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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태모 / 사물의 풍경

윤진섭


사물의 풍경


윤진섭 | 미술평론가

Ⅰ. 
 어떤 경우든 작가는 현실과 떨어져 존재할 수 없다. 세상에 태어나 눈뜨면서 본 사물의 이미지를 비롯하여 손으로 만져본 느낌, 냄새, 피부에 와 닿는 감각에 이르기까지, 세계는 늘 작가의 곁에 머문다. 작가가 세계의 곁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작가는 자신을 온전히 객관화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가령, 나뭇잎 하나에 손길을 뻗을 때, 내가 세계에 다가가는 게 아니라 세계가 나에게 오는 것이다. 이 경우, 객관적인 독립적 개체로서 내가 세계와 대등의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마음의 작용은 어떤 세계와 만났을 때 아무리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해도 작은 파문을 일으키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마음의 이끌림은 그런 이유에서 예술작품 탄생의 일차적 계기가 된다. 도대체 이끌리지 않는데 시심(詩心)이 일고, 화의(畫意)가 발생할까? 시심이나 화의는 일종의 파문(波紋)과도 같다. 마음에 이는 작은 파문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커지면서 밖을 향해 뻗어나간다. 이때 작품은 ’잠재태‘에서 ’완성태‘를 향해 창작의 긴 여행을 시작하는 것이다. 
 

Ⅱ.
 천안시립미술관에서 열린 양태모의 전시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작가가 제공한 작업노트는 어떤 연유로 그가 닥(楮)을 재료로 쓰게 됐는지, 왜 캔버스를 피해 유독 오브제나 설치에 매료됐는지 하는 창작심리의 저변에 관한 정보를 제공해 주었다. 또한 유년시절에 겪은, 모친의 죽음으로 인한 정신적 외상(trauma)에 관한 매우 중요한 정보도 담겨 있었다. 이 정보는 양태모의 작품 해석에 꼭 필요한 것들이다. 
 만일 이런 정보들이 없었다면 이 글은 단순히 형식주의적 해석이거나 매체의 분석, 혹은 전시장 분위기에 대한 묘사에 그치고 말았으리라. 그리고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런 정도의 분석이나 해석으로는 작품의 진면목에 가까이 다가갈 수 없다. 


Ⅲ.
 여기서 양태모의 성장과정과 배경에 대해 잠시 살펴볼까 한다. 그는 작업노트 중 제1기에 해당하는 <To Nature>(1994-2000) 시리즈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자신이 ‘서해가 바라다보이는 시골 외딴집’에서 태어났음을 암시하고 있다. 이 시기에 양태모가 제작한 <알콜중독>, <황세골 예언자>, <술항아리> 등등의 작품들은 개인적인 추억에 바탕을 둔 것으로 제목으로 미루어봐서 성장과정에서 경험한 가정사가 낳은 심리적 상처와 관계가 깊다. 이번 전시에 이 무렵에 제작한 작품인 <달에 메고>(1996)가 출품됐는데, 철판, 철사 등 오브제에 채색을 가한 이 작품의 등장인물은 헝클어진 머리에 비틀거리는 듯한 몸짓을 보이고있어 ‘술취한’ 상태로 짐작된다. 하늘에는 초승달이 떠있고 철사로 된 머리카락이 달에 맞닿아 있다. 

 청년기의 정신적 방황을 암시하는 듯한 이 작품은 1996년에 제작한 <알콜중독>, <황세골 예언자>와 연작을 이루는 것으로 세 작품 모두 술에 취한 남자들의 모습을 다소 유머러스하게 묘사하고 있다.


