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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비평〕신진작가전 FLUXUS'12 / 유목주의로 ‘소수자-되기’를 실천하는 커뮤니티아트

김성호

〔전시비평〕

신진작가전 FLUXUS'12, _유목의 다섯 가지 과제들,

(2011. 11. 11-19, 커뮤니티 스페이스 리트머스)




이미지로 ‘되받아 쓰기’와 유목주의로 

‘소수자-되기’를 실천하는 커뮤니티아트



김성호(미술평론가)




안산시 원곡동은 대한민국 속 이방인들의 땅이다. 아니 이곳은, 고국에서의 부유(富有)한 삶의 미래를 기약하며 얼마간의 쓰디쓴 노동을 감내할 것을 결단한 제3세계의 외국인들이 입국해 부유(浮遊)하고 있는 ‘한국 속 이방인들의 나라’이다. 즉 부유(富有)를 위해 부유(浮遊)하고 있는 ‘유목의 땅’이다. 그들에게 노동의 값진 열매란 단순한 지표 ‘경제적 자본’으로 환원될 뿐이다. 그것은 그들이 한국에서의 평온하고 안락한 삶의 질을 포기하고 얻는 눈물의 대가(代價)이다. 그것은 인종적 차별, 불평등, 인권 유린에 굴복하면서까지 지키고자 하는 그들의 마지막 보루이다. 돈을 위해 소수자의 삶을 인내하며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그들에게 예술은 어떠한 답이 될 수 있을까?


여기 4인과 1팀의 한국의 신진작가들이 꾸미는 ‘《신진작가전 FLUXUS'12, _유목의 다섯 가지 과제들》에는 안산시 원곡동이라는 신(新)영토에 대한 젊은 예술가들의 해석들로 충만하다. 그들이 제시하는 유목의 5가지 과제들은 더러는 감각적이고 주관적인 해석의 수면 위를 걷거나 더러는 사회과학적인 리서칭과 객관적인 해석의 깊은 심연으로부터 끌어올려지기도 한다. 또한 그것은 그 양자의 사이를 오고가는 것이기도 하다.


이번 전시는 이미 원곡동 곳곳에서 진행되었던 현장 프로젝트에 대한 결과 보고전의 성격으로 꾸며졌다. 그만큼 대중 참여와 상호작용을 이끌어내었던 현장 프로젝트 당시의 생생함은 둔화된 감이 있지만, 주제 ‘유목’에 관한 다양한 해석을 시도했던 개별 프로젝트들을 한꺼번에 일괄해 볼 수 있다는 차원에서 주제 의식에 대한 관객들의 성찰은 극대화된다.


                                                      리트머스 커뮤니티 스페이스






예술 매개체들과 함께 유목하는 소통 주체들

김태균의 <원곡동 얼음캠프>는 매우 단순하다.


그저 60개의 얼음 덩어리를 폭염의 여름 원곡동의 주민들의 공간으로 쏟아낸 것이다. 거기에는 어떠한 프로그램도 없고 거기에는 어떠한 이념의 개입도 없다. 다만 얼음이라는 촉지적 감각만이 담겨 있을 뿐이다. 그것은 산업의 최전선에서 구슬땀을 흘렸을 이방인 주체들과 그들과 함께 호흡해온 원주민 주체들이 한 자리에 모여 흐르는 땀을 씻어 내리는 커뮤니케이션의 공간이다. 그것은 또한 유목의 힘든 여정들을 잠시 멈추고 각자의 시름들을 한순간에 날려버리고 쾌(快)를 만끽하는 치유의 공간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김태균에게 있어 얼음이란 이주민과 원주민들 사이에서 외국인과 한국인들 사이에서 서로에게 생긴 앙금과 불화를 녹여주는 치유의 매개체가 된다.


2012년 한 여름날의 프로젝트를 사진 아카이빙으로 전달하는 이번 전시에서 관객들은 자신의 몸을 소멸시켜가며 헌신하는 김태균의 얼음의 매개미학이라는 것이 즉발적인 촉지로부터 하나의 유의미한 소통의 메시지로 전환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십분 경험하게 된다.



                                                          김태균,  <원곡동 얼음캠프> 





유목연의 <목연포차>는 또한 어떠한가?


