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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기훈센 전 / 오르가슴 스텔라- 축출된 아브젝트의 향연

김성호

오르가슴 스텔라- 축출된 아브젝트의 향연

김성호(미술평론가, Kim, Sung-Ho)

어슴푸레한 전시장! 아니다. 그곳은 어둡지만 않다. 명멸하는 빛들이 수놓고 있는 ‘어둠 속 찬란함’이 거기에 있다. 전시장 내 잔잔한 공기의 흐름을 흔들면서 몸을 떨고 있는 금빛의 버티칼과 그것으로부터 반영되고 있는 빛의 산란이 도처에 존재한다. 전시장 중앙에 환형(環形)으로 매달린 금색의 버티칼을 연신 흔들고 있는 천장에 달린 선풍기 바람과 더불어 뒤편 바닥에 놓인 검정 알루미늄관에 연결된 공기 순환기(Air circulator)부터 밀려 나오는 바람은 버티컬을 가볍게 흔들면서 전시장 한가득 빛의 산란을 부추긴다. 그뿐 아니라, 전시장 한 편을 차지하고 있는 관객석을 온통 뒤덮은 검은 천 위에 반사되는 인공조명의 알지비(RGB) 색상은 빨강, 파랑, 녹색이 뒤섞여 마치 짙은 무지개처럼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한다. 이 빛들은 관객에게 속삭인다. 작가 기훈센의 ‘오르가슴 스텔라’에 오신 것을 환영한다고 말이다. 




I. 오르가슴 스텔라 
작가 기훈센은 이번 개인전의 주제로 ‘오르가슴 스텔라(Orgasm Stellar)’라는 ‘기묘한 단어의 조합’을 내세웠다. 인간 주체의 쾌락(오르가슴)과 우주적 세계관(스텔라)을 함께 담는 이 주제어는 ‘소변’이라는 인간 배설물로부터 출발한다. 
전시장 중앙에 자리한 작품을 보자! 지름이 1미터가 넘는 환형의 금빛 버티컬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다. 이 금빛은 금이 아닌 소변의 색을 상징하고 그것의 흔들림은 화려한 번영과 영화가 아닌 단지 소변의 분출을 의미한다. 그런 면에서 버티칼 안에서 ‘펌프를 작동시켜 금빛 액체를 샘솟듯이 연신 요동치게 만들고 있는 TV 요강’은 그가 만드는 ‘오르가슴 스텔라’의 원천인 셈이다. 관객이 금빛 버티칼의 원기둥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센서의 작동에 의해 버티칼을 흔들고 있던 천장 위 선풍기와 바닥의 에어 써큘레이터의 작동이 멈추면서 관객은 갑작스레 멈춘 주위 환경의 정적 속에서 ‘소변을 끊임없이 생산하는 것처럼 펌프질하고 있는 TV 요강의 기이한 움직임’에 비로소 주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소변으로 상정된 액체가 펌프질에 따라 움직일 따름이지만, 어떻게 보면 이 순간은 소변 생산의 순간을 오롯이 목격하는 시간이 될 뿐만 아니라 관객 스스로 소변 생산의 주인공이 된 듯한 착각에 빠지는 시간이기도 하다. 
관객이 정적 속에서 발견하고 동참하는 배설물 생산 충동의 순간! 글자 그대로 이 순간은 ‘예상 밖의 결과가 빚은 모순이나 부조화’라는 의미의 아이러니(irony)를 체감하는 시간이다. 정말로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소변이라는 비루한 배설물로부터 영묘한 생산의 금빛 아우라를 겹쳐 올리는 그의 조형 언어는 가히 반어(反語)적이다. 강력한 메시지를 드러내기 위해 실제로 반대 표현을 풀어 놓는 기훈센의 이와 같은 조형 태도는 주목할 만하다. 
소변에 부여하는 작가 기훈센의 이러한 무한한 호의와 찬양은 도대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그의 말을 들어보자: “2014년 평화 촛불 시위에서 수많은 인파가 줄을 이뤄도, 생리 현상을 해결할 수 있는 공간이 사회적으로 주어져 있었기에 불완전함이 내포된 집회가 평화롭게 끝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만약 서울의 수많은 개방 화장실이 서양권처럼 폐쇄(유료) 시스템이었다면 평화가 지속 가능할 수 있었을까?” 
작가의 이러한 문제 제기가, 이번 전시를 구상하게 된 근본적인 문제의식이었다는 점에서 이번 전시는 엉뚱한 데서 튀어나온 발상이 전시장을 온통 누비고 다니는 셈이 된다. 촛불 시위를 통해서 정의의 쟁취와 평화의 구현이라는 최선의 이상(理想)을 성취하는데 있어서, 의외로 별나거나 색다른 이상(異常)이 뒷받침했다는 그의 문제의식이 시각적으로 실천되고 있던 셈이다. 소위 소변으로 가득하다는 의미의 ‘피스필드(Piss-filled)’가 평화롭다는 의미의 ‘피스풀(peaceful)’과 묘하게 대비를 이루는 것이다. 가장 비루한 배설물인 소변(piss)이 고귀한 평화(peace)의 생산을 이루어 내다니. 
아서라! 그것은 ‘놀랍지만, 결코 놀랄 일이 아니다.’ 그가 이 비루함을 목도하는 방식을 평화의 촛불 시위로부터 가져왔음에도 자신의 전시 ‘오르가슴 스텔라’에서는 그 방식을 역으로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배설의 오르가슴’을 차단하는 ‘오르가슴 스텔라’의 세계라는 것이 그것이다. 




