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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애도의 시간_박영택『애도하는 미술 』

윤지수

우리들의 애도의 시간

 

애도하는 미술
예로부터 많은 화가들은 죽음과 관련된 그림을 그려왔다. 삶과 죽음이 남매지간처럼 밀접하게 관계한다는 것을 가감 없이 보여줬으며 죽어가는 것들을 안쓰럽게 여겼다. 그리고 이들을 화폭에 담아 대상에게 영원한 생명력을 부여했다. 시간에 저항함으로써 죽어가는 것들을 애도하는 미술만의 방식인 것이다. 또한 영원회귀나 삶의 영속성에 대한 염원을 담아 죽음의 이미지를 그리기도 했다. 구석기 시대의 동굴벽화, 이집트의 고분벽화, 르네상스 시대의 초상화, 네덜란드의 정물화 모두 죽음에 대한 그들의 이러한 인식이 담긴 도상들이다.
우리 선조들의 경우는 어떨까? 우리 선조들은 민화를 비롯하여 다양한 종교적, 신화적 도상들을 그렸고 일상 안에서 함께 했다. 그들의 삶 속엔 죽음에 대한 깊은 인식과 애도가 자리했다. 우리 선조들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민화를 비롯하여 다양한 종교적, 신화적 도상들을 그렸고 일상 안에서 함께 했다. 그들의 삶 속엔 죽음에 대한 깊은 인식과 애도가 자리했다.
  그러나 근대 이후부터 죽음은 미술에서 점차 멀어졌고 금기시되었다. 인간 중심의 시대가 도래 하고 자본주의가 세계적 흐름이 되면서 사람들은 생명력 있는 것에 더욱 주목한다. 그리고 문명발달에 가속력이 붙으면서 “더 빨리, 더 새롭게”를 외치게 된다. 발전에 발전을 가하다보니 우리는 주위를 둘러볼 시간도, 자신에 대해 생각할 시간도 잃은 것이다. 
  우리는 죽음에 대한 휴머니즘을 잃은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는 타인의 죽음에 대해 애도하는 마음을 잃었다. 그래서 필자는 이 책을 한번쯤은 꼭 읽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박영택의「애도하는 미술」은 그동안 우리가 회피해온 죽음을 회복시킨다. 또한 잊어왔던 미술과 죽음의 관계성을 드러낸다. 우리는 그가 선별한 미술작품을 보며 죽음에 대해 성찰해보는 기회를 갖게 될 것이며 타인에 대한 애도의 시간을 얻게 될 것이다.

 

애도가 필요한 이유
애도哀悼는 ‘사람의 죽음을 슬퍼한다.’는 뜻을 지닌 단어다. 우리는 이 단어를 통해 죽음에 대한 깊고 따스한 시선을 읽을 수 있다. 애哀는 입구(口)에 옷의(衣)자가 더해진 문자로 ‘슬프다, 가엾다, 사랑하다, 애지중지하다’는 뜻을 지닌다. 그리고 도悼는 마음심(心)에 높을 탁(卓)이 더해진 문자로 ‘슬퍼하다, 아파하다, 두려워하다’는 뜻을 지닌다. 우리는 애도라는 단어에 의(衣), 식(口), 주(卓) 모두가 담겨있음을 알 수 있다. 죽음은 사실 이 단어가 드러내는 것처럼 인간이 먹고, 마시고, 자고, 생리적 활동을 하는 것과 더불어 삶의 방식과 그가 향유했던 문화, 그리고 그가 관계 맺었던 사람들, 접했던 지식까지. 이 모든 것들을 저버려야 하는 중대한 사건이다. 그래서 죽은 자를 보내주고 그가 삶에 남긴 많은 흔적들 또한 잘 보내주기 위해서는 애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죽은 이를 가여워하고 그가 사랑했던 많은 것들을 새기며 슬퍼할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 시간과 절차들을 무시하곤 한다. 시간이 흐르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는 핑계를 대며.

 

죽음을 바라보는 옳은 시선

 

해변에서 바라보는 바다와 바다 한가운데서 바라보는 바다는 전혀 다르다.
살아 있는 내가 죽어 있는 나에 대해서도 그렇게밖에 보지 못한다면,
무엇 때문에 살아야 하는가1).

