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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상처와 시대의 질곡을 극복해 온 노대가의 열정과 의욕

하계훈

쿠사마 야요이는 올해 84살이다. 보통의 경우 이 나이의 사람들은 지나온 삶을 회고하고 정리하면서 다가올 무언가를 준비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일 것이다. 게다가 어떤 이는 이 나이를 맞아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기도 한다. 그러나 작가로서의 쿠사마의 경우에는 이와는 무척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쿠사마는 초기 일본의 활동에서부터 미국, 유럽, 남미, 호주, 중국 등 전 세계를 무대로 60년 넘게 회화뿐 아니라 콜라쥬, 조각, 퍼포먼스, 설치미술 등 다양한 장르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쳐오고 있다. 최근에도 쿠사마는 국제적 규모의 전시를 여러 번 개최하여 주요 도시들을 순회하고 있으며 이번 대구미술관에서 열리는 전시와 같이 새롭게 순회가 예정된 전시가 계획되는 것도 있다. 2011년에 발간된 작가의 자서전 <Infinity Net: The Autobiography of Yayoi Kusama>에서 쿠사마는 자신을 아직도 성취해내야 하는 일이 있는 작가(aspiring artist)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 책에서 작가는 작품 활동과 저술활동을 통해 자신이 아직도 이세상의 구석에 몰려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고통스런 느낌에 사로잡혀 있는 상황을 극복해내고싶어한다는('to triumph over the pain of feeling cornered and trapped,') 의욕을 내보였다.


쿠사마가 자신의 작품의 원천으로 지목하는 것 가운데 하나는 어린 시절부터 겪어왔던 환각(hallucination)이다. 환각은 우리의 오감에 모두 나타날 수 있는 것이며 실제 감각과 다르게 외부로부터의 물리적인 자극이 없이도 스스로 드러나서 마치 실제로 어떤 상황과 현상이 벌어지는 것처럼 느끼며 그것을 체험하게 해준다. 이러한 환각을 체험하는 상황은 안정적이고 정상적인 상황이기보다는 뭔가 불안정하고, 결핍과 신경쇄약이나 공포 등이 그 촉발원인으로 개입되는 상황인 경우가 적지 않다. 쿠사마를 비롯하여 적지 않은 작가들이 자신들의 작품과 관련하여 환각을 체험한 경험을 갖고 있다. 예를 들어 호안 미로는 카탈루니아에서 파리로 이주해 온 뒤 궁핍한 생활 속에서 작품 활동을 할 때 하루에 말린 무화과 몇 개로 끼니를 대신하면서 배고픔을 참아냈는데, 이 때 그는 정자를 죽이는 피임약물이 수프 위에 둥둥 떠다니는 환각을 체험하고 그것을 작품으로 표현하였다고 말한 적이 있다. 쿠사마 역시 자서전에서 어린 시절에 동물이나 식물들이 자신에게 이야기 하는 것을 듣는다든지 자신이 일상에서 마주치는 사물 주변으로 오로라처럼 빛이 발산되는 시청각적 환각을 경험하였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작가의 성장배경을 살펴보면 쿠사마에게는 환각을 촉발하는 요소가 어린 시절부터 가족 내에 상존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29년 일본 나가노 지방의 보수적인 집안에서 태어난 쿠사마는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로부터의 체벌과 욕설이 수반되는 냉담한 대우를 받으면서 어린 나이에 자살충동과 망상에 빠져 그리 행복하지 못한 시절을 보내야 했다. 어린 쿠사마에 대한 모성의 결핍은 쿠사마 자신이 어머니의 자궁에서부터 버려진 느낌이었다는 자서전의 고백에서 그 심각성이 느껴지기도 한다. 게다가 쿠사마의 어린 시절은 2차대전 전쟁중이었으며 10대에 들어서면 2차세계대전의 당시자인 일본이 처한 전쟁의 분위기는 최고조에 다다라서 쿠사마가 아니더라도 그 시대를 살던 일본인이라면 누구라도 전쟁의 공포 속에서 불안과 결핍의 시간을 지내야 하였을 것이다. 심지어 전쟁의 막바지에는 어린 쿠사마 마저 군수공장에 반강제적으로 불려가 낙하산 재봉 작업을 해야 했었다. 


