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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욕망해도 괜찮아展 / 질문과 용인 그리고 청유

김성호

욕망해도 괜찮아 - 질문과 용인 그리고 청유


김성호(미술평론가, Kim, Sung-Ho) 



프롤로그 - 세 가지의 문제의식  
미술은 답을 제시하기보다 문제를 제기한다. 미술은 메시지 전달의 차원에서 종종 애매하거나 모호한 태도를 취하는데, 미술가들이 대개 명료한 답을 찾기보다는 비언어의 미술을 통해서 무수한 질문을 던지는 것 자체에 골몰하기 때문이다. 답 말고 질문? 아니다. 단정하기에는 이르다. 미술가는 때로는 대답의 수많은 가능성을 열어두고 무책임하게 나 몰라라 하거나 때때로 엉뚱한 답을 내리고 자신의 주장에 따라오라고 억지를 부리기도 한다. 명확한 것은 있다. 미술가들의 각자 다른 태도에도 불구하고 미술은 언제나 ‘답을 내리기보다 문제의식을 지니고 미술 안팎에서 성찰하는 일’에 골몰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미술 본연의 정체성이다. 
여기 아트스페이스 휴의 기획전 《욕망해도 괜찮아》도 그렇다. 전시명을 김두식의 책 『욕망해도 괜찮아』에서 빌려온 것인 만큼, 이 전시는 ‘욕망’을 사회 질서를 위해서 통제할 ‘음험한 무엇’으로 간주하는 것에 대해서 따끔한 일침을 가하고, 욕망이란 과연 무엇이며 그것이 이 시대에 어떠한 것이 되어야 할지를 되묻는다. 전시는 욕망에 관한 문제의식을 미술 안팎에서 성찰하는 세 명의 작가, 김무무, 오화진, 김민희를 초대하고 그들의 ‘욕망에 관한 태도’를 우리에게 선보인다. 이 글은 세 작가의 ‘욕망에 관한 조형적 성찰’을, 논의는 한계가 있음을 전제하고, ‘질문, 용인, 청유’의 세 가지 키워드로 규범화하고 살펴보고자 한다.    





1. 김무무의 질문 - “욕망해도 괜찮아?”  
작가 김무무는 욕망에 관한 문제의식을 질문(質問)을 통해서 접근한다. 질문이란 “알고자 하는 바를 얻기 위해 물음”이라는 사전적 정의대로, 질문의 주체가 그 내용에 대해서 무지하다는 것을 대외적으로 공표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인들은 타자 앞에서 질문하기를 꺼린다. 짐짓 아는 체하면서 슬그머니 넘어가거나 자신을 스스로 자책할 따름이다. 생각해 보자. 알지 못하는 것을 묻지 못하고 위장과 기만으로 자신의 무지를 감추는 일은 ‘알고 싶다는 순수한 욕망’을 억누르는 일이다. 달리 말해 욕망해도 괜찮은지를 묻는 일 자체를 거세하고 태생적으로 자유로운 욕망 자체를 억압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김무무는 “욕망해도 괜찮아?”라고 묻는다. 이러한 질문은 마치 “나, 이거 먹어도 돼?”라고 묻는 아이들의 ‘호기심 가득한 욕망’을 드러내는 질문처럼 솔직한 것이다. 그의 출품작에는 이러한 호기심과 순수한 욕망으로 가득한 질문들이 펼쳐진다. “내가 신이나 거인처럼 될 수 있을까?”와 같은 질문은 현실계의 성인에겐 조현병(調絃病)과 같은 질병의 증후로 간주되거나 아이들의 어처구니없는 공상으로 치부될 따름이지만, 김무무의 작품 세계에선 상상력을 발현시키는 한계가 없는 욕망으로 발현된다.     
그의 출품작 〈거인2〉에서는, 고야(F. J. de Goya)의 작품 속 ‘거인’이 마치 초인처럼 나타나 현대의 도시의 풍경을 유유히 거닐기도 하고, 작품 〈people get up and drive your funky soul〉에선, 스위프트(J. Swift)의 풍자 소설인 『걸리버 여행기』(1726) 속 소인국에 나옴직한 사람들이 거대한 두 인물을 결박하고 있는 기묘한 풍경을 선보이기도 한다. 또한 고야, 마그리트(R. Magritte) 또는 벨기에의 동시대 화가 보흐먼스(Michaël Borremans) 등 사물 크기의 낯선 변주와 대비를 통해 불안하고도 기묘한 분위기를 선보이는 화가들의 조형적 언어를 빌려와 종합하여 파편적인 4개의 ‘쉐이프드 캔버스(Shaped canvas)’에 구현함으로써 전시 공간 자체를 하나의 작품 속으로 끌어들이기도 한다.  
이처럼 김무무의 작품에는, 초현실주의 회화에서 발견되곤 하는 꿈과 무의식이 지배하는 환영과 데페이즈망(dépaysement)과 같은 낯선 조합과 구도 그리고 거친 표현주의 풍의 그로스테스크의 화면과 덜 그린 것 같은 단순하고도 담백한 독특한 붓질이 맞부딪히면서 그의 한계 없는 상상과 욕망의 나래가 펼쳐진다. 이러한 차원에서 그의 출품작들은 “이게 뭐야?”, “이거 해도 돼?”라고 재차 묻는, 호기심과 순수한 욕망으로 가득한, 아이들의 질문을 탐색하고 실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면에서 김무무의 작품은 “이제 욕망해도 괜찮아?”라는 식의 순수한 질문들이 지속해서 펼쳐지는 ‘욕망의 연쇄적 회화’라 할 만하다


