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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코드-空 전

이선영

아시아 코드-空 전

(2013. 10.11—12.22, 소마미술관)

 

이선영(미술평론가)

 

일본, 중국, 인도, 베트남, 싱가포르, 한국 등, 이 전시에 참여한 아시아 작가 13인의 작품들을 관통하는 주제는 공(空)이다. 여기에는 공에 대한 동양사상적 맥락은 물론, 전 지구적 자본주의가 탈중심화로 선회하면서 역사적 무대의 새로운 주인공이 된 아시아, 그리고 그들 예술의 비워진 중심이 있다. 이 전시의 큐레이터 박윤정은 공의 다양한 의미 중에서 ‘zero’를 선택한다. 공의 어원인 산스크리트어 수냐(sunya)처럼, 비어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비어있음은 부정적이고 수동적이기 보다는 ‘주체와 객체, 존재와 비존재의 구분이 없음’을 말하며, ‘空에서 궁극적인 실재가 발견된다는 의미’에서 ‘적극적 존재방식’을 시사한다. 전시된 작품들은 주/객체의 경계가 와해된 무한한 자연과 종교적 우주적 공간부터 일상 공간, 무(無)에서 시작하여 무로 끝나는 영겁의 시간과 그 한토막이라 할 수 있는 구체적 역사, 그리고 이렇게 다시 규정된 시공간의 맥락에 있는 인간상 등이 두루 포진해있다. 

 

 

노상균,Constellation 8-Taurus-_100904-(matt-wine)

 

이 전시는 오래되었으면서도 새롭게 해석될 여지가 많은 주제를 펼침에 있어 영상이나 설치 등, 현대적 양식이 많이 활용된 점이 흥미롭다. 공이라고 해서 관념적 초월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내포적 깊이와 외연의 폭이 넓은 주제의 전시가 빠지기 쉬운 함정 중의 하나는, 관념에서 관념으로 평행 이동할 뿐인 창백하고 빈약한 작품들이 동어 반복적으로 나열되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인에게 친숙한 다양한 시청각 매체가 활용된 이 전시는 추상적 개념일수록 구체화가 필요하다는 점, 그리고 미술은 가장 구체적인 언어라는 점을 잊지 않는다. 공의 핵심으로 설정된 0이 동양에서 먼저 발견되어 서양으로 전파되었고, 0과 1이라는 이진법에 기초하는 디지털 언어를 가능하게 해주었다는 점에서 오래되면서도 새로울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공은 나를 비우면서 동시에 객체도 비우고, 주/객체의 이원론으로 성립된 현대세계를 상대화한다. 공은 이원론의 한편을 이루는 없음이 아니라, 있음 자체를 이루는 미지의 것들을 말한다. 그것은 전적인 시작, 즉 순수한 자기 동일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적 관계들’(데리다)로 이루어진다. 이 전시를 이루는 현대적 조형언어 역시 주체나 객체에 앞선 담론적 구성물로, 항구적인 구성의 과정 중에 있다.  공에 가장 직관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것이 자연이다. 권부문의 사진, 육근병의 영상, 김태호의 설치작품에는 공의 살아있는 무대라 할 수 있는 자연이 별다른 연출 없이 표현된다. 그들은 자연을 대상화가기 보다는 그것과 하나가 되려한다. 풍요의 이면에 그만큼의 모순이 쌓여있는 문명에 비해, 모든 것을 다 내려놓은 듯한 자연은 풍요로우면서도 평화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궁극적 실재로 간주된 신과 하나가 됨으로서 사랑과 신비를 추구하는 서구의 종교와 달리, 공은 무신론 또는 범신론에 가깝다. 초인격적인 존재나 그것의 반영물로서의 인간 또는 세상을 가정하는 서양과 달리, 동양은 만물에 내재되어 있는 신성을 추구한다. 권부문의 [구름 위에서]는 장거리 여행 중 비행기에서 찍은 하늘 사진들을 압축적으로 영상화한 것이다. 작가는 스스로 하나의 프레임이 되어 순간들이 집적된 영원의 상을 건져 올린다. 수많은 시공간의 층위들이 마치 한 장면처럼 펼쳐지면서 일련의 수평선이 보이는데, 그것은 구름이 만들어낸 허상이다. 이 가상적 경계 위에서 작가와 관객은 숭고를 느낀다. 

