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호
〔카탈로그 서문〕
2013 예술의전당 미술아카데미 작가스튜디오전
차이들의 동행_정중동(靜中動)
김성호(미술평론가)
2012년 ‘예술의전당 미술아카데미 작가 스튜디오’에서 선정, 지원된 4인의 작가들이 펼치는 이번 전시는 ‘차이(la différence)’와 ‘동일함(la même chose)’을 동반한다. 전자는 작가들마다 달리 추구하는 차이의 조형언어라 할 것이며, 후자는 그녀들이 함께 추구하는 동일한 조형정신이라 할 것이다. 필자는 그 같음의 조형정신을 ‘타블로 비방(tableau vivant)’으로 풀이한다.
‘타블로 비방’이란 사전적 의미로 ‘살아있는 그림(living picture)’을 뜻하는 프랑스어이다. 이것은 원래 “살아있는 사람을 그대로 그림처럼 꾸며 가장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잘 알려진 연극, 회화, 문학에 나타난 극적(dramatic) 순간을 움직임 없는 정지의 상태로 모방하는 퍼포먼스 형식의 예술언어였다. 이것은 ‘포즈의 수사학(The rhetoric of the pose)’이라는 별칭에서도 드러나듯이, 비단 조형언어(형식) 뿐 아니라 조형정신(내용)마저 아우른다. ‘포즈’가 외형적 자세를 의미함과 동시에 ‘마음가짐’이라는 내면적 자세를 의미하듯이, ‘수사학’ 역시 언어의 형식을 의미함과 동시에 그것이 담고 있는 내용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회자되는 타블로 비방이란 이러한 형식과 내용 사이를 부단히 오간다. 때로는 형식의 조형언어보다는 ‘의미심장함이 가득한 순간(pregnant moment)’이라는 내용 자체를 보다 더 주요하게 간주함으로써 '형식'으로부터 '내용'으로 전환되기조차 한다. 게다가 길버트와 조지(Gilbert & George)의 <노래하는 조각(The Singing Sculpture)>(1971)에서처럼, 최근 타블로 비방은 움직임마저 포함하면서 정지의 상태라는 형식으로부터 아예 탈주하기조차 한다. 현대의 타블로 비방은 ‘정지(standstill)/움직임(motion)’이라는 이중 형식 속에 ‘부동성/운동성, 비활성/활성, 부재/존재, 죽음/삶’과 같은 양가적 내용을 끊임없이 교차시키는 모든 것들로 확장된다.
그렇다면, 여기 출품작가 4인의 각기 다른 작품들을 관통하는 타블로 비방의 조형정신이란 무엇인가? 또한 그것은 그녀들의 실제 작품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 필자는 그것을 경계를 탈주하는 ‘정중동(靜中動)의 미학’으로 살펴본다.
임해선_표현과 초현실의 언어
임해선의 작품에서 ‘정중동(靜中動)’의 미학은 표현주의와 초현실주의의 세계로부터 발원한다. 그녀가 작가노트에서 자신의 작품을 “보이는 대상은 물론이고 보이지 않는 생각들을 형상화하고자 하는 시도들”로 언급하고 있듯이, 임해선의 작품은 내면의 비가시성과 외면의 가시성을 함께 탐구한다. 변별하자면 전자는 표현주의의 언어로, 후자는 초현실주의의 언어로 탐구된다. 그녀에게서 심연(深淵)의 내면세계는 활발한 붓질을 통해 화면 위에 이리저리 넘실댄다. 그것은 우리에게 단지 감정의 분위기만 감지시킬 뿐, 구체적인 메시지를 확인시켜주지 못한다. 반면, 작품의 메시지는 표현주의적 배경을 바탕으로 한 채 자리한 일련의 재현적 도상들에서 유추된다. 화분 위에서 자라나는 소녀, 기묘한 전구들 뭉치, 신비로운 가면과 두상 등 일정한 맥락 없이 낯설게 개입하는 초현실주의적 도상들이 특유의 알레고리, 상징들과 얽히고설키면서 작품의 의미는 활성화된다.
그러나 그 의미가 명징한 것은 아니다. 그녀의 말대로 “보는 이의 위치와 각도는 물론이고 내면의 상태에 따라 달라지는 색과 형태들” 그리고 “내면의 세계를 표현해내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막힘과 트임, 낯섦과 동경, 몰입과 해방감” 자체에 매료되어 있을 뿐, 메시지를 표상하는데 그녀가 그다지 골몰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그녀의 정중동의 미학은 ‘내면/외면’ 그리고 ‘표현주의/초현실주의’가 부딪히면서 만들어내는 ‘막힘/트임’과 같은 이항대립적 울림으로부터 살포시 가시화된다.
