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영
필요하지만 불편한 것
이선영(미술평론가)
이시하라 노리코(ISHIHARA Noriko)의 ‘보이는 사물이 된 분홍색 x 고무장갑 끼다, 껴지다’ 전은 타자들이 자신에게 기대하는 바에 대한 복잡한 생각을 함축적 사물과 행동을 통해 표현한다. 사회적 인간은 타자에게 무엇인가 기대하고 타자로부터 무엇인가 기대 받는 존재이다. 불행히도 이 쌍방의 기대치가 일치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내가 보는 나와 타자가 보는 나는 결코 같지 않기 때문이다. 이 어긋남이 사회 속 인간에게 수많은 드라마를 가능하게 하는 동인이다. 만약 양자의 시선이 균형을 이룬다면, 울고 웃는 인간적 드라마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양자 간의 균형은 기계적인 평형상태와 비슷할 것이다. 타자들과 유리된 지독한 고독 역시 이러한 상호관계의 산물이다. 그는 타자들로부터의 과도한 기대치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고독을 택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비인간적인 경쟁이 판치는 현대사회는 기대하지도 기대 받지도 않으려는 부류들도 만들어내곤 한다. 그러한 족속들은 점차로 늘어나고 있다.
끼다 껴지다-hameru hamerareru / 단채널 영상 / 00:03:23 / color / 2015
그리하여 인간들 간의 관계를 대신하는, 즉 인간이 만들어냈지만 그자체로는 인간적이지 않은 시스템의 지배가 용이해 진다. 서로를 바라보는 대신에, 각자 시스템과 상대하는 것이다. 이시하라 노리코가 이 심각한 주제를 전달하는 소재는 가볍고 일상적이다. 분홍색 고무장갑이라는 흔해 빠진 오브제가 사회인이라면 누구나 받고 있는 기대치에 대한 압박을 표현한다. 3분 남짓의 동영상에 나오는 등장인물은 여성임을 떠올리면, 일단 그것은 여성에게 기대되는 가사노동에 대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거친 물일을 할 때 손을 보호해주는 이 분홍색 도구는 가정 내에서 이루어지는, 그리고 가사노동을 모델로 여성에게 주어지는 성별 분업과 연관된다. 영상의 첫 장면에서 등장인물은 고무장갑을 끼고 있고, 그것이 답답한지 벗으려고 애쓰다가 결국은 벗어던지고, 바닥에 떨어진 고무장갑을 잘근잘근 밟아댄 후 화면 밖으로 통통 튀어 나간다.
그러나 그러한 경쾌함도 잠시, 다시 제자리로 되돌아와 바닥에 떨어진 장갑을 주우려는 듯 몸을 숙인다. 맨 마지막 장면은 다시 고무장갑을 낀 모습이며, 이 두 번째 착용에서 고무장갑은 더 커져 있다. 더 큰 수갑처럼 보이는 장갑은 비극적으로 다가온다. 고무장갑을 벗고 떠났던 장면이 경쾌했던 만큼이나 반전의 폭은 크다. 자신을 옭죄는 굴레에서 벗어나려는 탈주의 몸짓이 시지포스의 암담한 노력처럼 되돌아온다. 그러한 행동은 반복 재생되는 비디오 화면으로 반복된다. 한 번의 지나간 비극보다 반복된 비극이 견뎌내기 더 힘들지 않은가. 이시하라 노리코의 작품에서 분홍 고무장갑은 필요하지만 불편한 것에 대한 상징이다. 불편하기만 한 것이라면 벗어 버리는 것으로 충분했으리라. 그러나 불편하지만 필요하다는 것이 문제다. 전시부제가 ‘끼다’라는 능동태와 ‘껴지다’라는 수동태가 병렬되어 있는 것은 그 양면성을 알려준다. 이를 통해 작가는 당신의 분홍 고무장갑은 무엇인가를 묻는다.
