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서울아트가이드 디.에디션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흐르는 땅, 태백 / 검은 땅과 흰 꽃, 순환하는 자연과 이행하는 의미들

고충환



태백에는 검은 물이 흐른다. 아마도 <흐르는 땅, 태백>이란 주제는 검은 물이 맑은 물이 돼 흐르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고 있을 것이다. 죽은 물이 흘러가고 산 물이 흘러오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을 것이다. 죽임의 시대가 가고 살림의 시대가 오기를 바라는 소망을 담고 있을 것이다. 이처럼 흐르는 땅은 그 의미가 다중적이다. 

태백의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그리고 생태학적이고 지정학적인 위치가 땅의 의미를 다중적으로 흐르게 하는 것. 태백은 탄광촌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한때 석탄산업의 요충지였던 태백은 현재 탄광산업의 사양화로 인해 주민들이 떠나고 없는, 텅 빈 마을이 되었다. 1970,80년대 산업현장의 최전선을 지키며 경제발전을 견인해오다가 최근 산업구조가 재편되면서 사양길에 접어든 탄광촌마을에 언젠가부터 하나둘 예술가들이 모여들면서 죽음의 도시가 살림의 도시로 바뀌기 시작했다. 예술의 공공성 실천과 관련한 도시재생프로젝트며 공공미술프로젝트에 바탕을 둔 커뮤니티아트 탓이 크다. 


이런 태백의 지정학적 위치며 장소특정성에 부합하는 경우가 진주영의 숨이다. 나무가 있는 숲 같기도 하고, 신체 내부의 단면 같기도 하고, 폐부 깊숙한 곳에 똬리를 틀고 있는 꽈리 같기도 한, 온통 시커먼 탄가루를 덮어쓴 그림이다. 탄가루를 뒤집어쓴, 검게 변한 꽃이 침묵으로서 증언해주듯 숨쉬기조차 어려운 상황을 표현한 것일 터이다. 

그 현실은 도시로 치자면 재개발현장에 연동된다(전은희). 문패며 우편함, 낡고 해진 벽면이며 녹 쓴 철문에서 시간의 질감이 감촉되고, 부재하는 사람들이며 사물들을 보듬었을 골목길의 추억을 불러일으킨다. 황학동에 가면 이런 부재하는 것들이며 부재하는 시간을 만날 수 있다(김기태). 황학동에는 시간이 흐르지 않고 고인다. 작가는 황학동 골동품 가게에서 언젠가 1900년대 사진을 뭉텅이로 얻는다. 무명의 사진가가 찍은 익명의 사진들이다. 

롤랑 바르트는 사진의 본질이 죽음이라고 했다. 현실을 증언함에도, 정작 현실을 붙잡을 수는 없는, 사진의 아이러니를 의미할 것이다. 이처럼 그 자체로는 비가시적인 형태와 경우들로 존재하는 것들이며, 마치 과거의 한 순간 멈춰선, 그리고 그렇게 박제가 된 시간 앞에 서있는 것 같은 알 수 없는 그리움을 자아낸다. 그리고 이호영의 작업이 이런 부재하는 시간으로 존재하는 역사적인, 존재론적인, 생태학적인 의미론적 단층을 매개로 문명사적 비전을 열어 놓는다.  


태백의 의미는 현실비판적인, 존재론적인, 그리고 생태학적인 쪽으로 흐른다. 먼저 현실비판의 경우를 생각하면 아무래도 세월호를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다. 김은영의 사랑초 이야기, 반경란의 물에 잠긴 바벨탑, 이영하의 물속에 서 있는 사람들, 그리고 서로 물고 뜯는 조원득의 그림이 그렇다.  사랑초의 꽃말은 절대로 당신을 버리지 않겠다, 이다. 이 꽃말을 작가는 절대로 당신을 잊지 않겠다, 로 바꿔놓는다. 구원과 소망을 상징하는 손이 물에 잠긴 바벨탑을 재건할 수 있을까 묻게 하고, 물속에 서성이는 사람들이 상실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암울한 초상을 떠올리게 한다. 특히 조원득의 작업은 지리멸렬한, 묻다, 하루살이, 닫힌 막힌 갇힌, 폭력적 만장일치라는, 제목만으로도 현실비판을 겨냥하고 있음을 알겠다. 여기서 묻다, 는 도대체 이해불능의 사태를 묻는다는 의미고, 그렇게 물어오는 사람들을 묻는다는 이중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 의미는 현실비판에서 존재론적 비판에 이르고, 동물적 차원으로 전락한 인간성 상실의 현실 앞에 서게 만든다.  


존재론적인 작업은 자기반성적인 작업이다. 대개는 사사로운 자의식의 차원에서 시작하지만, 그 자체가 개인의 층위를 넘어 존재론적인 공통분모 쪽으로 연동되고 연대되는 작업들이다. 김선영의 닫힌 방, 김은아의 고양이를 매개로 한 위장과 관계형성 문제, 성연웅의 배를 타고 표류하는 사람들, 이남주의 꿈꾸는 물고기, 그리고 이서현의 돌연변이가 그렇다. 