II. 아브젝트와 아브젝시옹 - 분변학의 무의미 지대
‘배설의 오르가슴’을 차단한다는 말이 무엇인가? 이러한 관점을 드러내는 그의 ‘오르가슴 스텔라’를 살펴보기 위해서 이 글은 이제껏 지칭했던 ‘소변’을 ‘오줌’으로 부르기로 하자. ‘오줌’을 점잖게 이르는 ‘소변’이라는 말은 ‘버려진(질) 것’을 끊임없이 상정하고, 대상화하는 음험한 이데올로기뿐만 아니라 본질과는 하등 상관없는 정체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대신 오줌이라는 용어는 소변보다 본질적이다. 기훈센의 작품과 연동되는 ‘분변학(糞便學, scatology)’의 차원에서 종종 오줌이란 인간 주체와 바로 동일시되는 까닭이다. 
주지할 것은, 분변학의 실제는 생물의 배설물을 연구하는 의학과 생물학의 영역이지만, 작가 기훈센의 전시에서 그것은 문화이론가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의 아브젝트(abject)와 그것이 만드는 체험인 아브젝시옹(abjection)과 연동된다는 것이다. 아브젝트란 ‘주체로부터 축출된 온갖 더러운 것들’이다. 오줌은 물론, 똥, 땀, 콧물, 피, 피부 껍질 그리고 음식을 게워낸 토사물 나아가 남녀가 달리 지니고 있는 월경혈, 젖, 정액까지를 아우른다. 그것은 더럽고 비루하며 불순하고 불결하다. 따라서 아브젝트는 주체와 객체의 중간체인 ‘비(非)체’이며 아브젝시옹은 그러한 비체와 연동된 모든 행위와 현상을 가리킨다. 아브젝트는 주체로부터 축출되기 전에는 더럽게 인식되지 않지만, 축출된 순간부터 추(醜)의 정체성으로 인간 주체에게 육박한다. 한국의 평화 촛불 집회자들의 시위를 성공시킬 수 있었던 까닭은 자명하다. ‘배설’을 실현함으로써 이러한 추함을 바깥으로 던지고 주체의 청결 상태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수많은 공중 화장실을 개방한 까닭에, 축출된 아브젝트의 공격, 즉 아브젝시옹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기훈센의 전시 ‘오르가슴 스텔라’는 무엇을 표방하는가? 그것은 주체로부터 축출된 오줌(물론 기훈센은 실제의 오줌을 사용하지 않고 오줌의 대체제와 대체 이미지만을 사용하고 있지만)이라는 더럽고 혐오스럽기까지 한 ‘아브젝트’가 주체의 바깥에서 공격하고 있는 카오스의 세계이다. 그 공격은 주체의 바깥 즉 전시장 도처에서 벌어진다. 그런데 유념할 것은, ‘아브젝트’라는 것이, 주체로부터 ‘축출된 어떤 것(un exclu)’ 혹은 '추락한 대상(objet chu)'이 불결의 존재로서 바깥에서 주체에게 다가올 때 자기 감각을 상실케 하는 끔찍한 반응과 더불어 어떠한 매혹감을 동시에 불러일으킬 때 사용되는 용어라는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프로이트가 ‘평소 친숙한 것의 섬뜩한 등장’을 언캐니(Uncanny)라 불렀던 것을 상기한다면 아브젝트와 언캐니는 원인과 결과에서는 상이하면서도 양가적 감정의 차원에서는 같은 종족이라 하겠다. 아브젝시옹이란 우리가 뀐 방귀 냄새를 역하게 느끼면서도 묘한 느낌으로 맡고 있는 감정과 같은 것일까? 배설한 자신의 토사물, 오줌, 똥을 다시 손으로 만지거나 먹는다면 어떤 느낌일까? 주체에 의해 가차 없이 축출되어 추락한 대상에 느끼는 기묘한 연민은 아브젝트와 연동한다. 그것은 추와 불결함이 매혹과 연동되면서 극단적인 양가의 감정 상태를 초래하면서 종국에 의미가 붕괴되는 카오스와 혼돈의 공간으로 이끈다. 그곳은 기훈센이 오르가슴 스텔라라는 이름으로 펼쳐내고 있는 ‘분변학의 무의미’의 지대이기도 하다.  


