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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 구미원 / 원초적 그리움-무딘 의미를 향한 침묵의 메시지

김성호

원초적 그리움: 무딘 의미를 향한 침묵의 메시지


김성호(Sung-Ho Kim, 미술평론가)  

사진작가 구미원의 이번 전시는 ‘원초적 그리움’이라는 주제 아래, 동물원에 거주하는 야생동물들의 모습을 담은 흑백 사진을 통해서 부재와 상실의 메시지를 전한다. 무엇에 관한 그리움이며, 상실인가? 우리에 속박된 동물들이 강제로 떠나올 수밖에 없었던 야생 자연이라는 원고향에 대한 그리움이자 그 속에서 누렸던 자유의 부재 곧 상실이 그것이다. 구미원이 동물원의 야생동물들에 감정 이입해서 탐구하는 ‘원초적 그리움’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이며 그녀의 사진에 어떻게 표현되었는가? 또한 그녀의 흑백 사진이 함유하는 미학적 메시지는 무엇인가? 



원초적그리움  #01-타조, 서울대공원-피그먼트  프린트-80x53cm-2021



원초적그리움  #04-아시아흑곰, 청주동물원-피그먼트  프리트-48x60cm--2023



I. 동물원 — 잔혹한 셀터
‘동물원 안의 야생동물’은, 근대 이전부터 기이한 생명체를 탐구하려는 인류의 박물 취미가 낳은 존재이다. 근대 이후 인류의 과거를 추적하기 위해 탐구했던 생물학적 관심이나 부자들의 호사 취미로 고착화되었고, 오늘날의 멸종 위기종에 대한 생태학적 성찰로 지속되는 것일 뿐이라는 그럴싸한 변명을 늘어놓는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인간의 욕망이 낳은 피해자임에 분명하다. 이러한 차원에서 ‘우리 속 동물’은 지구의 생태계를 보전하는 주체를 인류로만 간주하려는 ‘인간중심적 접근(homocentric approach)’이 초래한 ‘사물화된 결과물’인 셈이다.  

아서라! 실상 ‘동물원 속 동물’의 기원은 더 오래되었다. 그것은 구석기의 사냥 노동으로부터 탈주하려는 신석기인들이 고단한 유목을 접고 정주의 시대를 열면서 농사짓기와 동물 사육을 꾀했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인간이 땅을 헤치고 홈을 만들어 씨앗을 뿌리는 것뿐만 아니라, 식육을 위해 벌판을 뛰놀던 들소를 말뚝에 붙들어 매고, 운송을 위해 야생마에 재갈을 물리고 고삐로 욱죄는 순간, 이미 야생동물은 가축이 되었고, ‘울타리 속 사물화된 결과물’로 변이되었다고 해도 무방하리라. 

이러한 차원에서 오늘날 야생동물에게 쇠창살로 둘러싸인 동물원은 셸터(shelter)의 또 다른 이름인 셈이다. ‘잔혹한 셸터’라고 할까? 그도 그럴 것이 ‘은신처, 피난처’를 의미하는 셸터는 인간에게는 추위와 폭염을 피하고 야수의 위협으로부터 자기 몸을 지키기 위해 유용한 구조물이었지만, 가축화된 동물에게는 도망가지 못하도록 속박하는 족쇄와 같은 감옥이었던 까닭이다. 자연의 ‘매끈한 공간(espace lisse)’ 위에 정주의 공동체를 위한 벽을 쌓고 수로를 파서 ‘셸터’를 위시한 ‘홈이 팬 공간(espace strié)'을 만들면서부터 동물에 대한 속박과 억압은 예견된 것이었다. 들뢰즈(G. Deleuze)는, ‘매끈한 공간’은 비식민화된 공간, 열린 공간, 유목의 공간인 반면, ‘홈이 팬 공간’은 매끈한 공간에 반대하는 질서와 계층의 공간, 식민화의 공간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인간에 대한 인간 식민이 그러할진대 하물며 동물에 대한 인간의 지배와 억압이 오죽했으랴!

사진작가 구미원은 최근 서울대공원이나 청주동물원 등 국내의 동물원을 바지런히 오가면서 야생동물들을 만나고 기록해 왔다. 그녀는 동물원이라는 이름의 ‘잔혹한 셀터’ 안에 속박당한 채, 아프리카, 아메리카, 사막, 몽골의 대초원과 같은 원고향인 자연을 잃어버린 동물들의 ‘삶 아닌 삶’을 사진으로 기록하고 추적하면서 그들에게 한껏 감정 이입한다. 그들이 상실한 자연이라는 원고향과 그 속에서 만끽했던 야생성의 자유에 대한 ‘원초적 그리움’이 무엇일지를 상상하면서 말이다. 