 

육근병의 카메라는 작업실 주변을 기록한다. 여기에서도 현대의 스펙터클을 특징짓는 복잡한 편집이나 꾸미기는 발견되지 않는다. 작가는 그저 우주에서 일어난 조그만 사건의 발견자로 자신을 한정한다. 비 내리는 숲이나 난간, 창문 주변에서 들을 수 있는 다양한 소리들도 들려온다. 여기에 심장소리가 가세한다. 어두운 전시장은 빗소리, 바람소리, 새소리, 심장소리를 더욱 선명하게 들리게 한다. 자연이라는 모태는 모든 유기체들이 되돌아가야 할 무덤이기도 하다. 삶과 죽음을 동시에 연상시키는 그의 작품은 서정적이면서도 비장하다. 김태호는 캔버스와 흑경, 나무판을 이용하여 인공적 풍경을 연출한다. 여러 크기의 캔버스는 지우기 또는 덮어쓰기를 반복한 결과 시시각각 오묘한 빛을 발산하며, 물처럼 깔린 검은 거울에 반영된다. 산과 물의 이미지는 자연에서는 발견될 수 없는 추상적 평면들로 구성된 것이다. 그것들은 구상이면서도 추상이고, 추상이면서 구체적이다. 현대 미술사를 압축하는 듯한 조형어법은 움직이지 않으면서도 움직임을 담고 있으며, 텅 비어있으면서도 채워져 있다. 

 

공을 강조하기 위한 전략 중의 하나는 차원의 축소이다. 탈색도 그 예이다. 홍승희는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동명 소설 [깊이에의 강요]에서 제목을 차용하여, 공간을 하얗게 만든다. 탈색된 공간은 물리적이고도 정신적인 깊이를 지우며, 하얀 표면들로 전치된 공간은 주름 잡혀 만들어진 새로운 깊이를 드러낸다. 80년대 이후에 태어나 물질적 풍요 속에 개인주의를 구가했던 중국 젊은이들에 속하는 가오 레이의 작품에는 축소모델의 세계 같은 내밀한 시점이 있다. 구멍을 통해 볼 수 있는 형광 라이트 박스 안의 인공구조물, 그리고 감옥 같은 하얀 그리드 공간 속에 놓여 있는 고래 그림이 그렇다. 중국의 어느 세대보다도 물질적 풍요와 개인적 자유를 누렸지만, 그 둘은 누리면 누릴수록 결핍을 자아낸다. 여기에서 공은 이미 있기 보다는 도달해야할 가치로 다가온다. 수보드 굽타와 노상균의 작품은 일상에서 우주로 도약한다. 

 

 

Subodh Gupta_Installation View at Arario Galelry Cheonan, 2010

 

수보드 굽타가 선택한 사물은 인도에서 흔히 사용되는 그릇이다. 전시장 벽에는 황동단지 68개가 붙어있는데, 안쪽은 칠흑같이 어두워서 그릇의 입구가 또 다른 우주로 통하는 입구처럼 보인다. 이러한 이국적 오브제는 삶과 종교, 세속과 성스러움이 공존하는 사회를 연상시킨다. 작품으로 선택된 사물은 전통과 현대의 공존 또한 덧붙인다. 노상균도 싸구려 물건을 우주적 차원으로 고양시킨다. [성좌] 시리즈는 별자리를 이루는 점들을 시퀸으로 동심원 구조로 연장하여 만든 형상인데, 마치 현미경 아래에서 보이는 미생물의 번식같이 보인다. 소우주와 대우주는 일상과 이상처럼 중첩된다. 범주와 차원들 간의 경계가 소멸되어 만들어진 것이 바로 공이다. 시간은 공간보다 경계가 소멸되는 과정을 더 명확히 보여준다. 미야지마 타츠오는 그가 잘 활용하던 LED 대신에, 미술관 유리벽에 붙인 시트지로 햇빛과 관객의 움직임에 따라 변화하는 숫자들을 보여준다. 여기에는 모든 것들이 숫자처럼 연결되어 있고 이러한 변화만이 영원하다는 메시지가 실려 있다. 와타나베의 [하나의 풍경_어느 여정]은 무에서 시작해서 무로 끝나는 긴 시간의 여정을 식기들이 깨졌다 복구되는 컴퓨터 그래픽 이미지를 무한 반복한다. 