임해선 작
임해선 작
이경숙_꽃이 그리는 마인드스케이프
이경숙의 작품에서 ‘정중동(靜中動)’의 미학은 ‘자연’으로 함축되는 테마 ‘꽃’으로부터 기인한다. 작가는 자연의 정수(精髓)를 꽃으로 표상하고 사계(四季)의 다양한 꽃들을 화면에 등장시켜 자연을 노래한다. 그런 면에서 그녀의 작품에서 꽃의 암술과 수술 그리고 그것을 품고 있는 꽃잎이나 꽃받침과 같은 화피(花被)가 서로 미묘하게 만나는 요철(凹凸)의 미적 조형성에 대한 탐구는 부차적이다. 그보다는 부귀, 사랑, 유희, 환희, 재생, 모태(母胎)의 생명과 같은 꽃에 담긴 수많은 상징들을 삶의 내러티브 안에 이끌어내는 주제의식이 보다 더 주요해진다. 그녀의 작업에서 꽃은 자연이라는 대우주와 상응하는 소우주이자, ‘인생에 대한 하나의 은유’로 발현되기 때문이다.
이런 차원에서, 작품 〈꽃으로부터〉는 그녀의 작업세계를 이해하는 관건이다. 무수히 겹쳐진 물감 층이 키워낸 커다란 붉은 꽃 하나! 디테일이 생략된 강렬한 레드 칼라의 ‘이미지 덩어리’는 배경과 함께 율동한다. ‘봄, 여름, 가을, 계절, 자연, 노을, 빛’ 등의 단어들을 제명으로 포함하는 또 다른 작품들에서, 작가는 물감을 깔끔하게 마무리하거나, 흘림, 덧칠, 스크래치와 같은 다양한 조형언어들을 통해 “한편의 수필을 쓰듯 담담하게” 자연을 그려낸다. 그것은 자연의 단순한 재현(再現)이기보다는 자연 질서의 재연(再演)을 지향한다. 그 결과 그녀의 작품은 연약한 꽃의 식물성으로부터 자연의 무한 역동성과 인생의 은유를 탐구하는 ‘심상풍경(mindscape)’이 된다.
이경숙 작
이경숙 작
최경미_기(氣)로 표출되는 불이(不二)의 세계
최경미의 작품에서 ‘정중동(靜中動)’의 미학은 ‘기(氣)’라는 화두에 집중된다. 주지하듯이, 도가(道家)사상에서 우주의 생성변화를 설명하는 용어였던 ‘기’는 한(漢)대의 음양오행 사상과의 결합을 통해서 오늘날 우주론, 예술론은 물론 일상에서조차 두루 사용하는 용어가 된지 오래이다. 최경미는 여기에 “물질적인 세계와 무차별한 공(空)의 세계가 다르지 않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대승불교의 ‘색즉시공공즉시색(色卽是空空卽是色)’이란 또 다른 화두를 자신의 창작에 기저로 삼는다. 그녀의 작품이 견지하는 이러한 화두들은 공히 차별과 대립을 극복하려는 ‘불이(不二)’의 세계를 드러낸다.
설악산 울산바위를 목탄으로 거칠게 스케치한 후 사진으로 담아 그것을 다시 일필휘지의 회화로 옮겨낸 작품이나 모란꽃의 씨방의 의미론을 탐색해온 작품들은 “사물에도 영혼이 있음”을 피력하는 ‘불이’의 세계와 교차한다. 그것은 사물의 외양에 대한 ‘재현(representational) 의지’이기보다는 사물에 담긴 기(氣)를 담아내려는 ‘표현(expressional) 의지’로부터 기인한다. 활달한 붓질로 물감을 화면 위에 끌고 다니거나 갈필로 덧칠하는 일련의 제스처들은 작품들마다 일정부분 편차가 있기는 하지만, 공히 ‘식물성/동물성, 비가시성/가시성, 소멸/생성, 죽음/삶, 부동성/운동성’과 같은 대립적 개념과 경계를 탈주하려고 시도한다. 이처럼 최경미의 작품세계는 모든 이항대립을 기(氣)로 통섭하는 가운데 노정되는 것이다.
