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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화폭에 담긴 현대 여성의 삶의 고백, 이은산 | 윤아영

현대미술포럼



화폭에 담긴 현대 여성의 삶의 고백, 이은산 



이은산(1948~)은 현대 여성의 삶과 감수성을 강렬한 색채와 동심어린 이미지로 표현해 온 작가이다. 1968년부터 1976년까지 대학에서 회화를 전공한 그는 1972년 열린 《제2회 표현그룹작품전》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40여년 간 꾸준히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이은산은 1980년대 중엽 여성의 경험과 가치를 의식적으로 추구했던 ‘여성주의 미술’ 보다 한 발 앞서 당대의 주류미술과는 구분되는 여성적 감수성의 존재를 암시하는 작품세계를 구축하였다. 이러한 시도는 남성 작가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미술사 속에서 여성적 관점을 모색하는 새로운 걸음의 신호탄이 되었기에 주목을 요한다.  

1970년대 한국 화단은 남성 화가들의 주도 아래 단색화가 한국적 모더니즘이자 제도권 미술로 자리매김하였으며, 그 반대 급부로 설치, 퍼포먼스, 해프닝 등 다양한 형태의 작업을 통해 사회적 발언을 제기하는 실험미술이 태동하였다. 한편 1950년대 말부터 등장한 여성작가들은 꾸준히 그 숫자가 증가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화단의 주변부에 머무르며 독자적 주체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한 상태였다. 때문에 대부분의 작품 속 여성상 또한 모더니즘과 전통화법이라는 남성적 어휘를 따르며 남성의 시선이 반영된 대상이라는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다. 

이 같은 변화의 시기 서울대학교 회화과에 재학중이던 이은산은 추상미술이나 단색화가로 구성된 교수들로부터 재료의 물성이나 동양적 정신성을 강조하는 학풍을 경험하는 동시에 ‘현실과 발언’ 그룹의 임옥상(1950~) 등 사회정치적 미술을 추구했던 남성 화가들과 함께 수학하며 양분된 미술계의 흐름을 직접 목도하였다. 그러나 이은산은 그를 둘러싼 제도권 추상미술과 재야 실험미술 어느 쪽에도 편승하지 않은 채 독자적 노선을 선택하였다. 당시 활발히 활동하였던 동료 여성 미술가들과의 연대를 통해 여성으로서 ‘우리’의 문제를 발견하려는 새로운 노정을 시작한 것이다. 이들은 여성적 정체성과 감수성 탐색이라는 목표를 세웠으며, 이를 작품에 반영한 독자적 시각을 형성하고자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이은산이 1972년부터 1992년까지 참여한 ‘표현그룹’ 활동은 이후 그의 작품세계 전반에 주요한 토대가 되었다. 이들은 여성으로서의 자신을 표현하려는 의지에서 ‘표현그룹’이라 명명하였으며, 공동 활동을 통해 ‘여성’이라는 주제를 이슈화한 최초의 여성미술 그룹으로 성장하였다. 기혼 여성 작가들로 구성된 표현그룹은 현대 여성의 일상과 감정 그 자체를 예술로 보았으며 ‘여인, 자연, 패턴, 장보기, 집, 헝겊’ 등 여성과 관련된 키워드를 공통 주제로 선정하여 소재와 기법 연구에 몰두하였다. 작품에는 구상형상과 공예 기법을 활용하였는데, 이러한 특성 또한 재료의 물성을 강조한 모더니즘 미술이나 무채색 화면에 추상성・정신성을 강조한 단색화, 혹은 사회적 발언이 담긴 실험미술 등 당시 주류 미술의 특성들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것이었다. 여성 미술가들의 활동이 증가하는 추세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여성의 시각이나 정체성이 주체적으로 확립되지 못한 시기였다는 점에서 여성성과 밀접하게 닿아있는 주제와 특성을 전면에 표방한 이들의 존재와 작업방식은 그 차제만으로 의미 있는 실천으로 평가될 만한 것이었다. 