 

미야지마 타츠오와 와타나베의 작품에 낙수물이 바위를 뚫는 듯한 장구하고도 무기질적인 시간이 내재한다면, 수잔 빅터, 준 응우옌-하츠시바, 야나기 유키노리의 작품 속 시간성은 제국주의의 역사 속에 부침했던 아시아 국가들의 비극이 은유적으로 드러난다. 이 역사의 시간 속에서 타자로 간주되었던 아시아의 시각이 있다. 그것은 오리엔탈리즘처럼 서구에 의해서 이국적으로 타자화 된 시각이 아니라, 동일자를 상대화하는 대안적 시점이다. 수잔 빅터의 [화려한 술책으로 가려진]은 8미터 높이의 미술관 로비 공간에 설치된 샹들리에 세트이다. 샹들리에는 화려한 외관을 가진 듯 하지만, 실은 깨진 유리조각들로 만들어져 있으며, 모터에 의해 이리저리 움직이기에 위기감을 준다. 높은 곳에 매달린 이 시대착오적 장식물은 식민주의 문화의 잔재로 타의적, 자의적으로 서구를 추종했던 산물이다. 주변부들이 해바라기처럼 바라보았던 휘황찬란한 중심은 깨진 조각들로 얼기설기 엮인 채 빈 중심을 선회한다. 

 

준 응우옌-하츠시바는 영상 작품 [해피 뉴 이어 : 메모리얼 프로젝트 베트남 II]에서 보트 피플로 알려진 베트남 난민의 역사적 체험이 깔려있다. 베트남의 흥겨운 전통놀이 또는 제의는 수장을 떠오르게 하는 공간 속에서 액체 매질의 저항을 받으며 이루어진다. 수중의 퍼포먼스는 색, 소리, 율동 등이 어우러지면서 서서히 진행되는데, 용춤과 축포의 향연은 새해 명절날 벌어진 뜻밖의 전쟁 도발로 수 만 명의 희생자를 낳은 역사를 상기시킨다. 여기에서 공은 이데올로기의 대립을 포함한 역사적 허무주의와 닿아있다. 야나기 유키노리는 한발 앞선 서구화를 통해 다른 아시아 국가들의 가해자가 되고, 그 반작용으로 다시 피해자가 된 자국의 역사가 있다. 작품 [헌법 제9조]는 다시 제국을 꿈꾸면서 군국주의의 부활을 꾀하는 수단으로 변형된 ‘평화헌법’을 풍자한다. 붉은 네온 글자로 헌법을 써넣은 쓰레기 더미 같은 것들은 법조항의 자의적 해석만큼이나 가해자와 피해자가 수시로 변모하는 국제정치의 상황을 말한다. 1994년에 제작된 그 작품은 현재 빨간 불이 켜져 있는 일본의 국가 이데올로기를 예견한다. 

 

 

FangLijun

 

근대적 진보를 추동해 왔던 직선적 세계관의 끝머리(post-history)에 서있는 인간은 어떤 모습일까. 피 한 방울 없는 차가운 사이보그 같은 와타나베의 [Face-Portrait]는 인간 이후(post-human)의 존재이다. 타인의 시선을 되돌려주지 않는 이 중성적 인물에서 탈색된 피부만이 구체적이다. 포스트모던 이론가 리오타르가 예시하듯이, 세계는 하나의 표면으로 변화하고, 인간 또한 예외가 아니다. 머리가 없는 마네킹에 시퀸을 덮어씌운 노상균의 작품 역시 표면으로 전치된 인간상이다. 하품하는 붉은 얼굴의 민머리 초상으로 엎치락뒤치락하는 중국의 현대사를 냉소적으로 풍자했던 팡 리쥔은 햇빛을 가득 받는 소녀, 구름 위로 솟아난 갓난 아이, 바다를 향해 뛰어가는 소년들을 통해 캔버스를 신생의 에너지로 가득 채운다. 이 인물상들은 객체와 분리되어 객체를 주변화, 도구화 하는 문제적 주체가 아니라, 자연에서 와서 자연으로 회귀하는 공(空)적 인간상을 예시한다. 

출전; 월간미술 2013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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