원초적  그리움  #19-망토개코원숭이, 서울대공원-피그먼트  프린트-40x60cm-2022



원초적그리움  #03-침팬지, 서울대공원-피그먼트  프린트-40x60cm-2022



II. 원초적 그리움 — 자연의 야생성 
동물원이라는 잔혹한 셸터는 대개 가로와 세로축이 교차하는 쇠창살로 표상된다. 갇힌 야생동물이 탈주하지 못하도록 높게 둘러싸인 담장을 만들되, 그들을 구경거리의 대상으로 삼아 바라볼 수 있는 비어 있는 공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쇠창살은 때로 야생의 짐승들이나 바닷속 생명체의 전모를 살펴볼 수 있는 동물원이나 아쿠아리움의 강화 유리벽으로 대신되기도 한다. 

쇠창살이나 강화 유리벽은 ‘야생동물의 보호를 위한 셸터’가 아니라 혹시 있을지 모를 그들의 위협을 미연에 방지하고 편안히 그들을 구경하기 위한 ‘인간의 안위를 위한 셸터’로 인식하게 만드는 기제이다.  

작가 구미원의 사진은 잔혹한 셸터에 구속된 야생동물을 구경거리로 대상화, 타자화하는 방식을 벗어나 그들에게 감정 이입을 시도하면서 자기화하는 방식을 취한다. 프로이트(S. Freud)의 정신분석학이 그랬던 것처럼, 타자에 감정 이입을 통해 자기를 투사하고 자기화하는 ‘연민의 동일시(identification)’를 실행하는 것이다. 정신분석학자 센들러와 로젠들랏(Sandler & Rosenblatt)는 동일시를 ‘대상 이미지의 측면들을 자기 이미지로 귀속시키는 것’이라고 했다. 

구미원에게 동일시는 구속과 억압이 존재하는 사회적 인간(또는 작가 자신)을 우리에 갇힌 야생동물에 투사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즉 그녀는 자신에게 있고 야생동물에게 있는(있을) ‘원초적 그리움’을 동일시하면서 다음처럼 야생동물에 감정 이입한다: “자아를 봉쇄당한 이곳에서 닿을 수 없는 정체를 향한 그들의 ‘원초적 그리움’을 목도하면, 내게 그들의 깊은 애수(哀愁)가 들려온다. 나에게는 그리움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의 그리움은 내 슬픔만이 알 터이니 홀로 잠식합니다. 그리움이 하늘과 땅 사이에 떠올라 무량겁(無量劫)에 닿습니다.”

갇힌 야생동물에 투사한 연민 그리고 ‘원초적 그리움’의 대상을 상실한 슬픈 처지에 대한 동일시는 작가 구미원을 동물원으로 이끌고 동물원 속 야생동물을 향해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게 만든다. 그녀가 야생동물에 감정 이입하고 그들과 동일시해서 얻은 원초적 그리움은 이제 무량겁을 향한 시원의 자연이 품은 야생성으로 달려간다. 

그리움은 결여와 상실의 상황을 여실히 드러낸다. 그래서일까? 그녀의 사진 속에서 이들은 주로 무리를 지어 나타나기보다는 단독자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때로는 쌍을 이룬 채 등장하기도 하지만 이들은 대개 속박된 몸 위로 창살의 그림자를 짙게 드리운 채 슬프고 외로운 단독자의 모습으로 관객을 맞이한다. 



원초적그리움  #11-그랜트얼룩말, 서울대공원-피그먼트프린트40x60cm-2022



원초적그리움  #17-그랜트얼룩말, 서울대공원-피그먼트프린트40x60cm-2022



III. 빛을 품은 어둠 — 바로크 모노크롬 포토성
구미원의 흑백 사진은 17세기 카라밧지오(Caravaggio)나 렘브란트(Rembrandt) 등의 바로크 회화에 드러난 명암 대비의 극적 효과를 발현한다. 특히 그녀의 흑백 사진은 대상의 고유색을 상실한 채 밝음과 어둠의 교차만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는 점에서 바로크풍(baroquerie)의 극적 효과가 더욱더 도드라진다. 이러한 차원에서 그녀의 흑백 사진은 가히 ‘바로크풍의 흑백 사진(Baroque black and white photograph)’ 혹은 바로크 모노크롬 포토(Baroque monochrome photograph)라고 할 만하다. 