어머니에 비하여 아버지는 쿠사마에게 위협적이기보다는 무심하였던 듯하다. 그러나 그 당시 일본 아버지들에게서 심심치 않게 발견되는 모습처럼 쿠사마의 아버지도 여성 문제로 아내와 다투는 모습을 아이들에게 여러 차례 보여주는 가장이었으며 어린 쿠사마의 형제들과 어머니를 버리고 집을 나가버리는 무책임한 가정의 모습을 보여주고 만다. 그리고 이러한 가족사의 경험으로부터 쿠사마는 결국 남성에 대한 혐오와 거부의 심리를 키워 나아가게 된다. 쿠사마의 작품 가운데 남성의 성기를 연상시키는 돌기들은 이러한 남성혐오와 더 나아가 남성성에 대한 공포에서 출발한 작가의 정서를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출품작 가운데 2004년작인 <영적 재생의 순간(The moment of Regeneration)>이나 2012년작인 <천국으로 가는 계단(Ladder to Heaven)>과 같은 작품들은 원래 쿠사마가 갖고 있는 남성성에 대한 이러한 부정적인 시각과 태도를 담고있다고 볼 수 있다. 


쿠사마에게 어린 시절의 불행과 불안에 대한 중요한 탈출구 가운데 하나는 그림이었다. 작가는 20대 초반 시절부터 일명 폴카점(Polka Dot)이라는 점무늬 패턴과 그물망처럼 사방으로 연속되는 패턴(작가는 이러한 작품을 ‘infinity nets'라고 불렀다)에 몰두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쿠사마가 10살 때인 1939년에 그린 두 점의 연필 드로잉 소품에는 이미 작가의 성숙기에 대표적 표현 기법으로 자리잡는 이러한 점들과 유사한 패턴이나 그물망 형식의 표현들이 나타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쿠사마가 작품화면 속에 점을 도입하는 것을 몇 가지 이유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작가 부모의 가업인 씨앗 배양작업에서 일상적으로 목격할 수 있는 씨앗이나 배양과정에서 뿌려주는 물(방울)을 점이라는 시각적 요소로 환원하여 작품에 도입한 것으로부터 폴카점으로 진화한 것은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해볼 수 있다.  


그녀에게 무한으로 증식되는 점과 그물의 패턴은 곧 우주의 무한함과 영원성을 시각적으로 구현하는 것이다. 1959년 뉴욕의 브라타(Brata)화랑에서 열린 첫 미국 개인전에서 쿠사마는 자신의 ‘그물’이 곧 자신의 과거를 요약하는 것이라고 말했다(이 전시에서 도널드 저드는 쿠사마의 그물 작품 한 점을 구매하였다). 어린 시절의 불우한 환경을 마주하는 어린 소녀의 무의식적 방어기제는 화면 속으로 빠져들어가서 현실을 이탈하는 환상과 공상을 무한대로 증식시켜 나아가는 것이었을 거라는 점은 쉽게 짐작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전시에 쿠사마는 회화 100여 점, 조각 8점, 설치작품 6점 내외, 그리고 영상 작품을 출품했는데 출품된 작품들 가운데 2008년작 <infinity net>는 이런 의미에서 쿠사마의 작가로서의 정체성과 작업의 역사를 보여주는 기표 역할을 하는 작품 가운데 하나라고 볼 수 있다. 


남성성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은 성인이 되어서도 여성으로서의 쿠사마를 자연스런 남녀관계로 이끌어주지 못했다. 평생을 통해 쿠사마는 자연스런 이성으로서의 남자친구를 갖지 않았다. 오직 한 번의 예외가 있다면 26살 연상의 미국작가 조셉 코넬(Joseph Cornell)과의 플라토닉한 관계였다고 할 수 있는데, 미술잡지 Artforum과의 인터뷰에서 쿠사마는 그들 둘 사이의 관계가 10년 정도 지속될 수 있었던 이유는 쿠사마가 성적 접촉을 싫어하는데 마침 코넬이 성불구였기 때문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의 관계는 쿠사마에게 정신적으로 적지 않게 도움이 되었으며 1972년 코넬이 사망하자 쿠사마는 심한 마음의 상처를 입어서 지친 몸을 이끌고 이듬해 일본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에 앞서 쿠사마가 27살인 1957년 미국으로 건너가게 된 데에는 미국의 케네스 칼라한(Kenneth Callahan)과 여류화가 조지아 오키프의 역할이 결정적으로 작용하였다. 대학에서 일본화를 공부한 쿠사마는 당시의 일본미술계의 위계적 질서와 도제적 수업분위기에 실망을 느끼고 있던 차에 1955년 우연히 오키프의 화집을 발견하고 그녀에게 편지와 자신의 수채화 작품을 보냈다. 동시에 쿠사마는 칼라한에게도 자신의 작품과 편지를 보냈는데 답장을 기대하지 않았던 쿠사마에게 오키프는 격려의 편지를 보내왔고 칼라한은 쿠사마의 작품에 매료되어 이듬해 시애틀에서 그녀의 전시회를 열수 있도록 주선해주었다. 쿠사마는 이 일에 고무되어 마침내 1957년 제대로 준비되지 않는 채로 일본을 뒤로하고 미국으로 향했었다. 고향을 떠나기 전 쿠사마는 집 뒤편 강둑에서 그때까지 제작했던 수천 점의 작품들을 불태워버리며 미국에서 보다 나은 작품 활동을 하겠노라는 비장한 결심을 하였었다.