 

무언가를 바라볼 때, 주체의 직접적인 체험이 없다면 그 시각은 왜곡될 수 있다. 해변에서 바다를 바라볼 때와 바다 한가운데서 바다를 바라보는 것이 다른 것처럼. 죽음을 바라보는 시선 또한 이와 같다. 죽음을 삶의 울타리 안으로 끌어오고, 그 안에 기꺼이 설 때 죽음에 대한 바른 시선을 가질 수 있다. 
  저자 박영택은 15개의 카테고리로 죽음을 바라본다. 이는 저자의 시선이며 저자가 애도하는 방식이다. 필자는 저자가 나눈 카테고리에 ‘애도의 시선’이라는 이름을 붙여 7가지로 분류했다. 그리고 각 분류별로 한 작품씩을 살펴보게 될 것이다.
  이 글은 필자의 글이지만 필자는 독자가 주체성을 가지고 이 글을 이끌어나가길 바란다. 그리고 책과 글을읽으면서 당신이 경험했던 죽음의 이야기들을 생생한 기억으로 끌어낼 수 있기를 바란다. 각 개인이 주체가 되는 것이야 말로 죽음을 바라보는 옳은 시선이며 애도의 참경험이기 때문이다. 

 

애도의 시선 1. 생명의 소멸 그리고 완전한 소멸의 단계
살아있는 것은 소멸한다. 이것이 존재의 역설이다.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은 탄생과 동시에 죽음을 향해 간다. 숨이 끊어지고 시신이 되고 뼈가 남는다. 뼈조차 사라지고 나에 대한 모든 기억이 지워질 때, 나는 진정으로 부재하는 존재가 된다.

 

1)이병호의 <Deep Breathing>은 조각에 시간의 힘을 가한 것이다. 조각은 시간의 지배를 받는 것들을 영구화시키는 역할을 해왔다. 인간의 육체를 가장 단단한 물질로 재현하여 시간의 속성에 반항한 것이 조각이다. 그러나 이병호는 실리콘, 공기라는 재료를 사용하여 조각을 변하게 만든다. 더불어 시간의 흐름에 영향을 받게 만든다.
그는 공기의 이중성을 이야기 한다. 공기는 생명체의 생명 유지를 돕는 동시에 죽음에 이르게 만든다. 이러한 공기의 양립하는 성질은 그의 조각을 일그러뜨리고 복구시킨다. 우리는 그의 조각을 통해 인간 육체의 변화 과정을 보게 된다. 젊고 아름다웠던 육체가 뼈로 남게 되는 과정. 그리고 죽음에 다다른 육체가 젊음을 얻는 과정을.

 




 

애도의 시선 2. 전통 생사관, 무덤과 제사
우리 조상들은 죽은 자를 무덤에 모셨고 제사 때와 성묘 때 죽은 자와 함께 하며 교감해왔다. 한국인은 저승을 이승의 연장선상으로 보았다. 죽은 이는 혼, 백, 귀로 분열하여, 혼은 저승으로, 백은 땅으로, 귀는 공중으로 이동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공중에서 떠돌던 귀는 제사나 기일에 참여하여 산자들과 함께한다고 생각하였다2). 산자와 죽은 자를 모두 생각하는 생사관은 죽음을 삶의 연장선으로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2)이원철의 <circle of being #011>은 오늘의 무덤풍경을 보여준다. 경주의 능은 밤의 조명을 환하게 받고 있다. 이 밤의 무덤은 시간의 역사가 담긴 곳이자 오늘날의 무덤이다. 자연광과 섞인 인공광은 기이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현실적이면서 동시에 비현실적인.
경주의 능은 아주 오래되었다. 이곳을 방문했던 이들 중 많은 이들이 지금은 무덤에 묻혀있을지 모른다. 작가는 이 사진을 통해 죽음과 영생, 그리고 죽음의 순환을 이야기 한다.

 




 

애도의 시선 3. 바니타스 정물과 박제
바니타스 정물화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를 이야기 한다. ‘네가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 라는 뜻을 함축한 바니타스 정물화는 상징적인 물체들을 통해 헛된 삶을 재현한다. 바니타스 정물에 사용되는 물체에는 시계, 해골, 꽃이 있다. 시계는 흘러가는 시간을, 해골은 죽은 자를, 꽃은 죽은 식물을 의미한다3).

 

3)정현목의 <Still of Snob>은 현대사회의 욕망을 이야기 한다. 작가는 테이블 위에 양초, 명품 핸드백, 해골을 올려놓았다. 이들을 바니타스 정물화처럼 배치한다. 작품은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 것 같다. “우리는 왜 명품을 사는가?” “당신은 명품을 갖기를 진심으로 원하는가?” “사실 명품을 소비하는 것은 상류사회로 오르길 원하는 마음 때문이 아닌가?” 작품은 우리가 그동안 교육받은, 소비의 욕망이 헛된 것임을 이야기 한다. 그리고 작가는 명품인 줄 알았던 핸드백을 모조품으로 배치함으로써 한 번 더 현대인의 욕망을 비꼰다. 진품이 아니라면 짝퉁이라도 사겠다는 그 우스운 심리를 말이다.

