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영
관리사회에 대한 예술적 단상
이선영(미술평론가)
협업을 주제로 전시가 열릴 만큼 협업하는 작가들이 꽤 있는 미술계에서 로와정은 각자의 이름이 낯설 만큼 일체화된 인물로 자리 잡았다. 중성적인 분위기의 이름을 가진 로와정이라는 캐릭터는 두 남녀(현석+윤희) 작가가 결합된 가상의 인물로, 20대 초반부터 함께 해온 35세 동갑내기다. 그러나 둘이라고 해서 작업의 효율이 두 배, 또는 그 이상은 아니라고 항변한다. 각자 잘하는 부분들이 있기는 하지만, 시간은 더 걸린다고 한다. 작품 구상에서 실현단계까지 수많은 과정들을 결정하는데 이견을 조정하고 합의하는데 상당한 에너지가 소모된다는 말이다. 오죽했으면 둘이 사지가 분리되도록 싸우는 과정을 작품으로 했을까. 여자라고 봐주는 것도 없는 살벌한 공방전을 보여주는 작품 [fighting](2008)은 조화로운 협업에 대한 환상을 사정없이 깨부순다. 로와정의 작품에는 둘로 된 것이 많은데, 이 짝패나 분신같은 이미지는 그들의 자화상이다. 실제와 가상의 양동이, 드라이와 물뿌리개, 휴지와 휴지심, 지우개와 연필, 크기가 다른 캔버스, 교차된 팬티 등 둘 간의 관계를 비유할만한 일상적 사물은 많다.
Fighting , 2008, 싱글채널비디오, 01:20
주체가 아닌 상호적 주체의 작품은 그만큼 단단하다. 하나의 중심을 가지는 원이 아니라 두 개의 중심을 가진 타원궤도가 가질 수 있는 안정감이 있다. 이견 조정은 쓸데없는 낭비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내디뎌도 발이 푹 빠지지 않고 건너갈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다. 둘 간의 대화는 차후에 관객과의 관계 속에서도 재연될 수 있는 담론으로, 작품 구상과 제작단계부터 층층의 검증이 포함되는 것이다. 열심히는 하고 있지만 제대로 하고 있는지 오리무중에 빠질 수밖에 없는 외로운 작가의 상황에 비한다면, 커플의 협업은 대안적으로 다가온다. 잔가지들을 다 쳐내고 단순하고 담백한 작품을 지향하지만, 작품에 이성적이고 의식적인 차원만 있는 것은 아니다.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작품이 꽤나 많은 현실에서 사적 영역에 이미 공적 영역을 탑재하고 있는 로와정의 스타일은 독특하다. 독백이 아닌 대화는 보편을 지향한다. 자기에게만 속하는 진실이 아니라 공유될 수 있는 사실이 된다.
로와정의 작품은 개념적이지만, 통상적인 ‘개념미술’에서 보여지는 바의 빈약함과 난삽함은 없다. 그들은 실제의 대화, 그리고 대화적 상상력을 통해서 생각할거리가 많은 단상을 함축적 작품 또는 사물로 제시한다. 난지 스튜디오에서 제작된 최근 작품은 현재의 권력 관계의 시초인 학창시절의 기억과 관련된다. 작품 [good answer]는 캔버스에 글자 수를 놓은 후 쫙 잡아당긴 작품으로 가해진 물리적 힘에 의해 평면과 글자가 우그러지고 캔버스를 지지하던 나무틀도 일부 드러난다. 이 작품의 모태가 되는 것은 [The thing](2014)으로, ‘네가 아는 것에 대해 난 궁금하지 않다’는 영어 메시지를 잡아당겨 구겨진 종이처럼 공중에 매달아 놓은 작품이다. 글자는 읽을 수 없게 되었고, 평면은 입체가, 가상은 현실이 되었다. 이 작품은 메시지의 투명한 전달을 불투명한 과정으로 변모시킨다. 초등학교 학생들이라면 모두 마셔야하는 하얀 우유는 유통기한을 넘긴 채 썩어가면서 줄에 가해지는 중력을 더욱 묵직하게 한다.
