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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관의 작품 [어둠의 계곡]에 대한 인터뷰

이선영

1. 질문-박지수(월간 포토닷 기자) 권순관의 <어둠의 계곡>은, 글에서 언급하셨다시피 ‘어둡게 찍혀있고 유리까지 끼워져 있어 거의 거울’ 같은 이미지이기 때문에 표면적으로 무언가를 읽어내기 어렵습니다. 처음 작품을 마주하셨을 때 어떤 식으로 접근하셨는지 궁금합니다. 


답-이선영(미술평론가) ‘거짓말의 거짓말’ 전은 국내의 유명한 사진가들이 많이 모인 전시였고, 설치나 영상 등과 결합하여 화려하기까지 했는데, 그 중 단 한 작품으로 지하전시장에 걸려 있던 권순관의 작품은 무엇을 봐야 할지 알 수 없었습니다. 녹색 풍경이긴 한데 관객의 시선이 관통할 만한 거리가 설정되어 있지 않고 유리 반사면으로 관객까지 비춰지는 상황이었습니다. 역사의 현장을 다룬 내용이라고 하는데 잘 보이지 않으니 제대로 읽을 수도 없지요. 사진적 기술을 발휘하여 정밀하게 찍힌 대상이었지만, 그것은 세상을 보여주는 창으로서의 역할을 거부하고 있었습니다. 보고 읽는다는 것은 깊이를 전제합니다. 그러나 작가는 표면, 그것도 극도로 교란된 표면만 제시하고 있으니 관객으로서는 표면으로부터 접근할 수밖에 없겠지요. 물론 평문을 쓰기 위해 작가도 만나고 작품 내용도 들었지만, 작품에 접근하는 방식은 전시장에 와서 처음 작품을 접한 다른 관객들처럼 외부로부터 다가갈 수밖에 없습니다. 작가의 내부에서 나온 작품을 바깥에서 보고 안팎 사이의 접점을 찾아가는 것이 평론이라고 생각해요. 



권순관, 어둠의 계곡, Digital C-print, 225×180cm, 2013 Unfinished dialectical theater series



 2. 글에서 사진의 표면에 드러나는 이미지에 관한 묘사가 치밀하게 진행되어 인상적이었습니다. 표면 이미지를 꼼꼼하게 훑은 다음 이미지의 심층으로 접근하는 글의 전개 방식은 그 차제로 이미지를 대하는 태도처럼 느껴졌습니다. 권순관의 ‘어둠의 계곡’을 바라볼 때 중요한 지점은 무엇일까요? 더 나아가 이미지를 바라볼 때 중요한 지점은 무엇일까요?


