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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불 / 어디에도 없지만 상상할 수 있는 곳을 향한 여정

이선영

어디에도 없지만 상상할 수 있는 곳을 향한 여정

 

이불 전 (9.30--2015.3.1,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이선영(미술평론가)

 

대형전시장 두 곳을 가득 채운 이번 전시의 작품은 200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이불의 ‘나의 거대서사’ 시리즈의 연속성 상에 있다. 비록 ‘나의-’란 말이 덧붙여져 있으나, 20여년 가까이 국내외에서 쉼 없이 성과를 거두어온 작가이니 만큼, ‘거대서사’를 거론할 만한 자격은 있으리라. 마침 작가는 1980년대와 90년대에 청년기를 보내면서 거대서사의 부침을 온몸으로 겪어낸 세대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불이 작품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거대서사는 거대서사의 종말에 가깝다. 근대를 건축해온 밝고 빛나고 가벼운 재료들이 많이 사용된 이 전시는 특히 근대에 얽힌 거대서사를 겨냥한다. 서사든 서사의 종말이든, 그것이 이미지로 구현된 방식이 장관이다. 국제무대를 전전해온 작가다운 거대한 작품 규모는 섬세함과 시의성 있는 개념 또한 갖추고 있다. 그동안의 전시들을 돌이켜보면, 이불은 동시대적 담론들을 구체적 형식언어로 잘 녹여낸 작가로 기억된다. 대개는 서사, 또는 형식 둘 중의 하나만 치중한다. 특히 작가가 거대담론을 운운하는 경우 이도저도 아닌 경우가 많다. 

 


새벽의 노래 III, 2014, 알루미늄, 폴리카보네이트, 메탈라이즈드 필름, LED 조명, 전선, 스테인리스 스틸, 포그 머신, 가변 설치, 

사진 전병철, 사진제공 국립현대미술관 



두 전시장은 드높이 서있어야 하거나 날라 다녀야 할 것들이 붕괴되어 있는 형국이다. 위의 것을 아래로 끌어내리려는 중력의 힘은 강하게 작동된다. 관객이 무사히 통과하기 주로 바닥을 봐야하는 [태양의 도시]는 더욱 그러하다. 좌초된 비행체의 잔해나 뭔가 거대한 것이 무너지고 난 후의 폐허 같은 장면을 연출한 설치작품들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구치려 했던 한 시대의 강박관념을 풍자한다. 저 머나먼 곳을 향하는 예언자적 파토스는 고꾸라지고 있다. 그러나 자유와 해방을 향한 진보라는 그 시대의 거대서사는 단번에, 손쉽게 거부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불의 작품에서 공중폭발이나 붕괴의 이미지는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장관을 이룬다. 거대서사는 추락할 만큼 날개가 달려있었던 것이다. 주기적으로 분사되는 안개와 점멸하는 빛 속에 배치된 파편들은 숭고하고도 심미적인 체험을 자아낸다. 작품 [새벽의 노래 III(Aubade III)]는 독일 건축가 브루노 타우트(Bruno Taut)의 [새로운 법령을 위한 기념비](1919)와 20세기 초 힌덴부르크 비행선(Hindenburg Airship) 등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라고 한다. 

 

15m 높이의 전시실의 공간 전체에 산포된 덩어리들과 면들은 폭발의 순간을 증거 하는 듯, 소리 없는 비명과 굉음이 메아리친다. 원래 형태를 예상할 수 없는 몸체는 토막 나 거친 절단면을 드러내고 있으며, 기계부품들의 겉을 감쌌을 것으로 생각되는 피막들은 여러 조각으로 찢어져 공중에 떠 있다. 구조물이 실제로 움직이지는 않지만 바로크적 역동 감으로 가득한 [새벽의 노래]는 뿌연 연기를 헤치고 가까이에서 보면 금속판들이 얼기설기 엮여져 있는 구조이다. 기계라는 비유가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정교하게 조립된 것이기 보다는 바느질한 듯 느슨하다. 그것은 파괴되고 있는 이미지이기도 하지만, 시한폭탄처럼 이미 해체가 잠재되어 있음을 예시한다. 시간이라는 시험대는 한시적으로 완벽해 보이는 공간적 질서의 해체를 보다 분명히 해줄 뿐이다. 우리는 이제 근대를 돌아볼 수 있을 만큼 멀리 왔다. 그것은 아마도 근대자체가 강력하게 추동한 시간의 가속화에 의한 것이다. 시간의 끝은 종말론적이다. 주기적으로 뿜어져 나오는 안개가 서서히 걷히면서 파국적 상황은 분명해진다. 

