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혹은 체험적 서사와 마주하는 내적 추상
김성호(Sung-Ho KIM, 미술평론가)
I. 꽃 아닌 꽃 – 개인 서사를 응축한 마인드스케이프
주지하듯이, 20세기 추상미술은 서구에서 아방가르드, 엘리트주의, 국제주의로 대별되는 집단 미술운동으로서의 모더니즘의 주역이었다. 21세기를 지나고 있는 지금은, 단토의 언급처럼, ‘예술 작품이 되도록 하는 양식(style)’이 특별히 존재하지 않는 다원주의 미술의 시대에 이른지 오래다. 추상 역시 이즘(ism)의 거시 서사가 아닌 개인의 미시 서사에 집중하는 다원주의 추상을 펼치고 있다. 모더니즘 추상 회화는 매체 미학을 정초했던 그린버그(C. Greenberg)의 선언적 언명 이래 2차원 평면성 너머에서 오는 모든 것들을 차단하고 모노크롬과 같은 평면성 안에 잠입하는데 골몰해 왔지만, 이내 다원주의 미술이라는 흐름 속에서 혼성의 추상으로 자신을 변신한다.
오늘날 국내 추상 회화의 영역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국내 추상미술은 1990년대 이후 포스트모더니즘의 대중문화와 키치의 영향으로, 탈(脫) 장르, 탈 엘리트 미술, 탈 이데올로기의 미술을 표방하면서, 다원주의 추상의 시대를 전개해 오고 있다. 이전의 ‘전위미술 = 추상미술 = 모더니즘 = 실험미술’이라는 등식은 오늘날 거부된다. 물론 과거 ‘아방가르드 추상’의 영광을 재연하고자, 포스트 단색화가 등장해서 오늘날까지 유행하고 있지만, 형식과 내용도 제각각인 이른바 ‘다원주의 추상’의 시대에서 많은 작가는 ‘새로운 장르의 미술’을 찾는 집단적 실험을 그만두고 자신만의 미시적 세계에 천착하고 있다.
이러한 동시대 추상미술의 상황은, 천태은의 추상을 이해하는 데 있어 주요하다. 천태은은 ‘꽃 아닌 꽃’, ‘물 아닌 물’, ‘하늘 아닌 하늘’을 탐구한다. 자연이라는 미적 대상으로부터 길어 올린 꽃, 물결, 하늘과 같은 자연 풍광을 회화의 소재로 삼고 있으면서도, 탈재현을 시도하는 표현주의, 혹은 추상주의의 조형 세계를 펼치는 까닭에, 그녀의 회화는 ‘꽃을 그렸으되 꽃이 아닌’, 비구상 혹은 추상의 영역에 굳건히 자리한다. 그녀의 작업이 시도하고 있는 탈재현, 비구상과 같은 추상은 구체적으로 무엇이고 어떠한 미학적 함의와 메시지를 함유하고 있는가?
천태은의 ‘꽃 아닌 꽃’을 살펴보자. 그녀는 자연의 정수(精髓)이자 대표적 상징으로 탐구되곤 하는 꽃의 비구상화, 추상화에 천착한다. 꽃이란 무엇보다 회화에 있어서 오랫동안 재현적 미를 탐색하는 전통적 화제(畫題)였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미의 조건들이 다양하게 변화되어 왔을 뿐 아니라 많은 작가가 더 이상 숭고, 미, 추미 등의 미적 범주론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테마에 천착해 오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작금에 꽃이라는 주제와 소재는 ‘관습 상징’만을 도모한다는 이유로 회화, 특히 재현 회화에서 멀어진 감이 없지 않다. 그래서일까? 오늘날 꽃이라는 주제는 하이퍼리얼리즘이나 포스트 팝적 조형, 또는 비구상이나 추상의 영역에서 빛을 발한다.
