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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작가론│이봉상 / 이봉상의 구상 회화에 나타난 환원적 자연주의 (상편)

김성호

이봉상의 구상 회화에 나타난 환원적 자연주의 (상편)

김성호(미술평론가)


I. 들어가는 말
이봉상(李鳳商, 1916-1970)은, 1916년, 병진년(丙辰年)생의 많은 작가들이 그러했듯이, 한국의 근대미술에 있어 싹을 틔우는 주요한 위치를 점유하는 작가이다. 대한제국이 멸망하여 나라 잃은 일제의 식민으로 태어나 양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민족의 해방을 시작으로 이어진 미군정, 남한만의 정부 수립 그리고 민족의 분단을 생생하게 목도하면서 고난을 지속적으로 거치는 대한민국의 허리 세대가 되었던 까닭이다. 
그가 태어난 1916년 당시는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인 고희동이 도쿄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공부하고 1915년 귀국한 이래 휘문학교에서 서양화를 가르치고 있을 때였다. 또한 김관호가  1915년 동경미술학교를 수석 졸업한 후, 일본 문부성(文部省) 주최 제10회 《문전(文展)》에 작품 〈해질녘〉을 처음 출품하여 특선으로 입선한 때이기도 하다. 또한 나혜석이 일본 도쿄 사립여자미술학교 서양화부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이기도 하다. 그가 성년이 되었던 1930년대 중반은 근대 미술의 다양한 기술과 정보가 수입되어 활발하게 전개되던 때이기도 했다.  
이봉상은, 1916년, 서울, 한 몰락한 양반가에서 출생해서 변혁의 시기를 살다가 55세로 작고했다. 짧은 삶이다. 그러나 혹자의 평가대로 “어떤 작가에 못지않게 오래 살았다”1)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가 “언제나 하나의 과도기를 설정해 놓고 살아왔기 때문”2)이다. 즉 그가 궁핍과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자신의 조금씩 다른 색의 희망을 펼치기 위해 미술가, 미술운동가, 미술교육자, 미술비평가란 다양했던 직업으로 바쁘게 살아왔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글에서 ‘화가’라는 가장 명료한 직업으로 그를 대면하면서 그의 작품 세계가 어떻게 펼쳐져 왔는지를 들여다보고 2016년 탄생 100주년이 되는 올해, 그의 작업 세계를 ‘환원적 자연주의를 지향하는 구상회화’의 관점에서 논해 보고자 한다. 


이봉상(李鳳商, 1916-1970)



II. 이봉상 연보의 범주화 
평론가 오광수는 이봉상의 작가적 이력을 다음과 같은 4범주로 나누어 설명3)한 바 있다.
1) 1929-1944 / 2) 1945-1952 / 3) 1953-1965 / 4) 1966-1970
여기서 1)번 범주에 해당하는 첫 해인 1929년은 그가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처음으로 입선했던 14살의 보통학교 6학년 시절을 가리킨다. 아직은 소년이지만, 미술의 장에서는 화가로 정식 등단한 것이라 해도 무방하겠다. 사실 이러한 구분은 애매한 것이기도 한데, 소년 시대 끝마무리에 큰 상을 받으면서 청소년이 된 이봉상으로서는 1935년 그가 20살이 돼서도 같은 생활들이 이어진다. 그런 면에서 오광수의 입장에 동의하는데, 이봉상의 20살 시점은 이봉상의 화가로서의 삶의 연혁을 범주화시키고 나누는 주요 ‘기점’이 되지 못한다. 그도 그럴 것이 20살 이전과 이후의 삶이 획기적인 변화 속에 전개된다고 하기보다 14살 이후의 선전 입선 이후의 삶을 20살 이후에도 조용히 이어간다고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광수는 이봉상의 화가 연혁의 1기를 1929(당시 14세)-1944(당시 29세)까지의 넓은 범주로 나누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성인 이전과 이후의 삶의 변곡점은 누구에게나 주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점을 검토하면서 오광수가 범주화한 1)기를 간단히 20세를 기점으로 한 번 더 나눠 살펴보고자 한다. 그것은 1)1929-1935(14세-20세), 2)1935-1944(20세-29세)로 간략히 정리될 수 있겠다. 더불어 3)기와 4)기 사이의 연결 고리인 년도인 ‘~1965년’과 ‘1966년~’을  ‘~1966년’과 ‘1967년~’으로 재조정했다. 그가 홍익대 교수를 1966년대 12월 막바지에서야 사직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전 사건의 끝을 1966년으로 새로운 변곡점의 시작을 1967년으로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전체 범주를 사건의 맥락과 함께 도표화하면 다음과 같다.  






