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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 최민 / 비판적 현실주의 미학

김종길

비판적 현실주의 미학
- 최민의 미술비평론



미술의 새로운 활로를 개척하기 위해서는 낡아빠진 인습과 빈혈증에 걸린 형식주의 논리를 전복시키려는 투지가 요구된다.
_ 최민, 「미술의 쓸모에 대한 의문제기」, 『계간미술』 봄호, 1982


미술평론가 최민이 향년 74세를 일기로 지난 5월 27일 작고했다. 그는 함경남도 북청군 신포읍에서 출생했고, 서울대에서 고고인류학(1968)과 미학(1972)을 전공했으나 문단에 먼저 데뷔했다. 1969년 『창작과 비평』에 「나는 모른다」외 5편의 시를 발표하며 시인이 된 것이다.


1972년 그는 석사논문 「재현의 표현적 의의」를 끝내고 첫 시집 『부랑(浮浪)』(월간문학사)을 펴냈다. 『부랑(浮浪)』은 “병든 지식인의 고뇌와 방황을 청산하는 과정을 보여” 주는데, “병든 도시생활과 거기에 연유한 정신의 퇴폐에 대한 내적(内的)추구에 역점을 둔 그의 시는 우울하고 복잡하고 썩은 현대의 한 단면(斷面)을 강렬하게 드러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1974년 그는 민음사에서 두 번째 시집 『상실』을 출간했다. 이 시집도 “암울한 시대와 조우하는 자신의 불안과 희망, 방황의 순간을 섬세하게 담아냈다”는 평가를 받았으나, 불온성을 이유로 판금 조치 당했다.


1970년대 중후반, 그는 시를 쓰고 미술평론을 간간히 발표하면서 번역에 몰두했다. 1975년, 『창작과비평』 여름호에 「꽃」, 「폐문」, 「동화」를 기고했고, 그 해에 열화당 미술문고 『미켈란젤로』와 앙드레 리샤르의 『미술비평사』를 우리말로 옮겼다. 이듬해에는 모리스 쉐릴라즈의 『인상주의』(열화당)를 번역했고, 이어서 에른스트 H.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 上下』(열화당)도 옮겼다. 이후 서양미술을 전공하는 이들에게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는 고전이 되었다.


그가 본격적으로 미술비평을 시작한 것은 1977년 5월 『미술과 생활』에 「부르조아에게 먹히는 미술」을 발표하면서부터일 것이다. 이 무렵 그는 『미술과 생활』을 오가며 미술평론가들과 교류하기 시작했다. 『미술과 생활』의 편집주간은 임영방 서울대 미학과 교수, 편집위원 성완경, 편집장은 동아일보 해직기자 황명걸 시인, 기자는 윤범모, 주재환, 성금자, 그리고 김용태, 원동석이 있었다. 그러나 『미술과 생활』은 1년 여 만에 폐간되고 말았다.


1979년 9월 25일, 원동석의 발의로 4.19혁명 20주년 기념전을 조직하기 위한 모임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12월 6일, 서울시대의 한 음식점에서 12명의 미술인이 모여서 창립을 결의하기에 이른다. 그들은 동인 이름을 ‘현실과 발언’이라 정했다. 이때 창립발기에 동참한 인물은 12명으로 원동석, 최민, 성완경, 윤범모(이상 평론가), 손장섭, 김경인, 주재환, 김정헌, 오수환, 김정수, 김용태, 오윤(이상 작가)이다. 최민은 원동석, 윤범모, 성완경과 함께 창립취지문을 작성했다. 이후 10개월의 준비과정을 거쳐 문예진흥원 미술회관에서 <현실과 발언 창립전>(1980.10.17.)을 개막했으나, 개막당일 미술회관 운영위원회의 일방적인 대관취소로 전시가 불발되고 만다. 한 달 후 그들은 동산방화랑으로 장소를 옮겨 11월 13일부터 19일까지 창립전을 다시 개최했다.