; [어둠의 계곡]은 특정한 중심을 찾기 어려운 작품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지점이라 할 것도 없습니다. 그 작품 앞에 서면 시선이 어디로 들어갔다가 어디로 나와야 할지 모르죠. 시선의 출입구 문제는 보는 순서를 암시하고 그것은 공간적인 조형예술에 시간성을 부여하며, 이러한 시간성을 통해 보여 진 것은 서사로 읽혀집니다. 통상적인 미술작품에는 그러한 구멍이 있습니다. 가령 정물화에서 전경에 어슷하게 놓인 나이프같이 것이 그것이죠. 그러한 지점들이 없을 때, 또는 분명하지 않을 때 관객의 시선은 표면을 정처 없이 떠돌게 됩니다. 중심/주변의 관계가 모호한 그의 작품은 작가가 명확히 정해준, 또는 암시한 순서 대신에 관객이 마음껏 들락거릴 수 있는 해체적 구조이며, 따라서 서사는 열려있습니다. 그런 작품은 어떤 작품보다도 맘껏 해석적 상상력을 펼칠 수 있을 것입니다. 녹색 평면을 칠판삼아 쓰는 것이죠. 작가가 입력해 놓은 메시지를 읽는 것은 소비적 행위에 불과합니다. 그의 작품은 소비가 아니라 쓰기, 즉 생산을 겨냥한 텍스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일반적으로 사진은 역사와 현실을 기록하는데 적합한 매체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글에서는 반대로 역사를 기술하는데 ‘매우 나약한 매체’임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에 관해서 좀 더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 사진은 지시대상과의 관련성으로 어떤 매체보다 정확하다는 기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진은 어떤 시공간의 순간적인 단편이며, 단편은 그자체로는 수수께끼입니다. 단편은 먼지처럼 떠돌 수 있을 뿐입니다. 장구한 시공간의 비전을 갖춰야만 가능할 역사 기술까지 갈 것도 없이, 단순한 사실 확인조차도 모호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진에 찍힌 것이 설명되기 위해서는 전후의 맥락이 필요합니다. 제목이나 사진 설명, 아니면 여러 장의 사진을 배치하는 식으로 말이죠. 그러나 작가는 이 모든 방식을 의도적으로 배제했습니다. 그는 매우 구체적이지만 동시에 추상적인 무엇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온갖 볼거리로 넘쳐나는 현대사회 역시 구체적인 듯 하지만 추상적입니다. 사진 뿐 아니라, 상품이나 화폐 등 구체적인 상황과 유리됨으로서 생겨난 수수께끼나 물신숭배가 팽배한 것이 현대 사회입니다. 그러한 구체적 추상이 현대를 지배하는 이유는 잉여가치의 원천이 되는 노동이나 생산관계의 흔적이 성공적으로 지워지지 않는 대상(상품)은 제대로 유통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4. 흔히 사진과 영상은 카메라를 이용한다는 점에서 서로 유사한 면이 많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글에서는 이 둘이 서사를 다루는 방식이 다르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의 차이점인지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 영상은 시간을 축으로 서사를 전개합니다. 기승전결을 갖춘 이야기가 그렇듯이요. 그러나 사진은 마치 그림처럼 한 장에 이야기를 압축합니다. 편물처럼 짜여있기 보다는 펠트처럼 압축되어 있습니다. 압축된 작품은 솔솔 풀어나갈 실마리를 잡기 힘듭니다. 그래서 사진은 영상보다 어렵고 매력적입니다. 영상이 산문이라면 사진은 시와 같습니다. 공간적 매체는 시간적 매체보다 읽기는 힘들지만 더 강한 울림과 여운을 줄 수 있습니다. 

 

5. ‘화면 어디에도 유의미한 증후는 발견되지 않는’ 권순관이 사진을 보려면 장소의 상징성을 고려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글에서는 예술이나 역사를 상징적으로 독해할 때 비슷한 교훈을 얻을 뿐이라고 그 한계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에 관해서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 상징주의는 하나의 중심을 가정하고 있습니다. 그 중심은 이데올로기나 상식처럼 이미 알려져 있지요. 빠르게 읽혀져 빠르게 소비되어야 하는 대중문화의 어법은 상징적입니다. 그리고 원형이나 전형에 호소하는 신화와 종교, 그리고 19세기 리얼리즘 식의 현실 인식은 상징적입니다. 거기에는 해독 돼야 할 코드가 이미 선재합니다. 그러한 진부한 패턴에 깔려있는 것은 선과 악의 싸움이고, 권선징악이거나 비극입니다. 반면 다수의 중심을 가지고 있어 거듭해서 해석될 것을 요구하는 권순관의 작품은 상징이 아니라, 알레고리에 가깝습니다. 


6. 사진적 대상은 명백히 존재하지 않고, 구성된다고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사진가의 의도적인 선택이나 해석에 의해 대상이 화면 안으로 들어온다는 측면으로 이해하면 될까요? 보통 사진은 대상에 의존하고, 명백한 대상을 기록한다는 인식이 강하기 때문에 선뜻 이해하기가 어려운 부분으로 다가옵니다. 


; 사진가들이 무엇인가를 찍을 때 단지 그것이 거기에 있어서라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선택과 배치의 문제가 있습니다. 포토샵이나 꼴라주같은 조작적인 과정을 거치지 않고, 하나의 대상을 있는 그대로 찍을 때 조차도 선택과 배치 상에 무한한 다양성이 있지 않나요. 그 가능성 때문에 사진이 예술이 될 수 있는 것 아닐까요. 사진 또한 언어입니다. 언어에서 자연스러운 것이란 없습니다. 그 언어를 깨려는 예술적 노력조차도 선재하는 상징적 우주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사진이 언어인 한 결코 투명하지 않습니다. 언어의 불투명성은 현대미술 뿐 아니라, 낯선 언어를 배우거나 접할 때 더욱 분명해 집니다.  

   

7. 한 장의 사진으로 지난 역사를 환기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진으로 역사의 문제를 다루는 것은 어떤 효용성이 있을까요?