시애틀에서 한 해를 머문 뒤 쿠사마는 뉴욕으로 이주하였는데 곧바로 대담한 작품 활동을 전개하면서 현지 작가들과의 교류에 돌입하여 당시 뉴욕의 아방가르드 미술계의 주류에 편입된다. 1961년 쿠사마는 도널드 저드와 에바 헤스가 살던 건물로 이사하였고 그 일을 계기로 이 작가들과 깊은 친분을 쌓게 되는데 특히 에바 헤스는 쿠사마와 절친한 관계를 맺게 된다. 자서전에서 쿠사마는 자신이 이 때 미국으로 건너가지 않았더라면 오늘날의 쿠사마 야요이는 없었을 것이라고 회상하였다. 


쿠사마의 평면과 입체 작품에서 드러나는 공통적인 특징은 반복과 그로부터 형성되는 일정한 패턴이 무한으로 확장된다는 점이다. 이러한 작품의 성격은 부분적으로 팝아트적 특징을 보이기도 하고 다른 측면에서는 환각에 입각한 초현실적인 성격과 단색조의 대형 화면에 기계적인 반복을 전면적으로 작품에 적용하는 면에 있어서 미니멀아트의 특징을 보이기도 한다. 1963년부터 쿠사마는 거울을 이용하여 작품이 차지하는 공간의 볼륨을 무한대로 확장시킴으로써 확산을 통한 강박증의 희석과 이를 통해 새로운 미학적 의미의 발견으로 이어지는 작품의 여정을 수립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쿠사마의 작품은 주제면에 있어서 다분히 개념적이면서 내용적으로 페미니스트적인 특징을 보이는데 후기로 올수록 점차 반복에 의한 주제의 객관화(depersonalization)를 통해 어린 시절부터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공포와 불안을 일상의 평범한 소재로 전환시키게 된다. 이번에 출품한 <Infinity Mirrored Room-Love Forever>(1994)나 <Infinity Mirrored Room-Gleaming Lights of the Souls>(2008), <Infinity net>(2008), <My eternal Soul>(2011)과 같은 작품들은 이러한 개념에서부터 출발한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쿠사마가 1960년 전후로 미국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던 시기는 남성 작가 중심으로 활발하게 미술의 담론이 형성되던 시기였다. 클레멘트 그린버그가 1961년 <Art and Culture>를 출간하여 젊은 작가들의 전위적 실험미술을 옹호하였고, 플럭서스 운동에 가담한 백남준이 뉴욕에 도착한 것은 1964년이었다. 같은 해에 로버트 라우센버그는 미국인으로서는 최초로 베니스비엔날레에서 대상을 수상하였다. 이 시기에 쿠사마도 팝아트, 설치미술, 퍼포먼스 등의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였으며 1965년에는 록펠러재단에서 지원하는 창작지원금을 받기도 하였다. 쿠사마는 그 당시 작품에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버리듯이 창작에 몰두하였는데 이번에 출품된 <I'm Here, But Nothing>과 같은 설치작품은 쿠사마가 그 무렵 미국의 작업실에서 작품 제작에 집중하면서 사방 벽과 천정까지 모두 점들로 뒤덮이는 환각을 체험한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작품으로 탄생시킨 설치 작품이다.