 



   

애도의 시선 4. 가족의 죽음
살면서 우리는 가족의 죽음을 한번쯤 겪는다. 가족의 죽음은 우리에게 치명적인 상처와 트라우마를 남기게 된다. 우리는 아주 오랜 시간 슬퍼한다. 그리고 그의 죽음을 비로소 인정하게 되었을 때 애도는 시작된다. 애도의 과정을 거치면서 새로운 사랑으로 건너가게 되는 것이다. 애도의 과정이 끝나더라도 그의 부재는 늘 부재로 남겨진다. 죽은 그를 아무도 대체할 수 없기 때문이다.    

 

4)구본창은 임종 직전의 아버지의 얼굴을 <숨 06>에 담았다. 그의 사진 한 장은 아버지의 숨이 끊기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 같다. 숨이 가빠지면서 그는 서서히 죽음의 과정에 들어선다. 그의 숨이 들고 날 때마다 영혼이 움직이는 것 같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숨을 멎는다. 우리는 이 사진을 통해 아버지의 임종을 지켜보는 작가의 슬픔과 안타까움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우리 곁을 떠난 가족을 떠올린다. 그가 떠났을 때 나에게 남은 상처들이 다시금 되살아나는 것 같다.   

 




 

애도의 시선 5. 역사속의 죽음 사회적 죽음
“죽음은 개인적인 사건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사회적이고 공적인 사실이다.” 필립 아리에스는 그의 책 「죽음 앞의 인간」에서 이렇게 이야기 했다4). 그의 말처럼 많은 이들은 죽음으로써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냈다. 그들 덕분에 우리는 더 나은 사회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들을 기억하는가?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떠올려야 하는가? 자신을 성찰해본다.
우리는 동시대 사람들의 죽음 또한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들이 죽은 까닭은 우리 사회의 병폐에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죽음을 기억하고 또 다른 희생자가 나오지 않도록 제도적인 모순을 해결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역사를 쓰는 방식이며 후손에게 더 나은 사회를 물려주는 답이다.

 

5)신학철은 우리의 근현대사의 수난사를 비판한다. 그리고 다양한 죽음의 사건들을 그려 <한국 현대사-초혼곡>을 완성했다. 거대한 불꽃 모양의 기둥 안에는 죽은 이들이 가득하다. 일제강점기부터 6.25 전쟁, 4.19혁명, 그리고 광주민주화사건을 거쳐 오늘날에 이르는 죽음의 불기둥이다. 그는 우리가 누리는 평등한 사회, 민주적인 사회가 얼마나 많은 이들의 죽음과 희생을 통해 만들어졌는지 작품을 통해 보여주는 것이다5).    

 




 

애도의 시선 6. 자살. 자발적 죽음? 사회적 타살?
우리 사회의 자살은 사회적 연관성이 매우 높다. 그래서 자살을 죽음의 방법 중 하나라고 치부하기엔 너무 무겁다. 사회적 무관심을 겪는 이들, 엄청난 경쟁에 내몰리는 이들, 가난에 허덕이는 이들은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죽음이라는 벼랑 끝에 내몰린다. 자살률이 세계 1위인 한국 사회에서는 그 심각성이 더하다. 자살 없는 사회를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자살한 이들과 우리를 어떻게 연결 지을 것인가? 고민해봐야 할 것이다.

 

6)김소희의 <Why>는 자살을 주제로 한 시리즈다. 그는 여러 가지 자살의 상황들을 대리 체험하고 이를 셀프 포트레이트 방법으로 사진에 남긴다. 사진 속의 작가는 오븐 속에 몸을 밀어 넣고 있다. 이 죽음의 순간을 목격하는 우리는 일종의 쾌락을 느낀다. 우리가 때때로 느끼던 죽음의 충동을 작품은 해소시켜주기 때문이다.

