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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화 / 그림은 우리의 삶이다

정영숙

민중미술가 박진화

‘그림은 우리의 삶이다’


남북 경계선에서 담아낸 분단의 현실... “화가는 시대의 증언자”


정영숙 갤러리세인 대표, 경희대 겸임교수


 박진화 작가의 그림은 한마디로 시대정신의 표출이다. 그는 30여 년간 그림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질문하며 자신의 생각을 치열하게 작품으로 보여주었다. 1989년부터 현재까지 모두 22회의 개인전을 가졌다. 2009년에는 선배와 지인들의 후원으로 박진화미술관을 개관했고, 포항공과대학교 캠퍼스 전관에 100여 점이 넘는 대작을 1년간 전시했다. 올 초부터는 민족미술인협회장을 맡아 진보미술의 한 시대를 이어가는 중견화가로 활동한다.

 박진화미술관은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대산리에 있다. 한적한 시골마을에 자리한 미술관은 소박하다. 허름한 창고건물을 개조했다는 직사각형의 전시공간은 30여 평쯤 되어 보였다. 이곳에서는 박작가의 작품을 중심으로 매년 수 차례 기획전이 열린다. 현재는 박 작가의 ‘드로잉+만남’이 전시 중이다.

 미술관에 들어서니 마치 20~30대 젊은 작가들이나 할 법한 유명 화가의 작품을 모사하는 현장을 목격한 기분이다. 전시장 한 켠에 자리 잡은 촘촘히 이어 붙인 드로잉은 렘브란트의 성서를 주제로 그의 작품 120여 점을 베낀 것이다. 박 작가는 렘브란트의 작품을 임화(臨畵)했다. 그는 대가의 작품을 만나는 방식으로 임화했지만, 복사하듯 재현하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내 붓을 다시 성찰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그림은 어쨌든 화가의 몸(생)이 담길 수밖에 없다. 그 때문에 그림은 화가와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생성해갈 수밖에 없다”는 작가의 글이 와닿는다.

 미술관에서 차를 타고 5분 정도 거리에 박 작가의 작업실이 있다. 민통선 지역인 대산리라는 곳이다. 아득하게 들이 펼쳐져 있고 임진강 건너 북한 땅과 산자락이 손에 잡힐 듯 보이는 마을이다. 경계지역이라고는 하지만 철조망이 보이지 않아 피부에 와 닿지는 않는다. 북한 땅을 가리키며 지리적 특성을 설명하는 작가의 등 뒤로 그의 작업실이 보인다. 박 작가는 1995년부터 이곳에 정착해 작업해오고 있다.

 작업실 문을 열기도 전에 작품이 궁금해진다. 작업실에는 진행 중인 작품이 여러 점 있다. 산을 소재로 한 작업과 인물 형상의 작업이 동시에 펼쳐져 있다. 차를 마시는 공간에는 사방으로 빼곡히 책이 꽂혀 있다. 미술 관련 서적 외에 인문학·철학·사회학 등 다양한 책이 눈에 띈다.


 
1                                                2

1 '화가의 초상1'(Portrait of the Artist-1), 130x194cm, Oil on Canvas(2009)
2 '합창'(Chorus), 750x290cm, Oil on Canvas(2009)

현실을 내면화하는 작품세계

작가를 만나기 전 박진화미술관 홈페이지에 접속해보았다. 대부분의 미술작가는 홈페이지에 평론 몇 편과 길지 않은 작가노트를 올려놓는 정도다. 그런데 박 작가의 홈페이지에는 잘 정리해 놓은 작품 목록 외에 ‘북서쪽 편지’ 등 작품과 정치·사회현상에 관한 작가의 글이 여러 편 올라와 있었다. 그 양에 우선 놀랐고, 그 글들을 읽어보고 다시 한 번 놀랐다.

 그의 고향은 전남 장흥이다. 예부터 ‘문림의향’으로 불리던 곳이다. 그 이름에 걸맞게 이 고장에서는 이청준·한승원·송기숙 등 걸출한 문학가가 여럿 배출됐다. 화기는 물론 문기까지 갖춘 박 작가는 장흥이 자랑하는 예술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박 작가는 대학(홍익대 미대) 졸업 후 고등학교에서 미술교사로 재직 당시 문학가가 될 요량으로 세 편의 단편소설을 썼다고 한다. 목적이 있고 계획을 세우면 거침없이 매진하는 성격인 그는 당시 넘치는 표현 욕구를 글에 담아내고자 했다. 그러나 글쓰기 못지않게 그림 그리는 데 탁월한 재능을 갖추었던 그는 결국 화가의 길을 걷게 된다. 1985년 열린 ‘20대 힘’전이 계기였다,

 내적 갈등을 겪으며 문학가의 길을 걷고자 소설을 썼지만 그 고민은 사라지지 않았다.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찾을 수 없어 괴로운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자신의 내부로부터 ‘다시 붓을 들라’는 메시지가 들렸다. 곧바로 목판화 작업을 하며 다시 화가의 길을 준비했다. 뜻을 같이하는 미술인들과 모임을 통해 토론하고, 공부했다. 나아가 ‘서울미술공동체’를 결성했고, 첫 전시로 ‘20대 힘’전을 개최했다.

