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 흔적을 승화하는 추상 실험 - 나만의 풍경
김성호(Sung-Ho KIM, 미술평론가)
I. 프롤로그
작가 최만길은 대학에서 회화를 전공했던 만큼, 비구상과 추상에 이르는 다양한 회화 연구를 지속해 온 것은 물론이고, 구상과 비구상의 영역에 이르는 조각을 두루 아우르는 작업을 선보여 왔다. 그의 회화와 조각이 추상과 구상 사이의 접점인 비구상을 일정 부분 공유한다는 점에서 그의 작업은 ‘비구상적인 추상 회화’와 ‘구상적인 비구상 조각’을 오가는 작품 세계를 선보인다고 평가할 만하다. 게다가 그의 상반된 두 영역을 아우르는 비구상의 조각과 회화가 동일하게 견인하는 주제 의식이 ‘인간’으로부터 기인하고 있다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특히 최근의 추상 회화는 이러한 주제 의식을 부단한 매체 실험을 통해서 더욱더 선명하게 선보인다. 그것이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의 미학적 함의는 무엇인가? 최근의 추상 회화를 중심으로 그의 작업 전모를 자세히 살펴보자.
II. 자연주의 인체 조각 – 인간의 내면에 관한 조형
최만길은 회화로부터 출발했으나 이후 조각으로 전환해서 오랫동안 작업 활동을 펼쳐 왔으며, 조각 작업을 병행하면서도 최근에는 본격적으로 회화 실험에 천착하고 있다. 그가 1992년 첫 개인전을 조각전으로 선보였던 만큼, 이 글의 중심인 최근 회화를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그의 조각이 어떠한 것이었는지 들여다보자.
그의 조각은 인간 형상을 품은 인체 조각이었으나 늘 자연과 함께하는 ‘관계 맺음’의 세계관을 선보여 왔다. 그의 초기작인 〈순간에서 순간(moment to moment)〉(1986)은 형식적으로는 짚으로 꼬아 만든 새끼줄 형상이 똬리를 틀고 올라가면서 마치 바위를 닮은 ‘인체 조각’을 드러내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인간(주체)과 또 다른 인간(타자)의 만남뿐 아니라 인간과 자연의 공존이라는 거시적이고 본질적인 메시지를 전한다. 이 작품의 인간 형상은 마치 바위나 흙덩이와 같은 무기물로 빚어진 것처럼 자연스럽다. 물, 공기, 토양과 같은 탄소 없는 무기물이 생명체의 구조를 유지하는 주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무기물 또한 유기물처럼 자연으로 통칭된다. 이러한 차원에서 그의 작품은 늘 주체와 타자의 만남 그리고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 표상한다. 게다가 그의 폴리로 된 조각의 조형 방식인 ‘짚으로 만든 새끼줄’ 형상이라는 것이 ‘벼, 보리, 밀, 조 등의 이삭을 떨어낸 줄기와 잎’으로 된 자연의 주검이라는 점에서 자연의 생성과 소멸을 거듭하고 있는 순환의 자연 미학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흥미로운 것은, 그의 조각에는, 서구의 프리미티비즘(Primitivism)의 세계와도 맞물린 ‘거칠거나 덜 다듬어진 그러나 자연스러운 인간 형상’이 자리하면서 한국 전통의 자연주의 미학을 깊이 성찰하고 있다는 것이다. 테라코타와 시멘트로 만든 작품, 〈순간–우정의 하모니(Moment–Harmony of Friendship)〉(1990) 또한 구릉이나 산과 같은 형상으로 만들어진 인체 조각을 표방하고 있다는 점에서, 구체적 형상과는 의도적으로 거리를 둔 채, 한국 전통의 자연주의 미학에 깊이 천착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즉 그의 조각은 김원룡(金元龍)의 ‘자연주의’ 그리고 고유섭(高裕燮)의 ‘비정형성, 비균제성, 무기교의 기교’와 같은 자연주의 미학을 유감없이 펼쳐 보인다. 가히 한국성에 근간한 한국적 미감이라고 하겠다.
