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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순의 1990년대 작품들에 대하여

하계훈




장성순의 1990년대 작품들에 대하여

하계훈 | 미술평론가



한국 미술에 있어서 추상화의 1세대라고 볼 수 있는 장성순 작가의 이력이나 활동 기간을 고려해 볼 때 우리는 이 작가에 대한 평가가 소홀하였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장성순에 대한 학문적 연구나 평론가들의 평가는 이에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우리 미술사의 격랑 속에서 장성순이 작업의 초기부터 일관되게 추상작품을 고수하여 나아감으로써 전통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고자 하는 의지를 시각화하였고, 이성과 논리보다는 직관과 감각에서 출발하여 순수 추상의 결정체에 도달한 업적을 높이 평가 받아야할 것이다. 

장성순은 일관되게 추상적 표현을 유지하면서 두 가지 관심사를 작품 속에 담아왔다. 그중 하나는 질료적 관심에서 시도하는 콜라주나 스크래치 기법 등의 회화 표면의 표정에 관심을 집중하는 시도이며, 또 다른 하나는 표현 형식에 있어서 추상표현주의 혹은 앵포르멜 미술을 연상시키는 창작 행위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두 가지 창작의 축은 한 쪽에 대한 관심이 다른 한 쪽에 대한 관심보다 많아지다가 다시 그 반대로 전환되면서 시계추처럼 교차하면서 장성순의 작품 속에 반영되어 왔다. 그리고 창작의 후반부에는 두 가지 요소가 한 화면 안에서 병렬식으로 결합되고 가독성이 낮은 문자를 통해 추가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듯한 시도가 가미되는 종합적 화면으로 완결되는 성과를 낳았다.

장성순이 반세기 가까이 추구해 온 추상의 근간에는 서예적 전통과 황색과 청색 계열의 색채를 중심으로 그 색들의 혼합과 응용이 작품의 기저에 자리 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장성순의 경우 청년시절까지 아직 서구의 문화가 본격적으로 유입되지 않고 서예의 전통이 학습과 자아형성의 중요한 과정이었으므로 자신의 작품에 서예 기법을 도입한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서(書)와 화(畵)가 엄격하게 구분되지 않고, 특히 서구의 경우와 달리 문학과 시각예술의 표현수단이 분리되지 않은 서예를 통해 서화 훈련을 받은 세대가 추상미술이라는 서구적 조형어법을 수용함에 있어서 가장 진솔하게 자신을 표현하기 위하여 동원하는 방법으로 서예를 바탕으로 하는 표현을 선택한 것은 가장 자연스러우면서도 당연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장성순의 작품 세계 전개과정에서 연관성 중심으로 추론해보면 이탈리아의 첼란트(Germano Celant)가 시작한 아르테 포베라(Arte Povera), 안토니오 타피에스(Antonio Tapies)와 피에르 술라주(Pierre Soulage)의 작업에 대한 관심 등을 통해 물성과 행위에 대한 관심을 작품 속에서 실험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뿐 아니라 입체파 화가들이 관심을 가졌던 공간의 분석과 다시 분석된 공간을 종합하는 의미에서의 콜라쥬나 스크래치 기법보다는 작가 스스로가 언급한 적이 있는 것처럼 대상에 대한 관찰로부터 떠오르는 생각의 내면화를 이루어가는 작가 자신의 고유한 조형 방법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장성순의 1990년대의 작품들에서는 작품의 표정과 함께 표면의 질감과 물성에 대한 작가의 관심이 상당부분 반영된다. 장성순은 어린 시절 중이염을 앓고 난 후 왼쪽 귀의 청력을 잃어버림으로써 청각을 대체할 시각이나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려는 태도가 자라난 것과, 이 무렵 돌의 질감과 표정에 각별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였다. 따라서 화면의 질감에 대한 관심은 작가의 이러한 개인적 환경 및 이력과 연관되어 해석될 수 있으며 이제까지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이점을 강조한 바가 있다. 작가는 돌의 표면 질감에서 물성에 대한 감성적 공감을 느끼는 데 그치지 않고 돌 표면의 표정에서 서예의 획과 유사한 이미지를 발견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 점은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포인트를 형성한다고 볼 수 있다.

장성순의 작품과 추상표현주의나 앵포르멜 등의 작품들이 유사성의 수준에서 동시적인 표현으로 보아야할 지 아니면 상호 영향관계를 살펴야 할지를 좀 더 면밀하게 검토할 필요성을 제기해준다. 1950년대 말 작가가 서울에 있는 미국문화원에서 타피에스나 술라주의 화집을 발견하였다고 하지만 당시의 인쇄 상태나 편집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 수 없고, 1993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작가의 회고전을 계기로 인터뷰를 했던 술라주 자신도 자신의 작품과 서예와의 연관성을 부정하는 인터뷰를 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1990년대 장성순의 작품들은 작가의 작품 주기로 볼 때 한 차원 도약을 위해 필요한 새로운 방향을 다방면으로 모색해가던 시기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장성순이 이 기간 동안 두 차례의 개인전을 갖는데 그쳤다는 사실로도 간접적으로 뒷받침될 수도 있을 것이다. 1990년대는 정치적으로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 등의 변동이 시작되었으며, 이어서 각종 비엔날레의 출범, 미술시장의 활기 등이 전개되던 시기였다. 그러나 국내 미술계에서는 소위 민중미술 계열과 모더니즘 계열의 대립이 마무리되어가면서 새로운 방향성을 모색하는 시기를 거쳐 ‘세계화’라는 모호한 개념을 쫓아서 정부가 앞장서서 문화예술을 지휘해 나아가던 시기였고, 국제적인 미술계에서는 영국의 yBA나 미국과 일본의 팝 아트가 주류를 이루며 미술계와 시장을 이끌어가던 시기였던 만큼 장성순의 추상 작품과 같은 양식의 작품들은 (물론 장성순이 원하는 바도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미술계의 전면에 나아가 자리를 잡을 정황이라고 보기 어려운 시기였다. 

