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카탈로그 서문〕심봉섭 회고전 (1편) / ‘대칭 속 비대칭’과 ‘결’의 추상미학

김성호

〔카탈로그 서문〕

심봉섭 작가론

 

‘대칭 속 비대칭’과 ‘결’의 추상미학 (1편)

 

 

 

 

김성호(미술평론가)

 

 

 

I. 추상의 밀물을 마중 나간 비추상의 청년 시대 (1956-1967)

조각가 고() 심봉섭[1]은 해방 이후 ‘국내 미술대학을 통해 배출된 추상조각’의 일세대 작가이다. 그는 한국전쟁 이후 한국 조각계가 서서히 추상의 시대에 들어서기 시작한 1950년대 중반에 조각의 수련기를 마쳤던 까닭에 작가 입문의 시절부터 추상미술의 다양한 실험들을 몸소 체득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청년 조각기를 결론부터 말하면 이러한 추상의 전개 속에서 추상의 정신을 어떻게 구상조각에 담아낼 수 있을까를 고민하던 시기, 즉 ‘비()추상의 조각기’[2]라 할 수 있겠다.

고인이 1955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각과를 졸업한 당시에는 인체를 소재로 한 구상조각이 그 동안 관행처럼 굳어져있던 조각계에 추상의 바람이 서서히 일고 있던 시기였다. 특히 1950년대 초부터 조각계에 ‘자연주의적 추상’의 토양을 일궈나간 한국추상조각의 개척자 우성(又誠) 김종영(金鐘瑛 1915-1982) 교수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았던 만큼, 그의 초기 작업은 구상임에도 추상의 정신을 효율적으로 담아내기 위해 재료를 지나치게 다듬지 않으면서도 그것의 물성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방식을 추구하였다. 그것은 1950년대 후반 한국의 서양화단에 불어 닥친 추상표현주의 류의 '집단적 앵포르멜 운동'[3]과는 기조를 달리 한 추상정신으로, 그가 이후에 추상조각을 펼쳐나가기 위한 계기를 마련한다.

당시 서양화단의 청년작가들은 ‘유럽의 미술사조와 새로운 재료의 도입’[4]과 같은 요인에 힘입어 추상언어를 전개해나가기 시작했다. 특히 이들은 한국전쟁 이후의 혼란한 정치시국으로부터 억눌렸던 예술가적 고뇌와 자유에 대한 표현 욕구를, 획일적 미술을 양산하는 국전에 반대하는 집단적 추상운동으로 표출하기 시작했다. 그런 점에서, 이들의 조형언어는 형식상으로 대상과 주체가 감정이입하는 자유로운 표현의지에 기반한 서구의 추상표현주의를 계승하고 있었음에도, 이들의 조형 태도는 다분히 사회정치적인 차원에서 유발된 점이 없지 않다.

이와 달리, 서양화단보다는 조금 늦게, 50년대 후반, 60년대 초반에야 비로소 추상미술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한국조각계는 사회정치적 측면보다는 예술미학의 심각한 자기반성에 집중하는 경향을 드러내었다. 심봉섭의 스승이었던 김종영은 동경미술학교 졸업후 서울대 미대에 교수로 재직(1948-1980)하면서부터 자신이 일본에서 받았던 아카데믹한 인체 조각 중심의 도제적 교육을 한국조각계에서 타파할 필요성을 절감한다. 더욱이 런던에서 열렸던 ‘정치인을 위한 모뉴멘트 국제전’에 참여한 경험[5]을 통해서, 한국조각계에 1950년대까지 만연해오던 고루한 관성을 깨치고자 하였다. 바로 그 모색지점에 추상의 예술정신이 있었다.