유목연은 캠핑 자전거와 카트를 개조해 이동하는 간이형 선술집을 고안하고 여기에 손님이자 관객들인 타자들을 초대한다. 포차(포장마차)란 음식을 매개로, 낯선 이들이 오고가는 소비의 공간이지만, 예술작품화 된 그의 포차란 한 주체와 다른 주체가 함께 나눔을 실천하는 커뮤니케이션의 장(場)을 지향한다. 여기에는 먹고 마실 음식과 다양한 대화가 오고간다. 이러한 나눔과 소통의 장에는 친밀함의 공유가 전제된다. 이곳에서는 낯선 이들이 음식을 매개로 형성하는 친밀한 관계와 더불어 그것에 관한 실천들을 다각화한다.

특히, 작가 유목연은 자신의 이름을 딴 ‘목연포차’라는 이동하는 매개의 공간을 통해서, 유목하는 도시인들의 삶을 은유한다. 나아가 안산 원곡동이라는 특수한 공간에서 펼치는 퍼포먼스적 행위를 통해서(실제 작가는 다른 도시 공간에서 이 작업을 펼치기도 했다.) 외국인 노동자와 한국인 노동자가, 이주민과 정주민이 서로의 낯선 관계를 친밀함으로 개선하면서 소통의 리좀적 관계를 맺어나가길 희망한다.


김태균과 유목연의 바람대로 소통의 성취란 가능한 것일까?


                                                              유목연, <목연포차>





되받아 쓰기

후기 식민 지배자들은 여전히 지배의 헤게모니를 공고히 하고 정당화하기 위해서 피지배자들을 간섭하되 문화의 힘으로 교묘히 위장한다. 여기에 피지배자들은 버리려 해도 버릴 수 없는 식민 지배자들의 언어를 훈련하고 습득하면서 피지배의 질서 속에 길들여진다. 문화와 언어는 민주주의의 불투명한 망토 아래서 식민지배의 질서를 공고히 하는 심층의 정치학이자 그것의 도구이기 때문이다.


여전히 미국의 후기식민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한국이 거꾸로 제3세계의 이주민과 노동자를 대상으로 벌이는 후기식민 지배의 만용은 어떠한가?


임민영은 이러한 질문 속으로 들어와 안산시 원곡동이라는 공공의 공간에서 피지배자들의 망각된 언어들을 되살린다. 〈자장가들〉이라는 작품이 바로 그것이다. 파키스탄, 우즈베키스탄, 베트남, 몽골 등 각기 국적이 다른 제3세계의 여성들이 자신들의 아이를 껴안고 자국의 언어로 전통적인 자장가를 부르는 방식으로 말이다. 그들은 각자 다른 동기와 컨텍스트 속에서 한국에 들어왔지만 동일하게 한국 남성들과 결혼한 제3세계 출신의 이주민 여성들이다. 그녀들이 자신들의 언어로 나직하게 부르는 자장가란 피지배자들의 사적 언어임과 동시에, 후기식민지의 지배자들로부터 억압받아온 후기식민 피지배자들의 공적 언어가 된다.


아쉽게도 제3세계 피식민자들의 이러한 언어 사용은 후기식민 지배자들의 지배이데올로기를 온전히 깨쳐내지 못한다. 즉 한국의 지배이데올로기에 저항하지 못하고 그저 베트남, 몽골의 전통적 정신 속에서 도피의 안식처를 잠시만 누릴 뿐이다. 그것은 그들에게는 영원한 타국인 한국에서 삶의 고단함을 누일 임시의 도피처로 기능할 따름이다. 그럼에도 임민영은 이러한 일련의 퍼포먼스를 통해서 이들의 한국에서의 애환이 치유되길 갈망한다. ‘한국인 아닌 정체성’과 이주민으로서의 고단한 삶을 공유하는 이들끼리 서로의 애환을 나누고 치유하는 소통의 장이 되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임민영의 이러한 퍼포먼스는 한국적 사회에서 늘 대상화되고 객체화되었던 이들에게 제3세계 이주민들이라는 정체성 속에서 망각된 주체를 되살려내는 작업이 된다.






                                                         임민영,〈자장가들〉




그러나 생각해보자. 진정한 탈이데올로기는 도피가 아니라 저항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에쉬크로프트(Bill Ashcroft)에 따르면, 지배문화는 ‘표준 언어’를 규범으로 내세우고 다른 모든 언어들을 불순한 것으로 규정한다. 후기식민적 지배문화는 피지배 계층의 저항을 무력하게 만들고 그들을 지배문화에 동화시키기 위해 그들의 언어를 빼앗는다.