 ‘20대 힘’전에는 20대의 젊은 작가 35명이 참여했는데, 당시 문화계의 큰 사건으로 기록돼있다. 경찰이 전시장에서 작품을 압수하고 몇몇 작가를 구속했다. 박 작가도 예외는 아니었다. 보름 동안의 구속 체험을 통해 그는 민중미술작가로 거듭난다. 박 작가는 “시대성과 역사성의 문제를 작품에 담고자 하는 내 붓의 생각을 하나의 신념으로 굳히는 계기였다”고 당시를 떠올린다.

 민중미술의 모태는 1979년 ‘현실과 발언’이라는 단체다. 그는 그 몇 년 후부터 본격적으로 민중미술작가로 활동했다. 민중미술은 당시 미술계의 관념화하고 물질성을 강조하는 비정형 미술에 대한 반동으로, 현실성을 회복하자는 진보적 미술활동을 일컫는다. 민중미술작가들은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주제를 형상회화로 제시한다.

 그런데 박 작가는 동시대의 작가들과 조금 다른 듯하다. 그는 현실을 보다 내면화해서 드러낸다. 1985년부터 1992년까지 7년가량 박 작가는 인물 군상을 중심으로 한 어둡고 거친 붓 터치로 사회적 현실을 적극적으로 드러냈다. 1992년 2회 개인전에서는 3년에 걸쳐 작업한 대작 30여 점을 발표했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열정적으로 작업한 결과에 비해 미술계의 반응은 크지 않았다. 박 작가는 잠시 붓을 내려놓기로 결심하고, 1993년 고향에 위치한 산골 폐교에서 1년 반가량을 칩거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수행하듯 붓을 내려놓는 대신 연필을 들고 드로잉에만 몰두했다. 하지만 긴 공백에도 ‘역사성’의 가치만은 내려놓지 않았다. 그가 말하는 역사성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화가로서의 책무(責務)다. 작가가 마땅히 갖춰야 할 정신·뜻·영혼·에너지를 포함한다.


 

1                                                                                  2

1 '개화-비(雨)'(Bloom-Rain), 300x230cm, Oil on Canvas(2012)

2 '동쪽하늘'(Eastern Sky), 600x270cm, Oil on Canvas(2009)


 
'밤에 첨성단에서'(Chamseongdan,At night), 362x227cm, Oil on Canvas(2005)

‘스탕달 신드롬’으로 체득한 예술혼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박 작가는 담임 선생님의 추천으로 학교 대표로 매년 사생대회에 나갔다. 중학교 2학년 때는 선생님의 권유로 미술반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미술선생님은 늘 “그림을 그리려면 죽음과 바꿀 정도로 몸과 마음을 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고 한다.

 그는 중학교 3학년 방학 한 달 동안 선배를 통해 알게 된 광주의 한 화실에서 아침 10시부터 저녁 10시까지 데생에 매진했다. 어린 나이였지만 선생님의 말씀처럼 몸과 마음을 다해 그림을 시작한 것이다. 이처럼 집중력 있고 에너지 넘치는 작업방식은 현재까지 지속된다. 어떤 내용이나 형상이 떠오르면 미친 듯이 그림을 그리는 집중력은 ‘그림에 대한 뚜렷한 정신’에서 비롯된다.

 “나의 눈은 사물과 생각을 넘나든다. 대상과 뜻을 함께 더듬고 구상과 추상을 같이 결합한다. 요컨대 보면서 느끼고, 느끼면서 사유할 수 있는 그림이어야 했다. 나는 대상을 보고 그리는 게 아니다. 본 것을 기억해 뜻으로 그린다. 뜻이 없는 그림에는 만족할 수 없었다. 나의 체질과 생리가 그랬다.”

 이처럼 폭풍 같은 힘으로 그린 30여 년간의 그림을 한 곳에 펼쳐놓은 전시가 2009년 포항공과대학교에서 개최됐다. 두꺼운 화집을 통해 본 당시의 전시는 우선 규모에서 압도당할 만하다. 캠퍼스 전체에 설치된 100여 점의 작품은 대부분 100호 정도의 대작이고, 개중에는 500호가 넘는 작품도 있었다. 전시 주제는 ‘발밑과 눈’이었다. 현실과 이상을 은유하는 표현이다.