심봉섭은 이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았다. 김종영의 자연주의적 추상은 심봉섭에게 이어진다. 다만, 김종영의 조형언어가 서울대 교수 시절 구상으로부터 추상으로 완전히 이동했다면, 심봉섭은 1955년 서울대 졸업후 60년대 중후반까지는 김종영의 자연주의적 추상의 정신을 이어받은 채 구상 조각에 관심을 기울인 것으로 보인다. 즉 졸업이후 1955년부터 1967년까지의 그의 작업 세계는 형상은 구상이지만 추상의 정신을 입고 있는 작업이 다수를 이룬다. 물론 이 시기에도 추상 조형을 탐구하는 작업들이 간헐적으로 드러나기도 하지만, 이 모든 작품들은 김종영의 불각의 추상정신을 계승한 구상조각의 연장선상 안에서 형성된 것들이었다. 예를 들면 쌀알이나 화초와 같은 식물 이미지, 초방(初枋)[6] 기법을 형상화한 한국 전통건축 이미지, 능묘(陵墓)조각과 같은 전통조각 이미지들을 추상화한 작업들은 구상적 이미지로부터 출현한 것이었다.

이처럼 그의 청년시대의 초기 작업은 주로 재료를 대면하는 매우 간결한 간섭 방식을 통해서 인물의 두상이나 흉상에 천착하던 구상조각이었다. 때로는 부조와 환조를 오고가고, 때로는 인체와 대상이 뒤섞이고, 때로는 개별인물이 군상과 조우하는 식의 양자의 경계 사이를 지속적으로 횡단하면서 이러한 중용(中庸)과 중화(中和)를 실천하는 미학은 분명코 그의 스승인 김종영이 자연과 인공 사이의 경계에서 실현한 ‘불각(不刻)의 미()’를 계승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심봉섭의 청년기의 작품 세계는 당시 함께 활동했던 그의 동문 송영수(宋榮洙, 1930-1970)와는 확연히 다른 지점이었다. 송영수가 앵포르멜 류의 추상정신을 1950년대 도입된 용접 기법을 통해서 조각에서 실현한 추상 철조각의 선구자이자 아방가디스트(avant-gardiste)로 자리매김했다면, 심봉섭은 다양한 재료들을 통해서[7] 김종영의 자연주의적 추상정신을 자신의 중화의 조형언어를 통해서 구상조각 안에서 실험하고 성찰했던 온건주의자였다. 따라서 심봉섭이 1968년 이후 시도한 본격적인 추상조각으로의 변모는 진중한 성찰의 시간들을 거친 자연스러운 발로(發露)의 결과였다.

 







 

 

 

II. 지역에서 중앙을 일구며 마무리한 추상의 시대 (1968-2001)

심봉섭이 비교적 한국추상조각의 초기에 조각의 수련기를 거쳤음에도 추상조각에 전면적으로 뛰어든 때가 추상조각이 본격화된 1960년대, 그것도 거의 후반이었던 것을 상기하면 그의 추상의 개시는 당시 추상미술을 선보인 1950년대 중후반 조각계의 흐름에서 뒤늦은 감이 없지 않다. 이런 사실은 한편으로 그의 추상조각이 시류에 편승하지 않은 자기성찰과 미학적 반성으로부터 성취한 결과물임을 유추케 한다.

심봉섭은 오랜 추상 학습의 시간을 거친 후 불혹의 나이에 근접해서 본격적인 추상작품을 선보인다. 주목할 지점은 앞서도 송영수와 비교해서 언급했듯이, 1950년대 후반 서양화단의 앵포르멜[8] 류의 추상의 영향을 받은 1950년대 후반-1960년대 초반의 청년조각계의 추상조각의 움직임과 그의 조각세계는 일정부분 그 궤를 달리한다는 것이다. 즉 심봉섭의 추상조각은 일정부분 곤잘레스(Julio Gonzalez, 1876-1942) 류의 앵포르멜 추상조각을 거쳐 서서히 브랑쿠시(Constantin Brancusi,1876-1957) 류의 구조적 환원주의 추상으로 정착해 나갔던 당시의 여러 조각가들[9]의 흐름과는 분명히 다른 궤를 지니고 있다.

그의 추상조각이 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는 점에서, 그의 작품세계는 60년대 홍대파와 서울대파(일명 미대파)[10]의 대립과 교류의 상황들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형성한다. 특히 두 대학 출신의 결합으로 형성된 원형회(原形會, 1963-66)와 서울대 미대 조소과 출신으로 형성된 낙우회((駱友會, 1963-현재)와 같은 그룹 운동으로부터 살찌워진 당시 조각계의 상황들은 그의 작품 세계의 지평을 확장하게 만든다. 최초의 여류추상조각가였던 김정숙(金貞淑 1917~1991)은 물론 김찬식(1926-1997), 최만린(1935- ), 이운식(1937- ) 그리고 김영중(1926-2005) 등의 작품들과 심봉섭이 일정부분 공통의 조형언어를 구사하고 있었던 시대를 상기한다면, 그들의 교류와 영향 관계를 충분히 유추할 수 있는 정도이다.