구미원의 색을 잃은 흑백 사진은 어둠을 주조로 한 채 ‘동물원에 속박된 동물들’의 그리움의 원천인 ‘자연의 야생성’ 상실에 관한 상황을 드러내기에 족하다. 아울러 어둠 속에서 역광이나 측면광에 의해 피사체의 일부가 강하게 빛을 발하는 바로크적 조형 효과로 인해 ‘우리에 갇힌 동물들’의 속박되고 고립된 양상을 강화하는 기제가 된다. 

낙타나 타조를 촬영한 작품을 보라! 여기에는 역광에 의해 동물의 표정을 가린 어둠 그리고 실루엣만 밝게 남긴 명암 대비와 후광 효과가 선명하다. 또한 유럽 홍학이나 아시아 코끼리를 촬영한 작품을 보자. 이 작품들에서는 측면광에 의해 머리나 팔 그리고 깃털 등 동물 몸체의 일부분만 강하게 빛을 비추고 몸체의 실루엣을 벽면에 그림자로 길게 드리운 음영 효과가 고독과 소외의 감정을 부추기고 극대화한다. 게다가 여러 작품에 등장하는 촬영자와 피사체 사이에 놓인 수직과 수평이 교차하는 쇠창살 혹은 철책의 길게 늘어진 차가운 그림자는 이러한 극적 효과를 배가시킨다. 시뮬라크르(simulacre)로서의 그림자(대상)가 쇠창살(원본)이 지닌 속박, 억압과 같은 상징적 메시지를 여백의 공간에 짙게 드러내면서 원본의 위상에 육박하기 때문이다. 

이때, 주목할 것은 작가 구미원이, 피사계심도(被寫界深度)라고 불리는 ‘초점 범위를 벗어난(out of focus)’ 흐려진 화상 상태를 가리키는 ‘아웃 포커싱(Out focusing)’ 기법을 자신의 작업에서 여러 방식으로 실험한다는 것이다. 이 기법은 주로 인물 사진에서 배경을 흐릿하게 만드는데, 그녀는 이 배경을 상황에 따라 종종 전치한다. 예를 들어 망코개코원숭이나 아시아흑곰을 피사체로 삼은 작품에서는 이 동물들과 촬영자의 사이에 있는 철책을 아웃 포커싱 기법으로 배경화했지만, 그랜트얼룩말을 촬영한 사진은 철책을 선명하게 하고 동물을 아웃 포커싱으로 배경화하는 역전의 방식을 취한다. 망원 렌즈로 피사체와의 거리를 조정하거나 조리개로 빛의 양을 조정하면서 실험하는 다양한 아웃 포커싱의 방식은 때로는 철책을, 때로는 동물을 흐릿하게 함으로써 사진이 함유한 동일한 메시지의 상이한 강조점을 다차원적으로 드러낸다. 달리 말하면 작가가 피사체의 원하는 부분에만 초점을 맞추고 그 외 이미지는 흐릿하게 만드는 셀렉티브 포커싱(Selective focusing)을 한 셈이다. 

구체적으로 작품 〈원초적 그리움 #03-침팬지〉에서는 철책을 잡고 있는 침팬지의 손과 철책을 선명하게 드러냄으로써 속박된 침팬지의 극적 상황을 강조하지만, 작품 〈원초적 그리움 #04-아시아흑곰〉에서는 앞초점(front focus)을 고의로 뭉그러뜨려 철책을 흐릿하게 만든 대신 흑곰의 몸체와 몸에 드리운 철책의 그림자를 선명하게 드러냄으로써 구속이라는 동일한 상황을 다른 형식의 극적 장치로 강조한다. 
물론 그녀의 작업에는 초점이 균질한 팬 포커스(Fan focus) 사진도 있지만, 많은 부분 조리개로 빛의 양을 조절하거나, 초점 거리가 긴 망원 렌즈로 시도하는 아웃포커싱과 셀렉티브 포커싱 기법을 통해 특정 부분을 흐릿하게 한 상태로 만들어 그녀의 사진을 매우 감성적으로 보이도록 만든다. 가히 ‘감성적인 바로크 모노크롬 포토’라고 할 만하다. 