Ⅳ.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양태모는 회화적 재현과 물성과의 결합을 통해 재현과 사물 간의 관계를 탐구하는 쪽으로 나아가게 된다. <정원연작>(2000-2010)은 삶의 체험을 다양한 물질을 통해 녹여낸 작품들이다. 작가가 인공정원을 만드는 과정에서 보고 느낀 체험이 주를 이루는 데 나무판에 아크릴로 꽃과 풀을 정교하게 그리고 그 위에 투명 에폭시 수지로 코팅을 하는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양태모는 실제와 재현, 사물이 지닌 실재성과 그 위에 묘사된 이미지 사이의 간극에 대한 질문을 하고자 하는 것이다. <To Nature>(2006)와 <A Garden-무위자연>(2006)이 이러한 경향의 작품들로써, 다 같이 자연을 소재로 하되 나무의 물성을 살리면서 마치 프레스코 벽화처럼 약간 담채 스타일로 대상을 묘사하고 있다. 따라서 이 작품을 보는 관객은 바탕과 그 위에 그려진 대상을 거의 대등한 시각적 관계로 파악하게 된다. 꽃과 풀의 존재감을 두드러지지 않게 묘사하는 동시에 나무판의 결이나 갈라진 틈 또한 관객의 시야에 들어오게끔 면밀히 배려하고 있다. 물로 씻어내고 다시 그리는 숱한 반복의 과정을 통해 작가는 마치 유년시절의 상처가 낳은 “기억의 집요함과 기억으로 인한 피해의식을 닦아”(작가노트)내기라도 하듯, 노동을 행하는 것이다. 


Ⅴ.
 제3기는 2010년에서 현재에 이르는 기간이다. 양태모는 이 시기에 들어서면서 ‘무위자연’의 주제를 더욱 강하게 밀고 나간다. 노자 철학의 핵심인 ‘무위(無爲)’는 말 그대로 ‘하지않음’을 이름이니, 자연과 짝을 이루어 우주의 본질을 드러낸다. 이 말 속에는 세계가 본성대로 운행되니 다치지 말고 그대로 두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노자는 “우주의 근본은 질서‘라고 갈파했다. 

 이 시기에 이르면 양태모의 작업에 큰 변화가 찾아온다. 물(物 : Thing)을 재료로 사용하되 가급적 가공을 하지 않고, 사물의 본성, 즉 물성(物性)을 살리는 방향으로 작업이 이루어지게 된다. 대표적인 재료가 닥(楮)이다. 

 양태모의 유년기 추억과 관련된 닥은 중심적인 재료이다. 작가의 말에 의하면 모친은 그림 그리기를 즐긴 이상주의자였는데, 결혼 후 모시 껍질과 닥 껍질을 다듬는 힘든 노동을 평생 에 걸쳐 했지만, 중년의 나이에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였다고 한다. 여기서 모친의 불운한 생애가 작가에게 내면화됐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모친의 죽음이 유발한 심리적 트라우마는 작가에게 평생 지울 수 없는 멍에였을 것이다. 예술이 대리적 꿈이라는 사실은 양태모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모친의 생애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닥이 작품의 소재로 등장하게 되는 것은 그러한 마음속 상처와 관계가 깊다. 


Ⅵ. 
 비록 ’무위자연‘이라고 했지만, 작품의 양태가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사물의 표정이 있기 때문이다. 닥을 얇게 펼쳐서 긴 직사각형의 형태로 벽에 걸거나, 캔버스 위에 비정형의 형태로 닥의 뭉치를 고착시킨 작품들은 일종의 풍경의 의미로 다가온다. 이 작품들은 모종의 표정을 지니거나 혹은 어떤 짐승이나 나뭇잎 등을 연상시킨다. 사물이 자아내는 이러한 풍경들은 유기적인 형태로 기둥처럼 천정을 향해 뻗은 조각작품이나, FRP로 제작한, 마치 두꺼운 이불을 무작위로 개 놓은 듯한 입체작품에 잘 나타나 있다. 

 물론 여기서 양태모의 작품이 풍경처럼 읽히는 이유는 그의 작품이 공간에서 차지하는 위치 때문이다. 양태모의 작품이 일정한 면적과 부피를 지닌 오브제나 설치작업으로 돼 있다는 사실, 또한 양괴와 부피를 지닌 작품들이 배경을 이루는 전시공간 안에 놓여있다는 점을 주목해 볼 일이다. 

 최근 들어 양태모는 반짝이는 시퀸을 모자이크 기법으로 거대한 비정형 형태의 구조물에 부착하여 빛의 요소를 도입하는 작업을 시도, 이번 전시에 출품하였다. 그의 이번 전시는 재료의 다변화와 자유로운 형태의 도입 등 조각과 회화, 공예 간의 경계를 해체하는 작업을 통해 예술의 또 다른 영역을 찾아나가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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