김무무, 거인2, 캔버스에 유화 33 × 24cm, 2019


김무무, People get up and drive your funky soul, 캔버스에 유화 145 × 91cm, 2019


김무무, 거인1, 캔버스에 유화, 60 × 150cm, 2019


2. 오화진의 용인 - “욕망해도 괜찮아.”  
한편, 작가 오화진은 꿈틀거리는 내적 욕망을 성찰하면서 자신에게 “욕망해도 괜찮아”라고 말한다. 그것은 “용납하여 인정하다”는 의미의 ‘용인(容認)’과 같은 태도를 드러낸다. 그것은 자신의 욕망에 대한 솔직한 인정과 수용 그리고 타자의 욕망에 대한 용납, 허락과 같은 개념이 한데 섞인 것이다. 실상 그것은 미술 창작에 대한 그녀의 오랫동안의 문제의식으로부터 출발한 것이다. 
그녀는 작가 노트에서 다음처럼 말한다: “나는 작업을 점점 할수록 계획되지 않은 순전한 본능적인 타고난 감각에 의해서 작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진다. 영감의 원천을 최대한 나 자신에게서 뽑아내고 싶은 것이다.” 여기서 ‘순전한 본능적인 타고난 감각’이란 자명하다. 그것은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작가 오화진의 내부로부터 오는 것이다. 그것은 “비록 진부한 아이디어가 나올지라도 스스로에게 있어서 충실했다는 결과물”을 만들고 싶어 하는 그녀에게 있어, 창작에 관한 가장 주요한 문제의식이 된다. 
‘본능적 감각’이란 인간의 내부에서부터 생산된다는 점에서 마치 ‘욕망’과 같은 것이다. 실제로 2005년부터 작가 오화진의 작업에서 ‘욕망’이란 주제가 나타났는데, 그것은 흥미롭게도 ‘오화진 개인의 문화’라는 화두와도 접목된 것이었다. ‘개인의 문화’?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문화란 “사회 구성원에 의하여 습득, 공유, 전달되는 행동 양식이나 생활 양식의 과정 및 그 과정에서 이룩하여 낸 물질적, 정신적 소득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지 않던가? 게다가 ‘문화’란 사회의 구성원들이 ‘이성’적 실천을 통해 집단의 이상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주체와 타자 사이에 공유하는 행동 양식이 아니던가? 그러니까 문화란 집단의 것이자, 이성의 결과물이다. 
그런데 개인의 문화라니,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그녀는 말한다. “역사를 통해 전해져 내려오는 모든 문화적 소산에는 인간의 욕망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것들이다. 그리고 본인이 바라볼 때 나라나 민족마다 사회 속에서 이뤄낸 문화가 있듯이 사람들에겐 각기 저마다의 문화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집단이 이뤄낸 문화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보이는 것이 작겠지만, 분명 있다고 본 것이다. 따라서 오화진 개인의 문화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오화진의 욕망을 알아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것이 수많은 작가가 다루는 욕망이라는 흔한 주제를 나 역시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다.” 작가의 진술에서도 드러나듯이, 그녀의 작품에서 ‘개인의 문화’란 욕망을 객관화시키면서 비로소 가능해진다. 즉 자신의 욕망을 타자의 욕망처럼 분류될 수 있는 것으로 객관화시키고 용인함으로써 그것을 집단의 범례 속에 투사함으로써 가능해지는 셈이다. 
보라! 종이 위에 즉흥적인 드로잉과 페인팅으로 제작된 일련의 시리즈 작품은 작가 오화진이 객관화시킨 자신의 욕망이 마치 ‘자연사박물관에 박제된 생물체’처럼 다양하게 펼쳐진다. 물고기와 같은 형상으로 보이는 드로잉은 〈이기주어(魚)〉라는 이름으로, 식물처럼 보이는 드로잉은 〈기생초〉라는 이름으로 또한 말처럼 보이는 그것은 〈자존마(馬)〉라는 이름으로 분류되면서 개별 작품들은 ‘오화진 개인의 문화’라는 한 집단의 여러 구성원으로 편입된다. 철사로 된 가느다란 조각체 위에 푸른색의 모직물을 입혀 전시 공간 속에 산포하듯이 매단 설치 작품 〈신호〉는 또 어떠한가? 그것 또한 본능적 욕망으로 창작된 여러 개별체의 조각들을 한꺼번에 객관화시키고 ‘오화진 개인의 문화’라는 집단의 구성원으로 편입시키기에 족하다. 마치 작품 제목처럼 개인의 ‘기호’적 세계로 그리고 그녀의 말처럼 개인의 ‘운명적’인 만남으로서 말이다.     
이제, 오화진은 개인의 문화라는 ‘기호적 세계’, 우연이 맞물리는 ‘운명적 세계’와 끊임없이 교류하면서, 자신과 타자에게 욕망을 용인하고 허락하면서 말한다. “욕망해도 괜찮아.”