비판적 현실주의론 주창


최민은 1980년 『계간미술』 여름호에 「미술가는 현실을 외면해도 되는가」를 기고했다. 그는 이 글에서 “오늘날의 우리 미술이 현실과 참다운 유기적 관계를 맺고 있지 않다는 이야기를 많은 사람들이 하고 있다.”면서 세 가지를 제시한다. “첫째, 하나의 특수한 분야로서 미술활동이 사회 일반대중의 현실적 삶으로부터 물리적 심리적으로 유리되어 있다. 둘째, 미술작품 속에 현실이 담겨 있지 않다. 즉 생활의 절실한 문제와 감정이 반영되어 있지 않다. 셋째, 미술이 실제 생활이나 현실 전반에 별다른 힘이나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그러면서 그는 이 세 가지 문제가 표면적으로는 분리된 것처럼 보이나, 실제로는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그의 이러한 문제제기는 “예술은 현실을 반영한다”고 주장했던 1969년의 「현실동인 제1선언」의 현실주의론을 잇는 것이면서, 1980년대의 새로운 미술론을 주창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현실주의 미학은 무엇일까?


“화가가 현실의 실상을 일체 도외시하고 오로지 그림이라는 화폭에만 집착하고 있으면 결국 그림에 관한 그림 밖에 그릴 수 없다. 이런 그림은 미술사의 형식적 문맥 속에서나 살아있을 수 있지 현실의 공기 속에서는 한순간도 견디지 못한다. 우리의 많은 작가들이 이런 그림만을 그리고 있다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
_ 최민, 「미술가는 현실을 외면해도 되는가」, 『계간미술』, 여름호, 143~144쪽 참조.


‘현실과 발언’ 동인이 창립 결의를 하던 그 당시 박정희는 죽었고(10.26), 군사쿠데타가 터졌으며(12.12), 1980년 5월의 ‘서울의 봄’도 잠시, 5․17비상계엄 전국 확대조치가 내려졌다. 전두환은 국가 보위 비상대책위원회 상임위원장이 되더니, 그 해 9월 1일 제11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한국의 현실은 숨이 가빴고 군부독재는 지속되었다. 그런 현실에서 ‘그림에 관한 그림’은 그가 지적하듯이 ‘현실의 공기 속에서는 한순간도 견디지 못’하는 죽은 미학일 수밖에 없었다.


1980년의 시대령(時代嶺)은 한국의 대중문화가 ‘흑백’에서 ‘컬러’로 전환되는 분기점이기도 했다. 1980년에 컬러TV 판매가 공식적으로 허용되었고, 12월부터는 컬러 방송이 송출되기 시작했다. 산업사회와 이미지의 현실은 이전과는 다른 미술을 요구했다. 최민과 성완경은 『시각과 언어1-산업사회와 미술』(1982)을 기획하고 편집했다. 그들은 이 책의 서문에서 “이미지는 인간에게 근원적인 마력으로 작용한다. 이미지의 마력은 바로 그것이 현실을 대신할 수 있고, 그럼으로써 현실에 대한 상징적 통어(通御)를 가능하게 한다는 인류의 오래된 믿음에서부터 비롯된다. 그러한 마력, 즉 비합리적이고 물신숭배적이고 원시적인 힘은 과거처럼 특수한 기회에 특별한 방식으로 체험되고 간직되는 것이라기보다는 도처에 편재하고 범람하여 누구나 일상다반사로 마주치는 것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 맥락에서 미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는 궁리했고, 그 고민이 1981년 『문예중앙』 겨울호에 기고한 「이미지의 대량생산과 미술」에 녹아있다.