1966년 쿠사마는 베니스비엔날레 행사장 앞 야외에서 <Narcissus Garden>이라는 제목으로 1500개의 플라스틱 공을 설치하고 한 개에 1200리라(약 2달러)에 판매하는 퍼포먼스를 선보였으며 이듬해에는 미국뿐 아니라 유럽 여러 나라에서 <Body Festival>이라는 주제로 누드 인물들을 통해 보디페인팅 형식으로 작품을 펼쳐 보여주는 해프닝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뉴욕의 주요 장소에서 벌인 이러한 해프닝 작업은 뉴욕 미술계뿐 아니라 일반인들과 미디어의 주목을 끌었다. 여기서 더 나아가 1968년 쿠사마는 영상 작업에 착수하여 <Kusama International Film Production>이라는 회사와 <Kusama Enterprise>라는 프러덕션을 설립하기도 하였으며 베트남 전쟁 참전 반대운동으로 누드 퍼포먼스를 기획하기도 하면서 당시의 동료작가들과 미디어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쿠사마 야요이는, 그녀를 직접 만나본 사람들의 말처럼 미디어와의 접촉에 매우 민감하며 상당히 정성을 들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신의 작품을 연상시키는 점무늬 의상에 오렌지색이나 ,코발트색과 같은 강렬한 색상의 가발을 쓰고 동그랗게 뜬 눈으로 정면을 응시하는 작가의 연출된 듯한 모습은 작가의 강한 자아와 정신성을 느끼게 해준다. 그리고 이러한 그녀의 태도로 인해 미디어는 그녀를 사실적으로 보도하면서도 부분적으로 신비화하는 경우가 생겨나게 될 수도 있다. 쿠사마는 작품활동 뿐 아니라 사생활에서도 미디어의 주목을 받을 만한 요소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 작가는 일찍이 뉴욕에서 활동할 때부터 작업도중 과로로 정신적 문제가 발생하여 종종 병원신세를 지고 1973년 일본으로 돌아온 뒤에는 자진하여 정신병원에 입원하여 그곳에서 자품활동을 이어가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스토리는 작품의 내용과 관계없이 독자나 시청자들에게 호기심과 흥미를 유발하기에 충분한 것이다. 


쿠사마의 정신 상태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다. 쿠사마의 작가로서의 행적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이들은 그녀의 어린 시절에서부터 이어진 정신적인 위기와 고통을 창작활동을 통해 극복해낸 점을 높이 평가하지만, 이와 반대로 그녀의 지나치리만큼 연출된 듯한 미디어와의 접촉 모습이 작품을 떠나서 작가의 개성에 집중하게 하는 고도의 마케팅 전략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갖는 이들도 있다. 일찍이 쿠사마가 23세 때인 1952년 마츠모토 시민 회관에서 열린 전시에서 나가노 대학의 정신 의학 교수인 니시마루 시호 박사는 쿠사마가 정신질환이 있다는 진단을 내렸었다. 그리고 1962년 뉴욕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던 쿠사마는 주변의 작가들이 자신의 작품을 모방한다는 과대망상에 사로잡혀 자신의 작업실 창문을 가리고 작업을 하기도 하였으며 결국 신경쇄약으로 병원신세를 지기도 하였다. 자서전에서 쿠사마 자신도 스스로의 정신 상태에 대해 문제가 있었음을 고백적으로 서술하여왔고 그 때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미국에서 고국으로 돌아와서는 자진하여 도쿄의 정신병원에 입원하여 생활하기도 하였다. 


뉴욕에 머물던 동안에 1970년 잠시 일본을 다녀간 쿠사마는 이 무렵부터 작품활동과 함께 자신의 삶에 대한 기록을 정리하기 시작하여 1978년 <Manhattan Suicide Addict>라는 첫 소설을 발표하게 된다. 이번에 출품된 영상작품 <Manhattan Suicide Addict>는 이 환각적인 자서전적 소설을 기반으로 제작된 영상작품이다. 이 무렵부터 쿠사마는 작품제작보다 문학활동에 시간을 더 많이 쏟게 되며 소설과 시에 몰입하여 많은 작품들을 출간한다. <Manhattan Suicide Addict> 이외에도 쿠사마는 최근까지 수십 편의 시와 소설, 그리고 시화집 등을 출판하였다. 

1980년대 말부터 쿠사마의 작품은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되고 1966년 베니스에서 퍼포먼스를 벌인 지 27년만에 마침내 1993년 일본 대표로서 공식적으로 베니스 비엔날레에 참가하게 된다. 그 후 쿠사마는 타이페이, 시드니, 발렌시아 등 세계 곳곳의 도시에서 열리는 수많은 비엔날레 행사에 초청을 받았다. 쿠사마는 이제 이러한 활발한 활동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는 것은 물론이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술관에서 초대전을 개최하게 되었으며 일본 교육부와 외교부 장관상을 받을 뿐 아니라 2003년에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예술문화훈장을 받기도 하였다. 