Rear view, 2014, 20F캔버스에 유화, 30F캔버스에 아크릴화, 각재, 가변크기
밤마다 행복했으면…., 2010, 팬티 2장, 조명, 40x40x40 cm
저기에 있는 것을 여기에 로딩하는 기계적 과정에 다름없는 획일적 교육은 입맛 같은 개별적 취향의 단일화까지 연결되어 있다. 번호순서대로 나와서 하나씩 뽑아먹던 비린내 나는 우유에 대한 공통의 추억이 있는 작품 [good answer]는 답이 이미 정해져 있는 질문에 준비된 대답을 해야 하는 훈육과정이 어린 시절에 한정될 수 없음을 말한다. 반듯한 것을 구겨버리는 행위는 조용히 썩어가는 곪은 상처 같은 것들을 과감히 드러낸다. 작품 [variable dimensions]은 아이의 다양한 잠재력을 사회가 원하는 방향으로 고정시키는 방식을 보여준다. 벽에 투사된 흑백 사진 속 아이들 머리 부분에 검은 못들이 박혀있는데, 원근법에 따라 크기가 다른 못들은 그들의 선택과 무관하게 속해진 상징적 우주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암시한다. 거기에는 못처럼 박힌 고정관념과 원근법적 서열화의 고착에 대한 비유가 있다. 교실은 사회질서가 원근법처럼 재현되는 장이다. 옛 사진처럼 흑백이지만, 지금의 교실풍경을 인터넷에서 내려 받아 변조했다.
학창시절이라는 아련한 기억에 의해 미화되곤, 하지만 학교가 실상은 서열과 고정관념이 시작되고 고착화되는 곳임을 암시한다. 작품 [frame]은 난지스튜디오 근처의 쓰레기더미에서 주은 폐목재로 만든 틀이다. 그 안은 더러운 목재를 틀로 다듬는데 사용한 사포로 채워졌다. 액자 안의 무채색 평면은 예술가의 혼이 깃 든 추상화 같은 모습이다. 다듬어진 것은 알맹이가 아니라 틀이다. 역으로, 틀은 별 것 아닌 것도 그럴듯하게 만든다. 무엇이 내용이고 무엇이 형식인가를 혼동시키는 이 작품은 중심이 아닌 주변에 대한 관심, 또는 중심/주변의 관계의 가변성이 있다. 틀 안에 귀중하게 보존된 사포처럼, 도구를 넘어서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교육은 가능한 것일까. 사포나 폐목재처럼 주변적인 것도 예술작품처럼 주목될 수 있을까. 교육이 궁극적으로는 틀 짓는 과정이어서인지, 틀은 최근 작품에 많이 등장한다.
Good Answer, 2015, 캔버스 천, 로프, 우유, 각재, 290x160 cm
작품 [drawing]은 만화영화가 나오는 모니터 위에 검게 드로잉을 해서 거의 보이지 않게 만들고 아이들의 학교 책상 위에 고정시켜 놓은 작품이다. 제목을 보면 그린 것으로 되어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지운 모습이다. 전 세계의 아이들에게 공통의 추억이 되고 있는 디즈니 만화는 알고 보면 매우 잔인한 발상과 행동들이 귀여운 캐릭터 뒤에 숨어 있다. 그러나 세계시민으로서의 자질과 감성을 연마하기 위해 모국어 보다 먼저 접하게 되는 이 공통의 문화는 지워진 화면 속 만화영화 내용처럼 중요한 생존의 전략으로 나타나며, 교과서처럼 또는 교과서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야 하는 시험지처럼 책상 한가운데에 딱 놓인다. 그러나 미디어가 일방적으로 쏟아내는 정보에만 몰입하는 과정이 학습장애를 일으킨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움직이고 있는 자신을 그리는 과정이 아래로 늘어진 긴 두루마리에 그려진 작품 [밑그림]은 고정되지 않는 실재를 재현하기 위한 불가능한 몸짓이 지진계처럼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서 재현 주체는 점차 희미해지는 흔적으로 남는다. 주체를 재현의 한 지점에 고착시키는 사회화 과정을 생각해 볼 때, 이러한 재현불가능성은 불행일까. 다행일까.