III. 소년 이봉상(1916~1929) - 화가 수련기
이봉상은 몰락한 양반가에서 태어나 조상의 남겨진 덕에 안주할 수 없는 변혁의 시대를 맞이한다. 족보의 뿌리를 찾자면 그는 이씨조선의 제2대 임금인 정종대왕(定宗大王)의 열 번째 아들 덕천군(德泉君)의 17대 손이 된다. 1866년 병인양요 때 순국한 사조삼판(史曹參判) 자월공(磁月公) 이희원(李喜遠)이 그의 고조이다.4) 또한 강화(江華) 출신의 양반인 그의 “조부인 이건방(李健芳) 씨는 호를 난곡(蘭谷)이라 하여 정만조(鄭萬朝)5) 씨와 동문수학한 분으로 이미 전국의 사림 사이에 그 문명이 높았다.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6) 씨는 바로 이 만곡의 제자이다.'7)
 
이봉상의 유족 및 전문가에 의해 정리된 연보8)에 따르면, 문기 가득한 양반의 집안이었지만 새로운 시대에 몰락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서 어린 이봉상의 집은 가난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가 9세가 된 1924년에 이르러서야 서울 소재 경성사범학교 부속보통학교에 입학한 것을 보면 가난 때문인지 나이에 비해 입학 시기도 좀 늦은 감이 없지 않다.
경성사범학교 부속보통학교(오늘의 초등학교)의 한 동창인 유경노(兪景老)의 증언9)에 의하면, 그의 어린 시절은 모두가 가난했고 그의 집 역시 가난했다고 한다. 학생들의 신은 전부 고무신이었다. 다만 체조 시간에 고무바닥을 실로 꿰어 달은 운동화를 신었다. 또한 학생들은 거의 모두가 검정 두루마기를 입었었는데 당시 이봉상, 김경옥 두 학생만이 분홍 두루마기를 입고 다녔다는 점에서 그의 양반가의 내력을 유추할 수는 있겠으나, 그의 증언대로 그저 모두가 가난한 사람들 속에서 조금 달리 보이는 모습이라고 보는 것이 낫겠다: “그 때의 부속보통학교는 일정 말엽이나 또는 얼마 전까지의 부속국민학교와는 달랐다. 그렇게 부유한 집의 자제도 얼마 없었고, 그렇게 유명한 사람의 아들도 없었다. 대부분의 학생이 그저 그날그날을 살아가는 서민층의 아이들이었다.'10)
 