쿠사마의 작품 제목에서 자주 쓰이는 단어들을 발췌해보면 Love, Soul, Forever, Eternal 등이 발견된다. 이러한 단어의 조합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표현은 영원한 사랑, 정신적인 사랑, 사랑의 영원성, 무한한 정신세계 등인데 쿠사마의 작품들 역시 작가가 관심을 두는 주제인 이러한 표현의 범위 안에서 ‘예술에 내재한 진리’(truth in art)의 추구를 위해 반복적으로 창작되어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쿠사마는 판화 작업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몇 년을 주기로 자신의 판화집 총목록을 책으로 펴내기도 하였다. 쿠사마는 자신의 판화 작업을 작품 속의 점이나 그물망이 무한하게 확장되는 것처럼 작품이 판화기법을 통해 수적으로 확장되는 것과 유사한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다. 


쿠사마의 작품들은 평면과 입체를 가리지 않고 언제나 점으로 덮여 있어서 역설적이게도 단순하면서도 복잡하고, 명쾌하면서도 모호하다. 반복되는 점과 그물망 무늬는 매우 노동집약적이고 강박적이어서 때로는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명랑한 리듬감과 묘한 에너지의 발산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이러한 쿠사마의 작품들은 얼핏 보기에 누구나 따라할 수 있을 것 같은 친근함이 있지만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오랜 연륜에 의해 이루어진 단순함의 무게를 쉽게 따라할 수 없다는 것을 실감하게 해준다. 


1960년대와 70년대 초반 미국에 머무르는 동안 쿠사마는 평론가들과 미디어의 주목을 받았지만 적극적으로 상업적 활동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1990년대부터 점차 미술시장의 주목을 받아 2008년 크리스티 경매에서는 그녀의 작품이 510만 불에 낙찰됨으로써 당시로서는 살아있는 여성 작가 가운데 가장 비싼 작품으로 기록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쿠사마는 점차 상업화랑으로부터 초청을 받기 시작하여 세계적으로 유명한 가고시안 화랑에서 2009년 개인전을 개최하고 최근까지 이 화랑의 전속작가로 활동하였다. 


쿠사마의 작품들은 화화나 조각의 성격과 함께 디자인의 요소를 지니고 있다. 쿠사마의 작품에서 읽을 수 있는 디자인적인 요소는 그녀의 작품을 미술관이나 화랑을 벗어나 백화점의 디스플레이나 유명 디자이너의 제품에 접목할 수 있게 해주기도 한다. 실제로 쿠사마는 2012년 5월 루이비통의 아트디렉터 마크 제이콥스와 협업하여 가방과 손지갑 등에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물방울 무늬를 응용한 제품들을 출시하기도 하였다.


최근 쿠사마는 바쁜 해외 전시 일정 가운데에도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회문제에도 적극적으로 관심을 표현하고 있다. 2013년 도쿄도 미나토구 롯폰기 힐즈에서 열린 롯폰기 아트 나이트(Roppongi Art Night)에서 쿠사마는 자신의 모습을 거대한 풍선으로 형상화한 <야요이짱>과 개를 형상화한 <린린>이라는 작품을 선보였다. 작가는 이 작품들을 통해 사랑과 예술을 믿어온 지난날들에 대해 이야기하며 “지진과 쓰나미, 원전 사고 등으로 인해 최악의 상황에 있지만 커다란 희망을 갖고 우리들의 인생을 살아가자”고 호소하였으며 “나의 물방울은 사랑과 생명에 대한 소중함을 표현한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작가 스스로가 말한 것처럼 평생 자신을 붙잡아 온 환각과 불안을 이겨내고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으로서 쿠사마는 고령에 악화된 건강을 이겨내면서 현재까지 그것을 물감과 펜과 연필로 묘사해내는 작업을 꾸준히 지속해왔다. 그렇게 함으로써 쿠사마는 마침내 어린 시절부터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환각과 불안을 작품 속에 녹여 넣어 자신의 의지로 통제하고 조절할 수 있게 되었으며 여기서 더 나아가 자신의 작품이 창조적 표현이나 치유와 위안의 상징으로 우뚝 설 수 있게 만들어놓은 것이다. 2012년 7월 자신의 고향인 일본 나가노 현 마쓰모토 시립미술관에서 열린 개인전 ‘영원의 영원의 영원(永遠の永遠の永遠)’전에 참석한 구사마는 휠체어를 탄 상태에서 자작시를 읽으며 거기에 멜로디를 붙여 노래를 부르기도 하였다. 쿠사마는 여기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필사적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다만 나이를 이렇게 먹어버린 것이 유감이지만…. 저는 오랫동안 작품을 하고 싶습니다.”라는 인사말을 전했다. 이러한 쿠사마의 작품 이력을 살펴보고 나면 이번 대구미술관에서 개최되는 쿠사마 야요이의 전시는 평생을 통해 개인적, 사회적 역경을 극복한 노대가의 열정과 의욕을 가시화한 더욱 더 의미 있는 전시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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