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영
헌 술을 새 부대에 담은 과오
이선영(미술평론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을 개관한지 한참 만에 방문한 나로서는, 개관 전시에 관련된 이런저런 기사와 무성한 이야기를 접하고, 먼저 미술인들이 그렇게 미술에 관심이 많은지 적잖이 놀랐다. 애써 전시를 하고 책과 잡지를 만들고 세미나를 해도 관련자 몇몇만 모이는 행사만 봤던 나로서는 더욱 그렇다. 미술계의 자기참조적이고 자기지시적인 풍토에 거슬러, 어떤 사안에 대해 다들 한마디씩 할 수 있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미술관을 둘러싼 담론들에서, 타자에 무관심한 냉소적인 분위기 와중에도 미술계 돌아가는 일에 관심은 있구나하는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좋지 않은 사건으로나마 공론의 장이 형성되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특히 말이 많이 나온 ‘자이트가이스트’전은 과연 놀라웠다.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으로 기획된 이 전시는 작가 39명의 작품 59점을 고른 것으로, 전시제목으로 보자면 ‘시대정신’--어느 시대의 무슨 정신인지는 모르겠으나--을 반영한 것이어야 했다.
전시 주제와 관련된 작품 선정은 둘째 치고, 전시장 모서리까지 다닭다닭 붙여 놓은 작품들은 실체보다는 맥락의 중요성을 다시금 일깨운다. 전시 기획자는 국립현대미술관의 소장품 중에서 ‘시대정신’을 담은 작품들이 너무 많아서, 정말 하나도 뺄게 없어서 전시의 완성도와 무관하게 이것저것 다 싸안고 온 것일까. 멀리는 국전, 가까이는 공모전이나 아트샵, 대학 과제 전이나 졸업 전 처럼 끼리끼리 모여 하는 아마추어 전시 같은 촘촘하고 답답한 작품 간격은, 일단 초대작가와 관객에 대한 배려가 보이지 않는다. 다른 전시들이 현대예술 전시를 위해 개조된 공간에 걸 맞는 면모를 나름대로 보여준 반면, 시대정신 전 기획자의 뇌리 속에 있었을 모종의 계보는 전혀 객관화되지 못했다. 관객은 그렇게 무더기로 보여 진 59점의 작품에서 어떠한 흐름도 파악할 수 없었다. 그때그때의 문화 정치적 흐름을 타고 수집되었을 우연적 대상들로 ‘시대정신’이라는 필연성을 끌어내기에는 애초에 무리가 따른다.
그래서 소장품만 아니라, 소장 작가의 다른 작품도 끼어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묘수도 역부족이었다. 이 전시에서 시대정신은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아무 내용이 없는 그럴듯한 틀 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이 아니라면 ‘시대정신’은 전시 작품의 상당수를 차지한 특정 미술대학의 ‘학풍’을 나름대로 반영한 것일지도 모른다. 미술관의 새로운 얼굴을 알리는 대표전시는 엉성하게 조직된 대부분의 그룹전처럼, 전시제목이나 개념과 무관하게 각각의 작품들은 낱낱이 흩어지고 있었다. 작품들이 묶여지지 않더라도, 전시 관련 텍스트가 이를 보충해줄 수도 있지만, 관객은 저 높디높은 아카데미에서 초빙된 기획자가 제시했어야할 미학적 담론을 아직 읽지 못했다. 아마도 어떤 출중한 학자라도 이 작품 목록들로 어떤 일관성 있고 구체성을 띈 담론은 끌어내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소장품만으로 새롭게 출발할 미술관의 방향성을 집어낸다는 발상 자체에 무리가 있다.
물론 ‘국립’자 들어가는 큰 미술관이 소장품으로 기획전을 하는 것은 관례상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럴 경우, 소장품들이 질과 양 면에서 선언문적 성격을 띈 전시가 가능하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을 충족시켜줄 정도가 되어야 한다. 그렇지 못할 때는 기존의 소장품이 아니라, 미래의 소장가치가 있는 작품을 발굴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시대정신’에 걸 맞는 무언가가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시민과 미술인들이 오랫동안 기대했던 것과 달리, 현실에서 벌어진 것은, ‘시대정신’이라는 엄청난 기대감을 주는 코드로 수장고에서 꺼내진 작품들의 면면이 말과 사물 간의 거대한 간극을 느끼게 한다는 것이다. 그나마 ‘시대정신’을 가장 직접적으로 표현한 두 작품--임옥상의 [하나됨을 위하여], 이강우의 [생각의 기록](한겨레신문 11월 16일자 참조)--이 자체 검열, 또는 사전 검열에 의해 빠진 점은 좁디좁은 기획의 입지를 확인시킨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전체 소장품의 면면을 알 수 없는 이들로서는 ‘시대정신’이라는 개념으로 고를 작품이 부족했거나, 아니면 잘못 골랐다고 밖에 생각밖에 안 든다.