 

흐릿한 안개 속에서도 붉게 점멸하는 LED 조명들은 기계 뿐 아니라, 유기체가 파열되는 순간을 중첩시킨다. 폭발하는 이미지 와중에도 핵심에 놓여 있는 뭔가 찌르는 듯한 형태는 에로틱한 느낌도 있다. 그것이 겨냥하는 곳에 영원히 가닿을 수 없는 순간 멈춤 동작은 작품 제목에 포함된 ‘Aubade’라는 개념이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을 담은 중세의 연시(戀詩)에서 왔음도 알려준다. 그것은 심리적 육체적 물리적으로 파열하는 순간을 표현한다. 경계의 파열은 재난이기도하지만 열락이기도 하다. 물질 내부에 압축되어 있던 에너지가 공중으로 산포되는 짧은 순간은 이러한 양가감정을 극화한다. 유토피아적 열망과 그 파국적 결과는 개체와 계통의 차원 모두에 관철된다. 그것은 또한 태양에 너무 가까이 다가가지 말라는 금기를 어긴 징벌처럼 다가온다. 인류학이 말하듯이, 금기의 위반은 저주와 성스러움을 동시에 야기한다. 

 


새벽의 노래 III, 2014, 알루미늄, 폴리카보네이트, 메탈라이즈드 필름, LED 조명, 전선, 스테인리스 스틸, 포그 머신, 가변 설치, 

사진 전병철, 사진제공 국립현대미술관 


[태양의 도시 II(Civitas Solis II)]는 사방 벽면이 거울로 되어있고 바닥은 거울 조각들이 흩어져 길을 만든다. 어지러운 반사면 속 거대한 공간에 펼쳐진 길들은 이내 미로가 된다. 이불은 미로에 대한 오래된 신화적 상상력을 번쩍 거리는 21세기형 미로로 업그레이드 시켰다. 이 미로는 ‘상호 접속된 매듭의 총체로서의 네트워크’(자크 아탈리)와도 비유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미로 속에서 앞을 향한 전진은 발전 및 진보와는 무관하다. 바닥에 깔린 압도적인 분량의 조각들은 붕괴의 강도를 추측케 한다. 엔트로피는 최대치를 향하며, 사방에서 울렁이는 반사면들은 어떠한 안정적 조망도 불가능하게 한다. 여기에서는 그저 헤맬 수 있을 뿐이다. 날카로운 절단면을 노출한 채 바닥에 흩어진 퍼즐들은 다시 맞출 수는 없을 것이다. 파국적 사건은 어느 시점에서 종료되었고, 3차원 상에 펼쳐진 잔해들은 신비로 전환된 공포를 전해준다. 길 저편에 설치된 점멸하는 전구들은 거울 면을 통해 형태가 반전되어 ‘Civitas Solis’(태양의 도시)라는 단어를 드러낸다. 환영을 통해서만 제대로 읽을 수 있는 구조는 현실과 허구가 역전된 상황을 암시한다. 

 

동시에 환영과 현실은 상보적으로 결합하여 새로운 현실을 만든다. 실제와 환상이 합쳐져 완벽에 대한 인류학적 상상력이 투사된 원형이 된다. 실재가 무너진 자리에서 환영의 위상은 어느 때 보다도 크다.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 듯한 도시에서 태양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 [태양의 도시]라는 작품 제목은 르네상스 시대의 철학자 캄파넬라(Tommaso Campanella)의 유토피아 론에서 영감 받았다고 한다. 현실의 질곡에 당면한 인류에게 유토피아적 상상력은 끊임없이 솟아났지만, 근대의 국면에 이르러 인간은 기계라는 강력한 수단이 있었기에 유토피아는 좀 더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이불의 [태양의 도시]는 이상도시에 관련된 고전을 근대의 유토피아적 기획에 적용한다. 건축으로 가시적인 성과를 보여준 근대의 계몽주의적 기획에서, 태양과의 비유는 분명했다. 유리, 철골, 콘크리트라는 새로운 재료와 모듈 식 구성 원리는 이전시대의 어둠을 몰아낼 더 많은 태양빛을 끌어들이고자 했다. 그러나 계몽 역시 신화에 불과함이 밝혀졌으며, 오늘날 그 필연적인 귀결을 펼치고 있다. 