1980년대 초 이은산의 작업에는 이러한 특징들이 잘 드러나 있다. 그는 작품 <실패와 실>(1980), <보자기>(1981), <바늘>(1982)에서 바늘, 실, 헝겊, 보자기, 십자수 등 여성의 일상과 밀접하게 연관된 사물들을 소재로 채택하고 에칭(etching), 애쿼틴트(aquatint) 등 동판화 기법을 활용한 단색의 작품들을 제작하였다. 여기서 그가 선택한 소재들은 전통적으로 여성의 영역으로 전수되어온 것들이자 여성 고유의 경험, 여성적 미학의 혈통을 이어온 것이라는 점에서 여성성을 대변하는 상징적 사물들이라 할 수 있다. 사회적 구조 속에서 구축된 여성의 위치와 경험의 종류는 남성의 것과는 다르기에 성별이 소재와 기법이라는 언어를 통해 작품 내부에 자연스럽게 전이되고 있는 것이다. 즉 “생물학적 구분이 아닌 사회적 성별 구조로부터의 차이가 남성과 여성이 무엇을 어떻게 그렸는지 결정”한다는 1) 그리젤다 폴록(Griselda Pollock)의 언급처럼 이은산의 작품 속에서도 사회적 성별로서의 ‘젠더’가 당대 여성의 삶과 닿아있는 소재와 기법들을 통해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1980년대 중엽에 들어서자 민중미술의 일환으로 ‘여성주의 미술’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면서 한국의 여성 미술사에 큰 변화가 일었다. 이들은 사회주의와 민족주의라는 민중미술의 이념을 공유하며 여성의 사회적 조건을 드러내고 비판하는 작업을 전개하였고, 자본주의의 산물인 모더니즘 미술과는 대척점에 섰다. 대표적인 예로 1988년에 발족한 ‘여성미술연구회’는 다양한 계층의 여성들이 일상과 노동의 삶 속에서 겪는 문제를 미술과 결부하여 다루고자 했다. 그러나 이은산의 작업은 페미니즘을 여성의 권익을 쟁취하기 위한 일종의 저항의 수단이자 전략으로 사용하는 이들 여성주의 미술과는 다른 지점에 있다는 점에서 독특한 위치를 점유한다. 페미니즘을 남성적 논리로 구축된 사회‧문화적 구조를 전복시키기 위한 전략으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여성적 소재와 기법을 활용하고 여성의 일상과 내면의 감정이라는 주제에 집중하는 이은산의 방식은 그의 작품세계가 자연스럽지만 견고한 여성적 영역을 이루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이 시기 이은산의 작업에도 변화가 일었다. 이전까지는 여성의 일상과 밀접하게 연관된 사물들을 활용해 여성의 정체성을 은유적으로 드러냈다면 1980년대 중반부터는 현대 여성의 삶, 일상에서 느끼는 감정들로 주제가 구체화되고 보다 직접적인 형태로 표현되기 시작한다. 이러한 변화는 여성 인물을 전면에 배치한 단순하고 과감한 구도, 강렬한 원색의 작품들로 표현되며 기법과 재료 또한 단색의 동판화에서 유화, 아크릴물감, 크레파스 등으로 바뀌어 원색의 대비가 강조된 경쾌하고 팝아트적 분위기로 변모하도록 했다. 예컨대 작품 <문양과 친근한 사람>(1984), <표정>(1986)에는 화려한 색채의 짙은 화장을 하고 모던한 의상을 입은 현대적 분위기의 여성이 등장하며 울거나 웃는 혹은 사색하는 표정이 강조되어 있다. 때로는 인물의 감정 표현에 집중하고자 바탕을 과감히 생략하고 문양이나 추상적 형태로 처리하여 옵아트적 효과를 주기도 한다. 이러한 표현은 타자로서 시선의 대상이 아닌 주체로서 여성의 감정 표현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특히 이 시기 작품들의 배경은 여성이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집’이나 ‘자연’, 몽환적 공간 등이 주를 이루는데, 이는 도시나 사회적 공간에서 벗어나 주변부에 놓인 여성의 위치를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짧은 원피스를 입고 유모차를 미는 여성과 강아지가 등장하는 작품 <우리집>(1986)에서도 이러한 풍경이 드러나 있다. 

