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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평론 | 김정헌 / 불온, 불편, 불륜의 사회에서 ‘큰 미술’ 그리기

김종길

불온, 불편, 불륜의 사회에서 ‘큰 미술’ 그리기
- 김정헌의 ‘그림의 생각’과 발언의 농담



김정헌(1946~ )은 서울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했다. 1974년 <한국실험작가>전에 참가했고, 또 1974년부터 79년까지는 <신체제>전에 참여했다. 1975년에는 제1회 대구 현대미술제에 초대 출품하기도 했다. 1980년 <현실과 발언>의 창립 동인으로 참여하면서 비판적 리얼리즘 미학에 기반을 둔 작품들을 발표했다.


작가로서만이 아니라 그는 교육자이자 문화운동가로도 크게 활약했다. 공주대학교 교수를 지냈고, 전국민족미술인연합 공동의장, 문화개혁시민연대 상임집행위원장, 문화연대 상임 공동대표, 한국문화예술위원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공주교도소 담장에 그린 벽화 <꿈과 기도>로 1985년에 법무부장관 표창을, 1995년에는 제1회 광주비엔날레 특별상을 수상했다.


이 원고는 1980년대 초반부터 현재까지 그가 발표한 글, 토론, 말을 콜라주로 엮어서 ‘김정헌 깊이읽기’를 시도한 인터뷰 형식의 평론이다. 지금 여기에서 과거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 거기의 ‘그’를 호명한 것이다.



‘큰 그림’의 사유


<현실과 발언>(이하 ‘현발’) 5주년을 맞아 기획 출간된 《현실과 발언-1980년대의 새로운 미술을 위하여》(열화당, 1985)에서 그는 “‘큰 미술’을 위한 제안”을 발표했다. 1985년에 발표한 글이지만 글의 시작과 끝은 그 이전이어서 1980년대 초중반을 보내며 그가 사유한 ‘새로운 미술’의 실체와 그가 추구하려는 미술을 엿볼 수 있다. 또한 그 시기는 민중미술의 개념이 완성되기 전이었다. 공교롭게도 바로 그 해에 미술동인 <두렁>(이하 ‘두렁’)이 《민중미술》(공동체, 1985)을 펴내기는 했으나 ‘현발’과 ‘두렁’이 본격적으로 교류를 시작한 것은 민족미술인협의회 결성(1985. 11) 이후 부터였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큰 미술’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것은 한마디로 ‘나누어 가질 수 있는 그림’이다. 공유(公有)의 개념에 가깝다고 할까. 그렇지만 다 똑같이 소유한다는 개념은 아니다. 그것을 뛰어 넘는 그림을 생각한 거다. 나는 그게 우리가 앞으로 이루어야 할 미래의 미술이라고 보았다. 미술사에서도 그런 예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우리는 뭔가를 먹거나 마시는 것으로써 내 몸에 어떤 물질을 편입시키는 것이 그것을 소유하는 원초적인 행위이자 양식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인류학자들이 원시인들의 식인풍습에 대해 ‘다른 인간을 먹으로써 나는 그 사람의 힘과 영원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원초적인 편입과 소유의 관계는 우리 인간들이 가졌던 원시적인 미술의 소유양식을 짐작하게 한다. 동굴벽화는 실제로 먹을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벽화의 ‘토템동물’을 먹음(그림)으로써 그 동물이 상징하는 신성한 실질을 획득한다고 믿었다. ‘큰 그림’은 그런 ‘신성한 실질’을, 바꾸어 말하면 ‘절실한 삶의 감동’ 같은 것을 나누어 가지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런 ‘큰 그림’이 주는 삶의 감동, 그러니까 신성한 실질을 획득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림의 주체로 삶의 필연성을 획득해야 하고, 또 서로 나누어 가질 수 있는 여러 방법들을 동시에 모색해야 한다[현실과 발언-1980년대의 새로운 미술을 위하여》(열화당, 1985), 80쪽. 구어체로 바꾸면서 문장을 흔들었으나 그 내용과 취지를 살렸다. 이 글에 실린 김정헌의 말들은 필자가 글의 흐름에 맞게 구어체로 바꾸고 편집한 것임을 밝혀둔다. 말의 실체는 각주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토템동물을 먹고 그것으로부터 신성한 실질이라는 절실한 삶의 감동을 나누어 가지는 것이 그가 말하는 ‘큰 미술’인 셈인데, 그것은 마치 ‘소설’을 ‘대설’로 바꾸어 부르는 것 같은 느낌이 있다.  그는 ‘큰 미술’에 삶의 감동이 있다고 했고, 그 감동을 위해서는 삶의 필연성을 획득해야 한다. 당시 미술평론가 김윤수는 삶의 구체성에 다가서는 새로운 구상을 리얼리즘으로 역설했었다. 김정헌의 ‘삶의 필연성’과 김윤수의 ‘삶의 구체성’을 동일한 바탕으로 볼 때 그들이 이야기하는 미술은 ‘리얼리즘’일 것이다.  