1990년대에 본격적으로 제작한 조각은 두상과 팔다리 등을 인식할 정도로 인체 외양을 확연히 띠고 있지만, 1980년대보다는 좀 더 구체성을 드러낸 것일 뿐, 여전히 한국 전통의 자연주의 미학을 고스란히 함유한다. 1992년에 대거 제작된 〈정(Attachment)〉, 〈정-기다림(Attachment–Waiting)〉 연작뿐만 아니라, 〈정-우정의 하모니(Attachment-Harmony of Friendship)〉 연작과 같은 흙과 유약을 사용한 도조 작품이나, 〈정–모자상(Attachment-mother and son)〉 그리고 〈정–휴식(Attachment-rest)〉 연작과 같은 브론즈 작품은 모두 자연의 나무 형상이나 쌓인 흙덩이와 같은 자연주의 양태로 인간 군상을 드러낸다.
한편, 1990년대 중후반, 새와 같은 자연 상징과 산과 같은 자연 풍경이 결합한 일련의 〈자연〉 연작인 브론즈 조각이나 1990년대 중반에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스테인리스 스틸 재질의 〈희망〉 연작-‘희망의 나래(2013), 희망의 나라로(2013,) 희망의 메아리(2015, 2016), 희망을 향하여(2017) 등-은 작품의 형식이 일정 부분 변화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자연주의 미학과 더불어 주체와 타자 그리고 인간과 자연의 만남이라는 관계의 미학을 일관되게 탐구한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최만길의 조각이 표방하는 ‘정, 우정, 사랑, 휴식, 기다림’ 또는 ‘자연, 희망’과 같은 제목은 그의 조각이 함유한 미학적 메시지가 인체 조각의 외양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인간 존재론과 인간 내면에 대한 심층적 성찰임을 반증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그의 시원(始原)의 한국적 자연주의 인체 조각을 ‘인간 내면에 관한 조형’이라고 넉넉히 부를 만하다.
III. 실험적 추상 회화 – 고통을 승화하는 추상 의지
작가 최만길은 회화과 졸업과 함께 회화 작업에 천착했으나, 특정 장르에 얽매이지 않는 여러 매체 실험을 거치면서 첫 개인전을 조각 전시로 가진 이래, 오랫동안 조각가로 활동해 왔다. 그러한 활동 중에도 추상 회화의 정신성은 그의 작업을 지탱하는 근원이었다. 심층적으로 구상했던 추상 회화 실험을 2018년부터 본격화했고, 비교적 최근인 2020년부터 매년 개인전을 통해 선보임으로써 우리는 조각에서부터 회화에 이르는 그의 방대한 작업 전모를 살펴볼 수 있게 되었다.
최만길은 왜 다시 추상 회화에 천착하고 있는 것일까? 다양한 제작 공정에 필요한 엄청난 노동력과 더불어 주물 캐스팅 등 공장과의 협업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젊은 시절의 조각 창작이 이제는 힘에 부친 것도 사실이지만 그보다 더 근원적인 고민은 여기에 있다. 온전히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만의 창작으로 이루어진 ‘최만길에 의한 최만길만의 작품 세계’가 필요했던 까닭이다.
여기에는 조각 창작보다 더하다면 더한 정신적 고뇌와 육체적 고통이 뒤따랐다. 남들과는 다른 독창적인 창작 세계를 일구기 위해서 수많은 날을 번민하면서 시도했던 수많은 에스키스 작업은 물론이고 거대한 크기의 특수 매체의 캔버스를 직접 짜고 그 위에 고된 노동의 창작 행위를 반복하면서 장애로 불편한 몸을 혹사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린 시절부터 소아마비의 역경을 딛고 불편한 몸을 이끌면서 학업과 생업을 병행하면서도 늘 흠모해 왔던 예술가로서 세상 살기를 마다하지 않았던 불굴의 도전 정신이 아니면 감히 엄두도 못 낼 선택이었다. 늦은 나이에 찾아왔던 뇌경색 또한 그에게 창작을 대면한 육체적 고통을 가중시켰다. 그도 그럴 것이 최만길에서 ‘실험적 추상 회화 실험’은 단순히 사의적 개념의 전환을 도모하는 개념적 추상에 머물지 않고 매체와 질료에 변화를 시도하는 무수한 육체적 노동을 동반하는 실험이었기에 몸의 혹사는 당연한 결과였다. 육체적 고통을 수반하는 그의 추상 회화 실험은 고통을 승화(Sublimation)하려는 추상 의지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러한 차원에서 그에게 캔버스와 나무 패널 그리고 그가 작업 중에 새롭게 발견한 한지는 일종의 투쟁의 장이었다. 육체적 고난 속에서 비로소 빛나는 정신성을 만날 수 있다고 했던가? 역설적으로 말해, 그에게 장애는 그의 빛나는 예술을 이끄는 한 동력이었던 셈이다.