오화진 작, 세상을 디자인하다 시리즈. 종이 위 드로잉 페인팅, 2019
(좌측부터) 이기주어(魚), 납품, 몸뚱다리, 개식새, 고등인, 먹뚜라미, 바늘귀안(眼), on off, 자존마(馬), 기생초(草),   



오화진, 모직물, 철사 등, 가변 크기, 2019




3. 김민희의 청유 - “욕망해도 괜찮아!”  
작가 김민희는 이번 전시에서 “욕망해도 괜찮아!”라고 말하면서 타자에게 손을 내민다. 그것은 ‘욕망하기를 함께 할 것을 권하고 요청’하는 ’청유(請誘)‘의 손짓이다. 한 주체가 자신 안에서 꿈틀대는 욕망을 스스로 실천하거나 타자에게 그(그녀)들의 욕망을 실천하라고 독려하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전자는 내밀한 사적 영역에서 일상적으로 실천되고, 후자는 공적인 제도의 영역에서 계몽적으로 실천되는 일이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다만 내 안의 사적 욕망을 타자에게 고백하거나 누설하고, “나와 함께 욕망을 실천하자”고 타자에게 청유하는 일은 그다지 쉽지 않다. 욕망은 개별자 주체의 사적 영역으로부터 발화하는 것이면서도 타자의 욕망을 자각하고 그들과 변증법적 관계를 맺으면서 까다롭게 구성되는 사회적 구성물이기 때문이다. 라캉(J. Lacan)의 유명한 아포리즘, “인간의 욕망은 대타자의 욕망”이라는 말은 그렇게 태어났다. 가정해 보자. “나의 욕망이 너의 욕망과 다르다면? 두 욕망이 만나 끝 간 데 없이 어그러지기만 하면 어떻게 해? 무안하잖아!” 그렇다. 욕망의 본질이 이러할진대, “욕망해도 괜찮아!”라면서 자신에게 용기를 주고 타자에게도 권하는 ‘욕망에 대한 청유’란 애초부터 쉽지 않다. 
작가 김민희는 이처럼 쉽지 않은 ‘욕망에 대한 청유’를 흔쾌히 그리고 기꺼이 실천한다. 그것은 무엇보다 여성을 욕망의 대상으로 타자화하고 심지어 상품화하기에 이른 한국의 폐쇄적이고 가부장적인 사회를 결연히 반대하는 비판적 인식 속에서 잉태하고 출발한 것이다. 그녀의 〈오키나와 판타지〉 연작(2018~ )은 “여성을 억압하는 사회적 구조를 가시화하고 여성의 성적 욕망과 상상을 드러내는 작업”이자 “기존의 남성적 발화로 치부되었던 성적 판타지를 여성의 것으로 전유”하는데 골몰한 작업이다. 
여성을 타자화하는 남성의 욕망에 반기를 들고 ‘여성적 발화’를 전면에 내세운 김민희의 ‘욕망에 대한 청유’는 그 출발 자체가 다소 도발적이다. 보라! 그녀는 남성으로부터 방어했던 여성의 몸을 당당하게 드러내는 일련의 회화적 제스처, 예를 들면 엉덩이와 가슴, 그리고 흥분해서 딱딱해진 유두를 가식 없이 회화의 표면 위에 올려놓는다. 그것은  페미니즘 이론가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의 아브젝트(abject)와 그것이 만드는 체험인 아브젝시옹(abjection) 개념을 회화를 통해 실천하려는 듯, 욕망이라는 이름으로, 여성의 몸으로부터 유출되는 모든 것을 비루한 것으로부터 신성한 존재로 치환하려는 노력에 다름 아닌 셈이다. 
한편, 김민희는 ‘발랄한 처녀 귀신’을 다루는 최근 연작인 〈고스트 비키니〉를 통해서, ‘여성의 욕망하기’를 강권하는 직접적 메시지로부터 일정 부분 힘을 뺀 채, 상징과 은유가 점유하는 작품들을 선보인다. 그것은 편견과 선입견으로 덧씌워졌던 여성의 욕망과 섹슈얼리티의 본성을 재기발랄한 가상의 ‘처녀 귀신’이 출몰하는 판타지적 세계로 벗겨내는 일이다. 그것은 젠더의 담론을 전복하려는 저항의 색을 지우고, 타자화된 여성의 실체를 팩션(faction)의 판타지의 세계로 드러내는 일에 집중한다. 즉 여귀(女鬼) 설화가 떠도는 실제의 장소를 답사하고, 전승의 이야기를 채취하는 등 사실(fact)에 기초한 채 자신이 창안한 허구(fiction)의 세계를 통해서 여성 담론을 시각화하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그것은 이 땅의 현실을 직시한 상태에서 욕망의 해방 담론을 상상하는 일이며, 선동과 강권의 메시지로부터 위로와 청유의 메시지로 전환하는 일이기도 하다. 들어보자. 김민희는 자신과 타자로서의 모든 여성을 따스한 눈으로 바라보면서 그녀들을 다독이는 청유의 손길을 내밀면서 상쾌하게 말한다. “욕망해도 괜찮아!”


