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영
느릿한 공간 속 시간의 깊이
이선영(미술평론가)
임동훈의 작업실에는 작품에 사용된 실리콘 뚜껑들이 수북이 쌓여있다. 그것들은 작품 안에 수없이 찍힌 점들만큼이나 작업에 쏟아 넣은 물질과 시간을 증거 한다. 그는 캔버스에 점을 찍어 말린 후, 실리콘으로 얇게 도포하고 그 위에 다시 점을 찍는 식으로, 10겹 이상으로 올라간 층들을 통해, 공간화 된 시간의 흔적들을 보여준다. 거듭 쌓여진 평면들로 인해 1차원적 존재인 점은 차원의 수를 늘려나간다. 점은 그려졌다기 보다는 중력의 작용을 받아 떨어뜨려졌는데, 액체의 둥근 표면 장력이 사라져 둥글게 말라붙을 즈음, 제 1막이 닫혀 지고 그다음 행위가 벌어질 무대가 준비된다. 새로운 막 위에서 다시 시작되는 행위는 어떤 내용이나 개념을 재현하는 연극적 행위가 아니라, 반복 속에서 차이를 길어내는 수행성을 내포한다. 이번 전시의 여러 작품에 그어진 수평선은 상자 같은 공간을 넘어서, 탁 트여있는 광활한 시야를 향한다.
가창 AA 갤러리 전시전경
이전의 행위들은 무화되지 않고, 화면 깊숙한 곳으로부터 시간의 깊이를 만들어낸다. 그것들은 저 멀리 사라지는 듯하지만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원자 같은 성질을 지닌다. 그의 작품은 깊이감이 있지만 그것은 원근법적 깊이가 아니라, 입체파의 꼴라주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은 구체적 환영이다. 그것은 점이 찍힌 위치의 차이가 만들어내는 깊이, 투명한 표면을 쌓아 만든 깊이이며, 이 시간의 지층이 만들어내는 형상은 생명과 우주, 미시세계와 거시세계에서 일어나는 운동 같은 자연의 과정이나 기원을 알 수 없는 오래된 사물을 닮았다. 그의 작품은 마치 실험용기에서 배양되는 미생물 같은 모습부터 별들이 탄생하고 소멸되는 우주까지 다양한 풍경이 연상된다. 점들과 그것이 확대된 원은 점이나 원에 대한 기하학적 정의와 무관하게 유기체적이다. 점(원)은 마치 꽃잎이나 낙엽이 흐드러지게 떨어져 있는 듯한, 또는 양서류나 어류의 알이 가득 배겨있는 듯한 모습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고정된 관찰자적 시선을 넘어서, 물이나 공기 같은 유동적 흐름과 기운이 느껴진다.
시간을 통해 밀도를 획득한 형상은 공간을 이리저리 휘저으며 움직이는 풍경을 만든다. 여러 층에 배치된 점의 이합집산은 바람이나 연기 같은 공기의 움직임을, 때로는 조류나 곤충 떼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유기물을 연상시키건 무기물을 연상시키건 그의 작품은 어떤 특정한 대상을 재현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움직임 자체를 제시한다. 작업은 점들의 위치와 강약 등, 간단한 계획만을 가지고 시작되며, 무념무상 속에서 스스로 움직이고 흘러간다. 그것은 정지에서 만들어지는 움직임이라는 점에서, 정중동(靜中動)의 미학을 구현한다. 그는 자신의 작업이 동양적이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거창한 관념이기보다는 벌레가 집을 짓듯이, 또는 서서히 이동하듯이 이루어지는 작업에서, 인간의 의식적인 행위가 최소화된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뉴욕에서 7년을 작업하다 귀국한 그가 가장 멀리하고 싶었던 풍조는, 시류의 코드를 적당히 섞어서 머릿속에서 짜 맞춰진 개념과 논리를, 강한 시각적 효과에 실어 자극적으로 보여주는 류의 작업들이었다.
그러한 일단의 흐름은 우선 그의 생각과 몸이 받아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에게 작업이란 ‘마음을 비우고 자연의 순리를 몸으로 보여주는 것’이라는 점에서, 종교적 수행과 비슷하다. 이번 전시의 작품은 그린에서 블루로 가는 공기나 물의 색을 연상시키며, 서늘하고 신비로운 느낌을 준다. 실리콘 층과 중첩되면서 발색되는 바탕은 연한 색조로 물들어 있으며, 이 색 면과 중첩되는 투명 막은 미광을 머금고 있다. 여백은 층과 층 사이의 공간에도 존재한다. 물이나 공기 같은 투명한 층의 효과는 1990년대 말부터 사용해왔던 재료인 실리콘에 힘입은 바 크다. 실리콘 외에도 그는 다양한 재료를 사용해왔지만, 이 재료는 단지 시도나 실험을 넘어 작품의 몸통이 되었다. 물렁물렁하며 끈적끈적한 질감을 주는 실리콘은 한 꺼풀 덮으면서 투과시키면서 점액질이나 수정체 같은 공간감을 형성한다. 그것은 시각적이기보다는 촉각적이다. 촉각은 다른 모든 감각들이 귀착될 수 있는 원초적 감각이다.