따라서 관건은 빼앗긴 언어를 되살리는 작업을 지배언어를 해체함으로써 시도하는 일이다. 즉 후기식민 지배자들의 정전화 된 언어와 텍스트를 비판적 해석으로 다시 읽고 자신의 언어와의 교착, 병행과 같은 새로운 어법으로 다시 씀으로서 지배담론을 역이용하거니 비판하는 글쓰기를 주창한다. 에쉬크로프트의 ‘되받아 쓰기(writing back)’가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후기식민 피지배자들의 저항적 전략은 후식식민 지배자들의 지배이데올로기를 문화정치적으로 해체하고 전복하는 글쓰기이다. 여기서 주요한 것은 식민자들의 '텍스트적 통제를 자신들의 언어가 아닌 지배자들의 언어를 구사하되 그것을 해체하고 전용함으로써 텍스트성(textualité)의 무기로 저항한다는 것이다.






한지혜의 <출입사무소>는 이러한 피식민 지배자들의 텍스트적 저항에 대한 욕망을 잘 담아낸다. 그녀는 이러한 욕망들을 가시화시키는 방식의 작업 보다는 거꾸로 이들의 욕망을 억누르는 후기식민 지배자들의 텍스트적 통제의 현실을 여실히 보여주는 방식으로 그것을 부추긴다. 이것을 위해 작가는 거리가 시작되는 지점에 관공서를 가장한 이동사무실을 세운다. 그곳에서 작가는 외국인의 ‘출/입’을 허가하는 공무원의 신분을 가장하는 퍼포먼스를 행한다. 그 ‘출/입’의 허가 기준은 서류의 몇 가지 물음에 대한 답변으로부터 시작되고 종결된다. 즉 지배자의 언어인 한국어에 대한 충실한 읽고 쓰기를 통해서 지배계급의 통제, 조정에 저항하지 아니하고 충실한 식민 피지배자의 입장에 순응할 의향이 있는지와 그것에 대한 자격 여부를 판단하는 것이다. 지배자들의 원하는 대답을 적은 서류를 제출한 이들에게는 ‘베스트 시티즌(Best citizen)’이라는 허가증이 발행된다. 다문화로 치장된 이러한 통제와 조정의 이데올로기는 다음과 같은 작가의 물음으로부터 그들의 저항의식을 독려하기에 이른다.


“누가 개입할 수 있는가? 누가 허락하는가? 무엇을 구분 지을 수 있는가?”


스스로 강자 혹은 후기 식민지의 지배자를 자청하는 작가의 텍스트를 통한 역할놀이는 그런 면에서 다문화의 이면에 은폐된 지배이데올로기를 드러내면서 그것이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되묻는다. 그럼으로써 본질적으로 경계란 없으며, 그것이 있는 것처럼 그려진 까닭은 정치적 힘들로부터 기인한 다중 개념 때문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따라서 우리는 작가가 만들어놓은 '베스트 시티즌‘을 ’논베스트 시티즌(non-best citizen)과 교차하는 다중 개념으로 풀어 이해할 일이다. 이것은 지배문화의 ‘식민화의 심리학’에 대항하면서 ‘존재의 탈식민화’를 시도하는 피지배자들의 일련의 저항의 텍스트성이 작동하는 지점이 된다.




                                                           한지혜, <출입사무소>






이미지로 되받아 쓰기

그렇다면, 피지배자들의 ‘저항의 텍스트성’은 기의(Signifié) 없는 기표(signifiant)만으로도 실천될 수 있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을 우리는 2인으로 구성된 그룹 ‘시도들(sidodeul)'의 작업들에서 찾아볼 수 있겠다.

이들은 원곡동 외국인 주민 센터에 걸려있던 만국기를 내리고 그 자리에 어떠한 국기 이미지를 연상할 수 없는 텅 빈 기호만이 남은 흰색의 깃발들인 <Nothing Flag>를 내걸었다. 그녀들이 여기에 부여한 의미는 보이드컬쳐리즘(Void culturism)이다. 다문화로 제시되는 멀티컬처리즘(Multi-culturism)에 대한 대안적 개념으로 제시된 이것은 완전한 수평성의 지평으로 지금의 원곡동을 만들 수는 없는가에 대한 비판적 문제 제기가 된다. 즉 채우기만을 거듭하면서 합치할 수 없는 이종 혼성의 다양성을 만들어내는 이러한 다문화를 그저 ‘텅 빈’ 기호의 바탕 위로 되돌려 다시 사유하자는 전복적인 제스처가 된다. 우리는 이것을 에쉬크로프트의 ‘되받아 쓰기(writing back)’의 개념을 빌려와 ‘이미지로 되받아 쓰기’하는 작업으로 풀어볼 수 있겠다. 전자가 지배문화의 텍스트를 해체하고 전유함으로써 탁식민화가 가능해지는 것처럼, 후자는 지배문화의 이미지를 해체함으로써 탈식민화를 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녀들의 <Nothing Flag>라고 하는 텅 빈 기호들은 우리로 하여금 제3세계 국가들의 문화적 수평을 통한 화해를 그려보게 만든다.