어떤 면에서는 추상 회화는 평생 장애의 몸을 이끌고 살아가는 그에게 비로소 장애가 아닌 세상을 만나게 하는 커다란 무언의 세계였다. 이것과 저것이 구별되지 않은 완전체로서의 세계, 그것은 누구도 시도하지 못했던 그만의 회화를 창출하기 위해 다양한 매체 실험을 거듭하면서 맞이한 환희와 낙도(樂道)의 세계이기도 했다. 그 실험이 무엇이고 그의 작품 속 미학이 어떠한 것인지 자세히 살펴보자.
IV. 상처 흔적으로부터 - 인간 기억에 관한 나만의 풍경
그의 회화는 실험적 추상 회화 혹은 비구상 회화에 자리한다. 현재까지 그것은 대략 두 가지 주제로 변별되는데, 하나는 〈나만의 풍경(The scene of my own)〉 연작이고 또 하나는 〈기억(recollection)〉 연작이다. 여기서 그가 주제어인 ‘풍경’을 랜드스케이프(landscape)가 아닌 신(scene)을 취한 까닭은 그의 작업이 단순한 ‘(자연) 풍광’이기보다 ‘(사건이 벌어진) 현장 혹은 장면’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또한 또 다른 주제어인 ‘기억’을 메모리(memory)가 아닌 리콜렉션(recollection)으로 삼은 이유는 그의 작업이 함유한 ‘기억(하는 내용)’의 의미를 강조하기 위함이다.
무슨 사건을 기억하기 위함인가? 그의 추상 회화 연작은 자기의 체험적 기억을 소환하고 창작 행위와 그 결과물을 통해서 상처 흔적(traces of wounds)을 승화하는 실험이다. 어린 시절부터 소아마비의 장애를 평생 끌어안고 살면서 타자로부터 체험했던 마음의 상처와 그것이 마음에 각인한 흔적을 은유하는 작업이자, 그것을 승화하고 정화하는 작업인 셈이다. 그가 자신의 작업 안에 “회한과 반성, 슬픔과 연민, 기쁨과 환희 등, 인간이 겪을 수 있는 모든 감정의 경험”을 담고 있다고 증언하고 있듯이, 그의 추상 회화는 이러한 작가 최만길의 체험적 기억을 투사한 무엇이다. 그래서 추상 회화 실험은 그의 조각과 마찬가지로 넓게는 인간에 관한 주제 의식으로부터 기인하고 있다고 단언할 수 있겠다,
이러한 차원에서, 어떠한 사건이 벌어진 현장이라는 ‘풍경’과 체험적 ‘기억’이라는 의미를 강조하는 두 주제어는 작품의 형식상 구별되는 것이지, 주제 의식에서 특별히 구별되는 것이 아니다. 외려 〈나만의 풍경〉 연작과 〈기억〉 연작은 공통적으로 체험적 기억과 그것을 담은 풍경을 지향한다. 그것은 “감각에 의하여 획득한 현상이 마음속에서 재생된 것”이라는 의미의 심상(心像, mental image)을 공통으로 지향한다. 즉 최만길의 회화에 드러난 ‘풍경 아닌 풍경’은 그가 대상으로 삼은 풍경 그 자체가 아니라, ‘작가의 특수한 체험을 축적한 사건의 장소성’의 의미를 함유한다는 점에서, 인간과 상호 작용하는 또 다른 주체로서의 풍경인 셈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화면 속 수많은 점의 형상들은 그가 언급하듯이, “수많은 사람”의 번안이다. 그가 추상 회화에서 '전생과 현생의 기억 또는 혼백이 한데 어울려 춤을 추는 것처럼 표현하고자 했다'고 밝히고 있듯이, 점의 형상으로 가득한 그의 추상 회화는 그의 체험적 기억이 만드는 마음의 이미지(mental image)이자, 마음의 풍경(mind scape)이 된다. 즉 작품명처럼 ‘나만의 풍경’인 것이다.