그가 참여한 ‘현실과 발언’은 1970년대와는 다른 1980년대의 ‘새로운 미술’을 기획하고자 했다. 1985년 ‘현실과 발언’ 창립 5주년을 맞아 발간한 『현실과 발언-1980년대 새로운 미술을 위하여』(열화당)에서 그는 「의사소통으로서의 미술-실천예술을 위하여」를 깊게 고민했다. 그는 “미술이 삶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는가 하는 실천적 문제를 검토하기에 앞서, 우선 미술이 현재 아무런 힘도 지니지 않았다는 것, 그러면서도 암암리에 존중받고 임의적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이율배반적인 사실을 새삼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이 사실의 비판적 검토가 현실의 삶 속에서 미술의 힘을 되살리기 위한, 그리고 그 힘을 효과적으로 이용하기 위한 시도”를 마련해야 한다고 주문하다. 이 글의 마지막에서 그는 “타인과의 소통이 없을 때 현실에의 의미있는 개입은 있을 수 없다.”고 말하면서 “미술이 지닌 잠재적인 소통의 기능을 회복시키려는 작가는 우선 신비화된 기존의 미학적 이념이나 도그마에 구애받지 않고 이야기하고 싶은 것을 솔직하게 이야기하고자 하는 의지를 지녀야 한다. 미술을 불필요하게 심각하고 까다로운 것으로 생각하거나 무턱대고 존중하는 것보다는 평이한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불 수 있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가 생각한 새로운 미술은 ‘소통하는 미술’이었고, 그래서 현실과 괴리되지 않는 ‘실천하는 미술’이었다.


비평가는 누구인가?


그의 평론에서 주목해야 할 또 하나의 주제는 ‘비평가의 자세’에 관한 그의 주장이다. 그는 1985년『시각과 언어2』(열화당)에 「최소한의 윤리-비평가의 자세에 대하여」를 실었다. 이 글은 에세크리틱 형식의 평론이어서 그의 자유로운 사유와 사유의 흔적을 고스란히 엿볼 수 있는 좋은 글이다. 그는 첫 문장에서 “70년대 이후 오늘에 걸쳐 미술비평은 관심갖는 사람들 사이에서 긍정적이라기보다는 부정적 반응을 받고 있는 것이 실상”이라고 이야기를 꺼낸다. 뒤를 이어서 그는 “비평가는 있되 비평은 없었다고까지 이야기될 정도로 그 활동이 보잘 것 없었고, 생산적인 기여를 했다기보다는 어떤 면, 기존의 제도적 병폐와 혼란을 가중시키는 데 일익을 담당해 왔다는 지적은 새삼스러울 것이 못 된다.”고 거침없이 이어간다. ‘사람들 사이’의 말이나, 그가 지켜 본 비평가의 자세(혹은 태도)나 별반 차이가 없을 정도로 그의 비판은 서론 전체를 휘감아 된다. 그렇다면 그가 생각하는 ‘비평가’는 무엇을 하는 존재일까?


“비평가는 단순히 기술만을 의도하건 또는 해석이나 평가까지도 포함시키고자 의식적으로 의도하건 간에, 말을 수단으로 삼으며 말로써 시각적 체험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문제는 시각적 체험이 지극히 복잡 미묘하며 그 중에서 단어와 문장을 동원하여 제대로 옮겨놓을 수 있는 부분이 생각보다 많지 않고, 그런 부분이라 할지라도 얼마만큼 남에게 전달될 수 있느냐가 미심쩍다는 점이다. 미술의 영역과 언어의 영역은 아무런 합치점을 발견할 수 없는 판이한 질서에 속하는 것일지도 모르며, 원칙적으로 시각적 체험을 언어로써 번역하는 또는 기술하는 작업이 불가능하다고 볼 수도 있다. 기술이 불가능할 때에 논리적 순서로 보아 그 뒤에 온다고 할 수 있는 해석이나 평가는 말할 것도 없다. 이론상으로는 그렇다. 기술과 해석이 결여된 평가는 설득력을 지닐 수가 없으며, 기껏 어려운 용어를 써서 복잡한 구절로 표현한다 할지라도 ‘나는 이 작품, 또는 이 작가, 이 조류가 마음에 든다’라든지 ‘마음에 안 든다’라는 단순한 취향의 토로 이상으로 받아들여지기가 힘들다.”


이 긴 인용구는 ‘평론’이라는 글이 무엇이며 또 어떻게 집필되어야 하는지, 그리고 ‘단순한 취향의 토로’에 머물 수 있는 한계까지를 너무나 간결하게 정리하고 있다. ‘기술하기’, ‘시각적 체험’, ‘문장력’, ‘번역하기’, ‘평가하기’, ‘해석하기’ 등의 핵심 키워드는 그때나 지금이나 평론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들이다. 그런데 문제는 평론이 ‘취향’이나 ‘토로’에 그치는 것은 고사하고 “이른바 주례사 또는 장황한 선전문일 수도 있고, 학식을 가장한 만담일 수도 있고, 기만적인 속임수일 경우도 있다”는데 있을 것이다.