천태은이 탐구하는 ‘꽃 아닌 꽃’은 꽃들처럼 보이는 군화(群花)이자 ‘기억과 체험적 개인 서사를 응축한 내적 에너지를 담은 추상’이 된다. 만개했던 꽃밭을 거닐던 어린 시절이나 청소년기의 기억을 소환하되 그 기억 이미지를 마치 물감 덩어리처럼 뭉뚱그려 표현했던 것처럼 그녀의 추상은 작가의 내적 에너지를 담은 일련의 마인드스케이프(mindscape)가 된다.
작품을 보자. 붉거나 푸른 계열의 주 색상이 점유하는 작품들에서도 어김없이 맞부딪히는 보색의 장치는 관객의 시선을 끌면서 생기발랄한 화면을 구축한다. 그것은 때로는 꽃의 형상으로 보이는 물감 덩어리들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전면 회화(all over painting)를 구성하거나 때로는 핑크나 그린의 단색면이 화면 상단 위에서 올오버 페인팅의 화면과 변별되게 구획되어 있기도 하다. 마치 프레임처럼 구성된 상단의 단색면 위에는 붉은 꽃잎 또는 노란 꽃수술처럼 보이는 군화의 일부 이미지가 올라서 있기도 하다. 형상이 구체화되지 않았으나 녹색의 꽃줄기나 푸르른 벌판을 배경으로 혹은 연못 혹은 습기를 머금은 듯한 보랏빛 풀밭을 바탕으로 흐드러지게 핀 화려한 난색의 꽃들로 보기에 무리가 없다고 할 것이다. 꽃들은 저마다 춤을 추는 듯한 율동감 가득한 형상으로 관객을 맞이한다. 더러 그 안에서 관객이 알 수 없는 추상화된 새의 모습이나 나비와 같은 곤충의 이미지를 발견하게 되는 것은 그녀의 작품을 대면하는 기쁨 속에 덤으로 얹게 되는 무엇이다.
망각이라는 이름으로 머리와 가슴 속에 담아두었던 천진난만했던 유소년기의 기억을 소환하는 그녀의 생동감 넘치는 군집의 꽃 이미지는 개별 관객의 공통된 보편적 추억마저 소환한다. 그녀의 작품은 작가 노트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기억과 같은 개인 서사를 응축한 내적 에너지를 담은 추상’이라고 할 만하다: “단순히 예쁘고 그림 같은 자연을 묘사하기보다는 인생의 시간과 경험, 개인의 서사와 삶을 마주하는 방식, 그리고 문득 떠오르는 기억이 압축된 우아한 추상화를 그리고 싶다. (중략) 그 때문에 전달하고 싶은 내적 에너지는 잠시 머물다 추상의 영역으로 회귀한다. 추상화에 끌리는 나의 그것과 닮아있다.”
그렇다. 천태은의 꽃들은 개인 서사와 삶이 마주했던 체험적 기억을 소환하고 응축한 추상의 이미지 덩어리이다. 어쩌면 그것은 꽃 아닌 꽃처럼, 어떠한 무엇으로 구체화하거나 특정하기 어려운 무엇이다. 더 구체적으로는 꽃을 ‘추상화된 군화’라는 형식의 마인드스케이프로 치환한 작가만의 내적 추상이라고 할 만하다.