'보이는 사물이 된 분홍색 x 고무장갑 끼다 껴지다'전 설치 사진
전시장에 들어온 관객은 이 짧은 이야기를 단지 시청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전시장 입구에는 분홍 고무장갑이 주렁주렁 걸려있고, 관객은 이것들 중 하나를 택해서 손에 낀 채 자신에 대한 기대치나 역할 등에 대한 생각을 고무장갑 위에 쓴다. 그리고 작품 속 인물처럼 고무장갑을 벗는다. 바로 벗을 수도 있고 좀 끼고 있다가 벗을 수도 있다. 고무장갑이 주는 이물감과 답답함을 상상력을 통해서가 아니라, 몸으로 체험케 하는 것이다. 영상 앞에는 그렇게 쌓인 고무장갑들이 한 가득이며, 전시기간이 길어질수록 더 늘어날 전망이다. 이시하라 노리코의 작품은 자기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비디오의 자기반영적 특성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상호반영적이다. 그녀의 작품에는 타인의 기대가 야기하는 주체의 반응이 있다. 거기에는 타자의 시선과 행동 또한 포함된다. 작품에서 주체가 내면화하고 순응하기도 하는 타자의 시선과 기대는 낯설어진다.
전시장의 분홍 조명을 받고 쌓여있는 피부색 장갑들은 흑백 톤의 영상만큼이나 움직이고 있는 듯하다. 거기에는 같은 크기와 형태, 그리고 색이라는 단위들이 모여서 움직임의 환영을 만든다. 그것은 화면 속 행위가 저 멀리에 있는 누군가의 사연이 아니라, 바로 내 앞에 직면한 현실임을 알려준다. 즉 목전의 고무장갑 더미들은 벗어던진 만큼이나 다시 낄 수 밖에 없었던 굴레들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 안의 손들은 빠져 나가고 희망만이 적혀있는 그 부재 기표들은 생경하게 다가온다. 부드럽고 달콤하며, 환상적 로맨스와 에로스를 상징하는 분홍은 이시하라 노리코의 영상과 설치작품에서 기괴하게 변모한다. 그것들은 매우 현실적이면서도 환상적으로 보인다. 피부 빛을 닮은 분홍 자체가 그렇다. 에바 헬러는 [색의 유혹]에서 분홍색의 비현실성을 말한다. 그에 의하면 열광은 분홍색 구름 위에 떠있는 상태, 분홍색 안경을 쓴 상태다. 분홍색 세상은 너무 아름다워서 현실일 수 없다.
(참고도판) # in Japan from series Hameru hamerareru/2015
에바 헬러는 가볍고 부드러운 기쁨이 찾아올 때 모든 것이 분홍빛으로 보인다고 말하면서, 그 색이 모든 것을 아름답게 바꿔주는 색, 어떤 맥락에서이든 비현실적인 색이라고 정의한다. 남자아이가 하늘색 포대기에, 여자아이가 분홍색 포대기에 쌓여서 세상으로 온 이후, 그것은 여성의 색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아무렇게나 벗겨져 쓰레기처럼 쌓여있는 분홍 껍질들은 꿈과 현실, 기대치와 실제는 차이가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여성에게 기대되는 바는 남성에게 기대되는 바만큼이나 억압적이다. 단지 억압이 억압으로 느껴지지 않는 시기와 느껴지는 시기로 나뉘어질 뿐이다. 억압은 동시에 쾌락이다. 고무 재질의 끼는 의상이 종종 등장하는 성적 하위문화에서는 억압과 쾌락을 연결된 의례적 행동도 많이 발견된다. 분홍 고무장갑 위에는 관객들이 쓴 글이 보인다. 짧은 글들이지만, 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짐작하기에 충분한 재미있는 사연들이 많다.
작품 [끼다 껴지다]가 유도하는 관객 참여는 누구나 생각하고 있는 고민이기에 부담이 없으면서도, 그 결과물은 피상적이지 않다. 한국의 여성에게 가해지는 압박을 상징하는 오브제는 절묘하다. 우리는 그 문화 안에 있어서 잘 의식이 안 되지만, 이방인의 시점이기에 더 쉽게 눈에 띄었을 그 오브제는 예술 특유의 낯설게 하기 기법과 관련된다. 이시하라 노리코는 생활인으로서는 불편하지만, 예술인으로서는 유리할 수도 있는 이방인의 시점을 잘 활용한다. 그것들은 익숙한 만큼이나 낯설다. 일본에서 국제 문화학을 전공한 후, 캐나다, 독일, 미국 등,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 공부하고 작업한 작가의 경험에 의하면, 작업용 고무장갑이 다른 나라에도 있지만 분홍 또는 빨강 위주의 고무장갑은 한국이 유일하다. 그 색들이 여성을 상징한다는 점은 물에다 손을 담가야 하는 여러 육체노동 중에서도 여성의 가사노동을 특정할 수 있게 했다.
