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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신화적이고 순진무구한 화가, 이중섭

김달진

오는 7월 1일 제주도 서귀포시에서 이중섭 축제가 열린다. 6.25 피난시절에 머물었던 초가를 복원하고 '이중섭로' 라는 거리 이름이 지정되고 그의 예술세계를 조명하는 학술대회가 있을 예정이다. 한국근대미술사학회의 다섯번 째 전국학술대회로 이중섭의 예술세계를 폭넓게 재조명한다. 미술평론가들의 주제발표에 이어 토론회를 갖는다.


이중섭(李仲燮)은 1916년 평남 평원 태생으로 1940년 일본 문화학원을 졸업하고 40-43년 일본 미술창작협회전에 출품하였고 42-43년 신미술가협회를 결성 활동하였다. 처음 다닌 오산학교에서 일찌기 미국과 유럽에서 유학한 임용련 미술교사를 만나 큰 영향을 받았으며 화가의 꿈을 다졌다.

그가 공부한 문화학원은 다른 학교와 달리 진취적이고 자유분방한 학교였다. 그리고 참가했던 미술창작협회전는 당시 새로운 미술운동의 추진체로 서구의 새로운 조형사조를 따랐으며 두차례의 상을 수상하였다. 46년 공산당 산하의 북조선미술동맹에 가입했으나 원산문학가동맹의 해방시집에 그린 표지화가 구상의 시와 문제가 되어 당국으로부터 문책을 받기도 했다.





6.25 사변에 월남하여 부산 서귀포 통영 등을 전전하며 피난살이를 했다. 1955년 1월에 서울에서 개인전을 가졌고 이듬 해 40세로 요절하였다. 순진무구한 천성과 작가적 정신으로 많은 일화를 남겼으며 연극, 문학, 전기로도 극화 되었다. 1972년 유작전(현대화랑), 86년 30주기 회고전(호암갤러리)등이 면모를 살핀 큰 전시회였다. 이중섭을 기리기위해 조선일보사에서는 1989년 이중섭미술상을 제정해 해마다 1명의 작가를 선정 시상해 오고 있다.


그의 생애는 해방되기 3개월 전에 원산에서 일본인 야마모도 마사꼬(한국명 이남덕)와 결혼식을 올렸지만 전쟁으로 부인과 어린 두 아들을 일본으로 보내야 했다. 그 뒤 절절한 고독감과 처자에 대한 그리움, 가장으로서의 무능을 자책하려고 든 병적인 고뇌, 안식처를 못갖고 자학적인 생활로 영양실조에 간장염까지 얻었다. 정신 이상 증세가 나타나 청량리뇌병원을 거쳐 적십자병원에서 삶을 마치고 무연고자로 3일간이나 방치되어 있다가 뒤늦게 친지들에 의해 망우리 공동묘지에 묻혔다.


그의 대표작 <소>시리즈 연작에는 그의 드높은 화가적 성취와 시대적 절망감이 진한 조형언어로 담겨져이다. 거친 숨소리라도 들릴 듯이 격력한 동세를 보이며 저항하는 황소, 분노를 풀지 못한 상태에서 또 다시 질주할 곳을 찾고 있는 듯한 지친 소, 고통과 갈등, 절망을 가득 남은 눈으로 클로즈업된 슬픈 소가 있다. 구속에서 우리 민족의 울분과 저항이 있었다. 소재로 즐겨 다룬 가족, 부부, 어린이, 닭, 물고기, 복숭아 속에는 환상적인 농원, 평화로운 자연풍경, 자전적인 요소도 많이 담고 있다. 




힘차고 대담한 터치, 단순화된 형태, 강열한 개성으로 인간 내면을 표현했다. 사변으로 재료의 극심한 궁핍속에 태어난 독특한 그림이 은지화였다. 담배갑 속의 은종이에 철촉으로 그어 그림에 대한 열정을 담아내었다. 또한 엽서 위에 많은 스케치와 가벼운 수채화를 남겼다. 뛰어났던 데생력과 풍부하고 자유로웠던 생동감의 필력이 특출하였던 화면 구성과 창조적 상상력을 발휘하였다.


그는 일제시대, 6.25사변의 민족적 수난과 가족적 비극 속에서 파란 많은 고통이었다. 초기에는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한 향토적인 주제, 후기에는 자기 신변의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민족적 화가로 평화 염원의 간절한 구체적 심정을 담은 인간적 순수함이 우리 가슴 속에 영원히 살아 남는다.


-포스틸갤러리 1997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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