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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성훈 전 / 소(小)자연의 소요사태

이선영

소(小)자연의 소요사태

공성훈 전 (9. 4일--11. 8일, 아라리오갤러리 서울)

  

이선영(미술평론가)


‘어스름(Dusky Landscape)’전은 근 몇 년 간 공성훈이 자주 그려온 바다풍경으로, 시공간적인 경계에서 펼쳐지는 장관을 보여준다. ‘어스름’은 해질녁 또는 해뜰 무렵이라는 시간성, 그리고 빛이 구름에 가려져 흐려 보이는 공간적 상태를 동시에 포함한다. 수평면으로 펼쳐진 바다 풍경 속 전이의 시공간에서, 나무나 인간 같이 공간을 가로지르는 요소는 어두운 실루엣으로만 나타난다. 배경과 전경의 극적인 대조, 그리고 바람에 날리는 하얀 머리털이나 바위의 주름 등, 인간의 시선으로는 자연스럽게 잡힐 수 없는 자연의 정교한 세부의 모습에서 광학기기의 시점도 감지된다. 움직이는 아이들의 순간포착이 공중 부양하는 것처럼 보인다든가, 원색의 화려한 조명을 받는 무대 같은 황혼녘 바닷가의 풍경도 그렇다. 그의 회화는 다양한 매체가 효과적으로 녹아있다는 점에서, 매우 ‘스마트’하다. 무심한 자연에 인간적 은유를 접어 넣는 것도 여전하다. 특히 1층 전시장에 걸린 작품들이 그러하다. 


 Buoy_Oil on .Canvas 130.3x162.2cm 2012-2015

기울어진 무궁화의 윗부분이 급강하는 비행기 자취와 만나는 작품 [무궁화와 비행기]는 대규모 애도 사태를 불러왔던 작년의 해난 사고를 떠오르게 한다. 그 다음에 걸린 [암초], 그리고 성난 파도 사이에서 심하게 흔들리는 [부표], 그리고 그러한 불길한 증후를 역설적으로 강조하는 듯 화면 상단을 뚫고 나갈 듯 두 아이가 뛰는 작품 [점프]가 그렇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계단 벽에 걸린 작품 [흰머리와 연기]에서 어두운 하늘과 바다는 하루 밤 만에 머리가 하얗게 샌 듯한 인물의 한숨 섞인 담배 연기의 궤적을 자세히 드러낸다. 땅, 바다, 하늘, 그리고 그 모두를 이어주는 인간이나 나무 등을 포괄하는 거시적 풍경 안에는 우리가 함께 겪은 역사적 사실에 의해 상상할 수 서사가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이 전시에서 또 하나 눈에 띄는 것들은 물, 공기, 빛, 식물 같이 자연을 이루는 근본적인 요소들의 운동이다. 가령 작품 [흰머리와 연기]에서 하얀 머리칼과 담배연기가 바람에 흐트러지는 광경은 얼어있는 고체가 바로 기체로 변화하는 물리적 운동감이 있다. 


자연을 이루는 근본적인 요소들의 운동


작품 [점프]에서 지는 해의 빛을 반사하는 대지의 일부는 전시장의 조명에도 마찬가지로 반응할 만큼 도드라지게 처리됐다. 어슷한 수평선을 중심으로 하늘과 바다가 맞붙어 있는 작품 [아침바다]에서도 구름 낀 하늘 사이의 해에서 방사되는 빛은 바다 표면에서 춤을 추는 점점의 밝은 선들을 남긴다. 공성훈의 작품에서는 언제나 되비치는 빛이 더 생기롭다. 푸른 잉크를 푼 물에 하얀 점과 선들이 미친 듯이 휘몰아치는 작품 [파도]에서 관객은 파도라는 도상 뿐 아니라, 말 그대로 파도치는 붓놀림을 볼 수 있다. 푸른 바탕을 빠른 속도로 지나갔을 하얀 붓질은 그 부분만 보면 얼마나 생경한지, 뜰채 같은 것을 이용하면 어디선가로부터 찢겨져 나온 하얀 부유물들이 건져질 듯하다. 빛의 환영이자 물질의 운동이 펼쳐지는 바다에서 끓기 직전의 무작위로 운동하는 액체 입자, 갑작스런 변심, 소요하는 군중들, 예측할 수 없는 미래 등이 동시에 떠오른다. 소요하는 공성훈의 바다는 다양한 임계점을 내포하고 있다.