그는 미국의 예술평론가 수전 손택(Susan Sontag)의 말을 인용하며 비평가의 역할을 재정의 하고자 한다. “해석한다는 것은 ‘의미’의 그림자 세계를 세우기 위해 세계를 빈약하게 만들고 텅 비우는 것이다. (……) 오늘날 대부분의 경우, 해석이란 예술작품만을 그대로 내버려 두기를 거부하는 속물적인 처사에 다름 아니다. 전정한 예술작품은 우리들을 충분히 예민하게 만들 수 있는 능력을 지닌다. 예술작품을 그 내용으로 환원시키고 그 다음 해석하는 행위에 의해 사람들은 예술작품을 제멋대로 길들인다. 해석은 예술을 손쉽게 다룰 수 있고 아무데나 적당하게 어울릴 수 있는 것으로 만든다.” 이러한 수전 손택의 논리는 그러나 그의 지적처럼 “작품이 지닌 생생한 충격과 힘을 설명함으로써 무력하게 만들거나 왜곡시킬지도 모른다는 기우에서 나온 말”일지 모른다. 또 어쩌면 비평이나 비평가에게 식상한 예술가들은 수전 손택의 말이 반가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비평가의 역할은 무엇일까?


그는 말한다. “작품을 기술하고 해석하고 평가를 내린다는 거의 자명해 보이는 비평의 일차적 기능은 새로운 각도에서 다시 음미되어야 할 것”이라고. “비평가의 관심이 단지 특정 작가와 작품의 예술적 가치를 추궁하는 일에만 매몰되어서는 안 되며, 자신의 비평작업이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어쩌면 작가와 일부 혜택받은 사람들 편에만 서서 ‘의미의 창조’라는 독점적 특권을 강화하고 신비화하는 데로만 보탬을 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 끊임없이 물어보아야 한다”고.  


그의 평론 활동은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집중되어 있다. 10년간의 뒤늦은 프랑스 유학과 이후 한국예술종합학고 영상원에서 후진 양성에 몰두하면서 빚어진 결과일 것이다. 그러나 1980년대 초중반의 그의 평론은 민중미술론을 구성하는 매우 중요한 참조점이다. 이제 그 참조점의 키워드를 재구성하는 일이 시작되어야 한다.   
 

최민 (崔旻, 1944.12.7~2018.5.27)
미술평론가, 시인, 영상이론

정리 | 김종길 미술평론가


연혁
1944, 함경남도 북청(北青) 출생
1968, 서울대학교 졸업(고고인류학/학사)
1972, 서울대학교 대학원 졸업(미학/석사)
1979, ‘현실과 발언’ 동인 창립동인
1993, 프랑스 파리 제1대학교 대학원 졸업(예술학/박사)
1995,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초대원장(3월)
1996, 96서울국제만화페스티벌(SICAF) 조직위원회 자문위원장(3월)
1996,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영상이론과 부교수(4월)
1997, 98사진․영상의 해 조직위원회 위원(10월)
1998, 제3회 광주비엔날레 전시기획위원장(전시총감독/3월~12월)
1998, 문화관광부 문화비전2000위원회 위원(5월)
2000, 제1회 전주국제영화제 조직위원장(4월)
2000,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영상이론과장
2002, 전주국제영화제 조직위원장, 청룡영화상 및 대종상 본심 심사위원 등 역임
2010, 한국예술종합학교 정년퇴임
2012, 한국예술종합학교 명예교수 추대


