉 眞善美를 지칭하는 것이다.)에 관한 판단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판단력 비판’이란 자신이 올바르게 자신의 행동과 인식을 판단할 수 있는 반성의 능력에 관한 것이다. 언어와 사고에서 스스로 교정하여 변화하고 발전하여 최고의 아름다움과 진실에 다가서려는 노력 그것이 판단력 비판이고 이것은 각자의 삶을 성숙하게 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일상은 반복되는 일들의 연속이다. 특별할 것 없는 생활의 반복에서 우리는 맹목적일 수밖에 없다. 더 좁게는 나를 둘러싸고 관계하는 가족과 친척 그리고 친구들이 있다. 그리고 내가 사는 동네와 지역이 있어 이것들에 의해 나를 둘러싼 사회구조가 만들어진다. 우리는 이런 사회구조 속에서 순간순간 선택하고 판단한다. 이런 평범한 일상 속에서 무언가 잃어버린 혹은 목적없는 시간을 보내거나, 한 곳에만 매달리는 맹목적인 집착에 빠지지 않게 우리의 삶을 진전시켜야 한다. 그림을 보거나 감상하는 일이 우리의 삶을 진전시킬 것이라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을 이유도 거부할 이유도 많다. 하지만 지금까지 예술이 존재해왔던 가장 분명한 이유는 여기에 지금까지 존재해왔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미적 체험 혹은 문화소비가 개인의 심미적 경험을 만들어 내고, 그것은 지금까지 언급했던 것처럼 자신을 비판적으로 반성하고 그것을 통하여 새로운 삶의 가치를 모색해 왔던 것이다. 이것만큼 그림을 그리고 본다는 것에 대한 의미를 적절하게 표현한 것은 없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조심스럽게 말하면 지금까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주태석의 그림을 바라보는 관점을 강제적으로 제시한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따지면 우리는 그림을 보는 최우선의 전략은 즐겁게 여유를 가지고 보는 것 이상이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의 그림은 시각적으로 편안한 느낌을 가지게 한다. 어쩌면 이런 태도가 현대미술을 감상하는 적합한 태도인지 모른다. 이 복잡한 세상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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