그다음으로 화제가 된 것은 특정 대학출신의 작가들이 전시작품의 82%(한겨레신문 11월 15일자 참조)를 차지한 점이다. 그렇게 일관성 없이 나열된 작품들에서 특정 학맥을 찾아낸 이들의 시각도 놀라울 따름이다. 그러나 달이 아니라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본 그들의 시각을 속 좁은 피해의식의 산물로만 치부할 수 있을까. 기획자는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출신학교는 고려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아마 사실일 것이다. 우리나라처럼 학맥에 민감한 곳에서 알고서 그런 무모한 선택을 했겠는가. 그러나 그것이 기획자의 의도가 아니었다는 점이 더 큰 문제이다. 의식이 아니라 무의식이, 의지가 아니라 환경이 더 문제다. 특정대학에 대한 배려가 아니었다면, 기획자가 선택해야만 했던 작품 풀, 즉 아카이브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 기획자가 골라야 했던 작품 군(소장품)에는, 작게는 미술학원 강사부터 크게는 대학 교수직까지 크고 작은 현실적 혜택을 독차지하다시피하는 학벌 중심의 사회가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새롭게 서울에서 출발하는 전시가 기존의 계층적 구도를 걸러내지 않은 채 그대로 노출했다는 점이 대다수 미술인의 공분을 자아낸 것이다. 그것은 이미 우리가 극복했다고 믿어진 것들이 아직도 건재하다는 것에서 오는 불안감이다. 요즘처럼 역주행하는 시대의 미술 판 버전이라고나 할까. 권위주의, 즉 기무사 앞을 지키던 헌병들은 우리의 뇌리에서 아직 사라지지 않은 것이다. 미술관에서 보여 준 그대로를 받아들인다면, 모 대학을 꼭짓점(또는 이항대립의 한축)으로 하는 계층적 구조를 그대로 재현한 이 전시의 ‘시대정신’은 갖가지 도그마로부터 자유로워야 할 미술계에 더 깊이 뿌리박힌 학벌중심의 ‘현실주의’인 것이다. 기존 가치의 해체/구성을 통해 새로운 비전을 보여주지 못하고, 단지 기존가치를 반영한 것에 머문 이 전시의 실패는 결국 미술관 책임이다. 개관 전처럼 중요한 전시는 미술관의 자체 역량에서 나오면 더욱 좋겠지만, 그러기 힘들 때 외부에 기획을 맡길 수는 있다.
최근 국립현대미술관은 ‘올해의 작가’를 비롯하여, 외부의 참여를 확대시킴으로서 큰 호응을 이끌어낸 바도 있다. 사실, 2013년 올해의 작가전도 특정 대학 출신이 75%를 차지했지만, 작품들이 받쳐 주었기에 뒷말이 나오지는 않았다. 전시기획이나 과정을 외부로 개방할 경우, 외부인사의 자율권을 충분히 존중해 주어야 하지만, 그렇더라도 미술관 측에서 최종 검증을 했어야 했다. 그래서 시대착오적인 전시로 물의를 일으킨 외부 기획자 뿐 아니라, 미술관 내부 인력의 학맥 문제까지도 거론되고 있는 것이다. 고립된 성루처럼 보였던 과천의 국립 현대미술관에서 그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 시민과 미술인들은 큰 관심이 없었다. 그것은 미술과 사회 모두에게 손해였다. 그러나 이제 본관 못지않은 규모로 분관이 서울 한 복판에 자리하면서, 손으로 하늘을 가리는 일을 더 이상 할 수 없다는 점이 이번 사태의 교훈이라 할 것이다.
출전; 컨템포러리아트저널(1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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