구체적 현실로서의 리얼리즘


김정헌은 1977년 첫 개인전에선 추상을, 1988년 두 번째 개인전에선 리얼리즘을 화두 삼았다. 그가 참여했던 ‘현실과 발언’은 비판적 리얼리즘을 추구했고 그 미학적 개념은 그의 10년의 변화를 보여주는 상징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렇다면 서른둘에서 마흔둘, 그 시간동안 그에게 어떤 사건들이 있었던 것일까? 그는 1960년대 후반에 추상표현주의를 받아들였다고 한 바 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이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대학원에서 사회과학 책들을 읽으면서 눈을 떴습니다. 유신과 맞섰던 문학의 저항을 보았고 거기서 영향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때 리얼리즘의 문제를 고민하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결국 1979년 ‘현실과 발언’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인 자기변혁의 계기를 갖게 되었죠. 1980년대 초에는 문명비판적인 그림을 주로 그렸습니다. 그게 시야가 넓은 것 같지만 사실 구체적인 사회현실의 문제는 부족했습니다. 아마도 비판적 리얼리즘을 해야겠다는 강박관념이 크게 작동했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가족의 모습을 담기도 하고, 우리네 삶의 원형을 지키고 있는 농촌과 농민의 모습들, 장승을 그리게 되었습니다. 나는 사실 피난민 출신입니다. 부산 피난시절에는 천막학교를 다녔고, 판자촌에서 자랐습니다. 그 시절의 정서가 <산동네 풍경> 같은 작품에 녹아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1980년대 작업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 중 하나가 공주교도소 담벼락에 대형 벽화를 그린 것입니다. 1985년 일이죠. 살인죄로 복역 중인 여자 재소자에게 그림지도를 했었어요. 사실적인 농촌 풍경에 민화적인 요소를 가미해서 봄여름가을겨울 사계절의 변화를 인간의 삶에 빗대어서 그렸습니다. 인간을 변화시키는 것은 자연이고, 그 자연에 대한 신뢰가 곧 큰 바탕이라는 생각으로 말이죠.”[한겨레 신문, 1988년 10월 23일자 기사(인터뷰) 참조. 몇 개의 인터뷰를 한 흐름으로 바꾸었다].


큰 미술을 위한 삶의 필연성은 그렇게 구체적인 사회현실의 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스스로의 변화에서 시작되었다. 비판적 리얼리즘은 관념이 아닌 ‘삶의 구체성’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것이야말로 대중과의 미학적 소통을 가능케 할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현실과 발언> 초창기부터 ‘현발’의 동인들은 대중성의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했다. 이들이 고민한 ‘대중성’의 핵심은 ‘소통’이다. 어떻게 하면 대중성을 확보할 수 있을까. 대중의 속성은 무엇인가. 그런 고민들은 회화의 주제를 설정하는 문제이기도 했다. 그는 예술성과 대치되는 개념이 아니라, 흔연히 대중과 만나는 방법 따위를 깊게 고민했다.