원초적그리움  #20-미어캣, 서울대공원-피그먼트  프린트-40x60cm-2022



IV. 자연스러운 의미 안에서 더듬는 무딘 의미 
구미원의 흑백 사진은 때로는 철책 울타리를, 때로는 야생동물을, 때로는 배경을 희미하게 만드는 다양한 아웃 포커싱과 셀렉티브 포커싱 기법을 통해 동물원에 갇힌 야생동물의 형상을 의미심장하게 포착한다. 여기서 흥미로은 것은, 흑백 사진으로 포착한 현재의 어두운 배경이나 흐릿한 형상이 곧 밝아지거나 반대로 더 어두워질 것 같은 기대감을 관객에게 선사한다는 것이다. 즉 어두운 상태에서 무대의 조명이 점점 밝아지게 만드는 영상 촬영 기법인 페이드 인(fade in)이나 더욱더 어두워지는 페이드 아웃(fade out)이 곧 실현될 것만 같은 기대감을 관객에게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그뿐인가? 그녀의 클로즈업 상태의 사진은 그 상태를 더 강화하거나 혹은 반대의 상태로 전개될 것 같은 ‘또 다른 변화’의 지점을 예견케 한다. 즉 ‘렌즈의 초점 거리를 조절하여 파사체의 형상이 프레임 안에서 커지게 만드는 촬영 방식’인 줌인(zoom in)의 상황이나 그 반대의 줌아웃(zoom out)의 상황이 계속 진행될 것만 같은 기대감을 불러일으킨다. 프레임 안에 피사체가 잘린 채 포착된 여러 사진이 이러한 기대감을 증폭시키는 셈이다.

이처럼 구미원의 사진 작업은 피사체인 야생동물을 클로즈업할 뿐만 아니라 프레임 안에 잘린 채 갇힌 몸체의 일부, 어둠 속에 묻힌 얼굴, 감정이나 심리 상태를 파악하기 어려운 동물의 뒷모습이나 옆모습 등을 흑백의 이미지로 담아냄으로써 ‘철책에 갇힌 야생동물’이 결핍과 잉여 그리고 고독과 소외의 존재라는 메시지를 강력하게 환기하게 만든다. 이러한 시각적 장치는 불완전한 존재인 ‘동물원 속 야생동물’이 그리는 자연의 야생성과 같은 완전한 세상에 대한 ‘원초적 그리움’을 표현하기에 족하다고 할 것이다.   

구미원의 흑백 사진 속에서 이러한 과감한 구도/음영 효과뿐만 아니라 아웃 포커싱/팬 포커싱, 페이드 인/페이드 아웃, 줌인/줌아웃 등 영상 촬영의 상황과 그 효과가 교차 진행할 것 같은 기대감은 원론적으로는 빛과 어둠이 극적 대비를 이루는 바로크풍의 사진에서 기인한 것이다. 즉 17세기 바로크 회화가 빛의 극적 대비를 통해 어떠한 사건이 일어날 것만 같은 긴장감을 드러내었듯이 그녀의 사진 또한 이러한 사건 발생의 기대감을 함유한다. 시간의 흐름을 정지하고 무심한 순간을 길어 올린 듯한 사진이 야기한 ‘시간 효과’인 셈이다.  

흥미로운 것은, 관객이 시간 흐름 속에서 연이은(을) 사건의 발생을 예측할 수 있으나 그 방향성이 어디인지 가늠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구미원의 사진 속에는 이쪽과 저쪽의 방향성이 모두 열려있기 때문이다. 그녀의 사진은 대개 색이 탈각된 검은 음영이 주조색을 이룬 채 흰빛이 일렁이는 극적 대비를 이루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 대비가 중화된 회색 톤을 지닌 중성성(neutralité)의 분위기에서 유발되기도 한다. 중성성은 어둠과 밝음 사이에서 그리고 검정과 하양 사이에서 양자를 모두 취할 가능성과 그 중간 지대에 머무를 가능성을 동시에 내포한다. 변화와 유지 사이의 잠재적 가능성으로서 말이다. 