1990년대 작품에서 장성순은 기존의 표현과 더불어 전통 서예에서의 갈필(渴筆)의 느낌과 그로부터 나타나는 비백(飛白)의 효과나 그래피티적인 긁어내기 효과, 드리핑 기법, 그리고 서양미술에서 초현실주의 작가들이 도입했던 프로타주 기법을 떠올리는 표현 등으로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음이 발견된다. 장성순이 표현 기법의 다양성을 모색하였다는 것은 그가 2003년 인터뷰에서 밝힌 적이 있는 것처럼 작가 활동 초기에 화면에 테레핀 기름을 뿌리고 불을 붙여 그을음을 만들었었다고 이야기한 것이나 1980년대에 한지를 화면에 붙이는 방식으로 작업해 온 사실 등을 볼 때 창작의 초기부터 이러한 관심이 높았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이와 함께 색채에 있어서도 이전의 시기보다 다양성을 확보하고자 하였으며 시각적으로 화면의 분할과 프레임 속에 다시 작은 프레임을 구획하는 등의 시도를 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러한 화면의 분할과 구획은 비슷한 시기에 미국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데이빗 샐리(David Salle)와 같은 신표현주의 작가들이 즐겨 사용하던 대표적인 방법들 가운데 하나인 점도 살펴보아야 한다. 다만 이들의 작품들은 오히려 이전의 추상에 대한 반작용에서 시작된 것인 만큼 기본적으로 반추상적이라는 점에서 장성순의 추상 작품들과의 공통점을 찾을 수는 없을 것이며 무엇보다도 양자간의 직접적인 교류나 접촉이 확인되지는 않고 있다.

1990년대가 장성순에게 다양한 모색과 실험의 시기였다면 이 시기를 지나온 작가의 작품에서는 이러한 실험들이 종합되는 시기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2000년 이후의 작품들은 이전 시기의 몇몇 작품들처럼 화면의 큰 프레임 속에 작은 프레임을 설정하는 작품들이 많은데 작은 프레임 속에서 붓놀림의 유체성(流體性)이 자유롭게 펼쳐지는 것을 외부의 프레임이 차분하게 진정시키는 듯한 구조의 작품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해석에는 바깥 프레임을 형성하는 화면의 회색 톤이 만들어내는 차분함도 한몫을 한다고 생각된다. 특히 이 시기의 작품들은 외곽의 프레임이 마치 그리스시대의 석비(石碑)를 연상시키면서 장성순이 어린 시절부터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아왔던 돌이라는 오브제가 새로운 형식으로 등장한다는 해석을 가능하게 해준다.


작은 프레임 속에서 붓놀림의 유체성(流體性)이 조심스럽게 프레임의 경계를 넘어서는 작품들은 2009년의 황색 계열의 작품들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 시기의 작품들은 이전보다 더욱 붓의 움직임이 과격해지고 마치 작가의 손이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붓의 흔적이 격렬하게 움직이는 화면을 발견할 수 있다. 부분적으로 물감이 뿌려지기도 하고 세련된 쾌속의 붓의 움직임이 느껴지기도 하며, 또 부분적으로는 사군자의 난이나 대나무를 염두에 두고 붓이 움직인 것 같은 형상을 떠올리게 해주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격렬성 역시 화면의 바깥까지 충분하게 확대되지는 못하고 작은 프레임을 약간 넘어서는 수준에서 그 격렬성의 에너지를 가두어두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시기의 작품들은 기법적으로도 이제까지 장성순이 구사해 온 다양한 기법이 적재적소에 도입되면서 작품의 세련미를 완성시켜 나아간다는 인상을 준다. 여기에 또 하나의 특징을 찾아본다면 이전보다 많은 경우에 작품 속에 문자가 도입된다는 점이다. 다만 이 글자들이 해독 불가능함으로써 모호함을 더해주고 있는데, 우리는 장성순이 젊은 시절 미술대학 진학에 앞서서 문학과 신학에 관심을 가졌었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2009년작 <추상 14>라는 제목이 붙은 작품에서는 큰 화면 속에 두 개의 작은 화면이 같은 크기로 아래위로 배열되어 있고 윗부분에는 격렬한 붓의 움직임을 담은 그림이, 그리고 아랫부분에는 이와 대조적으로 해독이 가능하지 않은 문자로 추정되는 조각들이 화면을 가득 메우고 있다. 작가는 이러한 문자의 배열을 불완전한 청력에서 오는 외부와의 소통을 위한 자신만의 ‘마음의 언어’라고 명명하고 있다. 이것은 작가의 두 가지 관심사인 회화와 문학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일 수도 있으며 감성과 지성, 혹은 디오니소스적 열정과 아폴론적 조화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작품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결론적으로 “타피에스도 아니고 술라주의 것도 아닌 장성순의 것”을 추구했던 작가의 예술세계는 이처럼 시대의 아픔과 고난의 질곡을 넘어서고, 개인의 환경과 상황을 작품속에 녹여냄으로써 자신이 추구하는 미학의 완성을 위한 긴 여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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