얼마 전에 한국에 다시 정착한 작가에게 절실하게 다가온 한국의 여성역할에 대한 의문을 담고 있는 상징인 분홍 고무장갑은 관념보다는 자신의 일상으로부터 작업 소재를 이끌어내곤 하는 그녀의 성향이 반영된 것이다. 해도 해도 끝이 없고 표시도 별로 안 나면서 안하면 확 표시가 나는 가사노동은 대표적인 무임금 노동이다. 사회를 유지하기에 꼭 필요한 노동이지만, 그 가치가 측정되지 않는 ‘그림자 노동’(일반 일리치)으로 간주된다. 그림자 노동이 행해지는 곳은 사적인 장소, 즉 가정이다. 줄리엣 미첼은 [여성의 지위]에서, 여성은 어느 정치적 집단보다도 가장 국제적이지만, 가장 작고 특수한 영역인 가정에서 억압을 경험한다고 말한다. 즉 가정은 개인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교차점이다. 그래서 페미니스트들은 여성권익에 관한 자신들의 주장이 여성만 좋자는 것이 아니라고 항변한다. 그것은 특수하면서 보편적인 것이라는 점에서, 특히나 예술이 공유할만한 가치다.
근대사회가 갈라놓은 공/사 영역이 다시금 분리 불가능해지는 현대사회에서, 그림자 노동의 영역은 점차 넓어지고 있다. 분홍 고무장갑으로 대변될 수 있는 가사노동이 대표적이지만, 헐값으로 사고 팔리는 모든 노동, ‘그저 자기 좋아서 할 뿐인’ 예술 활동 등등. 좋아서 시작했지만, 열심히 할수록 점점 자신을 구렁텅이에 빠트리는 일반 노동을 포함한 많은 일들에 이러한 어두운 그림자가 깔려 있다. 필요하지만 불편한 것은 분홍 고무장갑 말고도 많을 것이다. 그러한 사물은 해당 주체를 알려줄 것이다. 가령 날씬하게 보이고 싶은 여성의 하이힐, 번듯한 직장을 상징하는 남성의 넥타이, 단정하고 반듯한 청소년의 교복 등등. 그것들은 소속감이 주는 안정과 억압을 동시에 암시한다. 몬트세라트 귀베르나우는 [소속된다는 것 belonging]에서, 무슬림 여성들의 전통 복장의 예를 든다. 집에 있을 때만 벗는다고 하는 그 전신 가리개를 봉건적 억압으로만 볼 수만은 없다.
(참고도판) # in Korea from series Hameru hamerareru/2015
근본적 가치가 대결하고 있는 패권주의 시대에, 그 불편해 보이는 의상은 서구 제국주의에 대한 해방과 항의라는 행동주의의 상징으로도 다가온다. 저자는 이 복장이 나이나 생김새와 상관없이 언제나 섹시해야 한다는 서구 여성에게 기대되는 바로부터 자유롭다고까지 말한다. 입장에 따라 다르겠지만, 무슬림 여성의 복장이 억압과 자유, 또는 속박과 보호 같은 양가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점은 달라지지 않는다. 한국에서 이시하라 노리코가 선택한 분홍 고무장갑 또한 비슷한 맥락에 있다. 세계 경제대국 10위권을 들락거림에도 속함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지위를 대변하는 통계수치는 여전히 바닥 상태에 머물러 있는 한국에서, 많이들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여성은 아직까지 공적인 영역에서 그다지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한 여성에게 가정은 안정감을 주지만, 동시에 그러한 안정감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아니 그보다 더할지도 모를 대가가 필요한 것이다. 가장 혼자 벌어서 가정을 유지하기 힘들어진 현재, 가정이 여성이 속해야할 유일한 곳이라고 주장하는 얼빠진 부류는 없다.