실리콘은 여러 크기의 점(원)을 각 층에 고정시키면서 시간의 두께를 만든다. 긁어낸다면 둥글고 얇은 막으로 되어 있을 점들은 모든 집적체의 미세한 모사물(시뮬라크르)에 해당된다. 2010년-2011년에 발표된 작품들이 원 안을 채운 작은 점들이나 그것이 이동하는 모습, 또는 비슷한 크기의 원이 미세하게 중첩되면서 움직임의 궤적을 만들었다면, 이번전시에서는 원 보다는 미세한 입자들의 이합집산에 따른 운동감이 두드러진다. 이미 원안의 점은 이전의 작업 [씨 소금](2010)이나 성운 성단의 이미지처럼 파열되고 있다. 어떤 경계로부터 벗어난 점의 무리들은 시간의 층에 의한 잠재적 운동감 뿐 아니라, 공간적 방향성을 가진다. 점의 경우 원보다 운동감이 더 강하다. 머리 부분이 상대적으로 밀도가 강하고 뒤로 갈수록 흐릿한 형상들은 맹렬한 속도로 날아드는 벌떼나 혜성을 떠올리며, 화면 밖으로 튕겨나갈 듯한 기세이다.
동양화처럼 바닥에 깔고 작업해야 하는 임동훈의 작품은 수직/수평 양차원에서 확장한다. 쌓이며 형성되는 층은 잠재적 운동감을, 사방팔방을 향하는 공간적 벡터는 명시적 운동감을 가진다. 그는 여러 개의 화면을 사용하여 화면 밖으로 확장하는 움직임의 일단을 암시하기도 한다. 그의 작품은 거친 화공물질을 사용하지만, 은은한 자연적 효과가 살아있다. 이전 작업에서는 씨앗, 소금, 백토, 황토, 식물의 추출물 같은 자연적 재료로 작업을 하기도 했지만, 실재보다는 관계를 중시하는 이번 전시에서 자연은 보다 근본적인 입자로 변모했다. 화면에 그어진 수평선은 어떤 풍경을 떠오르게 하지만, 임동훈의 작품은 자연의 외양보다는 자연적 과정을 드러낸다. 특히 수직 수평의 양차원에서 헤쳐모이는 점은 고대의 원자론처럼, 자연의 근본 질서를 예시한다. 장 살렘은 [고대 원자론]에서, 원자론자들은 물질적 미립자들을 모든 현실의 씨앗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고대 원자론]은 ‘나타나는 것의 씨실을 만드는 쪼갤 수 없는 근원들’이 존재하며, ‘이 근원들 또는 제1물체들, 즉 원자들은 무한한 허공 안에서 끊임없이 운동’(에피쿠로스)한다고 인용한다. 원자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탄생은 결합이요 죽음은 해체이다. 데모크리토스를 비롯한 고대 원자론자들은 ‘햇살 속의 먼지 알갱이’를 통해 세상의 근본을 이루는 원소를 직관했다. 이러한 가설에서 원자들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허공의 존재였다. 루크레티우스는 허공 속에서 운동이 시작되며, 이를 통해 지상의 생명체들이 가지고 있는 자유가 온다고 말한다. 임동훈의 작품에서 점은 원자들처럼 작용하며, 투명한 막의 거듭된 축적이 만들어내는 공간은 원자론자들이 가정한 허공처럼 점 입자들의 운동을 만드는 잠재적 공간이다. 그가 만든 잠재적 운동의 공간은 밀폐를 통해서 열린다. 이러한 역설은 존재가 불연속적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점과 점의 만남은 미리 세워진 의도에 의한 것은 아니며, 이 우연적 과정이 지배한다.
기원과 목적 또한 불분명하다. 절대적 고립과 고독의 순간도 없다. 장 살렘이 말하듯이, 이 세계의 형성 이전에 이미 무수한 세계들이 있었으며, 원자들은 항상 이미 마주치고 있었던 것이다. 작가는 그가 고안한 장치를 통해서 항상 이미 주어져 있는 것을 보다 분명하게 표시할 뿐이다. 새로운 것은 이전의 잔해들로부터 형성된다. 임동훈의 원자론적 세계는 단순한 과학적 모델이 아니라,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들이 흙과 먼지로 되돌아간다는 보편적이고 원초적 경험에 기초한다. 점들의 방향성과 움직임이 있는 이번 전시의 작품들에는 분해나 해체보다는 생성과 약동의 분위기가 우세하다. 그 상쾌하고 잔잔한 움직임 속에 만물이 공통적으로 갈구하는 쾌락이 스며있다. 이 쾌락은 욕망처럼 강렬하지 않고 평온하다. 장 살렘에 의하면 고대 원자론자들에게 영혼론(또는 심리학)은 자연학의 일부였다. 영혼은 모든 집적체에, 즉 모든 유기체에 ‘퍼져 있는 미세한 입자들로 구성된 물체’(에피쿠로스)이다.
