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영
여성에서 여성으로, 삶에서 예술로
‘현대작가, 나혜석을 만나다’ 전(9.2--9.25, 대안공간눈*예술공간봄)
이선영(미술평론가)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인 나혜석(1896-1948)은 우여곡절 많았던 인생으로 유명하지만, ‘현대작가, 나혜석을 만나다’ 전(9.2--9.25) (주관; 나혜석생가터 문화예술제운영위원회)은 나혜석의 작품 [화령전작약]과 [캉캉]을 자신의 작품으로 재해석하는데 방점이 찍힌다. 각종 ‘최초’라는 수식어에 사랑에 얽힌 극적인 인생여정이 신화적 이야기의 반열에 오른 한 여성 작가의 전체를 막연하게 대상으로 하지 않고, 구체적 화제를 제시한 것이다. 나혜석의 가장 유명한 작품이기도 한 그것들은 소재 면에서 동/서양을 아우를 수 있는 폭을 가진다. 나혜석의 고향인 수원을 넘어 국가적 유산이 될 만한 인물을 기념하려는 문화예술 활동은 한해로만 끝낼 것이 아니기에, 매해 특화된 전략으로 기념행사를 펼치겠다는 의지로 읽힌다. 참조대상은 한정되어 있지만 해석은 무한할 수 있다. ‘창조’라고 일컬어지는 예술의 자체가 사실은 해석이다.
신주은, 같은 꿈을 꾸다가, 장지에 채색, 2014년.
생성의 차원으로 고양되는 해석은 표피적 만남이 아닌, 깊은 만남을 요구한다. 그 것은 내안에 넣어야 하고, 또 그렇게 내부에서 숙성된 것을 빼내야 하는 내재적 과정을 요구한다. 이러한 과정은 독백으로 머물기 쉬운 현대예술에서 대화라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그것이 소비의 차원에 머무는 문화가 아닌, 생산의 차원으로 고양된 예술의 특징이다. 유명세에 비해 아직도 변변한 기념관이 없는 지역에서 다소간 계몽적인 성격을 띄고 있는 행사지만, 공모라는 공적 기회의 마련, 그리고 제작지원과 작품기증이라는 형식을 통해 미래의 예술 콘텐츠를 차근차근 준비해 놓겠다는 의지의 발로이다. 건물만 지어놓고 채우지 못하는 예가 비일비재한 한국의 문화현실에서, 단순한 ‘마을 축제’를 넘어서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파는 절박함도 느껴진다. 6회를 맞는 2014년에 공모를 통해 선정된 작가들은 모두 여성 화가들이다. 공모와 선정 과정에서 장르, 나이, 성별, 국적을 열어두었지만, 우연찮게도 그런 결과가 나온 것은 최초의 참조대상과의 공감과 교감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반증이리라.
그것은 삶과 예술을 떼어놓을 수 없다는 것, 20세기를 훌쩍 넘긴 근대기임에도 불구하고 봉건잔재의 문화 속에서 비극적으로 삶을 마친 선각자적인 인물의 고난과 역경이 과거완료형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한 간접적 확인이다. 여성, 그리고 화가라는 존재는 아직도, 아니 영원히 감내해야할 몫이 있는 듯하다. 나혜석이라는 참조대상과 여성 화가들의 재해석 작업은 화가라는 난점에 여성이라는 난점이 추가되는 특수성을 반영한다. 여기에는 자유로운 창조성을 억압하는 구습 가운데 하나인 가부장제의 존재가 모습을 드러낸다. 남부럽지 않은 환경에서 태어나 자신의 재능을 가꿔온 나혜석의 비참한 말로로 이끈 원인 중의 하나는 남성과 여성에게 다르게 적용되었던 이중적 도덕이었다. 나혜석의 고난에는 자연(여성)을 판결하는 문명(남성)의 대립구도가 있으며, 침묵 속에 파묻혀 있어야할 자연의 항변--그림 뿐 아니라 글도 잘 쓴 나혜석은 [모(母)된 감상기](1923), [이혼고백장](1934)을 발표하기도 했다--이 있다.
근대에도 선명히 확인되는 기부장적 질서는 생존을 위해 경쟁하는 다른 모든 유기체들처럼 서로 간의 이해관계에 차이가 나며, 차이의 재조정은 결국 권력관계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봉건적 관계는 근대에도 지속된다. 앨버트 허쉬만은 [열정과 이해관계]에서 자본주의 시대가 되면서 이전 시대의 열정이 이해관계로 변모됨을 지적했지만, 열정은 사라지지 않고 무의식의 차원으로 스며든다. 공적 영역과 분리되어 그림자로 존재하는 사적영역은 그러한 열정의 보이지 않는 무대이며, 예술 또한 그 영역을 공유한다. 예술작품에는 이러한 관계 속에서 생겨나는 감정의 낙진들이 남아있다. 승화와 합리화는 모든 열정적 과정이 끝나고 나서야 온다. 남녀 간의 사랑에서 그 이해관계를 따져보게 되는 시점은 짧은 열정이 지나간 후의 일이지만, 열정만큼이나 불투명한 판결과정은 개인의 삶이 완전히 몰수될 수도 있는 강도를 가진다. 행려병자로 삶을 마친 나혜석의 시대가 그랬다.