소년 이봉상은 10대가 되기 전부터 운이 좋게도 그림을 다양하게 연마할 수 있는 다양한 경험들을 보통학교에서 체득할 수 있었다. 그를 가르쳤던 스승들 덕분이었다. 그의 친구 유경노가 증언하는 보통학교 1학년 당시 담임이었던 일본인 이와시마(岩島一二三) 선생, 2학년 당시 오가다(緖 方篤三郞) 선생의 가르침 역시 주요했지만 대개 교생들을 통해 초상화나 사생에 대해서 공부할 수 있었다. 특히 당시 이봉상의 미술적 재능은 교사들에게 익히 알려진지라 특별하게 주목을 받으면서 미술수업을 받을 수 있었다. 
유경노가 진술하는 보통학교 이봉상의 3학년 당시의 한 에피소드11)는 흥미롭다. 이봉상은 미술 시간에 그린 사과 그림 일부분에 크레용 칠을 하지 않고 흰 종이 자체를 남긴 적이 있는데, 의아해 하면서도 흥미롭게 그것을 지켜봤던 유경노는 그것이 나중에 하이라이트(highlight)라는 미술의 기법인 것을 배우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봉상이 누군가로부터 배웠는지 아니면 그 어린 나이에 스스로 체득했는지는 모를 일이나 어린 시절의 이봉상이 미술에 대해 품고 있었던 각별한 관심을 익히 알 수 있는 대목이라 하겠다. 
당시 유행했던 프랑스 인상주의 화풍의 영향도 보통학교 학생들을 매료시켰다. 이봉상과 유경노는 삼청동 거리나 경복궁 등의 운치 있는 장소를 찾아다니며 ‘사생(寫生)’이라 불리는 풍경화를 자주 그렸고 테이블 위에 정물을 배치하고 정물화도 시도했다. 또한 크레용뿐 아니라 파스텔, 크레파스의 차이에 대해서도 배울 수 있었다.  
그러나 소년 이봉상에게 무엇보다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보통학교 5학년 때의 미술 교사 손일봉(孫一峰)12)의 역할이었다. 소년 이봉상과 학생들은 그로부터 수채화와 더불어 목탄으로 석고 데생하는 방법들을 배웠다. 템페라, 수채화, 판화, 유화, 심지어 도자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기법을 보통학교 미술 교육에서 접할 수 있었던 것도 그의 덕분이었다. 이봉상은 탁월한 재능에 훌륭한 미술교육을 받아 그림에 두각을 나타내었고 그의 천재적 재질을 알고 있던 교사들은 더욱 열과 성의를 다해 그를 가르쳤다. 이봉상은 그의 지도에 힘입어 이 당시 학교 전시회나 몇몇 학생 공모전에서 상도 받았다. 
이봉상은 보통학교 6학년 때 손일봉 선생이 본격적인 미술 공부를 위해 동경으로 유학을 간 후, 후임인 다까하시(高橋式) 선생 밑에서 수채와 유화를 열심히 배웠다. 이 당시에 유경노와 이봉상은 경복궁에서 열렸던 조선미술전람회가 있었는데 당시 일본 화단의 거장인 와다(三田 三造)의 남풍과 다나베(田辺至)의 나부상을 보고 감탄하였다. 특히 이봉상은 남풍의 웅장한 필치에 감탄하였다고 한다.13)
1929년 보통학교 6학년 가을 무렵에 이봉상은 〈풍경〉이라는 작품으로 《조선미술전람회》에 응모했다. 9살에 1학년으로 보통학교에 들어갔던 이봉상이 6학년이 되는 14세 나이에 오늘날의 국전과 같은 최대 규모의 성인 대상의 종합미술전람회에 입선을 하는데 이것은 당시 가장 나이 어린 소년 화가로 입선한 초유의 일이었다. 유경노는 당시를 다음처럼 회상한다: “소학생으로서 조선미술전에 출품한다는 것이 얼마나 주제넘은 허세였는지 모른다. (중략) 결국 입선이 되었다. 그리고 우리 군 내 우리 학교가 한 때 이봉상의 입선으로 축제 기분에 싸였었다. 그 얼마 큰 영광이었던가. 우리나라 화단의 역사에서 과연 몇 명의 소학생이 이러한 조선미전 입선의 영관(榮冠)을 써 보았는가?” 14)
당시 그는 보통학교 시절 화재(畵才)를 인정받아 부지런히 미술 공부를 할 수 있게 도와준 많은 선생들의 역할에 힘입어 여러모로 예비화가로서의 수련을 했다. 이것저것을 함께 배우며 소학교에서 연마했던 미술의 기초 소양은 소년 이봉상에게는 마치 전문가의 활동이나 다름없이 간주된 듯하다. 수련 화가로서의 소년 이봉상은 등단 화가로서의 영예를 일찌감치 받으면서 어린 나이이지만 비로소 전문 미술가로서의 길을 걸을 수 있게 되었다. 