 렘브란트의 성화를 임화하는 작업은 김용옥 교수가 쓴 <기독교 성서의 이해>와 <요한복음 강해>라는 두 권의 책을 읽으면서 시작됐다. 박 작가는 <요한복음 강해>의 삽화로 사용된 렘브란트의 성화에 강한 호기심이 들었다. 17세기 대표적 화가의 성화 드로잉 화집을 수소문 끝내 중고 서점에서 구입한 그는 지난 겨울, 렘브란트의 예술세계와 성서 공부를 병행하며 임화를 마쳤다.

 박 작가가 연구한 해외 작가는 인상주의 시대의 세잔·고흐를 비롯해 현대미술의 프란시스 베이컨·루시안 프로이트 등이다. 국내 작가로는 조선시대 겸재 정선과 근대의 소정 변관식에 관심이 많다. 그는 현대미술작가로는 주변작가에 대한 평을 쓸 정도로 작가분석이 뛰어나다. 특히 소정 변관식의 작품세계에 대해 말할 때 그의 목소리는 흥분됐다.

 박 작가는 1989년 호암미술관에서 ‘4대화가전’을 관람할 당시 변관식의 작품 앞에서 다리가 풀리는 경험을 했다고 한다. 이른바 ‘스탕달 신드롬’이다. 프랑스 문학가 스탕달이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명화를 본 후 황홀경을 경험한 것에서 유래한다. 반 고흐도 렘브란트의 ‘위대한 유산’ 앞에서 이 같은 체험을 하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전해진다.

 박 작가는 변관식의 작품 앞에서 그림이라는 것이 시각 외에 청각과 또 다른 어떤 힘이 있음을 느꼈다. “그림은 머리가 아니다. 그림을 그리는 문제는 부분이 아니다. 세상과 몸 전체가 같이 만나는 것이 그림이다.” 박 작가는 그 후 변관식의 작품세계를 지속적으로 연구했다. 그때마다 그림이기 이전에 작가 정신의 중요성을 되새긴다.

 그는 탁월한 감수성의 소유자다. 감수성이 뛰어난 사람들에게 스탕달 신드롬은 반복되는 것일까? 그 후 유럽의 여러 미술관에서 그는 몇 차례 유사한 경험을 했다, 특히 오랑주르미술관에서 클로드 모네의 ‘수련’ 시리즈 대작은 처음 대면하는 순간 눈이 따가워 그림을 볼 수 없었다고 한다. 5분여가 지나고서야 겨우 작품을 볼 수 있었다. 모네가 말년에 시력이 떨어지는 상태에서 수련을 붙잡고 그리려 했던 절박한 상황이 작품에 투영되듯 그의 시선을 붙잡았다. 박 작가는 반 고흐와 고갱을 통해서는 자기절제와 치열하게 살았던 정신을 배웠다.


붓끝에 담은 분단의 역사성

그는 붓으로 이 땅의 주인인 우리를 담아낸다. 2009년 ‘동쪽하늘’은 가로 6m의 대작이다. 우리 민족의 시원과 현재를 그린 작품이다. 한반도 전체를 종횡무진 횡단하듯 좌측에는 파란색으로 우측에는 붉은 색 위주로 반추상 인물형상이 역동적으로 움직인다. 고갱의 가로 4m 가량의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라는 작품은 인간의 탄생과 삶, 죽음을 아우르는 형상으로 과거·현재·미래를 한 폭에 담아낸 것이다. 시간과 장소에 대한 속박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상상과 표현력이 각각의 작품을 통해 느껴진다. 산의 형상과 나무 형상이 중심을 이루는 작품 시리즈는 원색의 강렬한 붓질이 강한 생명력을 부각시킨다.

 추구하는 작품의 방향성을 묻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분단으로 갈라진 이 땅의 자존심을 위해 그림에 매진하고 있다. 예술과 현실 사이의 경계, 파르르 떠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남북의 경계선인 강화도 작업실에서 떨고 있다. 내 몸과 영혼이 이 땅의 붓의 소명(召命)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역사적 사명감을 나는 ‘역사성’이라고 의식해왔다. 남북이 마주한 강화에 내 붓이 자리 잡게 된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예술에 대한 치열한 정신과 살아있는 삶의 순수성이 와 닿는 박진화 작가, 그는 진정 우리 시대를 대변하는 미술가다.


월간중앙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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