김민희, 전시 전경, 오키나와 판타지, 합정지구, 2018


(좌)김민희, 망령 분수, 종이에 유화, 34.8 × 24.2cm, 2018
(좌)김민희, 망령 봉인석, 종이에 유화, 34.8 × 27.3cm, 2018


김민희, 야간 산행, 캔버스에 유화, 162.2 × 130.3cm, 2018



에필로그 
아트스페이스 휴의 기획전 《욕망해도 괜찮아》는 욕망에 대한 답을 제시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다만 세 명의 작가를 통해서 각기 ‘다르면서도 같은’ 욕망의 담론을 다양하게 성찰하고 이 시대에 욕망을 미술 안팎에서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지를, 때론 천진하게, 때론 흔쾌하게, 때론 도발적으로, 성찰할 따름이다. 
욕망이란 무엇인가? 세 작가의 작품을 살펴보고 그들의 조형적 성찰을 분석해 보았듯이, 욕망은 ‘인간 주체의 다중적 산물’이라는 정체성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존재이다. 그것은 수다한 인간 군상처럼 무척 다양한 모습으로 출현하는 까닭에 좀처럼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우리는 모두 욕망하고, 그 욕망이 언제나 충족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결핍의 공간에 자리한 소외가 욕망의 주체를 분열시킨다고 할지라도 욕망은 언제나 재생산된다는 것을 말이다. 윤리와 도덕, 법과 제도라는 이름으로 억압한다고 할지라도 인간에게 극히 ‘자연스러운 생산 활동’인 욕망은 끊임없이 재생산된다. 그러니 억압하지 말 일이다. 타자에게 고백하고 질문하라. 그렇지 않으면 한 주체의 욕망을 가늠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억압된 욕망이 사회적 질병으로 변질되기 십상이다. 지속해서 질문하되 그것을 허락하고 청유할 일이다. 
이 글에서 밝혀둘 것은, “욕망해도 괜찮아?”라는 질문, “욕망해도 괜찮아.”라는 용인, “욕망해도 괜찮아!”라는 청유는 세 작가의 작품을 분석하기 위한 개념적 장치일 뿐, 그들의 작품 세계 전반을 지칭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변하는 세월만큼, 세 명의 작가들은 앞으로도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변모를 거듭하는 작품들을 선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세 가지 ‘욕망에 대한 태도’는 동일하게 ‘욕망에 대한 억압과 은폐’에 대해서 반발하고 반기(反旗)한다. 따라서 이번 전시가 내세우는 “욕망해도 괜찮아”라는 발화 행위, 즉 ‘욕망에 대한 세 가지 방식의 말하기’는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면서 욕망에 대한 지속적인 실천을 설파하는 셈이다. ● 

출전/
김성호, 「욕망해도 괜찮아 - 질문과 용인 그리고 청유」, 카탈로그 서문, (욕망해도 괜찮아展, 2019. 8. 7~9. 10, 아트스페이스 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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