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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탈로그 서문〕심봉섭 작가론 (2편) / ‘대칭 속 비대칭’과 ‘결’의 추상미학

김성호

카탈로그 서문〕

심봉섭 작가론

 

‘대칭 속 비대칭’과 ‘결’의 추상미학 (2편)

 

 

 

 

김성호(미술평론가)

 

 

 

 

(1편에서 이어)!!!

 

 

IV. 주름과 겹, 틈과 구멍의 조형언어

한편, 우리가 특별하게 주목하는 또 다른 그의 조형언어는 주름, , , 구멍과 같은 것들이다. ‘주름과 겹’, 그리고 ‘틈과 구멍’은 대립적인 근원으로부터 연유한다. ‘주름과 겹’이란 하나의 몸체가 이지러지며 만들어내는 연접의 공간이지만,[20] ‘틈과 구멍’은 하나의 몸체가 둘 이상으로 갈라지거나 반대로 서로 다른 몸체들이 조우하면서 만들어내는 연접의 공간이다. 일테면 우리는 간단하게 전자를 접혀져 있는 커텐과 같은 것으로, 후자를 찢어지거나 구멍 난 커텐 같은 것으로 상상해볼 수 있겠다. 즉 주름과 겹은 하나의 몸체를 끝내 유지하는 공간이지만, 틈과 구멍은 하나의 몸체로부터 이탈하거나 또 다른 몸체가 만나면서 이루는 공간이다. 따라서 주름과 겹은 공간을 무수히 덮어낸 채 돌출한 포지티브의 공간을 창출한다면, 틈과 구멍은 공간을 텅 비워버린 네거티브의 공간을 창출한다. 그는 이러한 ‘주름과 겹 Vs 틈과 구멍’이라는 포지티브와 네거티브의 대립적 만남을 그의 작품 곳곳에서 조우하게 만든다. 그 결과 근원적 속성이 상이한 이러한 개념들은 그의 조각 안에서 신기할 정도로 조화롭게 합치된다.

먼저 그의 추상조각에서 ‘주름과 겹’의 조형언어를 살펴보자.

우리는 그의 추상조각이 1970-80년대에 유독 주름과 겹의 조형언어로 충만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애벌레가 휴식을 취하기 위해 잔뜩 자신의 몸통을 구부려 주름을 만든 듯한 형상, 곤충들이 구부렸던 다리와 촉수들을 펼쳐내면서 주름을 펴가는 듯한 형상, 날짐승이 비상하기 위해 겹겹이 숨겨져 있던 자신의 날개층을 드러내며 퍼득거리는 형상, 숨겨져 있던 부챗살이 펼쳐지듯 겹겹이 밀치고 나오는 듯한 형상, 반듯한 입방체가 상처를 입어 주름을 만들며 찌그러진 듯한 형상, 얇은 종이 박스들을 쌓아올렸을 때 중력에 의해 이지러지며 주저앉아가는 듯한 형상.... 그 형상의 진의는 파악할 길 없지만 우리의 지각에 의해서 유추되는 이와 같은 형상들은 그의 조각에서 주름과 겹의 공간들을 상상력 가득 맞이하게 만든다.

 

 

 

 




 

 

‘틈과 구멍’의 조형언어 역시 매혹적이다.

심봉섭에게서 틈과 구멍, 즉 투과의 조형언어는 1962년과 1965년 간헐적으로 드러나긴 하지만 그의 추상조각이 모색을 거듭하는 1973년 경 이후 비로소 서서히 출현한다.

나뭇결이 메말라 터져버린 상처처럼 각인된 흔적의 형상, 벗겨낸 나무껍질을 세워놓은 듯한 비틀어진 원기둥 형상들도 그러하거니와, 포도송이 같은 알과 알 사이의 연접의 틈, 파이프오르간처럼 파이프들이 중첩된 사이에 만들어진 연접의 틈, 한옥의 기둥과 인방(引枋)이 만나는 듯한 요철(凹凸) 사이의 틈들 역시 이러한 투과의 조형언어를 우리에게 선명히 보여준다. 그것들은 하나같이 하나의 개체가 파열해서 두 개 이상의 개체로 분열되는 공간임과 동시에 하나의 개체가 다른 개체와 만나 만들어내는 접합과 연접의 공간들이다.

 



 




 

그의 작품 중 90년대 이후에는 유독 ‘구멍’이라는 투과의 공간이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조각의 몸체에 투과체의 구멍을 만들어내는 조형언어는 이미 헨리무어(Henry Moore, 1898-1986)나 바바라 휍워스(Barbara Hepwarth, 1903-1975), 그리고 간헐적으로 자크 립시츠(Jacques Lipchitz, 18911973)의 작품들에서 시도된 바 있다. 한국에서는 김정숙, 김영중, 이운식 등이 투과의 표현언어를 전략적으로 사용한 작품들을 다수 남겼고, 최기원, 김찬식 등도 이와 같은 조형언어를 사용한 바 있다. 이처럼 서구조각에서 선보였던 투과의 표현 언어를 일정부분 계승해서 자기 것으로 삼으려던 국내의 조각가들의 시도는 그 정도가 다를지라도, 공간의 내부와 외부를 상호 연계시키고 둘 사이의 대화를 도모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는 점에서는 이견이 없다고 할 것이다.

