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영
근대라는 거인의 어깨 위에서
We Have Never Been Modern : 이탈리아 젊은 작가 전(5.8-8.9, 송은아트 스페이스)
이선영(미술평론가)
‘We Have Never Been Modern : 이탈리아 젊은 작가전’은 스위스(2012)와 프랑스(2013)에 이어 송은 아트스페이스에서 세 번째로 열리는 각국의 젊은 현대 미술가들의 소개 전시로, 1965년부터 1980년대 중반 출생의 젊은 작가 22명이 참여했다. 다소간 논쟁적으로 붙은 전시부제는 역사상 유래 없는 보편의 문화를 구가한 근대를 배경으로 한다. 부정어법은 빠져나오고 싶은 만큼이나 엮여 있는 상태를 말한다. 앙투안 콩파뇽이 [모더니티 다섯 개의 역설]에서 예언자들의 어깨에 올라앉은 복음주의자들이 그려진 사르트르 대성당 색유리 그림을 보고 지적했듯이, 12세기 베르나르 드 샤르트르의 책에 있는 ‘우리는 거인의 어깨에 앉은 난쟁이와 같다’는 비유가 근대(거인)와 탈근대(난쟁이)의 관계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콩파뇽은 난쟁이는 거인보다 작지만 거인의 어깨에 올라앉으면 거인보다 멀리 본다는 점이, 현대인이 더 작다는 뜻인가, 아니면 더 똑똑하다는 것인가를 묻는다. 어쨌든 우리는 이제 그 거대하고 위대했던 근대에 거리감을 두고 숙고해볼 만큼 많은 모순을 겪어왔다.
이탈리아의 젊은 작가들이 근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작품으로 풀어낸 이 전시는 ‘모더니티 철회하기’, ‘다수의 세계’, ‘평행 우주’, ‘자연의 법칙’, ‘현재에 대하여 생각하기’ 등 5개 섹션으로 나뉘어져 있다. 장점만큼이나 한계가 많았던 근대성을 반성한다면, 근대가 추동해 왔던 강한 논리, 가령 새로움과 진보, 도구적 이성으로 전락한 계몽과 합리주의, 이성적 주체 같은 근대의 지배적 규범으로 환원될 수 없는 다수의 평행한 세계가 펼쳐질 것이다. 그리고 근대이성에 의해 착취된 자연은 복귀할 것이고, 미래에 담보 잡혀 간과되었던 지금 여기는 주목될 것이다. 이탈리아는 르네상스를 통해 유럽 문화의 보편문법을 형성한 바 있기에, ‘모더니티 철회하기’는 남다른 울림을 준다. 전시에도 등장하는 독재자에 암시되듯이 20세기에 와서 이탈리아는 후발 자본주의 국가로서의 조급증이 독일이나 한국에서처럼 재앙에 가까운 독재체제를 낳은 바 있다. 또한 역사로의 회귀가 일어났던 포스트모더니즘 국면에서 이 오랜 역사의 나라는 ‘트랜스아방가르드’로 반응한 바 있다.
모더니티를 문제 삼는 것은 보편과 개별 사이에서 도출될 수 있는 특수성이라는 점에서, 지금 이탈리아 예술을 알기 위한 무난한 바로미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회화만 빼고 다양한 형식이 혼재된 이 전시는 근대라는 아리아드네의 실이 아니면 파악하기 힘들만큼 모호하다. 그래서 필자도 이탈리아 측 기획자들의 제시한 ‘근대’라는 키워드로 전시를 따라가 보련다. 우선 근대는 획일적인 건축 환경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래서 포스트모더니즘 운동이 건축 분야에서 가장 먼저 일어난 것도 우연은 아니다. 탈근대 역시 기계적이지만, 후자에서는 기계의 구조와 기능적 측면보다는 이접과 욕망의 측면이 강조된다. 프란체스코 아레나의 작품 [3.24 평방미터]는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것들이 세트화 되어 갖춰져 있는 나무상자 집처럼 생겼다. 이탈리아의 정치범이 감금되어 살해된 장소를 실물 크기로 재현한 이 작품은 상자 안에서 또 다른 상자로 들어갈 수 있는 구조이다. 결국은 큐브로 환원된 근대의 ‘살기 위한 기계’가 감금 같은 억압적 기제와 다를 바 없음을 나타낸다.