IV. 청소년 이봉상(1929~1935) : 화가 입문기

이봉상이 보통학교 6학년 때인 1929년 8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했으니, 그가 졸업 전이었음에도 우리는 그 해를 기점으로 그의 화단 생활이 시작되었다고 기술해야만 될 것이다. 따라서 20살이 될 때까지의 청소년 이봉상(1929-1935)을 우리는 화가 입문기로 정리할 필요가 있겠다. 
이봉상은 화가로서의 화려한 등단 이후에도, 1930년 조선일보가 주최하는 소학생작품전에서 특선을 하고, 소학교 재학생으로서 제9회 《조선미술전람회》에 〈풍경〉과 〈벽이 있는 풍경〉이라는 제목으로 2점의 작품으로 거듭 입선하여 파란을 일으킨다. 
이봉상은 졸업 후 1930년 바로 경성사범학교 입학에 실패를 했지만, 그림을 배우면서 한 해를 재수해서 다음해인 1931년에는 무난히 입학하게 된다.15) 이봉상은 이 재수 기간 동안 이과전의 회원으로 특별한 화풍을 가졌던 미끼(三木弘) 선생이 운영하던 미끼미술연구소에 그림을 배우러 다녔고, 여기서 완전히 사실적 작품이 아닌 어두운 색조의 그림들을 탐닉하면서 조형적으로 발전을 도모하게 된다. 이뿐 아니라 당시 조선인 서화가들만의 민족적인 전람회라 평가를 받는 《서화협회전(10회)》에 출품하면서 일제 밑의 민족화단에서 천재적인 새싹으로 주목을 받는다.16)         
14세에 《조선미술전람회》에 첫 입선 이후 꾸준히 선전에 지속적으로 응모하는데, 그가 19세 되는 1934년만 낙선하고 계속 입선하게 된다. 1934년 “13회는 낙선의 첫 고배”17)였던 셈이다. 같은 해 9월에 이봉상은 동아일보 주최 《전조선남녀학생작품전》에 출품하여 입선한다. 1932년 그가 17세 때에 처음으로 동아일보가 주최하는  《전조선남녀학생작품전》에 〈발벽(潑壁)〉을 출품하여 1. 2등이 없는 3등상을 차지하게 되었던 것을 보면, 1934년인 19세 때는 여러 가지로 이봉상으로서는 실망스러운 결과들과 맞닥뜨려야만 했던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여하튼 14세 당시인 1929년 선전에서의 입선 이후, 20세가 된 1935년까지의 연보는 ‘화가 입문기’라 정의할 수 있겠다. 이 시기에서 그의 수상 실적만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V. 청년 이봉상(1936~1944) : 화가 성장기
 그가 화가로서의 한 단락을 맞이하는 1944년 29세 지점은 그가 줄곧 화가 등용문과 작품 발표의 장으로 활용했던 《조선미술전람회》가 23회로서 폐막하는 시점이다. 물론 그것은 1945년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하고 종전하게 되면서 8. 15 해방을 맞이하게 되고 1945년부터는 더 이상 열지 않게 되면서 귀결된 사건이었다. 