나의 자리를 묻는 김선영의 작업에서 인간은 어쩌면 이중적이고 양가적인 존재며 경계 위의 존재일 수 있다. 여기서 주체는 페르소나와 아이덴티티로 분열되는데, 페르소나가 사회에 내어준 주체며 제도적 주체라고 한다면, 아이덴티티는 그 제도적 주체 뒤에 숨는 진정한 자기를 의미한다. 자기분열, 막막함, 불안함 등의 불확실성과 일종의 경계인의식에 의해 추동되고 견인되는 그림들이다. 

그리고 배를 타고 표류하는 사람은 아마도 삶의, 존재의 전형적인 메타포에 해당할 것이다. 그런가하면 그림에서 보는 것과 같은, 세상을 유영하는 물고기는 정작 물을 떠나서는 살 수가 없다. 그래서 꿈이고, 그 꿈은 아이러니에 연동된다. 그런가하면 일종의 혼성에 바탕을 둔 돌연변이는 불안과 두려움과 같은 심리적 계기에 의해 추동된다. 그리고 불안과 두려움은 프로이트의 언캐니에 연동된다. 언캐니는 친근한 것이 문득 낯설어질 때 온다. 그러므로 친근한 것은 이미 그 속에 낯선 것을 가능성의 형태로 품고 있고, 그 낯선 것이 표출될 때 불안을 일으키고 두려움을 자아내는 것. 그리고 존재론적인 자의식은 현대인의 초상(조한진의 핸드폰 중독)으로 일상성(이한조)을 조망하는 것으로 확대 재생산된다. 

그리고 생태학 쪽으로 치자면 단연 자연을 매개로 한 생명예찬의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남송녀, 김동영, 김소연, 김진선, 황보경, 원애경, 이금희, 이영화, 한선희, 홍승희). 이런 자연소재 작업들은 석탄산이 진풍경을 이루는 땅, 그 땅 위로 탄천이 흐르는 곳과 같은, 정작 자연이 죽은 태백이어서 더 각별하고 남다른 의미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을 나투라와 피직스로 구분했는데, 피직스가 자연의 물리적 현상이라고 한다면, 나투라는 그 물리적 자연을 가능하게 해주는 원인이며 운동성을 의미한다. 물리적 현상으로 치자면 재현의 논리에 의해 뒷받침되겠고, 원인이며 운동성의 경우에는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순환논리가 되겠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개 작가들의 작업은 이 두 경우의 경계를 넘나드는데, 곰브리치 식으론 재현충동과 표현충동이 하나의 화면 속에서 상호작용하면서 서로 견인하는 경우로 보면 되겠다. 말하자면 다만 재현적이기만 한 그림도 없고, 오로지 표현적인 그림도 없다. 모든 그림들은 자연의 물리적 현상을 매개로 자연의 순리를, 에너지를, 기를 표현한 것이다. 그렇게 주와 객이 합치되는 타협의 산물인 것이다. 이 타협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결국 존재의 원인이랄 수 있는 생명을 잉태하고 표상하기 위한 것이다. 여기서 생명은 그저 살아있는 존재의 당연한 조건으로서보다는 자연을 자연의 원래 자리로, 존재를 존재의 처음 자리로 되돌려 놓는 계기를 의미한다. 하이데거라면 존재의 존재다움이 실현되는 장이라고 했을, 그런 궁극의 자리로 원 위치시키는 행위를 의미한다. 말하자면 모든 존재가 원래자리로, 처음자리로 되돌아가는 것이 생명이다. 자연을 소재로 한 일련의 작업들은 바로 그 생명을 표상한다. 


이외에도 김지영의 기도하는 소녀가, 서유정의 콜라주 된 이미지가, 장동환의 칼리그래프가, 그리고 장윤정의 떠 있는 돌이며 부유하는 돌이 주목된다. 특히 서유정의 콜라주 된 이미지는 일종의 브리콜라주로 나타나고, 브리콜레르에 추동된다. 원래 잡다한 것들을 도구화하는 능력을 의미하는 브리콜레르는 상호간 이질적인 것들의 무분별한 집합을 의미하는 것으로 진화했다. 서로 무관계한 것들을 합치해 제3의 의미를 겨냥한 것이란 점에서 초현실주의의 사물의 전치에 연동되고, 이미지의 생산보다는 이미지의 소비에 연동된다. 여기서 이미지의 소비는 동시대 이미지의 존재방식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서, 이미지의 의미가 생산될 때보다는 소비될 때 결정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 이면에는 저자의 죽음논의와 화용론이 깔려있다. 의미란 실제로 말이 발화되는 지점에서 결정되며, 그 결정은 그 발화지점에 연동된다고 보는 것이다. 모든 것은 텍스트 안에서의 일이며, 텍스트 밖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롤랑 바르트의, 자크 데리다의 입장이 이해에 도움이 되겠다. 그리고 그렇게 의식의 흐름기법이며, 후기모더니즘의 하이퍼텍스트에도 연동되는 브리콜라주와 브리콜레르는 경계가 무너지고 형식을 넘나드는 최근 작업 경향의 새로운 동력이며 계기를 예시해주고 있다.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