Jump_227.3x181.8cm Oil on Canvas 2015



아침바다 227.3x181.8cm Oil on Canvas 2015


무엇이 상상되든, 이 촉각적 붓놀림이 파도에 대한 효과적인 환영을 낳고 있다는 점이 가장 놀랍다. 모더니즘에서 그 모순이 전면화 되었듯이, 자유로운 붓질과 대상의 재현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지만, 공성훈은 그 거리를 최소화 한다. 그의 작품에서 촉각성과 환영 사이의 협력 관계는 작품을 직접 보지 않으면 잘 감지되지 않을 만큼 절묘하다. 이 부분은 회화를 다른 것으로 환원하려는 어떤 움직임에 완강한 저항을 낳게 하는 회화의 실재적 차원이다. 파도와 함께 휘몰아치는 하얀 궤적들은 화면 가까이 다가가면 우연적인 색의 파편이지만, 뒤로 가면  빛의 환영을 위한 필수요소이다. 그것은 파도라는 현상을 알고는 있지만, 파도 그 자체는 그제서야 처음 보는 것 같은 강렬한 각인효과를 준다. 이러한 각성이 전무후무한 독창적 창조의 세계보다 부차적인 것은 아니다. 그의 작품은 예술 역시 과학처럼 창조가 아닌, 발견임을 알려준다. [파도] 양쪽으로 배치된 [담배 피우는 남자]와 [절벽]에서의 다채로운 질감을 가지는 절벽들 또한 자연의 이질적인 면모가 두드러진다. 


거기에는 고딕이나 그로테스크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기이한 세계가 똬리를 틀고 있다. 스펙터클한 풍경이지만, 작가는 관객의 시선을 그림 표면에 가둬놓고 그 안에서 끝없이 움직이게 한다. 절벽 위의 사람과 빈 절벽 그리고 파도라는 세 가지 장면은 일련의 추리를 가능케 하지만, 그러한 서사는 자연 표면에 집중된 압도적 묘사에 비한다면, 거의 숨은그림찾기 놀이 같은 차원이다. 나 또는 너의 이야기가 될 수 있는 인간적 이야기는 그림에 함축된 여러 차원의 한 가닥일 뿐이다. 자연의 세부에서 우글거리는 기기묘묘한 형태와 운동감은 3개의 패널로 이어져 7미터 가까이 되는 대작 [버드나무 1, 2, 3]에 전면화 된다. 수없이 갈라져서 만들어진 자연의 패턴은 마치 베일 같아서 그것을 걷어내고 저편으로 나아갈 수 있을 듯하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벽에 걸린 그림임을 강조한다. 캔버스 세 개가 연결되어 있지만 그것들이 맞붙어서 한 장면을 이루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림과 그림 사이에는 틈이 있다. 베일 저편은 눈으로만 통과할 수 있는 것이다. 


 흰머리와 연기 227.3x181.8cm Oil on Canvas 2014


  절벽(담배피우는 남자) 227.3x181.8cm Oil on Canvas 2013


파도 227.3x181.8cm Oil on Canvas 2014


어스름할 무렵의 자연은 실루엣으로만 나타나기에 그림의 평면성을 더욱 강조한다. 흐린 하늘을 배경으로 아래로 늘어져 있는 나뭇가지들은 작가가 살고 있는 일산호수공원의 풍경이지만, 바다풍경에서의 멜랑콜리한 정서를 공유한다. 형태심리학적 관점에서, 이러한 정서는 하늘을 향해 뻗쳐져야 할 가지들이 반대 방향을 하고 있음에서 발생할 수 있다. 실루엣만으로 드러난 나무는 자연의 섬세한 그물망을 보여줌과 동시에, 선긋기를 통해 빈 평면이 어떻게 채워지는 지 추적될 수 있는 장(場)이다. 엽맥이 잎이라는 한정된 공간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채우듯이, 허공 속 줄기들 역시 그러하다. 끝없이 가지치기하는 구조는 잎사귀 안이든 밖이든, 공간의 위상과 규모와 상관없이 허용된 공간을 깊숙이, 그리고 폭넓게 채워간다. 자연에서 발견되는 프랙털 구조와 유사하지만, 동시에 무작위적인 붓질의 결과이다. 그것은 자연의 복잡한 구조에 상응하는 또 다른 구조이지 단순한 재현이 아니다. 


무작위, 자연의 해결책


가지들이 또 다른 가지와 연결되는 과정은 인터넷같은 인공 생태계와 유사하다. 바라바시는 [링크]에서 네트워크들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그것들의 모양이나 구조를 지배하는 법칙은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으로 ‘무작위(random)’를 내세운다. 그것은 자연이 따를 수 있는 가장 단순한 해결책이다. 공성훈의 버드나무 줄기들에서 발견되는 무작위적인 연결망은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가장 단순한 방법을 떠올린다. 복잡한 세상과 자연, 그리고 네트워크를 관통하는 무작위성은 중요한 부분이다. 여러 차원에서 공통적으로 관철될 수 있는 무작위 네트워크 모델의 전제는 우연의 횡포나 운명 같은 것이기 보다는, 철저하게 평등주의적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자연은 보다 나은 세상을 꿈꾸는 이들이 언제나 다시 참조해야 하는 영원한 원천이 될 수 있다. [링크]에 의하면 링크는 완전히 무작위적이어서, 추가적 링크 하나를 부여받을 기회는 똑같다. 무작위적 세계는 평균에 의해 지배되는 세계이다. 자연과 그림을 포함한 네트워크의 세계에서 평등을 추동하는 것은 무작위성이다. 