그러나 정작 그의 추상조각이 긴밀하게 영향을 주고받은 지점은, 중앙으로 대변되는 이들 두 학교 출신들의 교류활동에 대한 영향 보다는 좀 더 다른 곳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심봉섭의 연혁을 살펴보면, 그는 1955년 서울대 졸업 이후 부산으로 내려와 부산사범대학 미술과 강사(1956-57), 부산공업고등학교 교사(1958-64)를 두루 거친다. 또한 부산공업전문학교 교수(1964~1974)로 재직 시에는 부산한성여대, 동아대 문리대, 부산여대 등에서 미술과 강사를 겸임하기조차 한다. 이후 부산상업고등학교, 부산공예고등학교 석공예 주무교사, 부산교육대학 미술과 교수에 이르기까지[11] 그는 줄곧 부산에 머물렀다.

그런 만큼, 당시 중앙과의 교류는 끊이지 않았음에도[12], 대학 졸업 후 그의 작품 세계는 언제나 부산의 교육현장과 맞물려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처럼 왕래가 편리하지 않았던 60년대를 상기한다면, 그의 작품세계 교류는 부산을 근거로 한 지역의 동료와 제자들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전개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는 첫 개인전을 1962년 부산에서 가졌을 뿐 아니라, 다수의 작품활동을 부산을 통해서 펼쳐나갔다. 특히 그는 1968년 그의 제자들을 포함하여 홍대 및 서울대 출신 작가들로 구성된 조각모임인 ‘공간회’[13]을 발족시켜 20여 년간 회장직을 수행했다. 그는 작고하기까지 공간회를 타 지역과의 교류전 등을 통해 외연을 확장시키면서 부산지역의 역량 있는 작가들의 모임으로 괄목하게 성장시켰다.

그런 의미에서, 비단 중견의 시대뿐만 아니라 그가 부산교육대학을 정년으로 은퇴하고, 2001년 작고한 원로의 시기까지, 그의 50여년에 이르는 조각 인생은 서울보다는 부산에서 뿌리를 내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는 결국 ‘부산지역의 주요한 업적을 남긴 작가로 평가받기에’[14] 충분함은 물론이고, ‘부산이라는 지역’에 자리 잡은 채 그곳에서 ‘서울 부럽지 않은 중앙’을 일궈낸 작가임에 틀림없다 할 것이다.

 


 

 

 


 


 

 

 

 

III. 대칭 속 비대칭의 공간

앞서도 언급했듯이, 그가 본격적으로 뛰어든 추상조각의 조형언어는 구상적 조형언어로부터 출발해서 귀결된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그가 남긴 ‘공간(空間)’이라는 제목의 다름과 같은 작업노트에서 여실히 확인해낼 수 있다.

“공간적인 것의 대소를 막론하고, 이 공간을 점령 아니하는 것은 없다. 그러나 그것이 조각작품일 것 같으면 (중략) 한 실내에서 좌우공간을 지배하여야 할 것이다. / 이 공간을 지배하지 못하는 작품은 약하여 볼 수 없다. 한쪽 팔만 전체의 형태에서 돌출하면 그 조각의 공간량은 약하다. 그것은 조각 전체가 가지는 공간을 돌출된 팔 때문에 일부분이 파괴되어 형태가 정리되지 않고 공간량이 거기서 산란하여 진다. 한 팔을 올린다면 그 팔로서 만들어지는 공간을 조화되는 다른 공간으로서 만들어지지 않으면 아니 된다.[15]

우리는 여기서 그가 인체의 형상을 예로 들면서 설명하고 있는 구상으로부터 근원한 그의 추상조각의 언어라는 것이 시메트리(symmetry)와 에이시메트리(asymmetry), 즉 대칭과 비대칭으로 정리되고 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 즉 그의 작업노트에서 ‘조화되는 다른 공간’이란 이렇게 해석된다. 조각이 공간을 효율적으로 점유하기 위해서는 비대칭적 양상이 극대화되는 것을 지양하고 대칭에 기초해야 되지만, 그 ‘비대칭/대칭’이라는 것에 또 다른 조화의 공간을 효율적으로 창출하는 비대칭적 개입이 절실하다는 풀이가 가능해진다.