                                                      시도들(sidodeul), <Nothing Flag>




그러나 복잡다기한 멀티컬처리즘의 질서를 재편하기보다는 백지의 상태에서 다시 민주적이고 수평적인 지평 속에서 질서를 재구축해내길 기대하는 작가들의 소망은 요원할 수 있다. 그녀들의 작업에서 해체의 방법으로 펼치는 예술의 이상론이 실천의 담론보다 앞서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녀들의 작업에서 해체란 때론 실천적 담론을 모색하기도 한다. 작업<lightON-journey>는 그러한 시도의 일환처럼 보인다. 안산 원곡동의 다문화적 풍경들을 촬영한 사진들에서 빈번하게 나타는 색들을 통계의 방법으로 추출하고, 그 결과로 선정된 색들을 활용해 페인팅으로 남기는 작업이 그것이다. 이 작업에서 풍광에 나타난 애초의 고유의 색들은 해체되지만, 작가들은 페인팅 속에서 그것들을 재배열하고 ‘다시 쓰기’함으로써 칼라들의 개별 정체성들을 되살려낸다. 개별 칼라들이란 다름 아닌 원곡동 제3세계 이주민들과 노동자의 정체성으로 은유된다. 이러한 작업은 지극히 개념적으로 제시되는 것이긴 하지만, 다문화에 관한 예술적 실천적 담론을 재기발랄하게 사유하는 모색이 된다.





                                      시도들(sidodeul),< The colors of Wongok-dong>



                                           시도들(sidodeul),< PARADISE to analyze the image>






‘소수자-되기’를 실천하는 커뮤니티아트

타국에서 경제적 자본을 획득하기 위해 번잡하고 비루한 도시의 일상을 사는 이주민들과 이주 노동자들은 안산시 원곡동의 거주민들만이 아니다. 세계 도처에 이들은 있다. 거꾸로 한국인 역시 다른 나라들에서 다르지 않게 살아간다. 삶의 질이 원곡동의 이주노동자들과 다른 점이 있다 할지라도 그들 역시 이방인으로 부유하는 유목민의 정체성으로 살아가야만 한다.


타국의 지배 문화 속에서 자신들의 임시적 삶(더러는 영구적 삶)을 살기로 선택한 이들은 영원한 소수자(minorités)일 수밖에 없다. 한국의 땅에서 커뮤니티아트를 실천하는 작가들은 이러한 소수자에 대한 관심을 ‘소수자-되기(devenir-minoritaire)를 체험함으로써 모색한다. 예술가 역시 도시 경쟁 속 소수자이지만, 탈식민주의적 세계 속에서 겪는 피지배인으로 겪는 소수자의 입장은 체험하지 않고서는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이들은 커뮤니티아트라는 예술을 매개로 소수자의 입장을 대리 체험한다. 이른바 ‘소수자-되기’를 체험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지배계급과 지배문화에 자리한 마조리테의 상징권력을 우리가 폭력으로 인식하지 않는 한 ‘소수자-되기’의 실천은 무력한 것이다. 경제적 자본과 문화적 자본의 불평등의 기원을 이들 제3세계 이주민들과 이주노동자로부터 더듬어 모색해나감으로써 우리 시대에 도래한 다문화주의를 커뮤니티아트로 화해시키고 치유해나갈 과제가 오늘날 신진 예술가들에게 업보처럼 남겨져 있다.


그런 면에서 안산시 원곡동을 이러한 화해와 치유의 장으로 설정하고 다양한 리서칭과 프로젝트로 진행한 〈신진작가전 FLUXUS'12, _유목의 다섯 가지 과제들〉은 오늘날 한국 현대미술의 균형과 건강성을 마련한다는 차원에서 매우 유의미한 사건이다. ‘커뮤니티 스페이스 리트머스’가 앞으로도 이러한 ‘이미지로 되받아 쓰기와 유목주의로 소수자-되기를 실천하는 신진작가들의 커뮤니티아트’를 지속적으로 지원하고 활성화시켜나가길 기대한다. ●



출전 /

김성호, '이미지로 ‘되받아 쓰기’와 유목주의로 ‘소수자-되기’를 실천하는 커뮤니티아트', 전시카탈로그, (신진작가전 FLUXUS'12, _유목의 다섯 가지 과제들, 2011. 11. 11-19, 커뮤니티 스페이스 리트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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