 버드나무 3_ 227.3x181.8cm Oil on Canvas 2015


소나무 227.3x181.8cm Oil on Canvas 2010


자연은 맹목적으로 링크를 여기저기 던지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보면 어떤 지점도 특별대우를 받거나 배제되지 않는다. 물론 거기에도 연결을 위한 경쟁은 있다. 상호 연관된 세계에서 링크는 생존을 위한 필수요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연에는 자본주의 사회 같은 독점은 없다. 독점은 삶이 아닌 죽음의 문화를 낳는다. 경계를 넘는 탈주로처럼 보이는 그물망은 살아 숨 쉬고 있다. 선재하는 것의 재현이 아닌, 무작위적으로 표면을 확장해 나가는 화가의 붓질은 살아 숨 쉼을 위한 필요충분조건이다. 공성훈의 그림은 이러한 무작위성이 복잡성과 함께함을 보여준다. 거기에는 복잡하고 상호 연결된 세계의의 보편적 구성요소와 그것의 동적인 시스템이 있다. 작품 속 섬세하면서도 자유로운 궤적들은 인간적 시선을 따돌린 자연이 자기만의 방식으로 성장하고 운동하며, 붓질 또한 이러한 자연의 방식을 따른다. 의식만큼이나 무의식이, 정신만큼이나 몸이 거의 자동적으로 움직였을 법한 나뭇가지/붓질은 물활론적이다. 


버드나무 가지들은 평면으로 크게 확대되어, 자연에 현미경을 갖다 댄 듯하다. 그렇게 드러난 자연은 다양한 국면을 가진 초이질적 실재이다. 필립 볼은 [물리학으로 보는 사회-임계질량에서 이어지는 사건들]에서, 사회현상과 연결시키기 위해 자연의 다양성(창조성)의 예를 든다. 그는 ‘다른 나무와 정확하게 똑같은 나무를 본 적이 있는가. 지구 전체의 날씨가 똑같은 날을 본적이 있는가. 바위 틈 사이로 끊임없이 흘러가는 강물에서 만들어지는 소용돌이가 똑같은 순간을 본적이 있는가’를 묻는다. 공성훈이 공들이고 있는 자연의 국면은 보다 미시적이다. 그는 거시적 풍경 뿐 아니라, 이 미시세계의 소요사태를 표현한다. 이 맥락에서 보자면, 빈 화면처럼 보이는 흐린 하늘을 담은 그림 양 옆에 걸린 소나무들의 조합은 기이하다. 가운데의 하늘은 마치 하늘을 향하고 있는 나무의 시점처럼 보이는 것이다. 검은 실루엣으로 나타나 있는 해안가의 소나무들은 땅, 바다, 하늘을 관통하여 잇는 지상의 기념비적인 요소이다. 


 
버드나무 1, 2, 3_227.3x181_oil on canvas_2015


설치전경


그러나 그 나무들이 지하와 지상 그리고 천상계를 잇는 인류학적 상징처럼 든든하게 자리하고 있는지는 불확실하다. 어떤 작품에서 길쭉한 나무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하늘을 향해 비틀거리며 올라간다. 그래도 바다나 땅이라는 실재를 강조하는 나무라는 이 수직적인 요소는 해안가에 서있는 감시탑이나 부표 등, 인공적 구조물보다는 믿음직스럽다. 공성훈의 그림에서 변화무쌍하게 요동치는 실재계 위에 떠있는 체계들은 극히 취약하다. 인간이 만들어낸 구조적 형태들은 완벽을 추구하지만, 사건은 구조의 상대성을 강조한다. 그것은 화가로서 체계에 대한 호기심이나 선망이 테크놀로지에 대한 몰두를 낳기도 했지만, 결국 다시 그림으로 돌아온 이력을 설명해 줄 듯싶다. 어쨌든 회화는 인공보다는 자연적 실재에 더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자연의 미시적 움직임에 상응하는 붓질은 머리와 눈 아래와 뒤쪽에 자리한 깊고 두터운 육체적 감각에 호소한다. 공성훈의 풍경은 ‘혼돈과 격변, 그리고 복잡’(필립 볼)으로 요약될 수 있는 자연적 실재와 만나는 회화의 방식으로 다가온다. 

         

 출전; 국립현대미술관 웹진 ART:MU(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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