여성을 출산과 육아, 그리고 복종이라는 자연적 존재로 묶어 두려는 가부장적 질서는 가부장적 권력에 의해 형태화 되어야 하는 질료로 취급한다. 질료가 단지 질료를 넘어서 하나의 형식이 되려 할 때 갈등이 야기되며, 이는 여성화가라는 이중적 타자화의 과정에 선명하다. 이 전시에서는 4명의 작가가 마치 역할이라도 분담한 듯 타자의 다양한 국면을 그려내고 있다. 정혜련의 화사한 작품에 예술 또는 사랑의 환희가 있다면, 신주은의 작품에는 죽음에 가까운 고통이 있다. 환희와 고통은 극과 극이기 보다는 서로의 이면이다. 그러나 육체와 연동되는 강렬한 감성인 환희와 고통은 개인을 무방비 상태에 놓는다. 그런 면에서 초이와 한유진의 작품은 보다 방어적이고 도발적이다. 현대에 대응하는 여성의 모습이라고나 할까. 초이의 작품에 나오는 패션모델 같은 인물이나 한유진의 작품에 나오는 신화적 인물은 코드와 상징으로 무장되어 있으며, 그것이 풍자 및 상실감과 연결되어 있을 지라도 그녀들의 만만치 않은 면모는 여전하다.
신주은의 작품 [같은 꿈을 꾸다가]는 하나의 심장으로부터 자라난 두개의 꽃이 이물감을 넘어서 생가지가 찢겨지는 듯한 고통으로 다가온다. 하트 모양으로 휘어져 있는 꽃은 작약이 가지는 본래 색이지만 심장과 연관되어 피를 머금고 있는 듯하다. 생명유지 물질을 퍼 올려야 할 심장은 텅 비어 있으며, 말라죽은 식물처럼 잎 새 하나 없는 식물형상의 화려한 개화 또한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같은 처지다. 작가는 강렬한 만큼이나 짧기에 비극적 여운을 남기는 사랑의 체험을 생생하게 체화했다. 열정과 이해관계 간의 부조화가 지고의 마술적 체험을 한시적인 것으로 만들고, 상대를 파멸시킬 수도 있는 치명적 독이 되고 만다. 나혜석의 원본 그림은 멀리 보이는 꽃밭 같은 풍경화지만, 21세기의 화가는 그 장면이 자아내는 정서를 생체기관까지 땡겨왔다. 피를 머금은 붉은 꽃들은 막연한 영혼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세포 하나하나가 떨리는 체험을 표현한다.
정혜련의 작품 [夢_화령전 작약]에는 꽃의 회오리바람이 분다. 작가는 그 회오리바람의 실제감을 더하기 위해 정사각형의 작은 캔버스 8개를 주변에 배치했다. 이러한 공간적 연출은 시간적 차이를 가지는 두 작품 간의 관계를 동시에 보여준다. 화령전에 핀 작약이 그 시대의 그림을 넘어서 여기까지 날라 오는 듯하다. 나혜석이 심은 꽃, 또는 온몸으로 피워낸 꽃은 지금 여기에서 또 다른 꽃으로 피어난다. 8개의 분체들에서 꽃의 상대적 비중은 더욱 커서 꽃 안에 풍경적 요소가 숨겨져 있을 정도이다. 작가는 나혜석의 비극적 삶보다는 원작이 가지는 환희의 측면을 극대화했다. 그것은 동시에 작약에 내포된 전통적 상징에 충실한 결과이기도 하다. 유기적 관계를 가지는 그림들은 행복한 세상을 기원하는 메신저들이다. 꽃향기처럼 전염되는 행복감이 캔버스에서 캔버스로 이어진다. 이러한 환희가 현실이 아니라 꿈이라는 점에서만, 선배화가의 비극을 떠올릴 수 있을 뿐이다.
초이의 작품 [Touching Collabo]는 이전에 패션을 전공했던 경력이 반영되어 있다. 작은 얼굴에 날씬하고 긴 몸매,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표정, 현대적으로 각색된 한복을 입고 대중들 앞에서 앞다투어 아름다움을 뽐내는 여성 이미지는 패션쇼나 패션 일러스트에서 발견될 수 있는 도상이다. 작품 제목도 협업의 관점에서 접근되었다. 작가는 나혜석의 [무희]를 참조로 하여, 무대 위에 선 화려하고 당당하고 도발적인 여자들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여성의 약진은 또 다른 질곡을 내포하고 있는데, 그것은 여성들을 감싸고 있는 비닐로 나타난다. 비닐은 통상적으로 상품의 포장재로 사용된다. 만물의 상품화는 전통적 가부장제를 느슨하게 했지만, 그 또한 가부장제 못지않은 억압적 권력으로, 여성을 진공상태에 가두어 놓는다. 그것은 현대 여성이 누리는 자유로움이 나혜석 시대 못지않은 한계를 가지고 있음을 알려준다. 소비욕망에 끌려 다니는 주체들 역시 자유롭다 할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한유진의 작품 [가릉빈가(迦陵頻伽)]는 불교설화에 나오는 전설적인 새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이 반인반조의 존재는 현대 여성들이 즐겨 입는 몸에 쫙 달라붙는 의상을 착용하고 있다. 안팎을 장식하는 무늬는 모란과 구름이며, 그것들은 민화에서 길상(吉祥)의 의미를 가진다. 여러 능력을 두루 갖춘 신적인 존재는 날개가 접히고 깃털이 뽑혀나가며, 방어적인 몸짓을 취한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또는 이것이자 저것이기도 한 경계위의 존재는 비천한 괴물이면서도 전능한 신적 존재이다. 하지만 인간은 아니다. 인간이란 보편적이기 보다는 한 성, 한 계층, 한 인종을 더 강하게 지칭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남성)의 시대는 여성, 자연, 동양, 상상, 예술을 비롯한 많은 것들이 도구화 되는 시점에서 비판될 수밖에 없다. 한유진의 가릉빈가도 전설적 존재처럼 극락을 꿈꾸며 비상을 준비한다. 가릉빈가는 다소간 의기소침하지만, 날지 못했던 이들에게 힘을 주는 부적 같은 존재로 다가온다.
한유진, 가릉빈가, 수묵담채, 2014년.
출전; 대안공간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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