 

계몽이 만들어낸 탈신비화는 재신비화의 국면에 돌입했다. 무한 반사의 공간을 이루는 거울의 방은 와해 및 붕괴의 파편에 자신을 비추어 보면서 나르시스의 환희와 비극을 되풀이하는 공간, 주체를 확장하다 못해 잃어버리는 공간이다. 반면 근대에는 어느 시대보다도 인류가 나아가야할 방향이 분명했다. 그것은 진보된 미래였다. 근대의 역사의식은 미래에 가중치를 둔다. 현실보다는 당위에 현재보다는 전망에 방점이 찍혀있고, 그것을 대변하는 보편적 지식인의 역할이 컸다. 미셸 마페졸리는 [근대를 생각하다]에서 엘리트주의는 중세 수도원 생활의 실천방식이라고 지적한다. 그것은 예언독해의 실천이며, 그래서 그는 사회라는 텍스트도 그처럼 파악할 것이다. 보편적 지식인들은 미래를 빗대어 과거와 현재를 비판하곤 한다. 근대에 미래의 위상은 더욱 커졌다. 근대의 기획이 다루는 시간의 폭이 커짐에 따라 서사도 거대해 진다. 이러한 거대화에서 근대가 극복하려했던 신화는 뒤로 들어온다. 

 


새벽의 노래 III’를 위한 스터디, 2014. 종이, 인디아 잉크, 피크먼트 잉크, 59x49cm. 사진제공 스튜디오 이불.  

R. 코젤렉은 [지나간 미래]에서 어떠한 시간이 새로운 시대로, 즉 ‘근대’로 경험될수록 미래의 도전은 점점 더 커졌다고 말한다. 미래의 세계는 현재나 과거의 세계와는 질적으로 다르리라는 확신 속에서 미래의 몫이 불균형적으로 커졌다는 것이다. 미래를 향해 살고 있었던 근대는 각종 유토피아가 번성한 시대이기도 했다. 유토피아를 앞당기기 위한 프로젝트에서 예술가 또한 중요한 자리를 맡는다. 전위라는 단어가 문화적인 용례로 처음 사용된 것은 1825년 유토피아 사회주의자였던 생시몽에 의해서였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로버트 휴즈는 [새로움의 충격]에서 문화적인 도전에 의해 사회적인 혁신이 가능하다는 ‘전위적’ 생각이 근 100년간 열렬히 추구되어왔고, 예술가는 선구자이며 진정 가치 있는 예술작품이란 미래의 건설에 기여할 수 있는 작품이라는 것이다. E. 블로흐는 [희망의 원리]에서 모든 예술작품과 철학은 유토피아라는 창문을 달고서 그것을 통해 새롭게 형성되는 어떤 풍경을 제시한다고 본다. 

 

인간의 영혼 속에서 아직 의식되지 않은 것이 떠오르듯이 그렇게 이 세상에서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창조된다는 것이다. 예술과 유토피아는 당대의 기술수준 뿐 아니라 상상을 매개로 한다는 점에서, 동족적 유사성을 가진다. 유토피아 상은 예술적 상상력만큼이나 다양하며, 낙관론이나 비관론에 물들어 있다. 유토피아적 이불의 작품에 스며있는 신비스러운 침묵은 미래를 향한 유토피아적 기획의 수다스러움이 고갈되었음을 예시하는 듯하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들은 유토피아를 말소 하에 보존한다. 뿌연 연기와 미로 속에서도 깜박이는 불빛들은 여전히 현실 너머를 가리킨다. 미래의 태양의 도시를 다시 일굴 수도 있는, 또는 그곳으로 날아갈 수 있는 상상의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 다만 이제 유토피아는 합리적인 거대 시스템에 의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미로에서 헤매면서 전체적 조망이 아닌 부분 부분을 탐닉할 수 있을 뿐이다. 미래에 저당 잡혀있던 지금여기는 다시 회귀한다. 

 

‘나의 거대서사’라는 맥락에 놓여있는 이불의 상상의 지형학은 먼 미래만 바라보는 집단적이고 보편적 주장을 넘어서, 지금 여기와 개인 그리고 특수한 체험에 기초한 작은 유토피아들을 말한다. [태양의 도시]는 인간에게 무한정 퍼주는 에너지의 원천인 태양과 자연의 무질서를 극복한 도시를 결합시킨다. 천국은 도시로 상상되곤 하였으며, 하늘 높이 솟은 고딕성당이나 마천루로 가시화되곤 하였다. 도시에 투사된 유토피아적 상상력은 무한정한 자유보다는 질서를 강조한다. 특히 작가가 영감을 얻은 사상가 캄파넬라도 질서에 기초한 유토피아를 보여준다. 칼 만하임은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에서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와 대립되는 사회질서의 유토피아로 캄파넬라의 [태양의 나라](1623)를 든다. 캄파넬라는 사회적 행복과의 동의어로 질서를 주장하였다. 그의 ‘태양의 나라’에서는 자유가 아니라 세분화시킨 질서가 모든 사람의 행복을 관할하는 척도가 된다. 

