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age courtesy of Royal Academy of ArtsSummer Exhibition 2012 Lecture Room Installation / Photograph © John Bodkin
멤버십을 통해 미술 본연의 가치를 지켜온 왕립 미술 아카데미
런던 중심가 피카딜리 서커스와 그린파크 사이, 많은 웅장한 건축물들 중에서도 특히 눈에 띄는 벌링턴 하우스(Burlington House)는 영국이 자랑하는 왕립 미술 아카데미(Royal Academy of Arts)가 자리한 곳이다. 매체 면에서는 회화, 조각, 판화, 건축 등 다양한 전통 예술 장르, 역사 면에서는 고대부터 현재까지를 광범위하게 아우르는 전시 프로그램을 선보이는 기관인 이곳은, 1786년 창립되어 200년이 훨씬 넘는 역사를 통해 영국 미술계를 대표하는 이름으로 그 명성을 쌓아 왔다.
유럽의 미술 아카데미가 보통 그렇듯이, 영국 왕립 미술 아카데미도 전통적으로 보수적인 미적 취향과 예술 엘리트 중심의 멤버십으로 인해, 대중적 취향이나 미술계의 현실적인 동향과는 다소 소원한 관계를 맺어온 것이 사실이다. 내셔널 갤러리나 테이트 같은 미술관들이 공공 기관으로서 영국의 국립 미술 컬렉션을 소장, 관리하고, 폭넓은 대중을 겨냥한 운영 철학을 강조해 온 것과는 달리, 왕립 미술 아카데미는 창립부터 현재까지 일관되게 엘리트 미술가들 및 건축가들에 의해 운영되면서 독립 기관으로서의 위상과 역할을 존중해 왔다. 그렇다고 해서 아카데미의 대중적 영향력이나 그 프로그램의 인지도가 낮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순수하게 미술의 독립적 가치와 예술적 이슈들에 집중함으로써, 아카데미의 전시 및 컬렉션은 대다수 미술 애호가들로부터 미술 본연의 가치에 대한 모델로 여겨지곤 한다. 공공 기금에 전폭적으로 의존하는 미술관들과는 달리 정치적 환경이나 대중주의적 압력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다는 점은, 아카데미가 독립 기관이라는 기본적 조건과 무관하지 않다. 반면 상류층 중심의 엘리트주의를 옹호하고 실험적이고 미래지향적인 미술을 포용하지 못한다는 비판은, 왕립 미술 아카데미의 균형 유지가 얼마나 쉽지 않은 과제인지를 가늠하게 한다.
영국 미술과 건축의 수준을 세계 최고의 수준으로 육성하기 위해 설립된 기관답게, 18세기 말부터 두 세기를 넘는 아카데미의 역사는 줄곧 최고 수준의 예술가 멤버십을 유지하고 있다. 초대 수장을 역임한 조슈아 레이놀즈 경(Sir Joshua Reynolds)은 당시 영국 회화를 대표하는 화가였을 뿐 아니라, 아카데미를 통한 예술의 진흥과 예술가의 육성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었다. 동료 화가 게인스버러(Gainsborough)와 함께 미술가 협회에서 활동하던 중 왕립 미술 아카데미의 필요성을 실감한 그는 당시 영국 국왕이었던 조지 3세 왕의 후원에 힘입어 아카데미 창설을 실현시켰다. 귀족 및 왕실의 초상화가로 큰 명성을 유지한 화가답게 그의 사회적 영향력은 상당한 수준이었고, 아카데미는 당대의 주요 미술가들과 건축가들로 이루어진 멤버십을 통해 조직의 기반을 탄탄히 성립시킬 수 있었다. 동시대 작가들이었던 라파엘 전파(Pre-Raphaelite Brotherhood) 화가들 및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 등으로부터는 지지를 얻지 못했지만, 터너(Joseph Mallord William Turner)와 같은 많은 작가들이 레이놀즈 경의 역할을 높게 인정하였고, 아카데미의 활동을 지원하였다. 왕립 미술 아카데미 입구 중앙 마당에 자리잡은 그의 동상은 여전히 아카데미의 역사를 대표하는 그의 위상을 환기시킨다.
왕립 미술 아카데미의 핵심 프로그램 <여름 전시>
왕립 미술 아카데미의 많은 전시 프로그램 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것은 해마다 열리는 <여름 전시(Summer Exhibition)>를 꼽을 수 있다. 일종의 공모전으로서 누구나 지원할 수 있는 이 전시는, 공개적으로 신청된 많은 지원 작품들을 아카데미 회원을 중심으로 한 선정 커미티가 심사하고 최종적으로 선정된 작품들을 전시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아카데미 창립 직후인 1769년부터 오늘날까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열린 <여름 전시>는 뛰어난 미술가들의 작품을 대중적으로 공개하는 자리를 마련함과 동시에, 이를 통한 수익금으로 아카데미 미술 학교 활동을 후원하기 위해 마련되었다. 미래의 미술가들을 위한 투자라는 기치를 지닌 전시이면서 또한 많은 무명 미술가들의 데뷔 무대가 되기도 하는 전시라는 점에서 영국 미술계에서 <여름 전시>가 지닌 의미는 특히 각별하다. 해마다 약 1200여점의 작품을 선보이는 대규모 전시인 <여름 전시>는 공모를 통해 선발된 작품들뿐만 아니라 아카데미 회원인 유명 작가들의 작품 또한 함께 전시함으로써, 전시를 찾는 관객들에게 다양한 층의 작품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미술적 명성과 대중적 명성을 동시에 누리고 있는 동시대 영국 작가들인 아니쉬 카푸어(Anish Kapoor), 트레이시 에민(Tracey Emin), 안토니 곰리(Anthony Gormley) 등이 아카데미 회원의 자격으로 참여하고, 때로는 제프 쿤스(Jeff Koons) 같은 국제적인 외국 작가의 작품도 접할 수 있는 <여름 전시>는 무명 작가들에게도 이들과 어깨를 맞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장이 된다.