“창립 초기에는 명확한 의식이 없었다. 내가 그때 농촌그림을 주로 그렸던 이유 중의 하나는 농촌 풍경에는 보편적인 공감대가 깃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여행을 하다가 농촌의 모습을 보게 되면 누구라도 그렇게 좋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각박한 삶을 사는 도시인들에게 농촌은 아늑하고 넉넉한 감정이지 않은가. 그 감정은 대단히 큰 거고(심광현, 「김정헌, 민중의 심성을 파고드는 그림」, 『민중미술을 향하여-현실과 발언 10년의 발자취』, 과학과 사상, 1990. 256쪽).


그런 과정은 그의 회화를 색다른 민중미학으로 형성시켰다.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한국적 현실이 회화적 발언으로 형성되었다. <현실과 발언> 이후 작가로서 다시 큰 변화를 맞이한 시점은 1997년의 <학고재> 전시가 아니었나 싶다. 1995년 광주비엔날레에서 특별상을 받은 뒤였고, 바로 그 시기부터 그 이전과는 변별되는 작품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 전시에는 가로 세로 60센티미터의 패널 작품 100개를 만들어 발표했다. 왜 그는 이렇게 모듈화 된 작품들을 제작했고 그가 발언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1993년의 개인전 <땅의 길, 흙의 길> 이후에 서서히 시작을 했습니다. 서태지가 등장하더니 문화판이 확 바뀌더군요. 1994년 이른 봄에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민중미술 15년전>을 기획해서 민중미술을 역사로 만들어 버렸고요. 그때부터 사진이나 이미지들 또는 기호화된 도상들을 채집했습니다. 심지어는 내가 그린 이전 작품들도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방법들을 차용했고 말이죠. 대기업의 로고, 최루탄 맞은 이한열, 스노보드 모자를 쓴 서태지, 금남로 분수대 앞에 모인 민중, 청와대 앞길, 열림 음악회 등등. 100개를 그렸지만 사실 100개라는 숫자는 임의적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한적이고 선택적이라기보다는 얼마든지 증식될 수 있다는 표시이기도 합니다. 그 이미지 조각들은 서로 영향을 주기도 하고, 충돌과 긴장과 상쇄와 화해를 만들어 내기도 할 것입니다. 나는 그 파편화된 이미지를 통해서 ‘미술이란 무엇인가’를 묻고 싶었습니다. 내 자신과 관객 모두에게 말이죠. 패널 8개로 구성한 <강물이 만난 것들>이 있는데, 처음엔 물풀로 시작해 나비와 자갈을 거쳐 마지막엔 시커먼 하수구로 가버립니다. 또 <1996년에 대한 희미한 기억들>은 10개짜리 연작인데 한 가지 주제 대신 햄버거, 김정일, 광부의 모습 등 다양한 형상들을 나열해 놓았습니다. 나는 거기에 쉽게 변하고 잊히는 ‘현실’이 있다고 봤던 것입니다. 시대만 다를 뿐 비판적 리얼리즘은 바뀌지 않았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경향신문, 1997년 6월 3일자 기사 참조).



농담, 그림으로 생각하기


1980년대 후반의 민중미학은 정치투쟁과 예술의 상징투쟁이 결합해서 ‘민주화’라는 하나의 꿈을 소비했다. 그러나 1990년의 시대령을 넘으면서 사회주의 체제의 몰락과 문민정부의 탄생을 지켜보았을 것이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김일성의 사망도 있었다. 한국사회는 빠르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민중미술의 시대도 끝났다는 평가도 있었다. 그의 작업은 그런 시대의 변화를 어떻게 사유할 것인가의 문제였을 수 있다. 