1980년대 후반 이은산의 작품은 또 다시 변화의 국면을 맞이한다. 단독의 여성 인물을 중심에 두고 여성적 정체성 표현에 집중하던 것에서 나아가 한 인간의 삶과 정체성의 모색으로 주제가 확장되는 것이다. 작품들의 제목을 살펴보면 <나를 찾아서>(1989), <길을 걸어간다>(1989), <사랑하는 작은 풀들>(1992), <빛을 등지고 서있는 사람>(1994), <우리들의 얼굴>(1995) 등 인생의 고락, 자연이 주는 위로와 자연으로의 회귀 욕구 등 여성이라는 영역을 넘어 인간이 느끼는 다양한 심상이 중심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여성으로 국한되었던 인물의 형상도 가슴이나 성기, 체형, 의상, 색조화장 등 성별을 구분할 수 있는 상징적 요소들이 삭제된 젠더리스한 모습으로 변형되며, 개인이 아닌 여럿이 함께 그려지기도 한다. 배경 또한 여성의 일상적 공간들로 처리되는 비중이 확연히 줄어들며 바위, 갈대밭, 하늘, 강가와 같은 자연풍경이 대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평면이었던 작품 형태는 어린아이들을 위한 팝업북에 영감을 받아 주제부를 강조한 입체 형태로 변형되며 판화, 유화를 주로 사용하였던 것에서 두꺼운 판지나 아크릴 보드, 철판 위에 채색과 콜라주 가미하여 거대한 팝업북처럼 설치하는 형태로 열린 공간을 향해 확장된다.

1990년대 이후 여성의 사회활동이 폭증하는 세계적 흐름과 함께 한국에도 여성작가들이 화단을 주도하는 새로운 힘으로 성장하였다. 이에 따라 페미니즘 담론이 일반화되고 작품 속 여성 이미지의 사용 빈도나 그 시선의 스펙트럼 또한 넓어지게 되었다. 사진 콜라주, 만화, 텍스트 등 다양한 매체가 활용되며 다원주의, 성의 상품화와 같은 후기자본주의 시대의 여성문제를 비판적으로 드러낸 작품들도 등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흐름과는 별개로 1996부터 공백기를 가진 이은산은 2000년대 들어 자연의 풍경으로 확장된 새로운 작업들을 선보이고 있다. 작품 <바람 부는 오후>(2016)에서 파스텔로 문지른 듯 부드러운 촉각을 환기하는 갈대밭의 풍경은 자연을 통해 스스로에게, 그리고 관람자에게 치유와 회복을 전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와 자전적 체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2016년에 열린 전시 《관념으로부터의 자유》의 전시명에서도 알 수 있듯 그의 작업은 더 이상 테크닉이나 형식적 문제, 하나의 주제 의식에 얽매이기보다 작가 자신의 내적 탐구와 표현이라는 본질적 영역에 더 관심을 쏟는다.    

이처럼 이은산의 자전적 체험은 그의 작품세계 전체를 관통하는 주요 소재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 체험은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지닌 자신의 것이기에 그의 작품 또한 동시대를 살아가는 현대 여성의 삶을 이야기하는 것일 수밖에 없게 된다. 주지할 것은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의 이미지가 긴 세월 확고하게 자리잡아온 한국 사회에서의 여성의 위치, 즉 출산과 가사를 숭고한 희생으로 미화한 부계적 모성신화나 가부장적 전통 위에 만들어진 여인상의 계보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이다. 그의 작품 속 여성상은 근대화 시기 새로운 여성 정체성의 모색이라는 과제 앞에 고민하는 현대 여성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한 명의 여성작가로서 자신만의 조형언어에 집중해온 이은산의 작업은 긴 시간 고정되었던 남성적 시선을 여성들만이 공유하는 경험으로 옮겨놓았고, 풍성한 여성 미술사의 여정을 시작하는 밑거름을 제공했다고 할 수 있다. 



윤아영(1986~), 이화여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 전 대림미술관 A.C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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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Griselda Pollock, “Women, Art and Ideology : Questions for Feminist Art Historians,” Woman’s Art Journal, Spring/Summer 1983, p. 40을 윤난지, 『한국현대미술의 정체』, 한길사, 2018, p. 486에서 재인용 




이은산, <보자기>, 1981, 헝겊, 100×80.3cm, 자료제공: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예술기록원(舊 국립예술자료원)




이은산, <문양과 친근한 사람>, 1984, 캔버스에 유채, 헝겊 콜라주, 90×70cm




이은산, <우리집>, 1986, 유채, 780×200cm




이은산, <빛을 등지고 서있는 사람>, 1994, 아크릴 보드에 유채, 40×90×170cm




이은산, <바람 부는 오후>, 2016, 아크릴 보드에 색연필, 120×18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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