영혼에는 프네우마(숨, 바람), 테르몬(열기), ‘이름 없는 원소’ 외에도 아에르(공기)가 있다. 이 맥락에서 본다면 임동훈의 작품에서 다양한 양상으로 드러나는, 움직이는 분절체들은 자연 뿐 아니라 영혼의 풍경이기도 하다. 그의 작품에서 질적 차이를 가지지 않는 중성적인 입자들은 영혼 또한 자연같은 물질성이 있다. 그러나 물질적이라고 해서, 운명이나 필연에 얽매여 있는 것은 아니다. 고대 원자론자들의 사고는 원자나 영혼이 신학적 섭리 없이도 자생성과 자유의 원리가 있음을 알려준다. [고대 원자론]에 의하면 루크레티우스는 우주는 전체적으로 무한하며, 그것의 부분집합인 물질과 거대한 허공도 역시 무한하다고 결론짓는다. 이 무한한 우주 내에서 온갖 종류의 결합과 배치 덕분에 원자들은 이 세계를 조성한다. 원자들이 저마다 자기 자리에 맞게 정렬되는 것은 결정된 계획이나 혜안을 가진 정신 혹은 섭리 때문이 아니다.
근본적으로 유물론적인 고대의 원자론은 ‘스스로’ 자(自), ‘그러할’ 연(然)이라는 동양적 사유와 조우하는 부분이 있다. 임동훈의 작품에서 자연 또는 영혼의 입자들은 시간의 축을 따라 이동하면서 보다 구체적인 서사를 만든다. 그의 작품에서 시간은 연대기적인 것이 아니라, 회귀한다. 회귀란 원점으로의 복귀가 아니라, 영원회귀 즉 ‘새롭고 뜻하지 않은 것이 출현하는 각각의 순간이 되풀이되는 가능성’(들뢰즈)으로 표현된다. 그의 작품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은 원자론적인 비전이 있지만, 과학의 객관적 시간성이 아닌 창안의 시간을 향한다. 데이비드 노만 로도윅은 [질 들뢰즈의 시간기계]에서 과학이 그려내는 자연의 이미지에서 시간 및 변화가 제거된다고 지적한다. 여기에서 우주는 본질적으로 정적이고 등질적이다. 예측 불가능한 변화, 새로운 것의 예기치 않은 출현, 관찰자와 자연의 상호작용, 이질적인 연속체로서의 변화는 과학의 이상에서 배제된다는 것이다.
임동훈의 작품에서 실리콘으로 만들어진 시간의 막은 여러 시간의 층을 만드는데, 이 층들은 비(非)연대기적이고 불연속적인 질서를 갖지만, 서로 공존한다. 그것이 운동 이미지를 만든다. 층이 더해짐에 따라 증식되는 점들은 예정된 결말을 향해 운동하는 것이 아니라, 예기치 못한 만남과 충돌을 향해 움직인다. 그것은 생명의 분화나 우주의 진화라는 과정과 비교될 수 있다. [질 들뢰즈의 시간기계]에서 시간은 간접적 이미지, 즉 그 자체로 움직이지 않는 연속체의 공간적 절편화로 정의된다. 시간은 운동이 측정되는 간격 또는 분화와 통합을 통해 주어진다. 여기에서 과거는 보존되며 현재는 지나가고 미래는 비결정적이다. 시간적 관계들의 집합을 통해 가변적 현재가 만들어진다. 이를 통해 시간의 순수형식인 생성의 운동이 드러난다. 임동훈의 독특한 이미지는 시간적 관계를 가시적인 것, 지각 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장치 때문이다.
선형적인 것도 연대기 적인 것도 아닌 작품 속 시간은 ‘지속’(베르그송)을 보여주는데, 지속은 결정되지 않은 미래를 향한 열림이 매 순간 중단되지 않음을 상정한다. 그의 작품은 ‘지속 자체, 즉 시간 관계들의 전체’(들뢰즈)이다. [질 들뢰즈의 시간기계]에 의하면 우리는 전체를 끊임없는 변형으로 직관할 수 있을 뿐이다. 진화는 ‘이미 존재했던 것의 발견이 아니라, 새로운 것의 지속적 창조’(베르그송)이다. 각각 다르게 산재될 질서, 층위, 거리를 지닌 현상들의 상호 연결성을 강조하는 전체는, ‘열림이며 내용이나 공간 보다는 시간, 심지어는 정신과 연관’(들뢰즈)된다. 평면에서 운동 이미지는 공간 내의 생성인 시간 자체, 또는 변화하는 전체의 조망과 관계된다. 지속을 이해한다는 것은 공간의 시간화에 해당하는 변화를 파악하는 것이다. 이 맥락에서 임동훈의 작품은 고정된 진리개념을 위기에 빠트리는 ‘시간의 형식, 또는 시간의 순수한 힘’(들뢰즈)을 보여준다. 이 힘은 미래로 열려 있어야할 예술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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