심봉섭의 ‘조각이 창출하는 공간’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물론 그의 스승인 김종영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다. 김종영은 자신의 작업세계를 회고하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긴 바 있다.

“나의 작품의 유기적인 구조와 더욱 효과적인 입체를 위해서 대칭(Symmetry)를 깨뜨리기에 힘쓴다. 대칭은 작품을 평면화시키고 운동성과 입체의 생기를 읽게 한다. 생명의 동적인 상태는 항상 비대칭성(Asymmetry)이다. [16]

김종영의 이러한 예술관은 근대 미학자 고유섭(高裕燮, 1905-1944)이 정의한 ‘비정형성, 비균제성, 무기교의 기교’[17] 라는 한국미술의 특성과 예술가치를 계승한 것이다. 여기서 비균제성(非均齊性)은 비대칭성을 의미함과 동시에 ‘완성의 정도가 초월된 상태의 표현’을 의미한다. 김종영이 유위(有爲), 즉 인위적 기교가 없는 무위(無爲)를 지향하면서도 예술의 지평을 넓히는 비대칭적 ‘불각(不刻)의 미’[18]를 강조한 바와 상통한다고 할 것이다.

 

 

 

 

 



 

김종영이 그러하듯이, 심봉섭도 무위의 자연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그 추상정신을 극대화시키는 ‘비대칭적 조화의 공간’을 강조한다.[19] 심봉섭은, 언제나 음과 양이 맞물리지만, 어느 하나 대칭적인 대립을 형성하지 않는 음양조화의 동양의 자연관을 자신의 작품세계에 실현하고자 노력했다. 동양의 자연관이 그러하듯이 그의 조각의 추상적 정신성은 언제나 비대칭적 조화의 공간으로부터 창출된다.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주요한 것은, 심봉섭이 이러한 ‘비대칭적 조화’라는 것을 ‘대칭이 근간이 된 상태에서 형성되는 미묘한 울림’으로 간주한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면, 그 형상의 구체성을 알 수 없는 추상조각은, 바위나 자연목처럼 보이는 자연물, 콩깍지와 같은 열매를 유추케 하는 식물, 혹은 작은 생물의 알집, 신체의 내부 기관들 같은 대칭적이면서도 비대칭적인 유기 생명체들의 이미지를 닮아있다. 더욱이 꿈틀꿈틀 알을 깨고 나오려는듯한 모태 속 생명 이미지, 혹은 딱정벌레 같은 곤충이나 애벌레 혹은 그것의 번데기, 전갈과 같은 이미지들은 좌우대칭형의 생물체 형상으로부터 출발하고 있음에도 미묘하게 그것의 비대칭적인 양상을 동시에 드러낸다. 그 뿐인가? 고개가 삐딱하게 한쪽 방향으로 치우친 원형질 혹은 항아리 형상, 비틀어진 철판처럼 휘감긴 형상, 퍼즐을 위태롭게 쌓아올린 채 한쪽으로 중력을 지탱하고 있는 듯한 구조물의 형상 등등...

그가 선보인 대부분의 작품들은 이처럼 비대칭을 전면에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대칭에 근간한 비대칭의 절묘함을 조형언어의 근간으로 삼고 있다. 특히 90년대 이후의 정형화된 시메트리 작업속에서도 이러한 에이시메트리의 미세한 변화는 감지된다.

 


 (주석 생략)

 (2편에서 계속)!!!


출전 /

김성호, '대칭 속 비대칭과 결의 추상미학', 카탈로그 서문, 『한국추상조각의 원류-석리 심봉섭 1929-2001』, 화집, 2012. 3. pp.20-29. (심봉섭회고전, 2012. 3.7-13, 인사아트센터)

................................................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