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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리뷰 | 김종영+안상수 / 글씨와 생각씨

김종길

글씨와 생각씨


김종영전 2017. 12. 22~2.4 예술의 전당 서울서예박물관
수행하는 문자, 문자의 수행자전, 2017. 12. 16~1. 28 바라캇 서울


“말과 글에 사람의 ‘생각씨’가 있고 그 씨알이 사유하기의 철학이며 사상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이는 다석이었다. 사람이 곧 씨알이라는 것도 그런 사유의 큰 바탈(本性)에서 비롯한다.”
_ 김종길, 〈안상수 ‘글꼴’ 인문학자〉, 《ART》, 2017년 6월호, 155쪽.


우성 김종영은 『완당집고첩』을 모셨다. 그 절첩식 책자에 담긴 완당 김정희의 붓글씨 말글(文字)은 비범했고 두려웠다. 그래서 그것은 그대로 사표(師表)였다. 그는 완당의 말글을 본떠서 썼다. 본떠 쓰는 것으로 완당의 뜻을 헤아렸다. 그가 완당의 ‘탁월한 달견’에 놀란 것은 ‘유희삼매’(遊戱三昧)였다. 유희삼매는 이 서첩의 첫 장에 있다. 완당이 원용한 이 말의 뜻에서 그는 예술의 첫 기원에 닿았고 깨달았다. 그가 마음에 새긴 그 말의 뜻은 “절대 구속이 없는 자유”였다. 그는 창작을 위해서는 일체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수필 〈유희삼매〉를 짓고 거기에 “우리 예술계에 절실히 필요한 것이 바로 유희정신”이라 썼다. 시공을 초월해 완당은 우성에게 ‘유희(정신)’이라는 ‘생각씨’를 던졌다.


날개 안상수는 1996년에 《타이포그라피적 관점에서 본 이상 시에 대한 연구》를 마쳤다. 시인 이상은 주저 없이 근대성의 총아라 할 것이다. 그의 시에는 초현실주의, 다다이즘, 입체파, 미래파의 그늘이 뒤섞여서 난무한다. 무엇보다 날개가 이상에 집중한 것은 그가 한글의 말글에 회화, 기하학, 물리학, 숫자, 고유어, 외래어 등을 혼합한 하이브리드 텍스트를 창조했을 뿐만 아니라, 언어유희의 기표로 ‘멋짓’(design)을 펼치는데 누구보다 탁월했기 때문이다. 한글로 멋 지은 이상의 시는 시이면서 그림이요, 그림이면서 구조적 건축이었다. 시가 그림이고 건축이라는 것은 뜻보다 먼저 말글이 형상을 갖추었다는 얘기다. 근대 예술계에 이상의 출현은 기묘한 것이어서, 그 글의 뜻을 헤아리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그의 시적 유희는 비범하고 두려웠다. 날개는 그런 이상에게서 그 ‘(언어)유희’의 ‘생각씨’를 받았다.



글과 그림, 하나의 '생각씨'