왕립 미술 아카데미가 운영하는 미술학교
<여름 전시>에 선보이는 작품들은 대부분 구입이 가능하며, 왕립 미술 아카데미는 작품 판매의 수익금 상당 부분을 산하의 미술 학교와 학생들을 위해 사용한다. 아카데미의 설립 당시부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온 미술 학교는 아카데미 회원들로 이루어진 교수진으로부터 직접 교육 받는다는 이점으로 인해 역사적으로 영국 미술 교육 분야에서 각별한 위상을 지녀왔다. 영국의 대학원 과정이 보통 1년인 데 반해, 유일하게 3년의 미술 실기 대학원 과정을 운영하는 곳인 이곳은 학생들로부터 수업료를 받지 않고 많은 장학 혜택을 부여함으로써, 영국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모여드는 지원자들로 인해 높은 입학 경쟁률을 자랑한다. 개념주의적이고 실험적인 미술 경향이 현대 미술의 중심을 차지해 온 지난 20여년 동안 아카데미 미술 학교의 지위가 상대적으로 약해지기는 했지만, 회화, 판화, 조각, 건축 등의 분야에서 실질적인 창작 기법과 장인정신을 강조함으로써, 여전히 예술가의 손과 창작 과정 자체를 중시하는 아카데미의 전통적 철학을 고수하고 있는 것이다.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킨 <센세이션> 전시회
1997년 영국 현대미술 컬렉터 찰스 사치(Charles Saatchi)의 소장품들로 이루어진 <센세이션(Sensation)>전이 왕립 미술 아카데미에서 개최된 것은 여러모로 놀랄만한 사건이었다. 우선 전통과 보수적 취향을 자랑하는 아카데미에서 충격적인 주제를 다루는 젊은 미술가들의 전시가 열렸다는 점 자체가 아카데미 회원들의 큰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영국 화단의 보수 세력을 대표하는 회원들에게 있어 데미언 허스트(Damien Hirst)의 죽은 상어, 체프먼 형제의 벌거벗은 어린이 마네킹, 트레이시 에민이 함께 잔 사람들의 명단이 적힌 텐트 등은, 존엄한 아카데미 전시장에 걸맞지 않을뿐더러, 미술 작품으로서의 위상조차 의심해 볼 만한 대상들이었기 때문이다. 기존 관객들에게도, <센세이션>의 개최는 ‘한 발 너무 나아간’ 행동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일부 아카데미 회원의 탈퇴, 고정 관객들의 보이콧, 유아 살해범의 초상화에 가해진 계란 공세 등이 언론의 집중적인 관심을 모으면서, 전시의 관람객수는 예상을 뛰어넘는 수준을 기록했다. 아카데미 자체로서는 새로운 관객층을 확보하는 계기가 된 이 전시는 한편으로 ‘영국 청년 미술가(YBA)’라는 브랜드가 확고히 자리잡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왕립 미술 아카데미의 새로운 도약, '벌링턴 프로젝트'
2012년 가을, 아카데미는 회원들로부터 기증받은 작품들의 전시와 경매를 통해 야심적인 ‘벌링턴 프로젝트(Burlington Project)’를 대중적으로 론칭했다. 아카데미 회원이자 영국을 대표하는 현대 건축가 중 하나인 데이비드 카퍼필드 경이 주도하는 이 프로젝트는, 아카데미 바로 뒷편, 지난 수 년 간 현대 미술 갤러리 등으로 사용되면서 인지도를 높여온 벌링턴 가든 공간을 아카데미 자체가 수용하게 되는 확장 계획이다. 현재는 연결되어 있지 않은 두 공간을 건축적으로 연결하고, 미술학교 및 전시 공간, 여가 공간 등을 향상시킬 이 계획은, 영국 복권 기금의 첫 단계 후원금을 확보하면서 순조로운 출발을 보여주고 있다. 확장된 공간을 통해 ‘독립적인 목소리’를 중시하며 순수한 미적 가치를 추구해온 왕립 미술 아카데미가 21세기의 문화적, 사회적 환경과 어떤 관계를 맺어 갈 지 기대해 본다.
인용날짜 : 2016.03.14
필자: 테이트 모던 아시아 태평양 리서치 센터/ 큐레이터 이숙경
이숙경은 홍익대학교 예술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학예연구사로 재직 중이던 이숙경은 1996년 런던 시티대학 예술비평 석사과정에 입학하여 석사 과정을 마쳤고 이후 에섹스 대학교에서 미술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영국 내 다양한 예술 기관에서 근무하다가 2007년 말 테이트리버풀로 옮겨 큐레이터이자 테이트 미술관의 아시아-태평양 소장품 구입위원회에서 근무하였고 현재는 테이트 모던 아시아 태평양 리서치 센터에 큐레이터로 근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