II. 물결 아닌 물결 - 패턴화된 리듬에 몸을 실은 내적 추상
천태은의 작품에서 군화 연작 외에 또 달리 주목할 만한 작업은 일련의 ‘물결’ 연작이다. 이 연작은 군화 연작처럼 화면 전체를 물결 형상으로 가득 채운 전면 추상 회화이다. 이 연작에서는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윤슬을 노란빛의 추상적 표현으로 담아내거나 주위의 다채로운 풍광을 수면 위에 반영한 한낮의 물결 혹은 저녁 노을빛을 받아 붉게 물든 물결 등을 추상으로 담아내면서 자연에서 기인한 추상에 관한 다양한 실험을 시도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물결’ 연작이 작가 노트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물감을 다루는 방식의 조형 언어와 맞물려 있다는 것이다: “모이고 / 뭉치고 / 밀리고 / 선명해지고 /흩어지고 / 이내 흐른다.” 물감을 올려 레이어를 만들어 모으거나 뭉쳐서 마티에르를 만들고 그것을 다시 밀어내어 평평하게 화면을 만들거나 물감층을 해체하여 흩어짐과 흐름의 연쇄를 지속하게 하는 방식의 창작 언어는 물의 흐름을 가시화하는 물결의 형상과 더불어 그 속성을 닮아있다. 즉, 물감을 층층이 덮거나 밀쳐 내는 창작의 복잡다기한 방식이란 물 밑의 모습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투영과 물 밖의 풍경을 얹어 보여주는 반영이 맞물려 있거나 그것이 반복되는 물결의 흐름과 같이 마루와 골의 연속적 만남이 상호 조화를 이룬 것이다.
그렇다. 천태은의 물결 연작에는 정형화된 파상형(波狀形) 패턴, 즉 마루와 골을 일정하게 만드는 물결 패턴 혹은 비정형의 운무(雲霧)나 거센 바람의 비(非)파상형 패턴, 즉 마루와 골을 분간하기 어렵게 만드는 비규칙의 패턴이 혼재한 화면을 다이나믹하게 선보인다. “규칙성을 갖는 평면적, 공간적인 배열”을 우리가 패턴이라고 부를 때, 그녀의 물결 연작은 정형화되었든, 비정형화되었든, 리듬으로 연속된 동형 반복을 통해서 다분히 ‘패턴화된 추상’을 선보인다. 패턴이란 일정한 형태나 양식이 연쇄되는 이미지로 '무늬' 혹은 '문양(文樣)'이란 말과 같은 것이다. 패턴은 결국 ‘결’과 같은 말과 연동한다. ‘결’은 ‘바탕이나 상태’를 의미하는데, 대개 ‘규칙적이고 정형적인 상태’, 구체적으로 ‘겹이 만든 가시적인 요철(凹凸)의 공간의 일련의 평정 상태’를 지칭한다. ‘결’의 경우, 요(고랑, 골)와 철(이랑, 마루)이 연접하는 대비의 간극이 크면 클수록 평정 상태는 매우 거칠다.
그렇다면 물결은 흐르는 물에서 마루와 골이 만드는 운동의 평정 상태로 정의해 볼 수 있겠다. 달리 말해 우리는 ‘물결’을 그 자체로 패턴화된 양상을 함유한 자연의 양태로 살펴볼 수 있다. ‘물결’이란 골과 마루가 만들어 내는 무수한 파동(波動)의 형식이 운동한 과정이자 그것이 평정 상태에 이른 결과이다. 이 결의 평정 상태는 ‘정중동(靜中動)’이라는 운동성의 미학으로 가득 차 있다. 따라서 그녀의 작업 중 물결 연작은 골과 마루와 같은 대립적 요소들이 끊임없이 수면 아래에서 움직이는 운동성이 비로소 물 위로 드러난 패턴화된 양상을 표현한 것이라고 할 만하다.
작품을 보자! 노란색의 ‘마루’가 똬리를 트는 지점 옆으로 밀려 들어오는 푸른빛의 ‘골’의 형상이 반복되는 마루와 골의 유기적인 상호 작용이 그녀의 작업을 클로즈업된 물결의 재현처럼 보이게 만들기도 하면서 한편으로 패턴화된 추상으로 선보이기도 한다. 붉은 노을빛이 반영된 것처럼 보이는 물결 연작 역시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골과 마루가 지나고 물속 풍경이 들여다보이는 ‘투영’과 물 밖 풍경이 수면 위에 드리워지는 ‘반영’이 한데 어우러진 또 다른 물결 연작은 어떠한가? 이 작업에서도 골/마루, 투영/반영이 서로를 밀치고 끌어안으면서 패턴화된 추상을 만들기에 족하다. 가히 ‘패턴화된 리듬에 몸을 실은 내적 추상’이라고 할 만하다.