두 예술가에게 유희(정신)의 생각씨는 창조의 샘이었을까? 그들은 글씨․그림․조각․멋짓(design)의 생각씨가 터지는 순간들에서 ‘본떠 쓰는’(臨書) 행위의 오래된 완숙과, 그 완숙의 쓰기가 뜻으로 번져서 물든 사유의 몸을 헤아렸다. 우성은 완당의 ‘유희삼매’(遊戱三昧)를 임서했다. 임서한 것의 뒤에 ‘각인 종영’(刻人 鐘瑛)이라 붙였다. 임서한 것을 보면 그가 말글의 붓글씨 형상이 아니라 그 뜻의 형상을 본뜨려(刻)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말글의 붓글씨(書藝)를 그대로 본떠 베끼는 것은 ‘각’(刻)을 수행하고자 했던 그의 마음과 달랐을 것이다. 송대 강기(姜夔)는 “임서는 옛 사람의 위치(점획․문자․행 등의 구성)를 잃기 쉽지만, 옛 사람의 필의(筆義)를 얻는 것은 많다”고 했다. 우성은 스스로를 ‘각도인’(刻道人)이라 했고, 또 후에는 ‘불각도인’(不刻道人)이라 불렀다. 김종원은 「우성 김종영 서작품 세계 소고」에서 “‘각인’이라는 아호는 아마도 조각가로서의 자기 진로를 분명히 하고, 그곳에 목표하는 바의 철리가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 했고, ‘각도인’은 각의 도를 가는 사람, 각으로 도를 삼는 사람이라 했으며, ‘불각도인’은 불각의 도를 지향하는 사람, 각하지 않음이 도인 것을 아는 사람이라 해석했다. 이때 ‘도’(道)와 ‘불각’(不刻)의 뜻은 김종원이 ‘철리’(哲理)라 표현했듯이 매우 현묘한 것이다. 즉, ‘각’이 곧 ‘도’의 수행이요, 그 수행의 유희는 곧 ‘불각’에 있다고 표현한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붓글씨 말글의 뜻을 깨달아 유희의 세계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그가 어떤 무한의 공간을 엿본 것이 회화일 것이다. 말글의 원형은 본래 이미지(象形)였다. 1958년 2월에 그린 <44세 자화상>과 철조각 <전설>은 그 유희적 세계가 이미지 말글의 먼 원형에 가 닿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날개는 말글의 탄생지를 여행할 때마다 절첩식 화첩에 이미지 연대기(timeline)을 그리고 새긴다. 거기에는 이상이 ‘오감도·烏瞰圖 시제 2호’에서 펼치듯이 띄어쓰기 없는 사유의 거대한 능선이 한 없이 이어진다. 시어가 된 말글이 한 줄로 이어져서 뜻과 상징의 타이포 만다라가 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는 옛 금문(金文)과 석문(石文)을 비롯해 암각화의 이미지에서 그림말글과 글씨말글이 어떻게 흘레붙어서 ‘하나’를 이루고 뜻을 품었는지를 생각한다. 여행에서 돌아와 그는 그림말글과 글씨말글이 창조적 유희로 탄생한 조선후기의 문자도 민화를 탐색했다. 바라캇 서울의 <수행하는 문자, 문자의 수행자>전에 내 건 <날자.날자>(2017)는 지난해 서울시립미술관 <날개.파티>전에 전시되었던 <홀려라> 연작과는 많이 다른데, <홀려라>가 옛 문자도 민화의 혼융방식을 차용한 것이라면 <날자.날자>는 좀 더 유희적인 토템의 느낌을 드러낸다. 먹붓의 자유로운 파묵(破墨)에 안상수체 글꼴 ‘ㅎ’이 나란하다. 파격의 기운에 자음의 질서 몇 개를 붙여 놓은 꼴이다. 그에 비하면 노지수의 이미지 멋짓은 엄정하다. <락, 시저스, 페이퍼 1-쐐기문자 시리즈>(2017)은 그림말글에서 말글을 떼고 ‘그림’(象形)을 추상화했다. 그림을 하나의 언표기호로 해석한 미니멀한 멋짓에서 그림은 그것으로 상징일 수 있음을 확인한다. 이푸로니의 <주술적 문자>(2017)는 우성이 그린 수천 장의 회화/드로잉에서 슬몃슬몃 엿보이는 토템적 이미지와 이어진다. ‘주술적 문자’는 고대 암각화, 동굴벽화, 어린 샤먼들이 꿈을 꾸고 그린 그림들, 여러 세계의 원주민 그림들이 조합되어 있는 것 같다. 그것은 ‘말글’(書/文字)이 아니다. ‘그림’(畵/刻)이다. 그러니까 그가 차용한 것들은 말글이 되기 전의 그림이거나, 말글의 뜻이 생성되는 단계의 어떤 원초적 상징의 상태를 보여준다. 우성은 자화상에서 말글이 되지는 못하나, 그 말글의 뜻이 그림이 되고 조각이 되는, 완전한 자유로서의 유희적 드로잉을 시도한 듯 보인다. 김종영전을 기획한 이동국은 누차 우성의 세계를 ‘사의’(寫意)라고 했다. 우성에게 사의는 유희와 같았을 것이다. 그는 “유희는 이 모든 구속을 수반하지 않는데서 예술의 세계와 통하는 것”이라고 적었으니까. 그러므로 유희적 드로잉이 우성과 날개와 노지수와 이푸로니와 고대 말글과 뜻을 하나로 잇는 통로일지 모른다. 글과 그림은 근원이 같다(書畵同源).