비교적 추상조각 초기인 1960년대에 일반적으로 나타났던 이러한 투과의 조형언어가 심봉섭의 작품에서 90년대에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의외의 사실이다. 필자가 보기에 그것은 다분히 종교적 주제의식을 형상화하는 가운데서 발현된 것으로 파악된다.

그의 작품에서 70-80년대 간헐적으로 나타났던 구멍이란 투과체는 대개 타원형의 것이었는데, 1990년 이래 집중적으로 나타난 투과체의 도상은 타원형으로부터 불꽃 혹은 각이 진 섬광과 같은 파장의 형태로 옮겨간다. 대개 그것들은 불상 뒤편에 표현되는 ‘무애(無碍)의 광배(光背)[21]라고 하는 불교의 아이콘을 표상화하는 과정에서 표현된 것들로 해석된다. 그런 면에서 이러한 섬광과 같은 파상(波狀)의 투과 공간은 그가 평소 몸담았던 불교에 대한 종교적 경외, 성찰의 과정으로부터 연유된 표상임에 틀림없다 할 것이다.

그의 조각에서 나타나는 틈과 구멍에서 흥미로운 지점은 그것이 헨리 무어 식으로 몸체를 관통시킨 뻥 뚫린 공간이기 보다는 하나의 개체가 또 다른 개체와 만나면서 만들어진 연접의 공간이라는 점이다. 앞서 언급한 불상의 광배로 보이는 파상의 투과 공간 역시, 사람이 두 팔로 합장하는 형상으로 표현되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생각해보자. 불교에서 합장할 때 손바닥과 손바닥이 연접해서 비움의 공간을 만들어내듯이 벌린 팔과 팔 사이에서 또 다른 비움의 공간은 생성된다. 그것은 두 개의 젓가락이 손 안에서 쌍으로 만나 투과의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벽돌이 쌓이면서 비워진 공간, 다리와 다리 사이의 벌어진 공간, 너와 내가 만나서 살포시 만들어내는 연접의 공간 같은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그의 투과의 조각언어인 구멍 역시 틈의 확장이며, 틈과 구멍 이 둘은 바로 연접의 공간에 다름 아니다.

 


 

 

 

 

 

 

V. ‘결’의 추상정신과 미학

심봉섭의 조각세계를 총체적으로 점검하는 이 글에서 중요하게 결론짓고자 하는 관점은 ‘시메트리 속 에이시메트리’ 또는 ‘주름과 겹, 틈과 구멍’과 같은 그의 형식적 조형언어가 ‘결의 추상정신’이라고 하는 주제의식과 만나는 지점에 관한 것이다.

결은 일견 ‘규칙적이고 정형적인 상태’를 의미하는 형식에 관한 용어이지만, 그것은 다분히 ‘추상 정신’이라는 주제의식과 만나는 용어이기도 하다. 즉 결의 형식은 언제나 이치, 도리, 원리, 섭리와 같은 리()의 정신세계와 만난다. 한자 리()를 해제한다면 옥(=)을 단위체()로 쪼개어 내는 것이다. 즉 단단한 옥을 다듬고 다스려 그것으로부터 근원적 이치를 밝혀내는 것이다. 나무결, 물결에서의 규칙적이고 정형적인 평정의 형식은 곧 그것의 내용과 맞물린다. 일테면 마음결이란 형식의 차원이자 그것으로부터 진화한 내용의 차원이기도 하다. ‘마음결’이 곧 ‘심리(心理)’인 것과 같이, 결의 형식은 리()라는 내용과 언제나 만나는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심봉섭의 조각에서 ‘결’은 그의 다양한 조형언어를 총괄하는 형식언어이자, 동시에 그것의 추상정신을 드러내는 형이상학의 세계가 된다.