최경미 작,
최경미 작
윤영_잠재태의 기계 생명체
윤영의 작품에서 정중동(靜中動)의 미학은 ‘주체와 주체’ ‘사물과 사물’ 사이의 관계 맺기 속에서 발현된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기계부속들을 서로 이어주는 연결체(coupler, connector)로 특정화된다. 기계의 개별체들은 볼트/너트와 같은 연결체의 중재 아래 서로를 맞잡으면서 온전한 하나의 기계로 재탄생한다. 그런 면에서 개체와 개체의 만남을 중계함으로써 비로소 기계 작동이라는 본연의 목적을 성취케 하는 ‘연결체’의 존재는, ‘작동하다’라는 명제를 완성케 하는 필요충분조건이 된다. 오목과 볼록이 맞물림으로써 비로소 기계 개체들의 실제적 운동을 보장하는 연결체의 존재는, 윤영의 작품에서 하나의 은유로 확장한다. 그것은 ‘나’라는 주체가 대면하는 당신(들), 그(녀), 그(녀)들 사이에서 벌이는 인간관계와 커뮤니케이션을 은유하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윤영의 이러한 ‘관계 맺기’ 자체가 잠재태(la puissance)로서 작동한다는 것이다. 잠재태란, 들뢰즈 철학에서 엿볼 수 있듯이, 현실태(l'acte)가 아닐 뿐 이미 실재(réalité)이다. 즉 그것은 현실의 심층에서 잠재성(virtualité)의 상태로 끊임없이 작동하고 있는 운동체인 것이다. 그것은 마치 어떤 기관들로 분화될 지 파악하기 모호한 ‘알’과 같은 ‘기관 없는 신체(le corps sans organs)’의 양태로 운동한다. 즉 그것은 그녀의 작품에서 때로는 인간의 관절체로, 때로는 절지동물의 그것으로, 무기체/유기체 사이에서 알 수 없는 기계 생명체의 양태로 ‘정중동’의 무한 운동을 지속한다. 붉은 빛 혈관을 내부에 가득 안은 채 말이다.
윤영 작
윤영 작
에필로그
각기 다른 4인의 작품들을 ‘타블로 비방의 조형정신’과 ‘정중동의 미학’으로 한데 묶어 내려 시도한 필자의 글이 지니는 한계는 명징하다. 창작이란 태생적으로 어떠한 이론의 틀에도 묶이지 않고 무한 탈주하는 자유로움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필자가 이러한 시도를 한 이유는 몇 가지로 좁혀진다. 우선 전공 후 오랜 휴지기를 보냈거나, 디자인으로부터 순수미술을 갈망하며 선회했거나, 완전한 비전공자로서 미술창작의 길에 이제야 들어섰거나, 중년이 넘어선 나이에 프로페셔널 아티스트의 길을 걷기 시작한 4인의 작가들에게 공유되는 ‘남들보다 늦은 비주류’라는 출발지점 때문이다. 또한 장르별 통섭이 넘나드는 오늘날, 구식의 장르처럼 간주되곤 하는 ‘회화’에 여전히 매료된 채 4인의 작가가 공히 그곳에 발을 성큼 내딛은 까닭이기도 하다.
그녀들이 설레는 마음으로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미술창작의 순수 열의’는 회화에 생명의 호흡을 불어넣고 ‘창작자와 작품’의 혼연일체를 도모하는 ‘타블로 비방’의 초기 정신과 닮아있다. 더욱이 이들이 순수미술의 경계 너머로부터 왔다는 사실은, 오늘날의 ‘타블로 비방’의 탈경계적 조형정신과도 일맥상통한다. 마지막으로 4인의 작가들에게 공유되는 이러한 조형정신은 ‘정중동’으로 미학으로 정리될 수 있겠다. 그것은 그녀들에게 특별한 변화를 약속하기 어려운 위태로운 작가적 위상과 더불어 감내하기 힘든 막중한 창작의 노동력을 동반한다.
4인에게 남겨진 관건은, 프로페셔널 아티스트의 길로 들어서는 ‘차이들의 동행’을 부단히 지속하는 일이다. 훗날 기억하자. 4인이 현재 당면한 모든 어려움은 결코 장애물이 아니라, 외려 무한가능성이었다는 것을. 또한 ‘지금, 여기서’ 상기해보자. 세계적 작가 루이즈 부르주아(Louise Bourgeois)가 70세가 넘어서야 비로소 국제적 명성을 얻기 시작했으며, 그 전까지는 거의 무명에 가까운 작가로 지냈던 사실을 말이다. ●
출전 /
김성호, “차이들의 동행_정중동(靜中動)”, (임해선, 이경숙, 최경미, 윤영 4인전, 2013. 1. 31-2.20,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갤러리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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