어항에 담긴 금붕어를 비행기에 태운 파올라 피비의 사진은 어항이나 비행기로 대변될 수 있는 한정된 시스템이 가지는 답답함과 위험성을 풍자한다. 배불뚝이의 착석자세와도 유사한 이미지는 인간이 비행기에 타고 있는 어류에 불과함을 보여주는 듯하다. 인간은 자연이라는 주어진 운명을 벗어나 더 멀리 더 빠르게 더 높게 날아오를 수 있었지만, 이러한 성과는 또 다른 시스템에 종속된 결과이다. 근대적 해방은 종속의 또 다른 측면인 것이다. 정치경제학적 과정에 방점이 찍힌 모더니티에 대한 문화적 반응이 모더니즘이다. 그래서 모더니티와 모더니즘은 완전히 중첩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합리주의적 주체와 예술가적 주체도 차이가 있다. 그러나 근대화가 야기한 분업화, 각 영역의 자율화가 세계를 보는 창으로서의 미술을 자기지시적인 그 무엇, 즉 평면으로 환원이라는 부조리한 진화를 낳은 점은 부정할 수 없다. 몇 년간 닦지 않은 유리창을 종이로 주름 잡힌 벽에 엇겨서 걸쳐 놓은 니코 바셀라리의 작품은 틀과 대상을 다시금 분리시킴으로서 평면의 자기지시적 구조를 해체한다.
MDF 판과 석고를 사용하여 제작된 거대한 퍼즐로 전시장 한 귀퉁이를 덮은 루카 트레비사니의 작품 [메아리를 들으려면 숲에서 소리를 질러야 한다]는 그린버그에 의해 모더니즘의 최종적 귀결점으로 선언된 추상표현주의에 대한 풍자처럼 보인다. 이젤로부터 탈주하여 벽면을 변화무쌍하게 잠식하는 중인 얼룩들은 잭슨 폴록의 회화에서 나타난 바와 같은 주체의 실존적 자유의 흔적이 아니라 일정한 단위구조(코드)가 유희적으로 조합된 산물이다. 슬라이드 프로젝터를 이용하여 색과 빛이 교차하는 장을 연출하는 메리스 안졸레티의 [황금빛, 갈색과 파란색]은 마치 바우하우스의 색채 실험이나 색면 추상이 떠오르기도 하지만, 그 원천은 러시아 성화 및 영화와 관련되어 있다. 여기에는 근대에 물신화된 추상적 시각성이 아니라, 시적인 알레고리와 개인적 서사가 깔려 있다. 10년 넘게 진행해온 모이라 리치의 작품 [53.12.20-04.8.10]은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허문다. 모더니즘에서 전통적 환영은 평면이라는 화면의 현실로 지양, 수렴된 바 있는데,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모더니즘과는 다른 방식으로 양 영역의 경계를 해체한다. 즉물성을 대신하는 것은 허구이다. 모든 것이 허구라면 조작은 더욱 쉬워진다.
사진이나 영상으로 기록된 현실은 이러한 변형을 더욱 용이하게 한다. 갑작스럽게 돌아가신 어머니의 앨범을 뒤져서 사진 속 그때 그곳의 인물로 변장한 작가가 끼어들어 상황을 연출한 위조 이미지들은 시간과 공간, 정체성, 기억 등이 비교적 간단한 기계 기술의 조작으로 변조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녀의 작품은 시공간적 위계질서를 허물고 무차별적으로 횡단, 유목, 융합하는 시대, 즉 편집된 현실이 편재하는 시대를 반영한다. 모더니즘의 물마루인 미니멀리즘에서 시간성은 복귀되었고, 짧은 순간의 명료한 시각적 체험 대신에 몰입적인 현존의 체험이 고양되었다. 시간은 공간에 비해 불확실성을 높이는 요소이다. 진화론이나 진보주의에서는 시간 역시 확실성을 향해 전진했지만 말이다. 근대에 대한 반대급부를 강조하는 이 전시에서 시간성과 역사는 적극 도입된다. 조르조 안드레오타 칼로의 [새겨진 시간]은 파도치는 시간의 흐름을 각인한 기괴한 기둥이다. 원래의 나무 기둥 형태는 잘록한 모래시계처럼 변형되어있다. 이러한 변형은 직선보다는 순환적 시간을 강조한다. 2012년부터 계속 진행해오고 있는 마르게리타 모스카르디니의 작품 [1 x unknown]은 대서양 방벽을 따라 구축되었던 요새 같은 구조물을 영상으로 수집한다. 이 거대한 덩어리들은 하나의 분석적 시점이 아니라 모호한 시간과 몸의 움직임에 호소하는 현대조각처럼 보인다. 명료한 기능주의적 대상을 수수께끼 같은 사물로 변형시키는 것은 시간이다.