결은 음과 양, 네거티브와 포지티브를 상호 충돌시키면서 평정의 상태를 만들어낸다. 역으로 말하면 ‘결’의 평정 상태는 대립의 요소들이 끊임없이 그 수면 아래에서 움직이고 있는 운동성의 차원을 상정한다.[22] 일테면 ‘물결’이란 ‘골’과 ‘마루’가 만들어내는 무수한 파동으로 형성되고, ‘마음결’이란 ‘희노애락’의 상반된 감정들이 끊임없이 생채기 내며 싸우는 가운데 생성되며, ‘숨결’이란 ‘들숨’과 ‘날숨’이 쉼 없이 교차하는 가운데서 유지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심봉섭의 추상조각에서도 이러한 이항대립항은 충돌하고 상호작용하면서 ‘결의 추상정신’을 생성시키고 유지시킨다. 그의 작품에는 좌우대칭의 균제미(均齊美)가 자리 잡은 대칭성 속에서도 비대칭이 살포시 머리를 내밀고 있고, , 구멍과 같은 네거티브 공간에는 주름, 겹과 같은 포지티브의 공간이 긴밀하게 침투하고 상호작용한다. 그의 작품이 피상적으로 대칭적 구조(symmetrical structure)의 조형적 쌍생아들로 연속된 듯하지만, 실상 이러한 상사성(similarity) 안에는 비우기와 채우기로 상정되는 대립적 이질성(heterogeneity)이 연속적으로 꿈틀대고 있는 것이다.

추상이라 함은 삼라만상의 사물들과 개념들 사이에서 공통적 속성을 추출하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그것은 각기 다른 사물들과 개념들의 경계를 해체하고 허물어뜨려내는 작업이다. 추상조각 또한 3차원 매체 안에 가시적인 조형체들 사이의 경계를 무너뜨려 개별 조형언어들을 모호하게 만드는 어떤 근원적 예술의 덩어리를 창출해내는 작업이다. 이런 차원에서 ‘결’이란 음과 양의 대립, 네거티브와 포지티브의 대립을 끊임없이 지속하게 만듦으로써 종국에는 그 대립을 무너뜨리고 서로의 관계를 조화로운 평정상태로 이끌어내는 ‘추상의 정신’이다. 동시에 그것은 심봉섭의 조각이 추구하는 ‘결의 추상미학’이기도 하다.

실제로 심봉섭의 작품에는 ‘결’이란 제목의 작품들[23]이 있다. 이 작품들은 각기 두 명의 인물이 서로를 끌어안고 있는 듯한 형상으로 된 투과체의 시메트리컬 추상 조각들이다. 성격도, 고향도 배경도 각기 다른 이질성의 너와 내가 만나 동질성의 우리가 되는 과정을 유추케 하는 이 모뉴멘트들은 심봉섭에 대한 지금까지의 우리의 논의를 모두 담고 있는 결정체로 보인다.

이처럼 그가 추구하는 결의 미학은 이질성의 개체와 개체가 만나 끊임없는 운동을 지속하면서 상호간 상응하는 조화의 미를 형성한다. 그의 추상이 인체의 형상으로부터 기반한 구상으로부터 자연스레 발화했던 만큼, 그의 작품에는 인간과 사물, 인간과 건축, 인간과 자연, 인간과 우주와 같은 이질성과의 교류와 상호작용이 두드러지게 발현된다. 그의 추상적 인간은 부랑쿠시 류의 ‘인간 형상으로부터 발현한 근원적 추상 원형’[24]을 모색하는 것에 멈추지 않고 이질의 대립항들과 상호작용하는 것으로 확장한다. 그것은 한국적 전통 정신의 천일합일사상(天人合一思想)에 의한 우리나라의 천인지분(天人之分)의 관점에 다름 아니다. 천인지분은 선()에서의 심신일여(心身一如)로서의 물아일체와 같은 표현이다. 그것은 세계와 나, 주체와 객체, 대상과 비대상이 하나로 숨 쉬는 자연, 인간, 신의 삼자일합(三者一合)적 일원론이다. 인간과 대상이 “불일이불이(不一而不二)의 세계처럼 일치가 아니면서 모순도 아닌’[25] 세계를 형성하기 위해 부단히 작동시키는 상호작용은 실상 추상조각가 심봉섭이 일관되게 밀고 가는 지향점이다.

그의 이러한 작품의 일관된 지향점은 평론가 이시우의 다음 글에서도 일부분 확인된다.

'그의 작품의 일관성을 꼭 잘라 말하기가 힘드나 유기적인 덩어리의 형태와 무기적인 분석적 형태의 대립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양자를 조심스럽게 융합시켜 만들어 낸 것이라고 생각된다. / 유기적 형태의 일부를 약간 무기적으로 형상화한 형상, 그러니까 유기적 형태의 한 부분을 凹凸로써 미묘한 순간을 존재로 승화시켜 버린 것이다.'[26]

그러나 평론가 이시우가 ‘대립’이기보다는 ‘융합’이라는 말로 평가하고 있듯이, 그의 작품들에는 언제나 비일치성들이 수면 아래서 투쟁하고 화해하며 상호작용을 끊임없이 하고 있음에도, 그 역동적 움직임들이 그의 추상조각의 표면 위로 쉽사리 감지되지 않는다. 그래서 관자들에게 그의 조각은 이것, 저것과의 ‘조심스러운 융합’처럼 보일 뿐, 배면 아래서 움직이고 있는 ‘대립의 역동적 운동성’이 쉬이 파악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아쉬운 지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