여기서 그의 〈나만의 풍경〉 연작을 살펴보자. 이 연작에서는 질료의 차원에서 한지가 전면에 나선다. 그의 조각이 인간과 자연의 만남을 화두로 자연주의 미학에 천착해 왔던 것처럼, 그의 추상 회화 또한 자연의 대표적인 질료로 표상되는 한지를 매체로 해서 인간과 자연의 만남을 화두로 내세운다. 나무로부터 온 종이, 특히 “한지는 우리 전통이 깃들어 있는 지류(紙類)이다. 나무의 속성이 묻어 있으면서도 물성 자체가 물과 바람에 잘 어울린다는 점만으로도 나의 작품 ‘내면의 풍경’과 너무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스쳤다”고 그가 언급하고 있듯이, 한지는 자연주의와 같은 한국 전통의 미감을 작품 속에 담아내기에 제격이다.
그가 이 한지를 맞닥뜨리게 된 계기는 우연한 경험으로부터 왔다. 작업실 인근의 한 서예원에서 서예 연습하고 버려진 한지를 우연히 발견하고, 그것을 자신의 작업 속으로 견인해 온 것이다. 누군가로부터 이미 만들어진 ‘발견된 오브제(Objet trouvé)'를 자기 작품 속으로 전이하는 데페이즈망(dépaysement)의 전략을 실천하면서 그는 무엇을 기대했던 것일까? 그는 한국 전통 서도(書道)의 서향 넘치는 문기와 더불어 작가의 체험적 무의식 속에 잠재한 정서가 서로 결을 이루며 형식과 내용의 조화를 이루기를 기대했음이 틀림없어 보인다. 그는 이 한지를 찢어 콜라주를 시도하거나 젖은 상태에서 한지를 밀어내거나 스크래치와 같은 데콜라주를 시도하면서 그 위에 다시 먹이나 색을 올리는 등 다양한 조형적 실험을 거듭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해체된 캘리그래피가 이미지 안에 개입하면서 만드는 이미지(icon)와 텍스트(text)의 혼성체, 즉 동양 전통의 문자도(文字圖)나 서화(書畵) 혹은 현대 서예와 같은 아이코노텍스트(Iconotext)의 효과를 효율적으로 실현한다. 찢어지거나 뭉개진 텍스트! 그러니까 작가 최만길은 한자나 한글의 텍스트 고유의 내용을 해체하고 자기의 작품 속 이미지로 전유함으로써 텍스트의 가독성을 고의적으로 탈각하는 새로운 의미의 정체성을 부여한 셈이다.
이러한 조형 언어는 한지의 물성에 대한 탐구로 이어진다. 평면 위에 요철(凹凸)을 만드는 릴리프(relief)와 같은 부조적 화면을 만드는 방식이 그것이다. 그는, 계곡 풍경을 클로즈업한 듯한 화면이나 심원법(深遠法)으로 포착한 듯한 자연 이미지가 한데 어우러지게 해서, 추상에서 출발한 그의 회화를 구상과 맞물린 비구상 화면으로 변주한다. 여기에 캔버스와 한지가 올라선 패널 모양을 둥근 원 모양으로 만들거나 변형한 쉐이프트 캔버스를 통해서 작품이 단순한 물리적 풍경이 아닌, 체험적 기억으로 견인하는 마음의 풍경, 즉 ‘심상’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따라서 그의 작품 속, 산 능선의 골과 마루가 연상되는 요철의 조형 언어인 포지티브와 네거티브의 병치는 풍경의 재현이기보다 매체의 질료감을 강조하는 표현의 방식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질료감을 강조하는 부조적 작업은 회화와 조각이 만나고 자연과 인간이 한데 만나는 사유의 장이 된 셈이다.