저서
1972, 최민, 『부랑(浮浪)』(시집), 월간문학사
1974, 최민, 『상실』(시집), 민음사
1975, 앙드레 리샤르 지음, 백기수․최민 옮김, 『미술비평사』, 열화당
1975, 최민 편저, 『미켈란젤로』(열화당 미술문고), 열화당
1976, 모리스 쉐릴라즈 지음, 최민 옮김, 『인상주의』(열화당 미술문고), 열화당
1977, 에른스트 H. 곰브리치 지음, 최민 옮김, 『서양미술사 上下』(열화당 미술선서1), 열화당
1982, 벤자민 로울랜드 지음, 최민 옮김, 『동서미술론-비교미술입문』(열화당 미술선서33), 열화당
1982, 최민․성완경 편집, 『시각과 언어1-산업사회와 미술』, 열화당
1994, 파스칼 보나푸 지음, 최민 옮김, 『VERMEER(요하네스 베르메르)』, 열화당
1995, 앙드레 리샤르 지음, 백기수․최민 공역, 『미술비평의 역사』(열화당 미술선서68), 열화당
2000, 앙드레 리샤르 지음, 백기수․최민 옮김, 『미술비평의 역사-미술을 읽는 다섯 가지 방법』, 열화당
2000, 모리스 쉐릴라즈 지음, 최민 옮김, 『인상주의-태동에서 절정까지, 그리고 그 주변 이야기』(열화당 미술책방), 열화당
2000, 최민, 『기억과 망각』(수필집), 문화과학
2001, 최민, 『첫사랑의 그림자를 찾아서』(소설), 맑은물


2002, 벤자민 로울랜드 지음, 최민 옮김, 『동서미술론-비교미술입문』(열화당 미술책방), 열화당
2005, 최민, 『어느 날 꿈에』(시집), 창비
2009, 심정수, 최민, 『조각가 심정수』(작품집) , 열화당
2010, 최민, 『전에도 그랬어』(시집) , 눈빛출판사
2012, 존 버거 지음, 최민 옮김, 『다른 방식으로 보기(Ways of Seeing)』, 열화당

미술평론 목록 1977~1994 (※ 민중미술 관련 평론만을 목록화 한 것임)
1972.2, 「재현의 표현적 의의」, 서울대학교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1976.11, 「(서평)평예술(評藝術)과 사회: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아놀드 하우저 저」, 『대화』, 월간 대화사
1977, 「소시민 의식의 극복」, 『창작과 비평44』, 여름호, 창작과 비평사
1977.5, 「부르조아에게 먹히는 미술」, 『미술과 생활』, 미술과 생활사
1977, 「일제하 기자운동의 전개」, 『창작과 비평45』, 가을호, 창작과 비평사
1977.8, 「(서평)교육현장의 고발, 아이들을 어찌할 것인가, 이오덕 저」, 『대화』, 월간 대화사
1980.6, 「전시회장-떠들썩해야 할 자리」, 『뿌리깊은 나무』, 뿌리깊은 나무
1980.8, 「절충주의와 학예회」, 『뿌리깊은 나무』, 뿌리깊은 나무
1980, 「미술가는 현실을 외면해도 되는가」, 『계간미술』, 여름호, 중앙일보사(주)
1981, 「미술작품과 글」, 『문예중앙』, 중앙일보사(주)
1981, 「이미지의 대량생산과 미술」, 『문예중앙』, 중앙일보사(주)
1981.7, 「도시와 시각전에 붙여」, 『도시와 시각전』, 팸플릿
1981, 「미술작품을 보는 눈」, 『문예중앙』, 여름호, 중앙일보사(주)
1981, 「미술은 물건인가」, 『문예중앙』, 가을호, 중앙일보사(주)
1981, 「이미지의 대량생산과 미술」, 『문예중앙』, 겨울호, 중앙일보사(주)
1981, 「미술작품과 글」, 『문예중앙』, 겨울호, 중앙일보사(주)
1981, 「피카소」, 『계간미술』, 겨울호, 중앙일보사(주)
1982, 「미술비평가의 역할」, 『미대학보』, 서울대출판부
1982, 「환원주의적 경향에 대한 반성」, 『예술평론』, 예술평론가협의회
1982, 「영혼의 외상을 드러낸 기호들」, 『계간미술』, 봄호, 중앙일보사(주)
1982, 「미술의 쓸모에 대한 의문제기-강요배」, 「영혼의 외상을 드러낸 기호들-문영태」, 『계간미술』, 봄호, 중앙일보사(주)
1982.2, 「싸늘한 실험미술의 화석-일본현대미술전」, 『마당』, 마당
1982.3, 「시험대에 오른 평론가들」, 『마당』, 마당
1982, 「미술관과 대중-반 덴 하아그」, 『시각과 언어1』, 열화당
1982.5, 최민, 성완경, 「산업사회와 이미지의 현실」, 『시각과 언어1』, 열화당
1982, 「이미지의 대량생산과 미술」, 『그림과 말』(동인지), 현실과 발언
1982, 「벤샨의 예술과 생애」, 『계간미술』, 가을호, 중앙일보사(주)
1982, 「현대로 이어진 서구의 풍속화 정신」, 『계간미술』, 겨울호, 중앙일보사(주)
1983.4, 「의사소통으로서의 미술」, 『이대학보』, 이화여자대학교
1985, 「의사소통으로서의 미술-실천예술을 위하여」, 『현실과 발언-1980년대 새로운 미술을 위하여』, 열화당
1983.6, 「한 시대의 초상들, 사람들」, 『빛나는 정신전』, 팸플릿
1983.8, 「비평가의 역할」, 『미대학보』, 서울대출판사
1983.9, 「이미지의 근원」, 『민정기전』, 팸플릿
1985, 「최소한의 윤리-비평가의 자세에 대하여」, 『시각과 언어2』, 열화당
1986, 「자크모노리에 미친 영화의 영향」, 파리 제1대학
1993, 「1960-1970년대 프랑스 신구상회화에 미친 영화의 영향」, 박사학위논문, 파리 제1대학교
1994, 「미술속의 영화 영화속의 미술」, 『월간미술』, ㈜월간미술
2000.2, 「마라르메에게서의 ‘책’의 개념과 그 실천」, 『한국프랑스학논집 29』, 한국프랑스학회


