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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하랄드 제만’ 기억에 대하여

유진상

금년 베니스에서는 비엔날레와 더불어 열린 프라다파운데이션의 전시가 큰 이슈를 불러 일으켰다. 1969년 스위스 베른에서 열린 하랄드 제만(Harald Szeemann, 1933-2005)의 전시 ‘태도가 형식이 될 때’를 그대로 재연해 낸 것이다. 이 전시는 컨템포러리 아트 전시기획의 근본적인 틀을 바꾼 것으로 평가된다. 하랄드 제만은 이 시기의 가장 창조적이고 새로운 예술가들의 작업실을 찾아다니면서 이들이 이전의 예술가들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창작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다시 말해 이들은 서로를 잘 알지 못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종의 태도를 공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태도를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창작의 맥락을 중요시 한다.

2. 비용이 거의 들지 않는, 아무데서나 구할 수 있는 재료들을 사용한다. 

3. 작업에 대한 판단은 전적으로 관객의 몫으로 남긴다.

4. 전시공간에 한정되지 않는 작업을 한다.


등이다. 1 × 1 m의 사각형 벽면 표피를 깨내는 작업을 하던 로렌스 비너에게 작업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묻자 그는 그 사각형이 어느 곳에서나 누구나 어떤 벽 위에라도 다 만들 수 있는 작업이기 때문에 몹시 흥분된다고 대답했다. 전깃줄을 전시장에 여기저기 이어놓은 알랭 자케에게 왜 이런 작업을 하느냐고 묻자, 한참 작업방법을 설명하던 그는 그렇게 하면 안될 이유가 없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하랄드 제만은 이 시기의 작가들이 공유하고 있던 태도가 이미 형식으로 가시화되어 있었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는 이 전시를 기획했다. ‘태도가 형식이 될 때’가 충격적이었던 이유는 단순히 전시 스타일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예술의 가장 지적이고 정신적인 형식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라는 메시지를 당시의 세계에 던졌기 때문이었다. 이 작가들은 어떠한 형태의 강요, 설득, 설명, 이해도 배제했다. 작가들에게 무엇을 묻던 이들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은 당신이 스스로 생각해 보라는 것이었다. 이 작품들이 쓸모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건, 아니면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건 그건 관객이 알아서 할 일라는 것이다. 이들의 태도는 예술이 무엇인가에 대한 당대의 중요한 물음으로 남았다. 예술은 사다가 집에 걸어놓는 것뿐만 아니라, 관객이 평생 동안 살아가면서 기억해야 할 어떤 것이기도 한 것이다. 여기서 예술작품은 바로 그 기억을 촉발시키는 장치와도 같은 것이다.


이 전시가 흥미로운 점은 전시 전체의 아카이브가 그대로 재현되었다는 점에 있다. 프라다파운데이션과 같은 민간재단에서 이런 전시를 했다는 것도 놀랍지만, 전시 전체에 걸친 리서치와 자료들, 편지들, 드로잉들과 메모들의 복원은 놀랍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이 중 상당수는 미국의 게티 파운데이션 리서치 아카이브에서 온 것들이다. 이 역시 민간재단이다. 규모와 내용, 그리고 전시방식을 보면 그 정교함과 집요한 컬렉션에 그저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이번 전시는 이들을 매우 두꺼운 도록으로 집대성했다. 


예술에 대한 기억, 그리고 보존우리가 예술에게 대해 갖는 태도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우리가 죽는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인간의 진화에 있어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기억에 대한 것이 아닐까 한다. 실상 현대 기술의 가장 중요한 부분 역시 기억과 기억의 재생에 대한 것이다. 저장기술과 빅데이터 처리기술은 우리가 기억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 진화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 기술에 있어서도 가장 어려운 부분은 기억의 선택, 보존에 대한 것이다.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잊을 것인가? 그리고 우리가 경험하고 살았던 사건과 사실들을 어떻게 남기고 재생시킬 것인가? 기억의 대상은 비즈니스와 산업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의 존재와 관련된 것이기도 하다. 


대한민국이 존재하기 시작한지 이제 80년이 되어간다. 이제 한 인간의 생애와 맞먹은 시간이 흐른 것이다. 인간이 예술에 관심을 갖는 것은 그것이 인간이 존재하는 이유에 대해 뭔가를 알려주기 때문이다. 44년 전 로렌스 비너는 그 정보를 가질 수 있을지 없을지는 우리에게 달려있다고 말했다. 기억과 정보에 대한 태도는 그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알려준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중요한 예술적 경험들에 대해 44년 후 우리도 무언가를 말할 수 있을까? 우리도 인간이므로 우리에게도 기억을 다룰 능력이 필요하다. 정부가 못한다면 민간에서라도 나서야 할 것이다.



유진상(1965- ) 프랑스 파리8대학 영화학과 석사. 디자인네트워크아시아(DNA) 예술감독, 서울국제미디어아트비엔날레 총감독 역임. 현 계원조형예대 시각예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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