필자는 그의 작품 곳곳에 각인된 생채기와 같은 상처 흔적을 주목한다. 그것은 캔버스 위에 부착해 올린 한지의 물성을 최대한 활용한 표현의 결과물이자, 슬픔과 고통과 같은 인간 감성에 대한 은유가 된다. 펄프가 맺은 순연(純然)의 식물성 조직체를 충격과 압력을 가해 찢어내는 해체의 전략을 통해 점 혹은 구멍과 같은 흔적을 남기고 그 물리적 흔적을 인간의 피부에 남긴 생채기와 같은 상처 흔적으로 은유하는 까닭이다.
V. 상처 흔적인 점 혹은 구멍 – 추상 충동과 승화된 내면 풍경
최만길의 작업에는 점 혹은 구멍으로 가득하다. 그것은 캔버스 위에 부착한 한지에 색을 입힌 후 마르기 전에 그 표면을 군데군데 밀어내거나 다 마른 후 특수 도구로 스크래치를 내어 긁어내거나 상처를 입힌 결과물로서의 흔적이다. 즉 상처 흔적인 셈이다.
생각해 보라. ‘점’은 평면의 XY 좌표 위에서 자신의 위치에 속박된 채 움직이지도 못하는 ‘외로운 정주자(定住者)’로서의 열등한 존재이고 ‘구멍’은 멀쩡한 표면이 뚫리거나 파내어진 결여와 부재의 존재이다. 그는 왜 점이나 구멍처럼 열등하고 비루한 존재를 화면 속에 가득 생채기처럼 만들고 있는 것일까? 그는 점이나 구멍을, 과거를 성찰하고 현재적 위상을 성찰하는 매개체로 삼는다. 그것은 작가의 체험적 기억 속에 남긴 생채기를 점이나 구멍과 같은 투사하여 자신의 과거를 성찰하는 것이자, 그 상처 흔적을 극대화하는 표현주의적 추상 행위를 통해서 자신의 과거 상처를 위무하고 치유하는 일련의 명상 행위가 된다.
최만길이 최근에 몰입하고 있는 작품을 보자. 그는 나무 패널 위에 캔버스 천을 씌우고 그 위에 재생 종이 박스를 덧대어 탄탄한 지지대를 만들고 한지를 덧대 바르고 채색을 입힌 후 그가 제작한 날카로운 특수한 도구를 가지고 화면에 흠집을 만들고 긁어내어 무수한 스크래치를 남기거나 구멍을 뚫어낸다. 뜯겨진 한지의 피부 아래로 누르스름한 재생 박스 종이의 날 것의 색이 마치 속살처럼 드러나거나, 피부가 벗겨져 선혈이 낭자한 생채기처럼 색면이 드러나기도 한다. 그는 때때로 이러한 상처 흔적을 군데군데 솜으로 메워내기도 하면서 상처 주기와 상처 치유하기를 동시에 행한다.
이론가 보링거(Welhelm Woringer)가 ‘추상과 감정이입’에서 ‘인간이 자연과의 관계에서 불안을 느끼고 극도의 정신주의로 몰입할 때 추상적 충동이 발생한다’고 고찰한 바 있듯이, 최만길에게 추상 충동은 자신의 체험적 기억 속에 남은 상처 흔적을 소환하고 다시 극대화하는 표현주의 방식으로 추동된다. 그는 이러한 추상 충동을 시각화하는 작업을 통해서 현재적 자신과 대면함과 동시에 그것을 고통으로부터 치유하는 일련의 승화 작용이 일어나는 사건의 장으로 삼는다. 승화(Sublimation)가 참담한 고통을 숭고(Sublime)의 과정으로 전이하는 작용을 가리키듯이, 승화는 우리 현실계의 비루하고도 비관적인 상황으로부터 해방되는 기제가 된다. 프로이트(S. Freud)가 승화를 ‘본능적 욕망의 변천 현상’으로 바라보고 있듯이, 승화의 욕망은 우리 모두에게서 자라난다. 심리학자 하트만(H. Hartmann)는 승화를 “본능적인 것이 비본능적인 것을 지향하는 에너지 양식의 변화”인 것으로 고찰하고 있듯이, 최만길에게 있어 승화란 평생 장애를 안고 현실과 맞닥뜨려야 했던 현실적 고통과 어려움을 탈주하는 유일한 해결책인 셈이다.