이봉상에게 가장 주요한 사건은 1936년 성년이 되자마자 결혼했다는 사실이다. 한 가장이 되었다는 것은 그의 작업을 함에 있어서도 가족을 생각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이봉상은 1944년 선전이 폐막하기까지, 20대 중반의 짧은 일본 유학 기간을 제외하곤 지속적으로 출품하였다. 앞서 언급했던 13회 낙선의 고배 외에 20회, 21회의 불참은 이러한 유학 생활에 기인한 까닭이었다. 23회는 1944년 전쟁 말기의 험한 상황은 그의 선전 출품의 의욕을 꺾었을 것이다.18) 주목할 것은 1936년 그가 21세 때 최초로 일본 문부성 《문전》에 출품을 했고 입선했다는 점이다. 성인의 문턱을 넘고 바로 일본 본토의 예술가들과 경쟁하면서 더 넓은 예술의 세상과 교류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화가로서의 가시적인 성공이 필요했던 이유 중 하나는 결혼 생활에 따른 일련의 책임감도 있었을 것이다. 1939년, 1940년 연이어 입선을 기록하고 있고 1940년 그가 일본 동경에서 1년간 연구 생활을 하러 떠났던 것을 보면, 그가 “선전과 기타 국내전에만 만족치 않고 좀 더 넓은 무대로 향하고자 한 뜻이 있었던 것 같다.” 19) 
오광수가 지적하고 있듯이, 그는 1941년 불과 1년 만에 국내로 되돌아오게 되는데 그 동기는 확실치 않다. “당시 새로 가정을 꾸민 몸인데다 자신이 아니면 생활이 어려웠다는 점, 그리고 사회적으로 전쟁에 돌입한 불안감 같은 것이 원인”20)이 되었을 수도 있겠다. “거기다 고향을 떠나서 살 수 없는 성격 탓에 덧붙여진 것”21)일 수도 있겠다.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줄곧 성장해 온 이상봉에게 있어 서울 아닌 타향은 외국이든 다른 지방이든 정 붙이고 살기에는 녹록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만약 또 다른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취업과 같은 일이 될 것이다. 그는 귀국 후 이듬해인 1942년, 경성여자사범대학교에 촉탁 발령을 받게 되는데, 이러한 취업 전선에서의 미래적 모색 역시 필요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28세가 되는 일 년 뒤인 1943년에는 그가 일본 문부성의 ‘중등교원 자격검정시험’인 ‘미술과 도화 고시’에 응시해서 합격했기 때문이다. 
한편, 그의 일본에서의 짧은 유학 생활과 관련하여 특이한 점은 그가 귀국한 다음 해인 1942년 서울에 거주하던 일본인 화가들과 젊은 미술 단체인 〈창룡사(蒼龍社)〉를 함께 조직하고 ‘정자옥(丁字屋) 화랑’(이전의 미도파 백화점)에서 제 1회 전람회를 개최했다는 사실이다. 그가 유학 할 당시 일본에서는 그룹 활동이 유행하고 있었는데, 아마도 그로서는 귀국 후 한국에서 그 계획을 실천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상황은 해방 후 더욱 활발해진 것으로 보이는데, 여기서는 1936-1944년까지의 그의 화단 활동을 간략히 정리해본다. 