시 발표
1969.6, 「나는 모른다」, 『창작과비평』, 여름호, 창작과비평사
1969.6, 「광대」, 『창작과비평』, 여름호, 창작과비평사 
1969.6, 「배화(拜火)」, 『창작과비평』, 여름호, 창작과비평사
1969.6, 「비의 방(房)」, 『창작과비평』. 여름호, 창작과비평사 
1969.6, 「저녁 식사 중의 확인」, 『창작과비평』, 여름호, 창작과비평사
1969.10, 「입신(立身)」, 『시인』
1970, 「부랑(浮浪)」, 『문화비평』, 여름호
1970.4, 「성년(成年)의 봄」, 『시인』
1971, 「밤의 서울」, 『창작과비평』, 가을호, 창작과비평사
1971.11, 「회복」, 『문학과지성』, 문학과지성사 
1971.11, 「벽」, 『문학과지성』, 문학과지성사 
1971.11, 「깊은 꿈」, 『문학과지성』, 문학과지성사 
1971.11, 「노예」, 『문학과지성』, 문학과지성사
1971.11, 「끝장」, 『문학과지성』, 문학과지성사
1972.12, 「별부(別賦)」, 『문화비평』
1973.3, 「예감」, 『창작과비평』, 봄호, 창작과비평사
1973.3, 「영등포 길」, 『창작과비평』, 봄호, 창작과비평사
1973.3, 「다리」, 『창작과비평』, 봄호, 창작과비평사
1973.3, 「소문」, 『창작과비평』, 봄호, 창작과비평사
1973.3, 「노래」, 『창작과비평』, 봄호, 창작과비평사
1975.6, 「꽃」, 『창작과비평』, 여름호, 창작과비평사
1975.6, 「폐문」, 『창작과비평』, 여름호, 창작과비평사
1975.6, 「동화」, 『창작과비평』, 여름호, 창작과비평사
1988, 「성난 휠체어」, 『창작과비평』, 여름호, 창작과비평사
2003, 「어느 날 꿈에」, 『창작과비평』, 가을호, 창작과비평사
2003.10, 「푸념」, 『현대문학』, 현대문학사


미술세계_2018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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