작가는 말한다. “흐르는 물처럼 / 나의 심상 / 인생도 담담한 흐름을 내 것으로 / 마주하기를.” 자연 대상을 내적 추상으로 견인한 작가의 물결 연작은 결국 인간 삶에 대한 은유인 셈이다. “둥글게 너울지고 / 소멸되듯 잔잔”해지는 ‘물결’에 마음을 투사한 우리의 ‘마음결’이라는 것이 희로애락의 상반된 감정들이 끊임없이 생채기를 내며 싸우는 운동의 과정에서 평정의 상태를 찾는 것처럼 말이다.
III. 에필로그
이 글은 천태은의 작품을 ‘기억과 체험적 개인 서사를 응축한 마인드스케이프’이자, ‘패턴화된 리듬에 몸을 실은 내적 추상’이라고 해설했다. 미적 대상인 자연을 회화의 소재로 삼고 있으면서도, 탈재현을 시도하는 표현주의, 혹은 추상주의의 조형 세계를 펼치는 그녀의 작업은 자연 대상을 내적 추상으로 전이함으로써 ‘꽃 아닌 꽃’, ‘물결 아닌 물결’을 우리에게 선보인다. 이러한 차원에서 바다를 품고 있는 도시를 멀리서 포착한 또 다른 작품은 하늘과 바다를 커다랗게 화폭 위에 담아낸다. 그것은 분명 구상화의 형식을 빌리고 있지만, 넓게 포착한 하늘과 바다의 풍경을 패턴화된 리듬으로 추출하고 있다는 점에서 어찌 보면 추상의 연장선상에서 읽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달리 말해, ‘하늘 아닌 하늘’이자 ‘바다 아닌 바다’라고 하겠다.
천태은이 캔버스 위에 보색의 물감을 올려 뭉쳐 놓거나 펼치는 방식으로 색을 조율하고 그것을 일련의 추상 패턴으로 만들어 서로 조화롭게 병치시키는 작업은 꽃과 꽃이 마주하는 꽃밭이나 골과 마루가 연동하는 물결처럼 ‘만남과 연결’을 구성하고 ‘하나 → 전체’의 방식으로 확장되는 ‘결’의 이미지를 심리적 은유로 확장한다. 그것은 주체와 주체, 주체와 타자의 만남과 같은 존재론적 미학을 잉태한다.
이러한 만남과 연결의 존재론적 미학은 그녀의 또 다른 작품 〈Stone of Positive Power〉(2023)이 표방하는 메시지처럼 낙관적이고 긍정적인 세계관을 엿보게 한다. 핑크, 블랙, 화이트가 화면을 수직, 수평, 대각선으로 나누거나 대립하는 방식으로 기하학적 패턴을 만들고 있는 이 추상 작업은 자연과 인공, 정신과 물질이 대립하는 이미지로 전환되면서, 그녀가 의도하고 있는 “반석 위에 삶의 흐름을 단단하게 만들어 가고자 하는 긍정적 힘”이라는 메시지를 사뿐하게 올려놓을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차원에서, 천태은의 작업은 ‘기억과 체험적 개인 서사를 응축한 마인드스케이프’이자, ‘패턴화된 리듬에 몸을 실은 내적 추상’이면서 또 한편으로는 ‘낙관적이고 긍정적인 삶에 대한 은유’로 가득한 것으로 해설할 수 있겠다. 이러한 그녀의 추상 작업이 관객에게 ‘의미를 온전히 알 수 없는 추상화’로부터 ‘관객을 그림 앞으로 더 가까이 다가오게 하고 관객의 생각과 마음을 채울 수 있게 만드는 내적 은유의 추상’으로 거듭나길 기대한다.
출전/
김성호, 「기억 혹은 체험적 서사와 마주하는 내적 추상」, 『천태은』, 개인전 카탈로그, 2023
(천태은 개인전, 2023. 7. 1~7. 15, 서현문화의 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