 




 

애도의 시선 7. 동물의 죽음
동물은 다른 생명을 먹어야 자신의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존재다. 동물인 인간 또한 자신들을 제외한 다른 동물들을 끊임없이 잡아먹으며 생명을 부지했다. 동물은 인간에게 일용한 양식이었다. 또한 반대로 친구나 가족 같은 존재이기도 했다. 동물과 인간은 이렇게 오랜 시간 관계를 맺어왔다. 그런데 그 관계는 모호했다. 가족이었던 동물이 어느 날 우리의 식탁에 올라와 있던 경험은 한 번쯤 겪어보았을 것이다. 동물은 우리 인간에게 어떤 존재인가? 우리는 그들과 어떠한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7)김범의 <잠자는 통닭>은 우리가 자주 먹던 통닭과는 다르다. 이 닭은 옆으로 돌아누워 팔을 베고 누워있다. 흡사 사람이 잠자는 모습과 비슷하다. 그래서 평소에 우리가 그래왔듯이 “와 맛있겠다.”라는 탄성 후 바로 손을 뻗어 닭을 입안에 넣긴 힘들 것 같다. ‘통닭은 꿈을 꾸는 것일까? 아니면 잠이 든 것일까?’ 우리는 닭을 보며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가 먹어왔던 닭의 운명과 생애에 대해 궁금증을 갖게 된다.           

 




 

책 「애도하는 미술」에 대해서
「애도하는 미술」은 우리가 덮어두었던 죽음을 복귀시키고 애도의 체험을 돕는다는 점에서 고마운 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 저자는 죽음의 이미지를 다루는 작가들을 소개하고 그들의 작품을 통해 현대사회에서의 죽음을 이야기 한다. 그런데 그들이 작품을 통해 전하는 이야기 외에도 우리가 생각해볼만한 이야기는 많았다. 필자는 저자가 만약 작가들이 미처 하지 못한 이야기를 대신 해주었다면 더 깊이 있는 책이 되었을 것 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현대 사회에서의 죽음은 왜 가벼워졌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저자의 고찰이나 이러한 이야기를 전하는 작품들에 대한 소개와 같은.  
다음으로, 현대 사회의 죽음에 대한 평론가의 비판적인 시각이 책을 좀 더 강하게 이끌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저자는 이 책이 죽음에 관한 자신의 개인적 고찰이라고 이야기하며 자신이 수집한 이미지들을 엮어냈다. 저자의 이러한 개인성과 주관은 책을 이끌고 있는데 때문에 독자는 죽음이라는 소재를 강렬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는 것 같다. 저자의 고백적인 느낌보다는 비평가적인 날카로움이 책을 이끌었다면 독자는 죽음이라는 소재를 더 무게감 있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혜의 길이 열리길 바라며.
몸은 길을 안다고 했다. 이는 우리의 지혜가 신체에 새겨진다는 뜻이다. 다른 이들과의 마찰의 경험은 나에게 불편함을 준다. 그러나 덕분에 우리의 몸에는 지혜가 새겨진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이를 만나도 그 사람과 유연하게 접속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삶의 다른 지혜 또한 마찬가지이다. 삶에 대한 질문을 하고 이에 대해 깊이 탐구할 때 우리의 몸에는 지혜의 길이 열리는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지혜보다는 요령에 의지해 산다6). 그래서 인생에 찾아오는 고통과 회한, 그리고 죽음에 수동적인 자세로 임하게 된다.  

 

“신문 읽기라고 불리는 가증스럽고 음란한 행위는 지난 24시간 동안 우주에서 일어난 모든 불행과 재앙들, 5만 명의 생명을 앗아간 전투, 살인, 파업, 파산, 화재, 독살, 자살, 이혼, 정치인들과 배우들의 잔인한 감정들. 그런 것들에 신경도 쓰지 않는 우리를 위해 특별히 흥분되고 긴장되는 아침의 오락거리로 변형시키며, 이것은 카페오레 몇 모금과 대단히 잘 어울리게 된다. -알랭드 보통 「프루스트를 좋아하세요」 中

 

어쩌면 우리는 아주 먼 길을 걸어온 것인지 모른다. 언론매체는 죽음이라는 거대한 사건을 마치 오락거리처럼 가볍게 다루고, 우리 또한 방관자가 되어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는 삶이 너무도 오래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자는 죽음을 생각하는 노력이 있다면 우리가 떠나온 그 길을 다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jisu(yoonsart21@hanmail.net)

 

 

 

 

 

주석)

1)이성복, 「이성복 아포리즘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 문학동네, 2014년
2)박영택, 「애도하는 미술」, pp.111-112, 마음산책, 2014년
3)각주2) p.169참조
4)각주2) p.263참조
5)각주2) PP.300-301참조
6)고미숙, 한상덕, 조법종 외 2명, 「인문학 특강」, pp.17-19, 모시는사람들, 201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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