VI. 장년 이봉상(1945~1952) : 유목민 화가

30대에 이르는 시기에 맞은 8.15 해방의 감격은 그로 하여금 영원할 것 같았던 일본 강점기의 시절로부터 새로운 시대에 대해 예고했을 것이다. 급변하는 당시의 한국 사회에서 그는 해방 후부터 본격적으로 괄목할 활동을 선보였다.22) 
 후학을 지도하는 교사로, 조국을 재건하는 예술 행정가이면서도, 화가로 분주히 보냈었다. 또한 이내 맞이한 한국 전쟁의 포화 속에서 부산 피난지에서 예술혼을 펼치며 서울 수복과 통일을 염원하는 유목민으로서 살아가던 화가이기도 했다.  
차분히 앉아서 개인의 작품 세계에 집중할 시간은 허락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국가 재건을 시기를 거치는 동안은 미술계 복구를 위해서 할 일이 너무 많아 보였다. 그는 해방되던 해, 11월 이후부터 1948년 3월까지 서울 중동(中東)중학교에서 미술교사를 맡아 일했다.  
그 외의 일들은 대개 오늘날 야기되는 예술행정에 관한 일들이었다. 《조선미술전람회》에 참여했던 경험이 협회를 결성하기에 이르고 1945년 11월 창설된 〈조선미술협회(대한미협의 전신)〉에서 사무국장 23)이라는 상임위원(常任委員)에 피선되기에 이른다. 성격이 그다지 모나지 않았고 재학 시부터 명쾌한 논리를 갖추었던 이봉상은 사무국장 역할에 제격이었다. 
1947년 그를 첫 대면한 작가 박고석은 그를 “자그마한 키와 초라한 차람에 약간 창백한 듯한 얼굴에서 온화한 선비 타입의 나이브한 느낌의 첫 인상”24)으로 기억하면서, “예리한 관찰력과 정연한 논리, 근면한 자세로 인해서 크게 미더웠다”25)고 그를 평가한다.   
이봉상이 32세이었던 1947년에는 비정치적이고 순수한 미술단체를 표방하는 〈미술문화협회(美術文化協會)〉 (손응성, 김인승, 이인성, 남관 등)를 결성하였고 동화백화점에서 1회 회원 작품전을 개최하였다. 이때 그는 〈풍경〉이란 작품을 출품하였다. 같은 해 그는 차남 명주(明周)를 낳는다. 
33세인 1948년에는 경동(京東)중고등학교 미술교사로 취임하게 되는데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재직하게 된다. 1949년 9월 문교부 국정교과서 편집위원으로 임명된 후 중등미술, 고등미술의 교과서를 펴내게 된다. 
또한 1950년에는 김환기, 남관, 유영국, 김병기, 박고석, 김영주 등과 함께 〈50년 미협〉을 준비하기에 이르지만, 한국전쟁으로 증발하게 된다.
이러한 분주한 예술행정은 1950년 전쟁 발발 이후 부산으로 피난하게 되면서 백지화되게 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전란 속에서 그의 화가로서의 활동은 다시 활발해지는 계기가 된다. 무엇보다 전쟁 발발 1년 뒤인 1951년에 그가 육군 종군화가로 활약하게 된 것도 그러하지만,  
1952년 부산 피난지에서 이화여대 미술과 강사로 붓을 놓지 않고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면서 자신 스스로도 작업 생활을 이어가게 되었다는 것은 당시의 시대 상황이 만든 하나의 역설이다.  
이봉상에게 있어 1952년 피란지 부산에서 개최된 《기조전(其潮展)》은 이러한 대표적인 예이다. 손응성, 이중섭, 한묵, 박고석 등이 참여한 이 전시는 당시 화단에 자극을 준 상당히 성격 있는 전람회로 평가26)되고 있다. 이봉상은 여기에 〈항구〉, 〈풍경〉 등 5점을 출품했다. 이처럼 “부산 피난 시기에 있어서도 제작 활동은 결코 종식된 것은 아니었다. 《신사실파(新寫實派)전》, 《기조전(其潮展)》, 《토벽(土壁)전》, 《후반기(後半期)전》 같은 그룹전과 피난 온 미술인들의 개인전, 종군 스케치전 등 이 비좁은 다방에서나 꾸준히 열렸던 것이다.”27) 이봉상에게 있어서 비록 유목민적인 고난의 화업(畫業)일 수밖에 없었지만, 한국전쟁이 외려 그러한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는 장을 주었다는 것이 아이러니인 셈이다. 
우리가 위에서 언급한 이봉상의 1945-1952년 사이의 주요 연혁은 다음처럼 정리된다. 