로셀라 비스코티의 [문제의 머리들]은 무솔리니와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3세의 청동 두상 5점의 모습을 담은 사진인데, 공개된 적 없는 타인의 작품은 사진적 인용을 통해 은닉된 역사를 호출한다. 사실 세계 대전은 세계화나 마찬가지로 ‘근대적 진보’의 필연적 귀결이다. 근대사에 큰 흔적을 남긴 전쟁은 유럽의 근대 국민국가들이 생산력을 위해, 그리고 확대된 생산력을 소비하기 위한 경쟁의 결과인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일어난 역사의 부활을 기준으로 삼아, 근대가 역사를 억압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근대는 생산력의 진보라는 하나의 역사만을 인정함으로서 결과적으로 그렇게 했을 뿐이다. 하나의 목적을 가지는 역사란 종말론이라는 파국적 세계관과 밀접하다. 끝을 향한 불가역적 진행이라는 직선적 역사관은 서구의 종교에서 지배적이다. 근대적 진보는 겉보기의 새로움과 달리, 곧 쇠퇴와 죽음의 냄새를 피워 올린다. 역사주의가 한껏 힘을 발휘하던 시대에 니체나 보들레르같은 선지자는 일찍이 진보의 이면을 간파한 바 있다. 미술사는 화면에서 모든 것을 걷어내려 한 추상미술이 묵시론적 세계관과 밀접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전시장 바닥에 해골을 전시한 피에로 골리아의 작품은 파국으로 변질될 수 있는 유토피아적 꿈의 몰골 그자체라고 할 수 있다.
나팔 형태의 고풍스러운 스피커와 복잡한 관이 연결된 알베르토 타디엘로의 작품은 엄청난 강도의 소리를 방출하도록 고안된 무기이다. 예술과 무기라는 상반되어 보이는 두 범주를 교차시키는 이 작품은 처음에 군사적 용어였다가 예술적 용어가 된 아방가르드를 떠올린다. 복잡하게 꼬인 관들은 앞을 향한 전위의 진격 방향을 의문시한다. 발레리오 로코 오를란도는 자유로운 손글씨체로 씌여진 네온 작품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이다]에서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을 분리시킴으로서 집단적 생산력과 동시에 개인적 통제를 강화해온 현대사회에 대해, 근대의 남근이성중심주의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반발이었던 70년대의 페미니즘 어법으로 말한다. 중국의 베이징 부근의 채석장에서 채굴된 대리석이 유럽으로 운송되는 과정을 다룬 아드리안 파치의 작품은 근대화의 산물인 세계화를 비판한다. 분업이이라는 명분으로, 예술 또한 자본 못지않게 타자의 노동을 전유한다. 텃밭에서 키운 감자가 아닌 바다 건너온 수입 냉동감자를 먹는 것이 더 ‘경제적’이라고 생각하는 현대인들은 세계화된 거대한 분업체계 속에서 무한경쟁에 내몰린다. 세계 어디에서든 이윤과 시장이라는 하나의 강력한 원리만이 지배하며 예외는 없다. 이렇게 경제 원리에 의해 평면화된 세계에서 젊은 예술가들은 근대적 유토피아의 허구를 드러내고, 이질적 실재계에 바탕 하는 헤테로피아를 건설하려 한다.
출전; 국립현대미술관 웹진 ART;M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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