‘재현의 정치학’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재현 체계는 단지 미술의 한 양식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주체/객체를 나누고 재생산하는 권력의 방식이다. 교육이나 계몽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고전주의나 사실주의로부터 벗어난 현대예술은 재현불가능성에 대한 담론과 긴밀하다. 나무 판에 검정 전선으로 흘려 쓴 글자가 있는 작품 [live and let live]는 로와정의 메시지가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내식대로 살게 내버려 달라’는 메시지는 ‘거대한 동일성의 깔대기’([미술과 담론], 1996년, 이선영)가 되어버린 교육 과정에 맞선 개인의 외침이다. 교육은 가장 중요한 사회화 과정으로 간주된다. 자연처럼 각자 나름대로 살면 될 것을 굳이 똑같이 만들어서 경쟁시키고 도태시키는 과정은 노동력, 때로는 생명을 바쳐야 하는 거대 권력 집단을 전제한다. ‘국민 학교’라는 단어가 있었을 정도로, 근대 교육은 자연인을 ‘국민’으로 만들어서 노동자와 전사로 대규모 동원하는 가장 기본적인 시스템으로 자리 잡았다.
Variable Dimensions, 2015, 못, 소형빔프로젝터, 삼각대, 60x65x110 cm
‘live and let live’는 세계 대전과 월남전 때 나온 반전 구호였지만, 권력은 일상 자체도 전쟁터로 만드는 경향이 있기에 실감나며, 계몽주의가 정보화와 결합되어 더욱 확장되는 미래에는 더 실감날 메시지가 될 것이다. 글자를 이루고 있는 검은 전선은 과학시간에 사용했던 실험 세트의 일부로, 끝에 달린 꼬마전구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희미해진다. 그것은 개인의 저항적 외침이 사그라들고 있음을 암시한다. 사적, 공적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을 비롯한 주체화 과정은 시스템과 밀접하다. 낭만주의가 대립시키는 바와 달리, 주체와 구조는 상호적 산물이다. 도면 위의 숫자들이 이합집산하면서 벽을 만드는 작품 [Moving-unchangeable1425](2013)은 학교, 군대, 회사를 불문하고 사회집단 속에서 권력이 구조화되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경쾌한 게임 같은 작품이지만, 권력이 힘을 얻고 힘을 발휘하는 체계가 좀처럼 변할 수 없다는 비관적인 메시지다.
권력이 미시적, 거시적 차원에서 그물망으로 깔려 있으니만큼 전시 시스템, 보수 언론 등 로와정의 관심은 전 방위적이다. 그런데 최근 작품은 왜 학교에 조준되어 있을까. 30대 중반이면 학교에 대한 어떤 안 좋은 기억도 나름의 추억으로 미화될 수 있는 시기 아닌가. 록을 비롯한 젊은이들의 하위문화가 ‘서른 넘은 인간들을 믿지 말라!’ 는 외침이 있을 정도로 기성세대에 속한 나이 아닌가. 그러나 거기에는 30대 중반조차도 학교를 의식—피해의식이든 부채의식이든--할 수밖에 없는 한국의 특수한 상황이 깔려있다. 서른은 물론 마흔이 넘어서도 학교라는 ‘젖줄’이 필요할 만큼 우리 예술의 현실적 토대는 취약하다. 그러나 학교는 예술의 현실적 취약함을 보완해주는 곳이 아니라, 그자체가 지배적 현실로 군림하고 있다. 교육을 제외한다면 예술이 사회로부터 그 기능과 역할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학교적인 것’들은 한 때 지나간 악몽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의 문제인 것이다.
Frame, 2015, 폐목재, 사포, 유리, 32x27 cm
Drawing, 2015, 14인치 LCD패널에 펜드로잉, 책상, 60x40x76 cm
사회로부터 울타리 쳐진 고여 있는 물, 그 끈적한 또 하나의 권력사회 속에서 지식과 예술이 아무리 높고 깊게 쌓고 쌓여진다 한들 인간을 자유롭게 해주지 못한다. 그 시스템을 엉덩이에 깔고 있거나 머리에 이고 있는 작품들은 무겁고 침울하다. 학교에 저당 잡혀 있는 ‘작품’에는 착종된 현실을 따돌리고 신나게 앞서 달려 나가는 예술 본연의 면모를 찾아보기 힘들다. 학교가 자율적이고 자유로운 곳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그 시스템의 혜택을 받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대학을 마치고도 참으로 오랜 세월 동안 교육 소비자로 그곳에서 학력 자본을 축적해야 하는 현실은 작업하는 삶을 꿈꾸었던 이들에게 깊은 상흔을 남긴다. 학교제도의 비대화, 더 나아가 전 사회가 학교화 되는 경향은 사회 전반이 합리화, 체계화 되면서 그 구성원들 전체가 '관리하는 자와 관리 받는 자로 나뉘는 추세'(수잔 손탁)와 맞물려 있다. 머나먼 현실보다는 주변의 일상을 작품화하는 경향으로 볼 때, ‘내식대로 살게 내버려 둬’라는 로와정의 메시지는 아직도 학교를 의식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젊은 세대의 냉소적이고도 절망적 외침이다.