네거티브를 포지티브를 전환하는 이러한 승화 작용은 최만길의 작업에서 점과 구멍이라는 상처 흔적을 만드는 추상 충동으로부터 추동된다. 여기에 미시적 존재를 우주의 한 부분이자 우주의 다른 모습으로 보고자 하는 동양 철학의 사유가 더해져 그의 작업에서 점과 구멍은 더 이상 허망하고 비루한 무(無)’의 존재가 아닌 ‘충만한 유(有)’의 존재로 변화한다. 생각해 보라. 0차원 ‘점’은 자신의 몸을 2차원 선과 3차원 면으로 확장하는 생성의 출발점이 아니던가? 그래서 선인의 지혜를 담은 화엄경은 “하나 속에 모든 것이 들어있다”는 의미의 일중일절다중일(一中一切 多中一)을 설파하지 않았던가? 한편 ‘구멍’을 의미하는 한자어 혈(穴)이란 풍수지리에서, 용맥(龍脈)의 정기가 모인 자리가 아니던가? 그것은 문화기호학작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가 구멍을 마치 어머니의 자궁과도 같은 ‘무한한 에너지를 투여하는 생명 원천’으로서의 코라(chora)로 바라보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이러한 차원에서 최만길의 추상 회화 연작은 육화(incarnation, 肉化)된 ‘무수한 점과 구멍’을 추상 충동으로 추동하고 무수히 각인한 신성한 노동의 결과물이다. 아울러 그의 작업은 고통으로부터 치유와 승화를 도모하는 일련의 ‘고된 노동의 정화의식’이자 관객과 공유하는 작가만의 ‘승화된 내면 풍경’인 셈이다.
VI. 에필로그
글을 마치자. 소아마비라는 장애와 급작스럽게 찾아왔던 뇌경색이란 질병이 야기했던 육체적 고통과 환난의 상황을 비장애인이나 큰 질병 없이 지냈던 사람이 가늠한다는 것은 어렵다. 예술 작품을 평하는 이 글에서 최만길의 장애와 질병을 굳이 언급했던 까닭은 그의 이러한 장애와 질병이 야기한 상처 흔적을 거론하지 않고서는 그의 작품 속에 내재한 심층적 미학을 온전히 이해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아울러 생활고에 허덕이면서도 작품을 손에 놓지 않었던 예술가적 열정 역시 빼놓고 그의 작품을 이야기할 수 없겠다. 작가의 삶이 곧 작품인 까닭이다.
그는 오늘도 치열하게 노동하는 창작을 통해서 자신의 육체의 한계에 도전한다. 그것은 ‘상처 흔적을 승화하는 추상 실험’이자 ‘나만의 풍경’을 만들고자 하는 작가의 확고한 의지와 결단을 실천하는 성실한 과정이다. ‘자연주의 인체 조각’으로부터 ‘실험적 추상 회화’에 이르기까지 최만길의 전 작업은 상처와 고통을 망각하지 않고 그것을 천형처럼 끌어안고 하늘이 내린 자신의 예술가적 소명이 무엇인지를 치열하게 고민한 결과물이기도 하다.
(20240217)
출전 /
김성호, 「상처 흔적을 승화하는 추상 실험 - 나만의 풍경」, 『최만길』, 카탈로그, 2023.
(최만길 개인전, 갤러리자리아트, 2023키아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