III. 코라를 향한 아브젝시옹  
기훈센의 전시에서, 아브젝트와 아브젝시옹은 크리스테바가 언급하고 있는 ‘자기동일성, 체계, 질서를 교란하는 혼돈의 세계’ 속에서 존재하고 작동한다. 오줌으로서의 아브젝트와 그 아브젝시옹은 주체의 밖에서 그리고 이분법의 경계들의 바깥에서 애매하거나 복합적인 상태로 존재하고 작동한다. 물론 이러한 추상적인 아브젝트와 아브젝시옹의 개념은 그의 전시장 전체에 걸쳐 존재하고 작동한다. 흔들리는 버티컬이 난반사하는 황금빛은 전시장 벽면과 바닥 곳곳에서 그리고 검은 호일천으로 싸놓은 관객석 위로 일렁인다. 중앙의 버티컬 뒤로 월식(lunar eclipse)에 처한 달의 풍경이 신비롭게 언뜻언뜻 나타나는 장면은 또 어떠한가? 이 모든 몽롱한 황금빛은 오줌으로부터 출발한 것이다. 비루한 오줌이라는 아브젝트, 그것의 아브젝시옹이 우주의 풍광으로 확장시킨 것이다. 불결함과 매혹 그리고 황폐함과 숭고함을 동반하는 ‘양가적 감정’의 기묘한 체험! 그렇다 악취만 없을 뿐 그것은 아브젝트로서 관객에게 선보이는 불결한 오줌의 향연이다.   
우리는 이 몽롱한 아브젝트의 향연 속에서, 크리스테바의 코라(chora)의 공간을 읽는다. 플라톤으로부터 원용한 ‘코라’는 원래 우주의 원재료인 ‘게네시스(genesis)’라는 카오스가 존재하는 공간이다. 즉 게네시스(카오스)의 자궁이다. 기훈센의 전시 ‘오르가슴 스텔라’가 펼쳐지는 전시 공간은 이러한 카오스의 자궁, 즉 코라로 은유된다. 카오스는 전시장 옆에 있는 실제의 화장실의 공간으로까지 잠입한다. 보라색 반사띠로 둘러싸인 실제의 화장실은 오줌이라는 아브젝트를 금빛으로 확산하고 드리우면서 기훈센의 언급처럼 ‘양수로 가득한 공간’, 우리의 논의로 말해 ‘카오스의 자궁인 코라’를 창출하는 것이다. 그곳에는 쉽게 말해 ‘어머니의 몸(corps maternal)’에 대한 타부와 금기에 직면한 아브젝트의 혐오와 매혹이 자리한다. 



이러한 커다란 카오스의 공간 속에서 분절되는 언어란 무용지물이다. 아브젝션이 작동하는 공간은 의미를 지향하지 않기 때문이다. 관객석에서 아이패드로 상영되는 영상 작품 <접촉: 숨바꼭질 놀이(contact: play Hide and seek)>는 작가 기훈센이 실제로 겪었던 사건을 보도한 abc뉴스 방송을 재편집한 영상 작업이다. 방송 내용을 구글 번역기가 한국어로 해석한 자막을 보여주고 있지만, 실제의 사건에 대한 독해는 쉽지 않다. 번역기의 오역은 사회 시스템과 개인 사이의 의사소통 단절과 왜곡을 고스란히 전한다. 나아가 그것은 관객과 작품 사이에서 ‘분변학의 무의미의 지대’를 선보인다. 그곳에는 ‘불결함과 매혹 그리고 황폐함과 숭고함’을 동반하는 ‘양가적 감정’의 기묘한 체험만이 넘쳐날 따름이다. 그것들은 우리가 떠나왔던 아브젝트의 근원인 어머니의 자궁(혹은 코라)을 그리워하면서도 되돌아가려고 하지 않는 인간 주체의 ‘양가적 감정’으로 끊임없이 점철되어 확산하면서 전시장 곳곳으로 넘쳐난다. 그러한 차원에서 작가 기훈센의 전시는, 가히 ‘축출된 아브젝트의 향연’이라고 할 만하다.  ● 


출전/

김성호, 「오르가슴 스텔라- 축출된 아브젝트의 향연」, 전시 서문, (기훈센 전 -오르가슴 스텔라, 2019. 7. 26-8. 9, 미디어극장 아이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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