(주석)
1) 오광수, 「이상봉의 생애와 예술」, 『이상봉 화집』, 도서출판 한국문화사, 1972, p. 5.
2) 오광수, 위의 글, 1972, p. 5.
3) 오광수, 위의 글, 1972, p. 5.
4) 이구열, 「이상봉 연보」, 『이상봉 화집』, 도서출판 한국문화사, 1972, p.16. 
5) 정만조(鄭萬朝, 1858년~1936년)는 조선 말기의 학자이며 일제 강점기에 조선총독부에 협조한 대표적인 유교 계열 인물이다. 호는 무정(茂亭)이다. -이이화, 「정만조 : 친일유림의 거두」, 반민족문제연구소 편, 『친일파 99인 2』. 돌베개, 1993.
6) 정인보(鄭寅普, 1893년~1950년)는 한학자이자 역사학자로, 어려서 강화학파의 학통을 이은 이건방(李建芳)의 제자로 학문의 기초를 쌓았으며, 20대 때에는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귀국한 뒤 연희전문 교수로 재직하며 국학 연구와 언론 활동에 종사했다. 우리 고서(古書)에 대한 해제를 신문에 연재했으며, 《양명학 연론》과 《오천 년간 조선의 얼》 등도 신문에 발표했다. 해방 후 국학대학장과 제1공화국 초대 감찰위원장을 지냈으며, 6ㆍ25 때 납북되어 사망했다. -정인보 저, 한경애 해설, 『양명학 이야기1, 2』, 아펍코리아. 2012, 표지 저자소개란.
7) 유경노, 「이봉상의 학창시대」, 『이상봉 화집』, 도서출판 한국문화사, 1972, p. 24.  
8) 이구열, 「이상봉 연보」, 『이상봉 화집』, 도서출판 한국문화사, 1972, p.16. 
9)  유경노, 위의 글, 1972, p. 24.
10) 유경노, 위의 글, 1972, p. 23.
11) 유경노, 위의 글, 1972, p. 23.
12) 손일봉은 경주 출신으로, 경성사범학교 재학 시절부터 선전(鮮展 :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 1회, 특선 3회를 기록하였으며, 졸업 후 일본으로 건너가서 동경 우에노미술학교(上野美術學校)를 졸업하였다. 광복 후 경주에서 생활하는 동안은 고등학교 교사, 고등학교 교장을 지내 작가 생활을 거의 하지 못했으며, 퇴직 후 세종대학교 회화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비로소 본격적인 작가 생활로 접어들었다. 국전 초대작가, 신미술회(新美術會) 회원으로 활약하였다 -『현대미술가인명사전(現代美術家人名辭典),한국미술가편(韓國美術家篇)』, 열화당, 1977,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1991.
13) 유경노, 위의 글, 1972, p. 23. 
14) 유경노, 위의 글, 1972, p. 25. 
15) 유경노, 위의 글, 1972, p. 25. 
16) 이구열, 위의 글, 1972, p. 16.
17) 오광수, 위의 글, 1972, p. 6
18) 오광수, 위의 글, 1972, p. 6.
19) 오광수, 위의 글, 1972, p. 6.
20) 오광수, 위의 글, 1972, p. 6.
21) 오광수, 위의 글, 1972, p. 6.
22) 편집기자, 「독특한 체취 풍기는 이봉상 유작전」, 문화산책, 『중앙일보』, 1970. 11. 6. 
23) 오광수, 위의 글, 1972, p. 7.
24) 박고석, 「이봉상」, 『이상봉 화집』, 도서출판 한국문화사, 1972, p. 27.
25) 박고석, 위의 글, 1972, p. 27.
26) 오광수, 위의 글, 1972, p. 7. 
27) 오광수, 「해방 30년-문화 1세대 (3) 격동, 변혁의 드라마 미술」, 『경향신문』, 1975, 8. 6. 


(하편에 계속...)

출전 / 김성호,「이봉상의 구상 회화에 나타난 환원적 자연주의」 , (이봉상 작가론), 『미술평단』, 121호, 여름호, 2016, pp. 47-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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