그러나 사적인 영역과 공적인 영역에서 모두 잘해야 한다는 기대치가 남성과 여성 모두를 더욱 짓누르게 된 것은 사실이다. 작가는 자기에게 당면한 현실, 즉 그녀가 속해있는 영역 중의 한 곳을 중심으로 이러한 기대치에 대한 괴리감을 표현한다. 개인주의가 현대사회의 핵심적 특징이라는 사고에 이의를 제기하는 귀베르나우는, 소속이란 사람들이 속하고자 하는 집단이 부과하는 가치와 규범 및 복장 규범 같은 여러 조건에 순응하려는 의지에 의존함을 강조한다. 즉 선택에 따른 소속이 소외와 고독에 대한 해독제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소속은 일정한 친숙성을 수반한다. 소속은 자기 집에 있는 것처럼 편안하다는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그것은 가장 친숙한 것에서 생겨나는 기괴함이 특징인 이시하라 노리코의 작품에서 선명하다. 한국어에서 ‘끼다’는 소속감을 말하기도 한다. 집단주의 정서가 강한 한국에서 어떤 무리에 ‘끼지’ 못함은 불안하다. 어딘가에 끼는 것은 결코 개인을 풍요롭거나 자유롭게 해주지 만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소속되려는 것이다.
[소속된다는 것]에 의하면, 개인에게 소속을 강요하는 감정이 워낙 강해서, 종종 개인은 집단 성원이 되는 특전을 얻는 대가로 기꺼이 자유를 포기하기도 한다. 귀베르나우는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키르케고르)이라는 말을 인용하면서, 자유가 개인의 독립과 합리성을 가능케 한 반면, 누군가에게는 불안감과 무력감에 따르는 고립된 느낌을 남겼다고 말한다. 그래서 자유에서 벗어나려는 전략이 생겨난다. 벗어던진 고무장갑에 슬그머니 다가오는 이시하라 노리코의 작품 속 등장인물처럼 말이다. 이 전시에서 작가는 여성이 소속되곤 하는 주요 영역 중의 하나인 가정을 말하고 있지만, 소속감이 줄 수 있는 억압과 자유라는 양면성은 모든 공적 영역에도 확대될 수 있다. 단적으로 예술가의 길이 그렇지 않은가. 예술가는 어디에 소속되는가. 그 소속이 예술에 도움이 될까. 아닐까. 예술계의 구성원은 어딘가에 속하거나 그렇지 않을 수 있지만, 소속이 작업에 긍정적일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 자신 있게 답할 수 있는 이들은 얼마 없을 것이다.
미셀 푸코가 말했듯이, 권력은 억압하기도 하고 생산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권력이 억압만 한다면, 그것은 거센 저항을 낳고 곧 무너진다. 그러나 대상은 물론 주체도 생산하는 권력은 복잡 미묘한 것이다. 대중 연속극처럼 선/악 이분법이나 권선징악은 없다. 예술은 대중문화와 달리, 인생의 역설에 기반 한 양면적 가치를 다룬다. 대중문화는 소(유)통의 측면에서는 현실적이지만, 그것이 실어 나르는 내용은 허구적이다. 반면 예술은 실재를 다루지만, 소(유)통되기 힘들다. 그러나 이시하라 노리코의 작품의 미덕은 소통의 용이성이다. 그것은 그녀의 능숙한 한국어 구사처럼 투명성을 지향한다. 특히 그녀의 작품이 타자와의 관계를 묻는 것이기에, 어찌 보면 단순해 보일지도 모를 투명성이 더욱 요구되었을 것이다. [끼다 끼이다] 전에서, 되돌이표처럼 반복되는 장갑 끼기와 벗기는 어떤 물건이나 행동보다도 단순하지만, 안정감을 위해 자유로부터 도피하려는 현대인의 심리를 전달한다. 여성이자 예술가, 그러면서 어떤 한 사회에 확실하게 속하기 힘든 이방인인 작가에게 안정감을 주지만, 동시에 자유롭지 못함에 대한 역설적 이야기는 실감 있는 보편성으로 다가온다.
출전; 미디어 극장 아이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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