'스스로 그러함'을 닮은 예술


‘그림말글(뜻)’은 ‘글씨말글(소리)’에 앞섰다. 그림과 상형(象形)의 표의문자가 음절/음소구조의 표음문자보다 이르다는 뜻. 그렇다고 그림말글이 글씨말글의 옹알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림은 상상계(혹은 신화)의 구조를 뒤흔들어 말의 실재를 드러냈고, 글씨는 그 말의 실재로 다시 상상계를 구조화했으니까. 그림말글과 글씨말글의 탄생은 앞뒤가 있으나 말글이 완성된 뒤에 둘은 서로 갈마들어 어긋매꼈다. 그림은 말의 실재로 응고되면서 글씨가 되기도 했고 글씨는 다시 은유와 상징을 담아서 화상(畵像)이 되었기 때문이다(김종길, 〈안상수 ‘글꼴’ 인문학자〉, 《ART》, 2017년 6월호, 151쪽).


날개의 작업들은 상상계를 구조화하는 그림말글과 글씨말글의 혼융세계로 가득하다. 그가 나아가는 곳은 흰 여백이지만 그 뒤로 이어지는 그림자는 인류학의 구조적 상상계를 이루는 그림과 말글로 이뤄졌단 얘기다. 우성은 “자연현상에서 구조의 원리와 공간의 미를 경험하고, 조형의 기술적 방법을 탐구”했다고 고백한 바 있다. 그 과정에서 그가 취한 것이 완당의 유희정신이요, 완당이 금석학에 기대 터득한 붓글씨 말글의 조형이었다.


3세기 사상가 곽상(廓象)은『장자(莊子)』 제물론편(齊物論編) 해설에서 “조물이라 함은 주인 없이 제각기 스스로를 만듦으로써 제각기 스스로를 만들어 아무것에도 의지하지 않기 때문에 천지는 올바르다” 혹은 소요유편(逍遙遊編) 해설에서 “만물은 반드시 자연스러움을 올바르다고 한다. 자연이라고 하는, 작위 없이 스스로 그와 같은 것이다. 무언가에 그것을 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것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올바른 것이다”고 말했다. 여기서 ‘자연’이라는 말은 명사 형태로 읽고 있지만, 정확하게는 ‘스스로 然’, 즉 ‘원래 그와 같다’고 하는 형용구이며, 원래 그러했던 모습, 본래적인 모습, 인간의 작위에 의하지 않는 모습, 그렇게 있을 수밖에 없는 모습, 우주적인 섭리를 따른 모습을 말하고 있다. “만물은 반드시 자연스러움을 올바르다고 한다”는 것은, 만물이 조물주나 인간의 손을 빌리지 않고, 물 각각 스스로 그와 같은 그 모습이 우주의 운행에서 보아 올바른 모습이란 뜻이다. 우성의 조각론이 ‘불각(不刻)의 미학’에 기대고 있는 것은 그런 ‘자연’의 의미와 상통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우성이 “인물과 식물과 산”을 구분하지 않고 모티브를 찾았던 것은 ‘인(人)’과 ‘물(物)’이 똑같이 천지의 ‘생의(生意:만물을 낳고자 하는 마음)를 받아 자신의 본성에 따라 생명을 누린다는 옛 전통과 다르지 않다. 사람과 천지만물은 근원적으로 연결되어 있어 서로 유통한다고 보는 옛 관점. 그리고 그 관점에 또한 날개의 멋짓기가 투영되어 있다.


아트인컬쳐_2018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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