물질적 성장만큼이나 박탈감을 함께 생산해온 한국 사회에서 ‘화난 젊은이들’이 나올만한 시기인데도 고요하기 그지없는 문화예술계에서 시스템의 힘은 막강함을 확인한다. 사전적 정의에 의하면, 영어의 school이나 프랑스어의 ecole의 어원인 그리이스어의 ‘schope’는 원래 ‘한가한 시간’ 이라는 의미를 갖는데, 그것이 사색에 빠지는 방법을 배울 수 있는 시간적 여유라는 의미로 특수화 되어 그 장인 학교, 학원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무한 ‘스펙’의 시대에 학교는 결코 한가한 곳이 아니다. 학교는 바쁜 현대적 삶에 또 하나의 바쁨을 요구하는, 더 나아가 바쁨을 위한 바쁨을 만들어내는 부조리한 곳이 되었다. 한국처럼 급속히 관료주의화 되는 사회에서 제도적 차원에서 점차 비대화된 학교는 병목과 적체 현상을 보여주는 곳이다. 그곳은 좋은 의미로든 아니든, 사회 안으로 진입하기 위해 끝없이 준비하고 대기하기 위한 시공간이자, 그 자체가 사회를 재현한다. 그래서 어떤이들은 그곳에서 예술과 학문이 아니라, '사회'를 배우곤 한다.
Live and let live , 2015, 전선, 꼬마전구, 악어집게, 전지, 나무 판넬, 103x73 cm
이미 수많은 배움의 통로가 열려있는 정보화 사회에서 학교는 독점적 지위를 고수하려 하지만, 이러한 독점은 자체의 동력이 아니라, 더 근본적인 심급인 자본의 선택에 달려 있을 뿐이다. 자본의 하위범주로 남아있는 한 학교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영원한 족쇄로 남아있을 것이다. 로와정의 작품 [good answer]에 나와 있듯, 좋은 대답을 위한 교육적 과정은 규율을 내면화하는 과정이며, 그것은 어떤 이들에게는 체질적으로 맞지 않는 음식을 억지로 쑤셔 넣어야 하는 고통과도 비교된다. 작은 우유 곽은 작지만 큰 울림을 가지는 상징이다. 권력의 내면화는 권력의 자동적 실행을 위한 전제 조건이라 할 때, 글자를 이루는 선에 연결되는 부패해서 부풀려지고 있는 하얀 우유는 정신 뿐 아니라, 육체를 관통하는 일률적 규율에 대한 섬뜩한 상징이다. 쫒고 쫒기는 톰과 제리가 바탕 화면에 깔려있는 작품 [드로잉]에는, 영원히 피할 수 없는 끝없는 힘의 과정을 새까맣게 지워버리고 싶은 충동이 있다.
미셀 푸코는 [감시와 처벌]에서 학교의 공간이 교육을 위한 것일 뿐 아니라, 감시하고 위계질서를 세우고 상벌을 부과하는 하나의 기관으로서 기능한다고 말한다. 그곳에 관통하는 규율이란 다수를 유용하게 만들기 위한 것으로, 그들을 지배하기 위한 세밀한 권력의 기술, 즉 개인을 권력행사의 목적이자 수단으로 삼는 특수한 기술이다. 개인이 제조되는 방법은 규율의 엄수와 징계, 감독과 제재의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푸코에 의하면 규율은 단지 개인의 신체를 배분하고 그것으로부터 시간을 추출하여 축적하는 기술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힘을 조합하여 효율적인 장치를 만들어 내는 기술이다. 더 나아가 그것은 인생의 시간을 관리하며 그것을 유용한 형태로 축적하고 이렇게 조종된 시간은 인간에 대한 권력의 행사에 이바지한다. 정신 역시 신체의 주위에서 그 표면에서 그 내부에서 권력의 작용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오늘날 예술이 사회에 대해 그리고 예술 스스로에게 던져야 하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규율에 길들여지는 육체와 정신에 대한 저항이다. 로와정의 최근 작품은 그 지점을 강조하고 있다.
The thing, 2014, 캔버스, 로프, 가변크기
출전; 난지창작스튜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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