; 역사적 존재인 인간은 역사를 외면할 수 없습니다. ‘포스트 휴먼’과 함께 ‘포스트 히스토리’도 외쳐지곤 하지만, 인간이 역사를 잊는다면 어떤 철학자의 말처럼, 역사는 ‘한번은 비극으로 한번은 희극으로’ 반복될 수밖에 없습니다. 한 장의 사진이 역사를 환기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 사진의 존재만큼이나 수많은 맥락화를 통해서입니다. 사진만큼이나 수많은 해석행위가 중요합니다. 사진이야말로 어떤 장르보다도 많은 해석과 비평이 요구된다고 하겠습니다. 해석을 통해 사진적 사건은 수면 위에 뜰 수 있고 그래서 역사적 현실에 다시 영향을 줄 수 있겠지요. 그러나 역사적, 사진적 수수께끼를 동종어법으로 강조하는 [어둠의 계곡]은 뜨거운 해석의 장이 되기에는 다소간 냉소적인 작품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8. ‘사회가 사진의 힘을 거세하고 길들이는 전형적인 방식’에 관해서 좀 더 이야기를 들었으면 합니다.


; 그것은 제 평문에도 많이 인용되고 있는 롤랑 바르트의 의견으로, 그는 [카메라 루시다]에서 ‘사회가 사진을 얌전하게 만들려고’ 애쓰는 방식으로, ‘일반화시키고 군생시켜 진부하게 만드는 것’을 봅니다. 그는 미국의 예를 들면서 ‘거기에서는 모든 것이 이미지로 변하고 있으며 이미지 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도 생산되지도 소비되지도 않음’을, 그리고 ‘선진사회를 특징짓는 것은, 예전의 사회가 신앙을 소비했던 것과는 달리, 오늘 날은 이미지를 소비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것은 디지털 혁명을 통해 그의 시대보다 훨씬 사진이 흔해진 우리시대에 더욱 울림이 커진 의견이라고 생각합니다. 

 

9. 글에서 ‘부재와 죽음’은 역사의 속성일 뿐 아니라 사진의 속성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진과 역사라는 두 개의 층위에서 ‘부재와 죽음’이 겹쳐진 권순관의 ‘어둠의 계곡’에서 우리가 궁극적으로 보고 고민할 지점은 어떤 것일까요?


; 바르트나 손탁이 말했듯이 사진에는 부재와 죽음이 깔려있고, 이는 역사에 관해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어느 시대보다도 매개된, 그래서 조작된 지식 속에 존재하는 현대인은 스펙터클로 이루어진 현대판 플라톤의 동굴에서 살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부재하는 실재가 죽음입니다. 죽음은 반드시 어둡고 고통스럽게 재현되지 않습니다. 현실은 죽음을 의식하지도 못한 채로 서서히 죽어가게 하며, 이미 죽은 것들도 혼재합니다. 

  

10. 비평가로서 권순관의 ‘어둠의 계곡’의 유의미한 지점은 어떤 면이라고 생각하십니까?


; 권순관의 작품은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새삼 일깨워줍니다. 사진이라는 명료한 형식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관객을 눈 뜬 장님처럼 만들어버립니다. 보이는 것 속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찾아내는 것은 거듭되는 해석행위입니다. 불친절하기 그지없지만, 동시에 호기심을 자아내는 그의 작품은 관객에게 해석적, 대화적 상상력을 가동시키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11. 이번 비평을 쓰실 때 가장 신경 쓴 부분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또 평소 글을 쓰실 때 어떤 부분에 주안점을 두시는지도 궁금합니다. 


; 사진 및 사진적 형식은 미술 분야에 편재하지만, 제가 사진에 대한 글을 많이 쓰지 못한 점이 가장 신경 쓰였습니다. 오랫동안 사진을 찍어왔던 권순관 작가의 도움을 많이 받았고, 텍스트를 쓸 때는 사진에 관해서도 아름다운 글을 남겼던 롤랑 바르트, 그리고 역사철학자들의 논의가 도움이 되었습니다. 작품과의 교감만큼이나 작가의 육성을 듣는 것, 그리고 적절한 참고문헌을 선택하는 것이 비평적 글쓰기에서 큰 역할을 합니다. 작가의 이야기를 전달하고 제 느낌과 인상을 표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출발점으로 해서 이전 연구자들의 담론을 활용하여 좀 더 객관적으로 논증해 나갈 수 있다면 좋겠지요.     

 

출전; 월간 포토닷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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