생각해 보자. 관객은 구미원의 흑백 사진 속에서 우리에 갇힌 동물들이 갈망하는 자연의 야생성에 대한 ‘원초적 그리움’을 가늠하고 그 메시지를 어렵지 않게 읽어낸다. 그것은 바르트(Roland Barthes)의 언급을 빌어 말하면 그녀의 사진이 드러내는 ‘자연스러운 의미(le sens obvi)’인 셈이다. 그것은 철창의 형상 또는 그것의 짙은 그림자를 드리운 채 고독하게 서성이는 동물들의 형상에서 자연스럽게 발현된다. 또한 그것은 구미원의 텍스트로서의 주제 의식이나 작품 캡션이 ‘이미지가 담고 있는 객관화된 메시지’를 전달함으로써 이미지의 의미를 자연스럽게 고정하거나 중계하는 것이기도 하다. 즉 문화적 정보가 전제된 공시적 수준(niveau connotative)에서 작가가 전하는 ‘원초적 그리움’이라는 기의를 자연스럽게 코드화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관객은 누구나 작가의 친절한 해설이 늘 전제되지는 않는 이미지로부터 ‘원초적 그리움’이라는 ‘자연스러운 의미’ 너머의 또 다른 의미가 있음을 인식한다. 작품을 보자. 타조를 역광으로 촬영해 짙은 음영을 남긴 작품은 고독과 소외감 가득한 이미지처럼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마치 초인을 의인화한 작품처럼 보이기도 한다. 침팬지가 쇠창살을 한 손으로 쥐고 있는 작품은 야생의 자연으로 돌아갈 수 없는 한 동물이 좌절과 패배감을 가득 안고 있는 이미지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또 달리 보면 자기를 가로막은 쇠창살을 쥐고 저항의 몸짓을 하는 투사의 이미지처럼 보이기도 한다. 목을 길게 빼고 어딘가를 응시하는 쿠바홍학의 모습은 떠나온 원시향을 그리워하는 것으로 보이면서도, 어찌 보면 여유로운 시간을 편안하게 즐기는 모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바르트는 이미지에 드러난 객관적인 메시지 너머에 주관적 해석을 열어두고 있는 다양한 의미작용(signifiance)이 있음을 간파하고 그것을 ‘자연스러운 의미’ 너머의 ‘무딘 의미(le sens obtus)’로 정의한다. 이 무딘 의미는 의미의 과잉이자 보충분이다. 그것은 단일한 의미화(signification) 대신 무수한 의미작용을 생성해 내는 탈코드화의 산물이다. 그래서 바르트는 ‘무딘 의미’를 ‘기의 없는 기표(signifiant sans signifié)’에서 견인하는 ‘텍스트성(textualité)’으로 간주했다. 그는 ‘무딘 의미’를 시각적 문화적 정보의 바깥, 즉 제 3의 층위에서 꿈틀대는 모호한 무엇으로 간주한 까닭에 ‘제 3의 의미(le troisième sens)’라는 다른 용어로 지칭하기도 했다. 예술 작품 속에서 저자의 의도를 충분히 담고 있는 ‘자연스러운 의미’를 ‘제 2의 의미(le deuxième sens)’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대안적 응답인 셈이다. 

구미원의 작품에서 이러한 ‘무딘 의미’는 다양한 양상에서 기인하고 발현된다. 동물의 옆모습이나 뒷모습을 찍어 표정을 쉬이 가늠하기 어렵게 만든 카메라 각도, 피사체 동물의 전신을 프레임 안에 가두기보다 부분적 이미지로 잘라 포착한 사진의 구도, 아웃포커싱의 무수한 변주, 빛과 어두움의 극적 대비와 더불어 병행한 안온한 회색 톤의 이미지도 구미원의 작품을 여러 해석이 가능한 모호한 이미지로 만들기에 족하다. 

그렇다. 작가 구미원이 고단한 몸을 이끌고 발품을 팔아 여러 동물원을 다니며 촬영했던 야생동물 사진은 그녀가 애초에 의도했던 원초적 그리움이라는 ‘자연스러운 의미’를 관객에게 담담하게 선보이면서도 그 너머의 신비로운 메시지 덩어리를 견인해 온다. 이러한 차원에서 구미원이 ‘제 2의 의미’ 혹은 ‘자연스러운 의미’ 너머에서 제시하는 ‘제 3의 의미’ 혹은 ‘무딘 의미’는 관객에게 작품에 대한 주관적 해석을 무한정 열어두는 아름다운 선물이다. 원초적 그리움이라는 ‘자연스러운 의미’ 안에서 관객이 찾아 나서는 ‘무딘 의미’를 무한정 열어둔 채 그것을 더듬고 그것을 지향하는 침묵의 메시지를 가득 안은 작업으로서 말이다. (20240227) ●

출전 /
김성호, 「원초적 그리움: 무딘 의미를 향한 침묵의 메시지」, 『구미원』, 카탈로그, 2024.
(구미원 개인전 – 원초적 그리움, 2024. 3. 12~3. 18, 수원시립만석전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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