“1980년대 민중미술은 거칠고 가난했습니다. 내 초기 작품도 마찬가집니다. 이영욱 평론가가 ‘텁텁하다’라고 표현했던 게 기억이 납니다. 농부와 민중의 삶, 땅을 주제로 했는데, 미완성적 작품이 많았습니다. 심각하게 무게 잡기보다는 농담이 섞여 있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미술이라는 것이 뭔가, 질문하면서 당시 유행했던 고급문화 화풍을 조롱하고 위악을 떨어보고도 싶었습니다.  밑바닥에서 억압받는 사람들을 민중이라고 했을 때, 지배층이 아닌 그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시각매체가 민중미술이었고, 그 사람들의 감성을 대변한 미술을 했다고는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민중미술의 수준이 전반적으로 낮았다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민중미술 작가군을 작품 평가 대상으로 보는 걸 거부합니다. 나 역시 내가 민중미술 작가로 불리는 게 좀 거북하기도 합니다. 민중이라는 개념은 나에게 무겁고 맞지 않는 옷처럼 느껴지고 하고 말이죠. 그런 측면에서 주재환 작가는 달라요. 민미협 대표였던 주재환 작가를 보면 조롱과 유희, 가벼움과 심오함을 거의 무당 줄타기 수준으로 가지고 놀잖아요[조숙현 작가와의 인터뷰, 《한겨레 21》, 제1104호(2016.3.25.) 참조].


농담, 그는 자신의 작품에 ‘농담’을 심었다. 그는 1980년대 초기에도 빈 말풍선을 그려 넣기도 하고 광고판을 넣어서 자본을 비꼬는 회화를 보여주기도 했다. 그런 일종의 양식적 실험이 1990년대의 다문화적 상황에서 완성되기 시작했다. 지난 해(2016) 아트 스페이스 풀에서 개최한 <생각의 그림․그림의 생각>은 그런 ‘농담’이 하나의 미학적 세계를 이루는 전시였다. 제목에 딸린 부제가 농담의 실체일 것이다. “불편한, 불온한, 불후의, 불륜의, … 그냥 명작전”이라고 표현한 게 그것인데 그것의 속뜻은 무엇일까?


“‘생각의 그림, 그림의 생각’이라고 한 것은 내가 늘 품고 있는 작업에 대한 단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림이 곧 생각이잖아요. 그것은 작품이 관객과 맺는 관계이기도 합니다. 내가 무엇을 그려 놓았든 결국 그림을 해석하고 완성하는 것은 관객의 몫이거든요. 그래서 내 작품들은 그리는 나와는 또 다른 생각을 품게 됩니다. 혹시라도 어떤 관객은 내 작품 앞에서 춤을 추는 그리스인 조르바를 만날게 될지도 몰라요. 내 작품을 만나서 환호를 하든 엉뚱한 해석을 하든 춤을 추든, 때로는 외면을 하든 이제부터 모든 것은 완전히 관객의 몫입니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죠. 정말이지 박근혜 정부 들어서는 신명이 나지 않을뿐더러 도무지 직설화법으로 그림을 던질 수가 없었어요. 패러디로 비틀고 다른 것에 빗대어서 의인화를 해야 주제가 풀리더군요. ‘아몰랑’이란 유행어 압니까? 그게 ‘아, 나도 모르겠어’란 뜻이에요. 2015년에 그린 <‘아몰랑’ 구름이 떠있는 수상한 옥상>에 ‘아몰랑’ 말풍선이 있는데 아무런 말도 쓰여 있지 않아요. 나는 그게 착란의 언어라고 생각했거든요. 말할 수 없는 것, 표현되거나 발음될 수 없는 병, 이 수상한 풍경이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어떤 ‘인지부조화’의 질병인 것이죠. 불온, 불편, 불륜을 쓴 것은 우리 사회를 직접적으로 체감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모순과 아이러니가 판을 쳤잖아요. 사회나 체제나 모두 불륜 투성이고 말이죠(CNB JOURNAL 제475호, 2016년 3월 24일 기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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