 



 태양의 도시 II, 2014, 폴리카보네이트, 아크릴 거울, LED 조명, 전선, 330x3325x1850cm, 사진 전병철, 사진제공 국립현대미술관

 

태양의 나라에 사는 사람들의 가정 및 공적인 삶, 도시의 상황 및 교통의 체계, 목욕과 식사 그리고 올바른성생활 등은 오직 별들의 시간에 의해 규정된다. 태양의 나라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하루 4시간만 일하는데, 여기서는 착취와 이윤이 전혀 발생하지 않으며 생산물은 공산주의적으로 분배한다. ‘태양의 나라에서는 사람들이 사물의 노예로 머물러 있지 않고, 오히려 사물이 그들을 돕게 될 것이다.’(캄파넬라) 만하임에 의하면, 캄파넬라의 유토피아에서는 신이 태양, 혹은 ‘형이상학적 존재’로 묘사된다. 캄파넬라의 비전은 완전하게 형성된 국가가 신과 같은 찬란한 빛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여기엔 자유의 유토피아가 아니라, 개인을 초월한 평등한 질서가 세계국가 속에 정착되어있다는 면에서 공산주의적 면모까지 있다. 필연은 우연을, 숙명은 경우를, 조화는 행운 및 운세를 무찌르는 캄페넬라의 세계, 만하임은 이를 중세적인 혼돈과 무(無)에 완강히 대항하는 세계관이라고 평가한다. 

 

[태양의 도시]가 가지는 비전은 자유의 토대로서의 질서를 전제하며, 그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이라 불리우는, 흥청망청의 무질서한 상대주의와도 다르다. 그것은 그 자신이 절도와 자유로움을 적절히 안배해왔던 작가가 관심을 가질만한 비전이라고 생각된다. 1990년대의 이불의 작업이 물컹거리는 유기체의 비유가 강했다면, 2000년대 이후에는 SF적인 비유가 강해 보인다. 그것이 유토피아든, 디스토피아이든 구조와의 역학관계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유토피아적 비전이 투사된 이불의 최근 작품에서 근대 건축은 중요한 모델이 된다. 칸토와 팔리우는 [인간은 어떻게 미래를 상상해 왔는가]에서 르 코르뷔제가 꿈꾼 ‘빛과 공기에 담긴 수직의 도시’는 푸리에가 주장한 공동 사회의 원칙을 일원적이고 효율적이며 분자화 된 도시공간에 적용시킨 것이라고 지적한다. 혁명과 1,2차 대전을 겪은 후 거의 제로 베이스에서 출발한 근대건축 역시 유토피아적 비전으로 가득했다. 

 


 

태양의 도시 II, 2014, 폴리카보네이트, 아크릴 거울, LED 조명, 전선, 330x3325x1850cm, 사진 전병철, 사진제공 국립현대미술관

 

이전 시대를 지배했던 녹색이나 고동색은 묵직한 자연과 전통을 상징하면서 가볍고 투명하고 빛나는 것으로 대체되어야 했다. 작품 [새벽의 노래]에 영감을 준 건축가 부르노 타우트는 ‘장중주의 타도! 투명하고 맑은 것이여! 순수성이여 만세! 결정이여 만세! 그리고 유연한 것, 우아한 것, 각이진 것, 빛나는 것, 반짝이는 것, 경쾌한 것, 영원의 건축 만세!’라고 외치면서 1920년대의 시대정신을 반향한 바 있다. 그것은 태양의 빛을 최대한 끌어들이는 구조로 영원한 자연의 에너지와 문명의 질서를 결합시키는 유토피아였던 것이다. [새벽의 노래]에서 형해로 나타나는 비행선의 이미지는 태양과 가까워지려는 건축의 궁극적 모델일지도 모른다. [태양의 도시]도 그 안에 스며든 어떤 작은 빛줄기도 태양에 못지않게 확장시키는 다양한 반사면들이 존재한다. 빛과 안개는 대비되면서 서로를 강조한다. 이불의 전시는 보다 많은 빛을 요구하는 계몽주의와 ‘어디에도 없는 곳’(유토피아)의 만남을 통해, 상상력의 위대함과 불안함을 동시에 보여준다. 

 

출전; 국립현대미술관 웹진 ART; M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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